무적이라는 무협웹진에서 퍼온글입니다. 김요석이라는 분이 운영하던 웹사이트인데 지금은 거의 썰렁해졌지요.
좋은글들이 무척 많습니다. 참고로 꽤 오래된 글임을 감안하시고 읽으시길..
나는 김용을 이렇게 생각한다
최근 언급되는 김용의 행적 가운데 하나는 그가 무협을 어떻게 생각했느냐 하는 것이다. 지난 호의 기사에 따르면 만년(晩年)의 그는 한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무협을 썼다는 사실에 대해 굉장한 불쾌감을 표시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것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무협이 원형적으로 남아 있는 한국 독자들이다. 무협의 마지막 세례를 받았다는 점에서 특히나 고려원 이후로 무협 하면 김용이라는 등식이 성립되어 있는 지금, 새삼 김용이 그런 발언을 했다는 것은 여태껏 그를 무협소설의 신(神)으로 추앙한 독자나 그에게 지지를 던지던 많은 매니아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마지막 작품 『녹정기(鹿鼎記)』를 통하여 무협의 궁극적인 무엇에 도달했다고 찬사를 받았던 김용. 과연 그가 내뱉은 말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옳은 것일까.
이에 대해 우선, 국내의 무협 작가들이나 독자 모두 씁쓸해지는 심정을 감출 길 없다. 무협의 표준(標準), 이정표(里程標), 규범(規範), 교과서(敎科書)라 할 수 있는 작품을 써왔던 김용 자신이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은 어찌 보면 무협 전체를 놓고 봤을 때 열등감을 느끼게 해 주는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미 끝간데 없이 잘난 양반이 후학(後學)들에게 무협을 썼다는 게 크게 후회된다고 말한 것은 의지의 날개를 꺽은 것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홍콩이 김용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무협 시장이 점점 사양화 되었고 결국에는 무협이 사라지고 무협풍의 대체 장르가 시장의 주류로 성장했다는 점은 곱씹을 수 있는 대목이다.
후배 무협 작가는 김용이 남긴 작품 자체 만으로도 버거움을 느끼지만 그런 그의 언사(言事) 또한 신경 쓰이지 않을 리 만무하다. 최고의 인기와 명성을 구가하여 어떤 우상이나 존경이었던 대상이 그 지닌 바의 위치에서 열등감과 불만을 표시했다고 하면 의욕적인 측면에서 기(氣)가 죽는 것이다. 한편으로 자조하는 마음을 갖게 되고 무협을 쓴다는 것에 대해 큰 의미를 두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럴 거면 도대체 왜 무협을 쓴 거야. 그런 식의 마음을 가지고 쓴 무협이 저리도 인기가 있을 수 있다니 이건 공평하지가 않아.
여기서 우리는 김용이 한 말을 조금 정치적으로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주지하다시피 그의 그런 발언의 배경에는 언제나 자신의 작품이 어떤 이상적인 것으로 평가 받고 싶었던 자기욕구의 현시로서 나타났기 때문이다.
김용은 무협 작가 이전에 한 사람의 작가로써 평가 받고 싶었던 것이다. 이것은 마치 굳이 소설가란 직함을 두고 특별히 여류(女流)라는 호칭을 붙여 구별하고자 했던 과거 문단(文壇)의 분위기와 동일하다. 여기에 대해 여류 소설가는 자신이 성별의 차이 없이 소설가란 직함으로 동등하게 대우 받기를 원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김용은 무협이라는 타이틀 이전에 자신의 작품이 문학(文學)으로 평가 받기를 원했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문학적인 것이라고 자평(自評)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일단 그의 이러한 시도(試圖)는 그리 성공적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명보(明報)를 통해 연재를 했을 때도 평자(評者)의 시선에는 단지 대중소설로서의 무협으로밖에 비쳐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거북스런 부담감은 외려 자신감이 있던 김용에게는 일종의 웅덩이로 작용했다.
이런 면은 우리나라의 대중소설 논쟁과 유사(類似)한 면모가 있다. 어떤 문학적인 수사(修辭)와 효과(效果)를 함께 거두고도 그것이 대중매체를 통해 발표된, 어느 정도 독자의 호기심을 고의로 유혹했다고 판명이 된다면 너무나 가혹하게 내려지는 한 수 아래의 평가가 그것이다. 얼마 전에 벌어진 조선일보상의 논쟁도 결국 이 같은 맥락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던가.
한편, 김용이 작가로서 평가 받아야 하지만 그가 정치적인 이슈에 관심이 많은 지식인이라는 점에서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의 대륙에 대한 관심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고 알려진 바, 북경(北京)의 강연(講演)에서 자신이 썼던 무협소설에 대한 비판(批判)은 다분히 이데올로기 측면에서 행해진 면이 없지 않다. 아무래도 문인적 기질(氣質)보다는 정치적 기질(氣質)이 강한 사람이 김용이라고 생각된다.
원래 김용 자신이 한 신문사의 경영자였으며 무협 소설은 신문의 판매 부수를 위하여 스스로 붓을 든 것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그의 작품의 분위기가 모든 것을 말해 주지 않겠는가.
김용의 장편이라고 구분되는 것을 예로 들어볼 때 대체로 김용의 소설은 무협(武俠)이 가지는 내재성 보다는 좀더 외향적인 면에 치중되어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일 것이다.
즉, 그는 강호 그 자체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사회적인 의미를 가진 소설을 계속 써왔었다. 김용은 무협이 가지는 주제를 교묘히 사회적인 효과와 결부시키려 노력했고 그것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소오강호』는 대표적인 정치풍자소설이라고 알려졌으며 『녹정기』는 인간사(人間事)를 구구절절 관통하는, 말 그대로 백미(白眉)의 무협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다소 무협적인 내용에 가깝다는 영웅문 삼부작(英雄門三部作) 조차 결국 그 저변을 캐다 보면 두 남녀의 사랑이 주제 선율로 떠오르는 것 같지만 역시 도도한 역사의 흐름에 심어진 영상(映像)에 다름 아니다. 우리가 순백의 사랑이라고 일컫는 『연성결』이나 『신조협려』의 두 남녀의 사랑도 종래엔 개인과 사회의 체제와 부딪치는 것이 아니던가.
결국 김용의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개인과 사회의 고리가 어떻게 확장되어 있고 얽혀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것을 풀지 않고서는 작가 김용에 대한 본의(本意)를 제대로 살피기 어렵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협객(俠客)이란 무엇인가를 화두(話頭)로 안고 사는 한국무협의 좌백은 얼마나 순진(純眞)한 것인가.
하므로, 김용에게 있어 무협소설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기 보다는 어느 정도의 애정이 있었지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무대(舞臺)로 활용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즉, 사회적, 정치적이었던 김용은 인간과 사회에 얽힌 여러 갈래의 난마(亂麻)를 무협이라는 주제를 입혀 나름대로 피력하는 연출의 장소로 삼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나름대로 세상사를 꿰뚫어 봤으며 그 최종결론이 『녹정기』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김용은 『녹정기』 이후로 어떤 작품을 쓸 수가 없었다. 『녹정기』야말로 인과율의 법칙과 그에 위배된 모순의 양면성을 드러내 주는 유일무이한 소설이기 때문이다. 주목할 점이라고 하면 김용이 마지막 작품을 색다르게 쓴 동기라고나 할까. 그는 왜 『녹정기』에 이르러 필치를 바꿨던 것일까. 단순히 마지막 작품을 색다르게 맺고 싶은 마음 때문은 아니었을 텐데 말이다.
어쨌든 문제는 이러한 의도(意圖)를 김용의 입장에선 평자(評者)가 제대로 알아주지 않았다는 불만(不滿)이다. 평자들은 그를 불세출의 무협소설의 거장(巨匠)으로 그려 놓았지 문학의 거장(巨匠)의 반열로 올려 놓지는 않았다.
그런 가운데 김용은 자신의 작품을 후원해주는 사람을 모아 의견을 듣고 혹여 모를 가운데 재차 작품을 수정, 탈고(脫稿)했으며 김학(金學)이라는 추증(追增) 세력을 불려 자신의 입장을 공고히 하고자 했다. 다분히 문인적 기질보다는 정치적 색채가 짙은 대목이다. 김학총서연구 시리즈는 이러한 분위기의 산물(産物)인 것이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쌓아 놓은 수많은 업적을 우리는 부인하기 어렵다. 만약 이러한 평가가 정당하다면 과연 그러한 것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는 후대의 무협작가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우리는 반문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재미있게도 한국에서의 무협은 조금 다른 양상을 보이지 않던가.
처음부터 다시 출발하는 자세로, 한국무협은 서서히 내재적인 것에서 외향적인 면을 보인다는 점이 반가운 특색이겠지만 이것이 한 작가의 노고(勞苦)로만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란 점은 분명하다.
짧게나마 김용에 대해 살펴 보았는데 그의 행보가 다분히 정치적이라고 해서 그에 대해 비난을 던지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럴 만한 식견이나 위치도 안되거니와 세상에는 여러 정치적 성향의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엔 김홍신 같은 이도 있는 것이다.
나는 단지 이 점만을 인정하고 싶을 뿐이다. 김용은 무협 소설을 쓴 이유가 순수한 목적이라기보다는 사회적, 정치적 이슈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자리로 선택했다. 그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지만 자신의 만족을 이루지 못했다. 스스로의 평가와 세간(世間)의 시선이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 『녹정기』에 이르러 어느 정도 사회적 자리를 받아냈지만 더 이상의 무협 소설을 쓸만한 힘이 그에겐 남아 있지 않았다. 애초부터 그에겐 무협에 대한 정열이 없었기 때문이다.
첫댓글 제목도 길군요..^^;;;;;;;;;;;;;
으음...
그냥 재미로 읽었던 작품들....지금 다시 떠올려보니...확실히 사회적인 내용을 담고 있군요...유교 사회에 대한 반항이라든지...-.-a
김용..얼마전 창하오와 조국수님의 무림대결을 방영할때 나오셨었죠....^^
후움.. 제가 어릴적 ..정신적인 이데올로기가 정립되기전인..ㅎㅎㅎ 많은 영향을 끼쳤죠..영웅은 의롭고 미녀는 간교하지만. 영웅은 미녀에게서 벗어날수없다.. 뭐...여튼 무협지덕에 착한사람됐어요.. 정치적성향이든 상업적목적이든.. 독자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이해하니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