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선교팀을 위해서 기도하며 함께 동참하기에 유익할 것 같아서 글을 올립니다(어떤 선교사님 홈피에서 복사해온 자료입니다). 캄보디아는 역사적으로 늘 다른 주변 나라들에 의해서 짓밟혀온 고통의 나라입니다. 특히 1975-1979년 사이에 폴 포트에 의한 공산정권(크메르루즈) 아래서 약2백만명 정도가 비참하게 살해된 눈물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세계는 그곳을 '킬링필드'라고 부릅니다. 이제 우리 형제자매들을 통해서 생명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포될 때 킬링필드가 '리빙필드'로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나도록 함께 기도드립시다.
1. 캄보디아의 역사
1-6 세기 경 현재의 캄보디아에는 중국과 인도 사이의 무역로를 차지하고, 번성을 구하하던 후난 (Funan) 왕국이 있었다. 건축과 조각에서 두각을 나타낸 앙코르 시대는 800년 경 자야바르만 2세 (Jahavarman II) 에 의해 시작 되었다. 그의 재위 기간에 정교 일치의 권한을 가진 데바라자 (Devaraja; (신왕) 의 크메르 통치가 성립되었다. 앙코르 주변에 관개 시설을 이용한 집약적인 농사가 이루어졌으며, 그 결과 크메르 인들은 고도로 중안집권화된 국가에서 많은 인구를 부양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1863년부터 90년 동안 프랑스가 캄보디아와 베트남을 식민지 통치했으며, 1953년 캄보디아는 독립을 선언 했다. 그후 15년 동안 노로돔 시하누크 (Norodom Sihanouk) 왕이 캄보디아 정치를 좌지우지 했다 (후에 그는 수상, 국가 원수를 거친 다음 다시 왕으로 복귀했다). 하지만 그는 좌우 세력을 오가며 연합전선을 펴는 변덕 스러움과 억압적인 정치 스타일 때문에 1970년 군부에 의해 쫓겨나 중국으로 망명했다.
1969년부터 캄보디아는 베트남 전쟁에 말려들었다. 미국은 캄보디아 내에 있다고 의심되는 공산군 기지를 부수기 위해 비밀 융단 폭격을 실시 했으며, 1970년 쿠데타후에 미국과 월남군은 월맹군의 뿌리를 뽑기위해 캄보디아를 침공했다. 그들의 침략은 실패했지만 캄보디아의 자체 혁명 세력인 크메르루즈 (불어로 루즈는 붉은색을 뜻한다) 를 내륙 오지로 몰아내게 되었다. 이후 캄보디아는 전체가 참혹한 싸움에 빠져들었으며 사이공이 함락되기 2주 전인 1975년 4월17일 크메르루주가 프놈펜을 점령함으로써 전쟁이 끝났다. 곧 크메르루즈의 지도자 폴포트 (Pol-Pot)의 지휘아래 지금까지 행해진 것 중에서 그 어떤 것보다 급진적이고, 잔인한 사회개조가 시도되었다. 목표는 캄보디아를 농민이 지배하는 사회주의 농업협동조합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후 4년동안 식자층을 포함한 대부준의 도시인들이 농촌 지역으로 재배치 되었으며, 고문을 당해 죽거나 처형당했다. 크메르푸즈의 정책 때문에 적어도 백만명, 많게는 2백만명의 캄보디아 인들이 1975-1979년 사이에 죽었다.
1978년 말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공했으며, 그 결과 크메르루즈는 태국과의 국경지대에 있는 캄보디아 서쪽의 정글로 쫓겨 갔다. 1970년대 후반 부터 1980년대에 걸쳐 크메르루즈는 중국과 태국 (간접적으로 미국이 지원)의 도움을 받아 베트남의 조종을 받는 프놈펜 정부에 대항하여 게릴라 전을 전개했다.
1993년 중순 유엔의 관리하에 캄보디아에서 선거가 치뤄졌다. 새로운 헌법에 의해 노로돔 시하누크가 다시 왕이 되었다. 현 정부는 독립연합전선 (United Front for an Independent)으로 노로돔 나나리드 왕자 (Prince Norodom Ranariddh) 가 이끄는 FUNCINPEC (Neutral and Free Cambodia) 당과 훈센 (Hun Sen)이 이끄는 캄보디아 민중당 (Cambodian People's Party)이 합쳐진 연정이다.
캄보디아 정부와 연정 수립을 위해 많은 협상에도 불구하고 크메르루즈는 여전히 제도권 정치 밖에 있으면서 캄보디아의 안정을 위협하고 있었다. 그러나 1998년 8월 UN의 감시하에 치른 선거에서 훈센이 승리를 거둠으로서 2원 집정체제의 문을 내리고 1원 집정체제로 정치적 안정을 되찾으면서, 그동안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많은 혼란을 야기 시켰던 크메르 루즈군도 이제 거의 투항하여 극 소수의 일부를 제하고는 이제 정부군으로서 혹은 사회에 복귀함으로서 정치와 사회적인 안정을 되찾고 있다
2. 캄보디아의 정치제도
캄보디아는 입헌군주국이다. 역사적으로 캄보디아는 국경을 침범하고 그 문화를 말살하려고 하는 두 나라의 위협가운데 있었다. 앙코르 왕조때 크메르는 지금의 베트남과 태국의 많은 부분을 점령하고 있었으나 15세기 앙코르 왕조가 몰락할 때 베트남과 태국으로부터 많은 영토를 빼앗겼다.
1945년에 프랑스로부터 독립하여 캄보디아 왕국이 되었으나, 1970년에 정변이 일어나 크메르 공화국이 되었다. 1960년대까지 시하누크 왕은 국가의 수반이요 절대적 권력자였다. 그러나 시하누크는 왕위를 사퇴하고 국무총리가 되었다.
1975년에는 크메르 루지가 정권을 장악하고 공산주의 체제를 강요하였다. 그러나 1979년 베트남이 국경 분쟁을 이유로 캄보디아를 침공했고 크메르 루지 정권은 무너지게 되었다.
베트남 정부는 크메르 루지에 반대하는 그룹으로 허수아비 정부를 세웠으며 그 이후 10여년간 국내는 3개의 파벌로 나뉘어 분열상을 보이다가 1990년 UN에 의하여 연합정부를 구성했다.
1991년에는 UN에 의하여 정치적 안정을 찾게 되었고 1993년 5월 23일에 우여곡절 끝에 20억달러에 이르는 유엔임시행정기구의 엄청난 행정비용과 2만 2천명에 달하는 평화유지군의 분투적인 노력 속에 총선이 실시되었다. 크메르 루즈파가 빠지고 시아누크 계열의 노로돔 나라니드가 이끄는 캄보디아 민족통일 전선 (FUNCINPEC), 프놈펜 정부의 훈센 수상이 이끄는 캄보디아인민당 (CPP), 손산의 불교 자유민주당(BLDP) 등 20여개의 군소정당이 참가하여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비례 대표제로 실시된 이 선거에 서 펜신팩이 약 46%, 캄보디아 인민당이 약39%, 불교자유민주당이 약3.8% 기타 군소 정당 중에서 몰리나카가 약0.4%를 차지하였다.
이 결과에 따라 제헌 국회 의석수 120석에서 펜신팩이 58석, 인민당 51석, 불교자유민주당 10석, 그리고 몰나카당이 1석으로 각각 배분되기도 하였으나 선거에서 승리한 펜신팩의 정권인수와 정권장악 능력에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펜신팩 출범 당시 1만 2천여명에 달했던 병력이 난민틈에 끼어 해외이민과 이탈로 거의 반으로 줄어 훈센정권의 정규병력 10만여 명을 감당하기에 역부족이었으며 훈센 정권 또한 선거 결과를 순수히 승복하지 않고 선거 개표 부정을 이유로 일부 주에 대한 재선거를 요구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1993년 9월 21일 제헌의회는 몇 차례 헌법 초안을 개정한 뒤 과도 정부 수반인 시아누크를 국왕으로 하는 입헌 군주제의 캄보디아왕국 (Kingdom of Cambodia)의 새 헌법안을 통과 시켰다.
새 헌법의 주요 내용으로 국왕은 군 통수권과 각료 임면동의권, 국제 조약 비준권, 외교사절의 신용장 수리권등을 갖고 '왕은 군림하나 통치하지 않는다'는 상징적 국가원수로 존재하고 캄보디아 왕국은 자유주의 시장 경제를 채택한다는 것이다. 또한 인권을 강조하여 민족적. 종교적 평등을 보장하고 사형제도와 성차별을 금지할 것을 규정하였다. 그리고 이 헌법은 임시 조항을 두어 5년간의 신헌법1차 내각에 한해 2명의 공동총리를 규정하였다.
1993년10월 헌법에 따라 국왕에 노로돔 시아누크, 선거에서 승리한 캄보디아 민족 통일전선 FUNCINPEC의 당수이며 시아누크의 장남인 노로돔 라나리드가 제 1총리, 야당으로 전락한 전 정권의 수상인 훈센을 제2총리로 하는 캄보디아 왕국의 신정부가 출범하였다.
3. 캄보디아의 경제
캄보디아는 아시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중에 하나로, 그들은 주로 공무원, 어업, 농업, 소규모 무역상, 식당경영, 상점주인, 자동 판매기업등에 종사한다. 인구의 80% 이상이 농업활동에 종사하며 15%가 경제분야에서 봉사한다.
주 수입원은 잉여농산물 판매, 어업, 원목, 보석, 채광 및 판매, 소매사업등을 통해서 얻어진다. 생산물로서는 고무,쌀,콩,담배,시멘트,제지,생선,옷감,바스켓,비단생산과 직조등이며무역상대국은 러시아 동구유럽, 싱가포르, 타일랜드, 홍콩, 일본, 베트남 등이다. 고무, 원목, 콩, 담배등은 수출하고 식량, 원유, 소비재, 원자재등 수입한다.
현재 프놈펜에 4개의 전력발전소가 있고 그 외에 몇 개가 더 있다. 모든 연료와 대부분의 원료, 자본 재,소비재를 수입해야한다. 최근에 주 수출품이 고무에서 목재로 바뀌었다. 목재는 현재 캄보디아 수출액의 50%를 차지하고 있다.이외 금과 담배의 적환이나 외국의 원조가 경제를 지지하는 주요 재원이 되고 있다.
캄보디아의 통화 단위는 리엘(Riel)이며, 금액 다음에 R 을 붙인다. 1989년 중반 U$1에 대해 200R 정도이던것이 지금은 3,800 R (1999년 11월1일 현재)을 하고 있다. 동전은 없고 모두가 지폐이며 100, 200, 500, 1,000, 2,000, 5,000, 10,000, 20,000, 50,000, 100,000짜리가 있다. 1인당 GNP는 U$285(1995년기준)달러로서 세계에서 가장 낮은 나라 중에 하나이다
4. 캄보디아의 종교
캄보디아는 98%가 불교이며 정령숭배적인 요소가 매우 강하다. 소승불교가 캄보디아에서는 가장 널리 퍼져 있으며 1975년 까가지는 국교였다. 1980년대 후반 소승불교는 국교로 복귀했다. 1975-1979년 사이 수많은 캄보디아 승려들이 크메르루즈에 의해 살해 당했으며, 3천개가 넘는 절들이 파괴되었다. 1990년대 많은 절들과 모스크가 복원되었으며 스님들의 탁발이 다시 일상적인 모습이 되었다. 대부분 크메르족은 불교 신앙에 곁들여 초자연적 존재인 "네악 타"(neak taa)를 믿는다. '네악 타'는 죽음의 영도 될 수 있으나 항상 살아있는 영으로 간주된다. 그 영은 적절한 경의를 표하면 해를 받지 아니하나 그렇지 않으면 질병이나 가뭄을 가져온다고 믿어진다. 크메르족들은 석가의 생애를 경축하는 여러 가지 행사를 가지고 있다. 폴포트 정권의 붕괴이후 종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불교의 부흥이 일어나고 있다. 주목할 만한 것은 동남아의 여타 국가와 마찬가지로 모슬렘이 부흥하고 있고, 힌두교도 서서히 증가하고 있다.
타일랜드에 있는 크메르 난민촌 피난민들이 기독교에 대하여 열린 자세를 취하고 있다. 지난 15년동안 캄보디아의 기독교인들은 박해를 받아왔다. 크메르족은 기독교를 서구의 종교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전쟁과 사회적 혼란으로 인한 민족주의와 불교사이의 괴리현상으로 인하여 학생들과 지식인들은 기독교에 대하여 개방적인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1954년에 전체 성경이 크메르 언어로 번역되었다. 크메르어로 된 신앙서적이 있으며 영화 '예수'가 크메르어로 번역이 되어 있다. 크메르족에게는 무엇보다도 현재 그들의 육체적, 정서적 요구를 채워줄 수 있는 사역이 요구된다. 20년이 넘도록 그들은 전쟁에 시달려 왔기 때문이다
5. 캄보디아와 킬링필드
5.1. 크메르 루즈 공산당의 공산 혁명
1975-1979년 1월 사이에 캄보디아를 천둥과 비바람으로 휩쓸고 강타했던 공산혁명은 1백만 명에 이르는 사상자와 30여만 명의 난민을 만들어낸 세계 역사상 유래가 없는 비극과 공포의 세월이었다. 이 기간의 캄보디아는 동물 농장이었으며 혁명지도부와 그 하수인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은 일만 하는 동물이나 다름 없었다. 혁명 지도부 대변인이 1975년 4월 17일 프놈펜 점령 직후 캄보디아의 2쳔년 이상의 역사는 끝났다고 밝혔듯이 공산 혁명의 시대는 캄보디아의 역사와 전통을 크게 변화 시켰다.
바로 '민주 캄푸치아 (Democratic Kampuchea)'로 외부세계에 알려진 크메르 공산혁명 정권의 3년 7개월이라는 짧은 치세의 기간이 말해주듯이 공산혁명정권의 학정과 살해로 점철된 악행의 세월이 얼마나 심했는지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크메르 루즈 공산혁명 지도부는 프놈펜을 점령한 직후부터 조직의 모습을 공개하지 않고 배후에 남아 그들의 혁명사업을 가차없이 진행시켰다. 점령직후 수도 프놈펜은 한마디로 몇 주일간 혼돈과 공포의 도가니였다. 혁명지도부는 화폐, 시장, 종교조직, 학교, 사유재산 그리고 이동의 자유를 일거에 철폐하고 프놈펜 도시민들을 지방으로 강제 이동시켰다. 그 동안 전쟁과 크메르 루즈의 학정을 피해 몰려들었던 프놈펜의 인구는 약2백만명 이상이나 되었는데 이들은 전쟁의 공포와 식량부족으로 심신이 지칠대로 지쳐있었다. 이들은 혁명 사업의 일환으로 각 지방 농경지대에서 노역하기 위해 강제 이동되는 길거리에서 사람들이 굶주리거나, 말라리아에 죽어 갔으며 논놀 정부에서 공직 생활을 했거나 군부에 종사했던 사람들은 프놈펜에서 무자비하게 처형되었다. 오직 혁명지도부의 가족과 몇백여 명의 공장 노동자들만 프놈펜에 남을 수 있었다. 강제 이동에 반항하는 자들은 닥치는 대로 처형되었고 심지어 병원의 병상에 있는 환자는 물론, 어린이, 노약자들도 강제 이동시켰는데 이들은 대부분 추방길에 버려지거나 죽어 갔다. 이후 2개월간 전국적으로 2-3백만 명의 인구가 농부로 신분이 바뀌어 시골지역으로 이동되었다. 마침4월의 건기라 마실 수 있는 물과 식량이 부족하여 굶주림과 허기, 말라리아로 길거리에서 암담하게 숨을 거두어 갔다.
크메르 루즈 공산군들의 대부분은 15세 이하의 어린 소년들이었다. 이들은 시아누크 치세와 논놀정권 시대의 가난한 하층민들로 아무런 특권도 없는 피착취 계급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1970년에서 1975년 사이에 캄보디아 공산당 CPK에 가입하여 공산당으로부터 무산 계급의 혁명을 교육 받으며 착취 계급에 대한 증오심을 키웠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정말로 가축이나 가재도구는 물론 땅 한뙈기도 없는, 가난한 사람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모택동 어록을 빌린다면 이들은 혁명이 잘 새겨질 수 있는 '가난하고 명청한 애들'이었다. 1975년 이들의 숫자는 만오천명이나 되었으며 공산당의 충직한 하부 조직원으로 활약했다. 한편 공산지도부는 이들과 더불어 행동대원으로 활용하기 위해서 13-15세 사이의 청소년들을 점령지역에서 징모하여 간단한 정치사상 교육과 군사훈련을 시켜 전투에 투입시키고 공산혁명의 첨병대원으로 육성하였다. 이들은 가족의 의무, 사회전통의 관습, 종교적 의식에서 벗어나 오직 절대적인 혁명조직에 충성할 것을 교육받음으로써 혁명의 칼날이 되었다. 무산자 계급, 공산당 하부조직원들의 가난한 과거의 기억과 새로 획득한 공산당의 힘과 그리고 전통사회를 부정하고 혁명조직에 충성할 것을 교육받은 반항적 기질의 청소년들의 대담성은 혁명의 과제를 가차없이 집행할 수 있게 하였다.
5.2. 숙청 작업
1975년 10월9일 소집된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회의에서 당지도부 위원들이 혁명지도부의 기초 내각의 부서에 배치되었는데 경제 및 국방에 서기장 폴 포트, 당조직업무와 교육에 부서기장 누온치아, 외무에 당서열3위인 이앙사리, 국민통합전선과의 연락업무 및 재정에 키우삼판, 통상업무에 코이투온 등 남성11명과 여성2명이 23개 부서의 책임을 맡았다. 새로운 정부가 구성되고 폴포트가 수상에 오르면서 집단 지도체제는 붕괴되고 엄청난 희생을 불러 일으킨 숙청작업이 이어졌다.
숙청의 발단은 1976년9월에 소집된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의 캄보디아 공산당 창설 기념일에 대한 이견에서 시작 되었다. 이때 두 명의 고위 당간부 케오 미아스 (Keo Meas)와 논 수온 (Non Suon)이 당지도부를 배반하였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혁명정권의 악명 높은 심문센타 툴 슬랭 (Tuol Sleng)으로 끌려가 처형되었다. 이 심문센타는 프놈펜 시내에 있는 고등학교 건물을 개조하여 심문실, 고문실, 유치실로 만들어 혁명정권의 악명높은 숙청의 산실로 이용되었다. 오늘날에는 만행의 전시관으로 일반에게 공개되어 캄보디아 관광의 명소로 자리잡고 있다
이 센타는 직원이 1백여 명이나 되었는데 타자수, 사서, 사진사, 전기기사, 대필사, 전직교사, 심문관등으로 구성되어 혁명지도부의 충직한 집행자로 활약하였다.
폴포트는 두명의 고위 강간부를 숙청한 이후부터 미세균이 침투하여 당이 병들었다면서 악덕 세균 색출을 지시하였다. 악덕 세균으로 간주되는 자들은 혁명에 반대하는 사람들, 당내 반혁명 분자, 전직교사, 지식인, 의사, 약사, 논놀정권의 관리와 군인들, 중산층등이 목표가 되었다. 그리고 베트맹이 주도할 때 공산주의 운동에 가담했던 당원들, 외국과 관련을 맺었던 사람들, 베트남 국경지대인 동부지역에 연관된 관리나 그 지역 사령관이나 군인들이 포함되었다. 일단 의심을 받아 심문센타에 끌려 가면 자술서에 3명의 다른 사람들을 거명해야 했다. 이 거명된 사람들은 다시 다른 3명을 끌어들여야 했다. 이 심문센타에 끌려온 사람들은 거의 무고한 사람들이었다. 이런 식으로 혁명기간에 약2만명이 이 심문센타에 끌려와 심문과 고문을 거쳐 처형되었다. 그래서 이곳을 '들어가지만 나오지는 못하는 곳'으로 알려 졌다. 이곳에 끌려간 약2만명 중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약10여 명 안팎에 지나지 않았다. 끌려온 자들은 억지로 진술서를 작성하였는데 현재 4천여장이 남겨져 보관되고 있다.
공산당에 대하여 가지적이고 잠재적인 모든 가능한 적을 처형하고 혁명정권의 권력을 유지하고 방어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이나 대상도 가리지 않으로써 숙청의 희생자는 불어났다. 미처 출국하지 못한 외국인들은 미국CIA 정보 요원이나 공산베트남의 정탐요원으로 간주되어 심문센타로 보내져 결국 처형되었다.
이 숙청작업은 1930년대 스탈린이 소련 공산당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행한 숙청작업과 2차대전 이후 동구 유럽공산국가에서 이루어진 고위 당간부의 전례를 훨씬 뛰어넘는 크메르 루즈 공산당의 악랄성과 잔혹성을 말해주는 고유 대명사가 되고 있다.
5.3. 폴포트 그는 누구인가? (1928-1998)
캄보디아 공산혁명의 지도자 폴포트는 (Pol Pot)는 1928년 5월 25일 프놈펜 북부에서 90여 마일 떨어진 캄퐁톰 (Kampong Thom) 주 프랙 스바우브(Prek Sbauv) 마을에서 양부모가 크메르족인 아버지 팬랙 스바우브 (Pen Saloth)와 어머니 속 넴 (Sok Nem) 사이에서 9남매중 여덟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부농으로 마을의 유지였고 어머니는 자비심이 많아 마을에서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의 원래 이름은 살로수 사 (Saloth Sar)이며 폴포트는 공산혁명 이후 1976년에 '민주 캄푸치아'국 선포와 함께 만든 이름이다.
1935년 살로쓰 사는 왕궁에서 직원과 궁중 무용수로 각각 일하고 있는 형과 누나의 자취집으로 옮겨 생활하다 왕궁 근처에 있는 바트 보툼배디 (Vat Botum Vaddi)라는 불교사원에 행자승으로 들어가 캄보디아 글과 불교의 기초 경전을 공부하였다. 당시 캄보디아는 불교사원에서 초급교육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는 초급 교육을 받던 시절에 또래 아이들과 잘 어울렸으며 다투거나 싸우는 일이 없는 얌전한 학생이었다고 한다. 그는 불교사원의 유치원 과정을 마치고 형의 학자금 지원으로 에껄미르 (Ecol Miche)라는 프랑스계 초등학교에 들어가 프랑스어를 공부하고 기독교 교리를 접하며 정상교욱을 받았다. 1942년에는 당시 캄보디아에서 세번째로 큰도시이며 경제활동이 가장 왕성했던 캄퐁참 (Kampongcham)에 새로 개교한 노로돔시아누크 중학교에 입학하였다. 신입생은 20명이었는데 이들은 각 주에서 선발되었고 살로쓰 사는 캄퐁톰의 대표였다. 여기에서 그들은 모두 프랑스어로 공부를 하였고 그는 여기에서 바이올린을 교습받기도 하였다. 그의 동창생 가운데 후님 (Hu Nim)이 있었는데 후에 공산주의자가 되어 폴포트 정권의 공보부 장관을 지냈으며 한 학년 후배 였던 키우삼판 (Khieu Sampan)은 프랑스 유학을 거쳐 폴포트 정권의 상징적 국가 원수를 지냈다. 그는 중간치의 학업 성적을 유지하였으나 선생의 강의에 충실하였으며 유쾌하고 올 곧고 예의 바른 학생이었다. 여기에서 그는 크반 시판 (Khvan Siphan)이라는 선생님이 앙코르 제국의 영화를 상기시키며 식민통치하의 연약한 조국의 현실을 토로할때 그로 부터 깊은 감명을 받고 후에 사립고등학교의 교사가 되기도 하였다.
1948년 그는 캄보디아 최고 명문 고등학교인 리씨 시소와쓰 (Lycee Sisowath)에 입학 시험을 보았으나 실패하고 기술 고등학교인 에꼴태 끄니끄 (Ecole Technigue)에 입학하여 수학하다가 다음 해 정부 장학생으로 파리 유학을 떠나게 된다. 1949년 9월말 그는 파리에 도착하여 싸뜨 대학 (Cite Universitaire) 전파전기학과에 등록하였다. 1950년 여름방학을 맞아 인생의 전환점을 가져다 주는 중요한 경험을 하게 된다. 여름방학이 다가오자 그는 사회주의 써클 조직의 홍보에 매료되어 유고슬라비아를 위한 자원노력 봉사대에 참여하여 1개월 동안 유고슬라비아에서 노력 봉사활동을 벌였다. 그는 여기서 당시 유고슬라비아의 강력한 지도자 조시프 브로즈(Josip Broz)가 이끄는 전국민을 동원한 나라 복구 정책에 매료되게 된다. 후에 그는 프랑스 공산당원이 되어 학업은 점점 멀리하고 공산주의 사상에 몰두하게 된다.
1952년 12월 그는 공산주의자가 되어 파리를 떠나 학위도 없이 새해 1월 캄보디아로 돌아왔다. 1953년8월 그는 인도차이나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그는 정치 학습을 마치고 프놈펜의 좌경단체와 협조하기 위해서 프놈펜에 돌아와 가명을 사용하며 활동하다 1955년 총선이후 시아누크의 좌경 및 공산주의자 강경탄압으로 활동이 제한되자 프놈펜의 시립고등학교 참라온 비치아에서 교편을 잡았다. 1956년7월 그는 리씨 시소와쓰 고등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고 있던 키우포너리 (Khieu Ponnary)와 결혼하고 교직에 충실하며 공산주의 지하 활동을 펴나갔다.
1960년데에 들어서면서 그때 당시 공산당 서기장이던 '토우 사모스가 시아누크 경찰에 의해 실종 되면서 사로쓰 사가 캄보디아 노동당 중앙 위원회 서기장이 되었다. 그는 이후 캄보디아 동부지대, 동북부 라타나기리(Ratanakiri)주, 캄퐁톰 (Kompongtom)주 등 변방 시골 지역과 산악지대에 공산당 게릴라 본부를 설치하고 이동하면서 베트맹 공산당으로부터 무기와 군사훈련의 지원을 받아 크메르 공산당의 전투력을 증대시켜 1967년 시아누크 정부에 대해 무장투쟁 선언을 하였다. 1968년에는 캄보디아 서북부 바탐방주와 캄보디아 남동부 캄포트 지역 등 몇 개주를 장악하면서 프놈펜 정부를 계속해서 압박하였다.
1972년 미국과 베트맹의 파리 종전 협정으로 캄보디아 내 베트맹군이 철수하고 1973년 미국의 공산게릴라기지에 대한 대대적인 공중폭격으로 크메르 루즈 공산게릴라군은 잠시 주춤거렸으나 이후 베트남에 주둔했던 미국군이 철수하자 공격을 가속하여 마침내 1975년 4월17일 프놈펜에 입성하였다. 이후 그는 공산혁명 정권의 최고지도자, 큰형 으로 캄보디아 현대사의 비극을 연출하였다. 3년7개월간의 통치기간중 이루 형언할 수 없는 만행을 그는 그의 민족에게 저질렀던 것이다. 그후 베트남의 침공으로 크메르 공산당이 북쪽 산악지역으로 물러가며 그도 역시 그때부터 산악에 묻혀사는 은둔생활과, 간혹있는 게릴라 전으로 활동을 벌였지만 역부족이었고, 현대사의 새로운 비극을 연출하고 1998년 태국 국경의 한 정글 지역에서 이름도 없이 생을 마감하였다.
첫댓글 캄보디아팀 홧팅~ 아룡주렁언니,규열오라버니 없어서 구정엔 제가 첫째랍니다 ㅋㅋㅋ 내가 세뱃돈 다 받아줄께! ㅋㅋ 아무튼 모두모두 잘다녀오세요 ^^
와...... 어떻게 한 사람이 이렇게 까지 변할수 있을까.... 그 힘이 무엇일까??? 평화 평화로다...주님의 평화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