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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에 관한 시모음 자작나무를 찾아서
---------------------- 자작나무 내 인생
무엇이 터졌을까 명치 끝에 누르스름한 멍이 배어 나왔다
길가에 벌(罰)처럼 선 자작나무 저 속에서는 무엇이 터졌길래 저리 흰빛이 배어 나오는 걸까 잎과 꽃 세상 모든 색들 다 버리고 해 달 별 세상 모든 빛들 제 속에 묻어 놓고 뼈만 솟은 저 서릿몸 신경줄까지 드러낸 저 헝큰 마음 언 땅에 비껴 갈리는 그림자 소슬히 세워가며 제 멍을 완성해가는 겨울 자작나무
숲덩이가 된 폐가(肺家) 하나 품고 있다 까치 한 마리 오래오래 맴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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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빨래집게에 집혀 집승처럼 울부짓고 바다 가까운 곳에, 묘지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별들은 그것을 바라보는 자들의 상처, 눈물보다 더 깊게 빛난다 성소(聖所) 별들의 운하가 끝나는 곳 그곳을 지나 이빨을 박을 수 있는 곳까지 가야 한다, 차갑고 딱딱한 공기가 나는 좋다, 어두운 밤이 오면 내 영혼은 자작나무의 육체로 환생한다 내 영혼의 살결을 부벼대는 싸늘한 겨울 바람이 나는 좋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욕망이 고드름처럼 익어간다 눈에 덮인 깊은 산속, 밤새 눈길을 걸어서라도 뿌리째 너에게로 갈 테다 그러나 네 몸의 숲 속에는 아직 내가 대적할 수 없는 무서운 짐승이 산다
-시집『그대가 곁에 있어서 나는 그대가 그립다』(푸른숲. 2002)
------------------------- 자작나무 봉분
꿈속의 내가 평상을 박차며 허둥댄 것도 같은 내 낮잠 속으로 누군가 자러 들어와 한잠 곤히 들었다 방금 나간 것
깨어보니 나는 큰대자로 잠들었던 모양인데 나비를 쫓으러 퍽이나 침대 발치에 머리를 누인 거꾸로 놓인 큰대자인지라
떡 벌어진 다리는 말고 조금은 섬섬하게 다리를 벌린 거꾸로 선 매촐한 큰대자 같은 자작나무 한그루 떠올린 것이다 말하나마나 몸빛은 재처럼 희디희어서 사바사나*, 라는 말도 함께
거꾸로 선 희디흰 자작나무의 잠, 송장자세로 삶을 건너는 고즈넉한 휴식이 나는 대번에 그리워져 내 죽음의 형식을 벼락처럼 알아채고 만 것이다
화장한 나를 묻은 뒤 자작나무 묘목 한채 심어주면 좋겠구나 원한다면 언젠가 내 옆에 그대의 육신도 좋은 나무 한채로 이사와도 그곳은 너무 울창하지 않은 이제 막 꿈꾸기 시작한 황무지여도 좋겠 하나둘 이사온 사람들이 한 백년쯤 뒤에는 숲 한채 넉넉하게 이루어도
한적한 가을 오후 저, 저, 나비 잡아라 희디흰 송장에서 비끄러져 내 수천수만의 저 나비떼, 나비떼 말이지
--------------------------- 자작나무
-월간『현대시』(2004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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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해
너의 상처를 보여다오 아무도 내 앞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허연 붕대를 휘날리며 서 있는 자작나무들
오래전 죽은 자의 수의를 걸쳐 입은 듯 온몸이 붕대로 친친 감긴 나무들의 미라여
지하 어딘가에 꼭꼭 숨겨진 그를 지상으로 발굴한 자는 누구인가
보름달 빛이 고대의 자태로 내려오는 밤이면 붕대자락이 조금씩 풀린다고 하고 그 속에서 텅텅 우는 소리 들린다 하고
나는 태초에 걸어다니는 족속이었으니 이것을 푸는 날은 당당히 걸어가리라
그때마다 잘 가꾸어진 공원의 연둣빛 나무들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원형의 전설을 들은 듯 한곳에 내린 뿌리가 조금씩 들뜬다 하고
-시집『자라』(창작과비평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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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룩말이 몸을 비비고 지나간 다음,
-시집『자작나무의 사랑』(도서출판 내일을 여는 책. 2005)
분주하다. 등피불을 들고 오래 꿈을 꾸는 자작의 흰 핏줄들,
『국제신문』(2006년 1월)
장철문
-계간『서정시학』(2007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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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이 말들의 고삐를 땅 속 깊이 묶어 놓았나 딛고 선 검은 땅, 견고하게 뿌리내린 긴 다리로 정신의 지평선 어디나 한 달음에 닿는 흰 말들 초록갈기 휘날리는 거침없는 질주를 본다 우점종, 활엽의 지붕 아래 한 자리에 모여 서서 천 년쯤 내닿는 무구한 풍경은 가지와 줄기와 몸통의 희디 흰 나날들이어서 숲길을 걸어 바이칼로 가는 동안 천마도를 숨기고 있는 수막의 내피를 슬쩍 뒤집어 보여주기도 하는 흰 얼굴은 시간을 뛰어 넘는 영웅을 기다린 흔적이 역력하다 긴 여정 끝에 마침내 도착하였으나 추신까지 읽어도 행간이 해독되지 않는 편지, 살아있는 목간에는 세로로 길게 자작의 서명이 뚜렷하여, 귀족의 품격이라는 말이 어울리겠지만 늘어선 열주의 흰 기둥들 정연한 질서를 거느려 한 그루마다 한 채의 사원을 몸에 지녔다 엄결한 사제라고 부르고 싶어지는 스스로 성소이며 경전인 나무들 길을 빼곡히 메운 흰 옷 입은 시민들 틈에 서서 백의종군하는 순신의 차림으로 먼 귀양길의 약용을 향해 손을 흔든다 말 울음소리 품은 알이 긴 잠에서 깨어나는 한 평 황무지, 마음의 시베리아, 마침내 얼음과 모래를 걷어내고 자작의 묘목을 심어야 할 때
-『시인시각』(2009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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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나를 자작나무라 부르고 떠난 후 네가 나를 자작나무라 부를 때 난 자작나무가 되었다
-시집『사랑, 그 백년에 대하여』(천년의시작,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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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이
밤이 되면 미친 밤들이 당신을 물고 밤새도록 놓지 않았을 거야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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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창을 열고 대관령을 보네 친구들은 대관령을 넘는 게 꿈이라고 했지만 나는 어릴 때부터 영 너머를 넘어가는 꿈 같은 건 꾸지 않았네 하긴 이상하지, 왜 나는 일찍부터 한곳에 머물길 원했었는지 왜 일찍부터 저 너머, 미지의 세계를 꿈꾸지 않았었는지 하지만 후회 같은 건 없네 내가 가장 먼저 창을 열고 대관령을 바라보는 것은 순전히 흰 자작나무숲 때문이지 대관령을 넘어온 찬 바람이 이마를 스치는 순간, 나는 대관령 정상에서 무리 지어 자라는 흰 자작나무 떼를 상상하게 되네 자작나무 떼를 지나온 하얗고 투명하고, 수정처럼 차디찬 바람 말일세 고향에 돌아온 것은 순전히 이 바람을 맞고 싶어서이지 여름 가고, 가을 가고 흰 눈 내리는 겨울이 와도 영 너머 도시에서는 이 바람을 맞을 수 없었다네 다시 고향에 돌아온 것은 순전히 자작나무숲을 지나온 바람 때문이란 걸 이 아침은 깨우쳐주네 창을 열면 거기 흰 갈기를 날리며 수백 마리 백마가 바다를 향해 달려가지
-시집『터미널』(문학동네. 2011)
구재기
나의 알몸이 하얗게 백일하에 드러나기까지에는 나의 장식부터 벗어버려야 했다 봄이 화려함으로 급히 지나가고 여름이 몸부림으로 다할 때까지 얼마나 큰 부끄러움을 가려왔던가 가을에 들어선 이제 산과 들에 열매로 가득할 때까지 얼마나 큰 욕심으로 매달려 왔던가 무성한 장식을 하나둘씩 모두 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하늘이 보이고 나의 알몸이 하얗게 드러났다 장식을 홀가분히 버리고 나면 어느덧 하늘을 알 나이에 이르고 자작나무 한 그루가 되어 산녘에 홀로 서 있어도 전혀 슬프거나 외롭지도 아니하나니 고산심곡高山深谷 숲 속이라야 맑디맑은 물 내리흐르는 까닭을 어이 모르겠는가 어두운 밤일수록 더더욱 달 하나, 별무리 내려와 몸을 적시며 밝게 닦아내는 걸 왜 모르겠는가
-시집『편안한 흔들림』(문학의전당, 2011)
두 줄로 나란히 서서 잎사귀 떨어뜨리는 자작나무들, 훤칠한 발치 사이를 걷다가 하늘을 올려다본다. 잔뜩 찌푸린 허공, 낙엽들이 가슴속에도 흩날린다.
길가의 자작나무들도 예까지 따라와서 자꾸 잎사귀들을 떨어뜨린다.
톨스토이의 무덤, 비석도 팻말도 안 보인다. 누군가가 왜 이리 초라하냐고 중얼거리며, 넓은 영지와 너무나 소박한 무덤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고개를 가로젓는다. 관모양의 봉분 위에 가득 놓여 있는 생화들이 뭐라고 말을 건네는 것 같지만 알아들을 수 없다. 다시 오듯 말듯 내리는 가는 비, 이마에 스치는 바람소리. 세워놓는 걸까. 그 사이로 낙엽을 밟고 걸으면 낙엽 밟히는 소리가 가슴속에도 쌓인다. 왜 그럴까를 생각해보는 사이 천천히 날이 저문다. 톨스토이 영지 입구에서 토산품을 팔던 노파들도 하나둘씩 짐을 꾸려 자리를 뜨는데 자작나무들은 여전히 잎사귀 떨어뜨리며 서 있다.
-계간『시와 정신』(2010년 봄호)
도끼로 장작을 쪼개면 자작자작 쏟아지는 햇살 새끼손가락 굵기 가지만 묶어 건식 사우나 벽에 걸어둔다 페치카 장작불에 맥반석이 후끈 달아오른다 천 근 무게가 걸린 등짝이 나른해지는 저녁나절 자작나무 빗자루를 물에 적셔 흩뿌리면 화르르 피어오르는 수증기 등짝에선 순식간 땀이 흐르고 빗자루로 온몸을 두드린다 이파리에서 돋아나는 숲 향기가 맨살 파고들어 한 계절 머금었던 햇살들이 타닥타닥 튀어 오른다 무릎 관절 두드리고 어깨 두드리고 건조한 공기에 후줄근 늘어진 이국의 가을을 두드린다 진눈깨비가 쏟아져 내리는 영하로 떨어진 사할린의 밤 공허하게 들려오는 시베리안 허스키 짖는 소리 며칠 쯤은 부단히 견딜 수 있을 것 같다
-시집『레닌 공원이 어둠을 껴입으면』(실천문학사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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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누가 자작나무 수액을 한 컵 따라준다 들여다보니 하늘도 있고 겨울바람도 있고 짐승들의 울음도 다 녹아 있는 듯하다 한 모금 마시고 먼 산을 건너다보고 앉아 등과 골 사이의 음영이 만들어낸 깊이만큼 세상은 쓸쓸하다는 생각을 하다가 다시 한 모금 마시며 또 쓸쓸함을 하복부로 밀어낸다 명치끝이 트지하고 꽉 막힌 듯 먹먹하다 산 속에서 불혹을 넘기도록 자작나무 수액을 먹으며 살았는데 갑자기 여기 도시로 오니 읽을 간판은 많고 배달 오토바이 소리는 세상을 다 가려 새들의 청청한 울음도 아이들의 발랄한 소리도 다 오토바이 소리에 점령당하고 저 점령군에 대자보 하나도 들이대지 못하고 귀 막고 눈 닫고 사는 법을 배워야 하는데 누가 자작나무 수액을 한 컵 따라 주길래 단숨에 마시고는 더 달라고 손을 내민다 한 컵 더 마시고 가만히 앉아 수액이 지나는 뱃속 길을 따라가 본다 굽고 꼬여도 길을 잘 내니 물은 길을 기억하는 것이다 길을 뚫으니 체기가 사라진다 트림이 두 번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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