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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초유종(有初有終)
처음이 있으면 끝도 있다는 뜻으로, 처음에 착하게 시작하지만 끝을 잘 마치는 일이 드물다는 말이다.
有 : 있을 유(月/2)
初 : 처음 초(刀/5)
有 : 있을 유(月/2)
終 : 마칠 종(糹/5)
출전 : 시경(詩經) 대아(大雅) 탕(蕩)
이 성어는 시경(詩經) 대아(大雅) 탕(蕩)의 첫 장에 나오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蕩(탕): 끝없이 높은
蕩蕩上帝, 下民之辟.
끝없이 높은 하느님은 이 백성의 군주이시네.
疾威上帝, 其命多辟.
포학한 하느님은 그 명령에 사악하고 치우침이 많으네.
天生烝民, 其命匪諶.
하늘이 뭇 백성을 내시니 그 명령이 믿을 수 없음은 참되지 않아서네.
靡不有初, 鮮克有終.
처음에는 착하게 시작하지만 착함으로 마치는 이가 적기 때문이네.
이 시는 어떤 사람이 천명과 민심을 얻어 주나라를 개국한 초기 문왕과 무왕의 빛나는 치적이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여왕(厲王)의 폭정에 의해 무너져가는 모습을 보고 탄식하며 읊은 것이다.
처음에는 누구나 다 잘 하지만 끝까지 잘한 사람은 매우 드물기 때문에 처음에 잘하는 것처럼 끝까지 잘한 사람이야말로 진실로 잘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는 얘기이다.
시경(詩經) 대아(大雅) 탕지습편(蕩之什篇) (1)
蕩(탕)
대아(大雅)는 문왕지습(文王之什), 생민지습(生民之什), 탕지습(蕩之什)을 합쳐서 모두 31편으로 편집되어 있다. 문왕지습에서 부터 생민지습의 '권아시(卷阿詩)'까지를 소위 정대아(正大雅)라고 일컫고 있다.
정대아(正大雅)는 주(周)나라 시조로 부터 문왕, 무왕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노래하여 역대 임금의 덕을 칭송하고, 주(周)나라가 천명을 받게된 유래를 밝히면서 자손들이 길이 길이 그 천명을 받들어 갈 것을 축원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또 한편으로는 태평성대의 즐거움을 노래하여 천자를 축복하는 시가 수록되어 있다.
그 다음부터는 칭송하는 시와 비방을 하는 시가 섞여 있으며, 특히 소아(小雅)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주(周)나라의 원로가 당시의 폭정에 분격하고 걱정하는 것이 매우 절실하게 풍자한것도 보인다.
이 대아(大雅)의 시들은 웅혼장대(雄渾壯大)하고, 또한 선이 굵고 의지력이 당당한 기백이, 마치 주(周)나라의 청동기처럼 실팍한 느낌을 주고 있다.
탕지습(蕩之什)(1)
아(雅)와 송(頌)의 작품들은 '습(什)'이라 구분되어 있는데, 이것은 편의상 그렇게 묶어 놓았을 뿐이지 별다른 의미는 없다.
주희(朱熹)는 아(雅)와 송(宋)에 제국(諸國)의 구별이 없어 10편(篇)을 1권(卷)으로 묶어 '습(什)'이라 했으니, 군법(軍法)에 열 명을 일습(一什)이라 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공영달(孔潁達)은 아(雅)와 송(宋)의 편수(篇數)가 너무 많아서 한곳에 묶어 놓기가 어려우므로 10편을 1권으로 나누어 묶고, 권수(卷首)의 편(篇)을 십장(什長)으로 하여, 권중(卷中)의 편(篇)을 모두 거느리게 한
것이라고 하였다.
蕩(탕)
이 시의 제명(題名)은, '위대한 상제(上帝)'이다. 이 시는 은(殷)나라 폭군(暴君)인 주왕(紂王)을 개탄하는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말투를 빌어서, 은(殷)나라가 망하게 된 세태(世態)를 풍자한 노래라고 한다.
주(周)나라의 문왕(文王)은 덕화(德化)로써, 백성들의 마음을 얻은 임금으로서, 유교(儒敎)의 정치(政治) 이상(理想)인 덕치(德治)를 가장 잘 실천한 군주로 받들어진다.
군주가 나라에 덕(德)을 베풀지 못하고 사악(邪惡)한 무리가 판을치며, 또한 백성들 마저 악(惡)해 진다면 천명(天命)이 기울어 질 수 밖에 없음은 물론이다. 이것은 물론 정치적인 천명(天命)이다. 그리고 이 천명(天命)은 바로 민의(民意)로 구현된다는 것이 유교의 정통적인 생각이다.
이 시의 뜻은 은(殷)나라의 멸망(滅亡)을 거울로 삼지 않았기 때문에 주(周)나라도 그 은(殷)나라의 전철을 밟을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蕩蕩上帝, 下民之辟.
광대한 덕을 지닌 상제는, 하늘 아래 만백성의 임금이신데,
疾威上帝, 其命多辟.
상제께서는 어찌 사납게 굴어, 명마다 사악함이 많은 것인가.
天生烝民, 其命匪諶.
하늘이 많은 백성들을 낳으셨건만, 명하심에 믿음이 없고,
靡不有初, 鮮克有終.
처음에는 잘하는 듯 하다가, 끝맺음은 어찌 그리 좋지 않은가.
文王曰咨, 咨女殷商.
문왕께서 탄식하여 말하시기를, 아아 그대 은나라여!
曾是彊禦, 曾是掊克.
일찍이 이렇게 포악한 신하와, 일찍이 이렇게 취렴을 일삼는 신하가,
曾是在位, 曾是在服.
일찍이 이렇게 벼슬자리에 앉아, 일찍이 이렇게 정사를 맡았는가.
天降慆德, 女興是力.
하늘은 방자한 덕을 내리고, 그대들은 일어나 그것을 힘쓰도다.
文王曰咨, 咨女殷商.
문왕께서 탄식하여 말하시기를, 아아 그대 은나라여!
而秉義類, 疆禦多懟.
마땅히 의로운 사람을 써야 하거늘, 포악한 자를 썼으니 원망이 많고,
流言以對, 寇攘式內.
터무니없는 말로 응대하니, 도둑들을 안에 들이어,
侯作侯祝, 靡屆靡究.
서로 질시하고 저주하여, 그 다툼은 그칠 날이 없도다.
文王曰咨, 咨女殷商.
문왕께서 탄식하여 말하시기를, 아아 그대 은나라여!
女炰烋于中國, 斂怨以爲德.
그대는 나라 안에서 자만하여 활개를 치니, 원망하는 덕을 거두고,
不明爾德, 時無背無側.
그대의 덕이 밝지 못하니, 등 뒤와 곁에는 신하가 없고,
爾德不明, 以無陪無卿.
그대의 덕이 밝지 못하니, 따르는 경사가 하나도 없도다.
文王曰咨, 咨女殷商.
문왕께서 탄식하여 말하시기를, 아아 그대 은나라여!
天不湎爾以酒, 不義從式.
하늘은 그대에게 술에 빠지라 하지 않았거늘, 어찌 불의만을 따르고,
旣愆爾止, 靡明靡晦.
이미 그 위의는 빛을 잃어, 낮이나 밤이나 그 모양이며,
式號式呼, 俾晝作夜.
밤낮없이 외치고 소리치며 지내니, 참으로 밤낮없이 비천하도다.
文王曰咨, 咨女殷商.
문왕께서 탄식하여 말하시기를, 아아 그대 은나라여!
如蜩如螗, 如沸如羹.
원성은 쓰르라미울듯 매미울듯, 솥에서는 부글부글 국이 끓는 듯하고,
小大近喪, 人尙乎由行.
늙은이도 젊은이도 쓰러지는 요즘에, 사람된 행실을 고치지 않고,
內奰于中國, 覃及鬼方.
백성들 노여움은 나라 안에 가득차고, 멀리는 오랑캐에 미치도다.
文王曰咨, 咨女殷商.
문왕께서 탄식하여 말하시기를, 아아 그대 은나라여!
匪上帝不時, 殷不用舊.
상제께서 옳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은나라의 옛 법을 쓰지 않은 때문이니,
雖無老成人, 尙有典刑.
비록 노성한 신하가 없다고 할지라도, 옛날의 법규는 있지 않던가.
曾是莫聽, 大命以傾.
일찍이 그러함에도 받아 들이지 않으니, 이에 천명이 기울어 졌도다.
文王曰咨, 咨女殷商.
문왕께서 탄식하여 말하시기를, 아아 그대 은나라여!
人亦有言, 顚沛之揭.
사람들 또한 말하는 바가 있으니, 나무가 쓰러져 뿌리가 드러나면,
枝葉未有害, 本實先撥.
가지와 잎은 아직 상하지 않았어도, 뿌리는 이미 썩어 있다고 한다네.
殷鑒不遠, 在夏后之世.
은나라의 거울은 멀리 있지 않으니, 하나라 망국을 볼 줄 잊었는가.
이 시를 가리켜 '모시서(毛詩序)'에서는, 소목공(召穆公)이 주(周)나라의 왕조가 크게 무너지려고 하는 것을 보고 상심하였으며, 여왕(厲王)이 무도하여 천하가 어지러워지고, 법도와 장전(章典)이 문란해지는 것을 보고서 개탄하여 지은 노래라고 하였다.
한편 주희(朱熹)는 여왕(厲王)은 마침내 망할 것을 알고, 시인이 이 시를 지은 것으로서, 문왕(文王)이 은(殷)나라의 주왕(紂王)을 책망하는 말투를 빌려서 읊은 것이라고 하였다.
즉 주(周)나라의 문왕(文王)은 은(殷)나라의 주왕(紂王)의 말로(末路)를 보건대, 은(殷)나라는 하(夏)나라 걸왕(桀王)의 최후를 생각하여 스스로의 거울로 삼아야 마땅하다고 하였다.
지금 막 괴멸(壞滅) 할 단계에 이른 주(周)나라도, 멸망한 은(殷)나라 주왕(紂王)의 말로(末路)를 거울삼아서 반성해야 한다고, 문왕(文王)의 말투를 빌려서 간(諫)한 것이라고 한 것이다.
유초유종(有初有終)
정조가 '경사강의(經史講義)'에서 말했다. '예부터 임금이 즉위 초에 정신을 쏟기는 쉬워도, 끝까지 훌륭한 명성으로 마치기는 어려웠다. 이는 지기(志氣)의 성쇠로만 논할 수가 없다.' 그러면서 한 무제(武帝)와 당 덕종(德宗)의 예를 들었다.
한 무제는 기원전 89년에 윤대(輪臺)에서 내린 조서에서 서역과 흉노를 상대로 벌인 전쟁을 후회하며, 백성의 삶을 돌보지 않은 자신의 지난 잘못을 인정했다. 이 조서가 유명한 '윤대죄기조(輪臺罪己詔)'다.
평생 전장을 누볐던 정벌 군주가 제 잘못을 직접 죄 주고, 정책 기조를 수문(守文)으로 전환했다. 처음은 나빴지만 끝이 좋았다.
당나라 덕종은 즉위 초에 당 태종을 본받겠다며, 코끼리를 풀어주고, 궁녀를 내보냈다. 아첨을 막겠다고 상서로움을 아뢰지도 못하게 했다.
그런데 산뜻한 출발과 달리 이후의 정령(政令)과 시책은 하나같이 엉망진창이었다. 노기(盧杞)와 같은 간신이 늘 곁을 맴돌았고, 육지(陸贄) 같은 어진 이는 외직으로만 떠돌았다.
세금을 거두기만 하고 백성을 위해 쓸 줄은 몰랐다. 번진(藩鎭)이 제멋대로 굴어도 규제하지 못했다.
정조의 질문은 이랬다. 이 두 예로 볼 때 임금의 나이나 정신의 총기만으로는 설명할 수가 없다. 덕종의 문제는 과연 어디에 있었을까?
성균관 유생 이규하(李圭夏)가 대답했다. '시경(詩經)에 '시작이 있지 않은 것이 아니라, 끝을 잘 마치는 이가 드물다(靡不有初, 鮮克有終)'고 했습니다. 한 무제는 늘그막에 허물을 고칠 줄 알았고, 당 덕종은 몇 년 만에 완전히 딴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것은 뜻을 세움이 굳건하지 않아, 훌륭한 일을 하기에 부족했기 때문입니다(立志不固, 無足有爲).'
당 태종의 신하 위징(魏徵)은 '십점불극종소(十漸不克終疏)'를 올렸다. 태종이 점차 초심을 잃어 열 가지 나라 일이 점점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지적을 돌직구로 날린 글이었다.
당 태종이 정관지치(貞觀之治)를 이룬 바탕에는 위징처럼 직언하는 신하가 있었다. 당 덕종이 몇 년 만에 나라를 말아먹은 것은, 곁에 노기 같은 무능한 간신들이 에워싸고 있어서였다. 시작이 있어야 하지만 끝이 더 중요하다
詩曰: 靡不有初, 鮮克有終.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처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끝 맺을 수 있기는 드물다'고 하였다.
易曰: 狐涉水, 濡其尾.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여우가 물을 건넜는데 그 꼬리를 적셨다'고 하였다.
此言始之易, 終之難也.
이 말들은 모두 시작은 쉽지만 이를 끝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미불유초 선극유종(靡不有初 鮮克有終)
하루가 저물고 있다. 마무리 지어야 할 일을 슬그머니 미룰 이유를 찾는 자신을 보면서 '미불유초 선극유종(靡不有初 鮮克有終)'이라는 말을 상기해 본다.
이 말은 '처음이 있지 않은 일은 없으나 끝이 잘 마무리되는 일은 드물다'는 뜻이다. 이와 관련한 고사가 전국책(戰國策)의 진책(秦策) 편에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진(秦)나라 효공(孝公)은 상앙(商鞅)을 등용하여 변법(變法)을 시행함으로써 부국강병에 힘을 기울였다. 또한 위(魏)나라를 정벌하여 영토를 확장하고 국력의 충실을 기하여 전국시대 강대국으로 발돋움하였다.
이어서 후대인 혜문왕(惠文王) 시절에 이르러 당대 최고의 유세가 중 한 사람인 장의(張儀)를 등용해서 외교정책인 연횡책(連衡策)으로 여섯 나라와 동맹을 맺어 화친을 주장했다.
그 후 파촉(巴蜀)을 정벌하여 최고의 곡창지대를 확보함에 따라 일약 진나라는 전국칠웅(戰國七雄)의 최강국 중 하나로 우뚝 서게 되어 천하 통일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혜문왕이 죽고 아들인 탕(蕩)이 즉위했다. 그가 진나라 27대 군주인 무왕(武王)이다. 어느 날 무왕은 국력이 강성해지자 점차 자만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러자 한 신하가 무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대왕은 위(魏), 조(趙) 두 나라를 얻은 것에 만족하여 제(齊)나라를 잃은 것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시경에 '처음이 있지 않은 일은 없으나 끝이 잘 마무리되는 일은 드물다(靡不有初 鮮克有終)'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왕들께서는 시작과 끝을 모두 존중하여 대성하셨습니다. 이에 반해 처음에는 잘하다가도 끝마무리를 잘하지 못해 멸망한 경우가 너무도 많습니다. 만일 대왕께서 마무리만 잘하시면 천하의 삼왕(三王)이라 추앙받는 하(夏)나라 우왕(禹王), 상(商)나라 탕왕(湯王), 주(周)나라 문왕(文王)과 같은 반열에 오르거나 춘추오패(春秋五覇)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마무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멸망의 화(禍)를 입을 것입니다.'
전국시대 진나라는 나라의 기틀이 잡히고 점차 강성해지며 전국칠웅의 하나로 불리었다. 당시 진나라 무왕이 자만하여 국정을 등한시하니 이를 걱정한 신하가 '시경'의 구절을 인용하여 간언한 것이다.
그 신하가 제시한 '미불유초 선극유종(靡不有初 鮮克有終)'은 어떤 일이든 끝맺음이 어려우므로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 함을 역설한 교훈이라 할 수 있다.
누구나 어떤 일을 처음 시작할 때 목표를 정하고 계획을 세운다. 일에 뜻을 둔 자라면 처음 자세를 끝까지 밀고 나가 원하는 결과를 얻고자 한다.
그렇지만 시작은 잘했으나 방심하거나 자만심에 빠지게 되면 마무리를 잘 해내기가 어렵게 된다. 이런 점에서 보면 계획을 끝까지 지키기가 쉽지는 않다.
아름다운 마무리를 하기 위해서는 처음 계획을 세울 때 먹은 초심을 유지하고 목표를 향해 실천하는 과정에서 어긋난 마음이 없는지 세심하게 살펴야만 한다.
수도의 과정에서도 이러한 삶의 자세는 중요하다. '대순진리회요람'의 '신(信)'에 대한 설명에서 '만고(萬古)를 통(通)하되 사시(四時)와 주야(晝夜)의 어김이 없는 것과 같이 하고 만겁(萬劫)을 경과(經過)하되 강하(江河)와 산악(山岳)이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이 하고'라 하여 한결같은 마음으로 장애를 극복하여 나가야 함을 밝히고 있다.
이처럼 변치 않는 마음을 가진다면 어떤 일이든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고사는 우리에게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일심(一心)으로 수도해 나가야 함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준다.
미불유초 선극유종(靡不有初 鮮克有終)
전국시대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秦始皇)의 선대(先代)인 무왕(武王)이 국력이 커지고 융성해지면서 점차 자만(自慢)에 빠져 흔들리자 신하가 시경(詩經)에 나오는 이 구절을 가지고 왕에게 간언(諫言)하여 바로 잡았다는 일화(逸話)가 있다.
미불유초(靡不有初)의 '미불(靡不)'은 부정에 부정을 더하니 강한 긍정을 나타내고, '유초(有初)'는 세상사 모든 것에 시작, 즉 처음이 있다는 뜻이니 정리한다면 '처음(시작)이 있지 않은 것은 없다'는 뜻이다.
선극유종(鮮克有終)의 '선(鮮)'은 드물다, '극(克)'은 해내다, 이루어내다의 의미이니, '시작의 마무리를 잘 해내는 것은 드물다'의 의미로 보면 된다.
의역(意譯)한다면 '모든 세상 사람들이 시작할 때는 큰 목표(目標)와 계획(計劃)을 세우고 출발하지만 중간에 포기(抛棄)하거나 흐지부지되어 끝까지 마무리하는 사람은 드물다'는 말이다.
고사성어에 처음 시작한 것을 끝까지 잘 마무리한다는 의미로 '유종지미(有終之美)'가 있고, 처음 출발은 야단스럽고 거창한데 끝마무리는 보잘것없이 흐지부지된다는 '용두사미(龍頭蛇尾)'가 있다.
한 해가 끝자락에 서있다. 이맘때면 사람들은 감회(感懷)에 젖어 지난 일 년을 뒤돌아본다. 아쉬움과 후회(後悔)가 파도처럼 밀려온다. 유종지미 보다는 용두사미가 대부분이다. 새해에는 잘 해보겠다는 각오(覺悟)를 다져본다.
그러나 연말이 되면 다시 반복(反復)이다. 이런 과정이 이어지며 인생은 순식간에 노년으로 접어든다. 가까운 사람들이 하나둘씩 떠나고 추모(追慕)하러 간 식장에서 영정을 바라본다.
인생사가 허망(虛妄)하기 짝이 없고 빈 들판에 삭풍 불어오는 듯하다. 저 분은 어떤 인생을 살고 갔는가? 생각하면 삶의 엄정함에 저절로 허리를 곧추세운다.
하루의 시작은 동틀 무렵이요, 일년의 시작은 정월 초하루이고, 인생의 시작은 강보에 쌓여 고고지성(呱呱之聲)을 지를 때인데, 잠들 무렵 하루를 돌아보고, 연말에 정초를 생각하고, 노년에 인생을 회고해 본다면 유종지미일까 용두사미일까.
유종지미를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요소가 있다. 좋은 습관(習慣)이다. 책 읽기와 실천을 통한 학습과, 틈날 때마다 건강관리이다.
늘 입버릇처럼 하는 주장이지만 학습과 운동은 훌륭한 인생을 만들어준다. 훌륭한 인생, 성공한 사람이란 결국 유종지미를 이루어내는 사람이다. 나는 여러분들이 그런 삶을 살아가기를 소원한다.
한해동안 우리 모두는 열심히 달렸고 괄목할만한 성과도 만들어냈다. 더구나 연초의 시련을 딛고 일어선 결과이기에 더욱 자랑스럽다.
그러나 전체가 이루어낸 성과 뒤에 숨어있는 제반 문제점도 우리는 직시해야 한다. 아직도 성과의 부진함을 '때문에'를 내세우며 외부로 돌린다. 그래서는 발전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의식으로 앞에 놓인 장애물을 치우거나 우회하여 나아가야 한다.
급변하는 상황에 대한 유연한 대응능력이 얼마나 중요한 경쟁력인가를 우리는 배웠다. 개인이나 조직이나 모두 필요한 힘이다.
각자 자신의 성장을 위해서 일 년간 얼마나 지극하게 정성을 다했는가를 돌아보고 반성하는 시간도 가지기를 부탁한다. 자기 자신에게 충실해야 앞으로 달려갈 수 있다.
미불유초(靡不有初)
처음이 있지 않는 게 없다는 말이다.
한 해가 시작됐다. 누구나 새해가 되면 희망을 꿈꾸며 각오를 다진다. 개인의 소망, 가정의 화평, 회사 발전, 국운 상승 등 다양한 목표가 이뤄지는 한 해가 되길 기원을 한다.
하지만 거창한 목표에 앞서 나 자신의 작지만 의미 있는 일부터 실천하는 게 중요하다. 좋은 습관을 갖도록 하는 게 긴요한 것이다. 좋은 습관을 지닌 이는 인격이 높아진다.
주자는 '소학' 서문에서 '습관이 지혜와 함께 자라며, 교화가 마음과 함께 이뤄진다(習與智長 化與心成)'고 강조했다.
지혜, 즉 '옳고 바른 것이냐, 그렇지 않은 것이냐'를 구분한 후 옳고 바른 것을 반복해 습관화하면, 이것은 자신의 본성과 같이 견고해져 훌륭한 인격의 바탕이 된다는 뜻이다.
좋은 습관을 길들이는 것도 때가 있다. 가급적 첫 시간, 첫날, 하루라도 빨리 시작해야 한다. '일생의 계획은 어릴 때에 달려 있고, 일 년 계획은 봄에 있으며, 하루의 계획은 새벽에 있다(一生之計在於幼 一年之計在於春 一日之計在於寅)'는 '명심보감'의 가르침이 뒷받침하고 있다. 처음이 중요한 법이다. 하긴 세상사 처음이 있어야 나중도 있는 게 아니겠는가.
'시경'에 '처음이 있지 않은 게 없지만, 능히 끝이 있는 것은 드물다(靡不有初 鮮克有終)'고 했다.
중국 춘추시대 진(晉)나라 영공(靈公)이 도도했다. 법도를 몰랐다. 영공에게 간언하기 위해 내전으로 들어간 사계는 지나가는 영공의 앞으로 다가가서 넙죽 엎드렸다. 영공은 못 본 체하며 발길을 옮겼다.
세 번째 처마 밑까지 가서 엎드리자 그제야 겨우 알아차린 체했다. 사계가 말을 꺼내기 무섭게 영공은 '알았소. 내가 잘못했소. 앞으로 그러지 않겠소' 하고 입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사계는 영공의 그 말을 받아 이렇게 간곡히 호소했다. '허물없는 이가 어디 있겠습니까. 잘못하고 능히 고친다면 그보다 더 훌륭한 일은 없습니다.'
그러면서 위 '시경' 구절을 인용해 올바른 마음을 초지일관토록 간언했다. 좋은 습관을 실천해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한 해가 되길 바란다.
선극유종(鮮克有終)
끝까지 잘하는 사람은 드물다는 말이다.
황제든 왕이든 사업가든 처음엔 다 잘한다. 그러나 초심을 잊지 않고 끝까지 잘하는 사람은 드물다.
시경 대아(大雅) 탕(蕩)편의 첫 장이 그런 걸 일러주는 내용이다. '하늘이 뭇 백성을 내셨는데, 내리신 명령이 믿을 수 없음은, 처음이 있지 않은 건 없지만, 능히 끝이 있는 것은 적기 때문이라네.'
天生烝民, 其命匪諶.
靡不有初, 鮮克有終.
조선왕조실록 중종 34년(1539) 10월 2일의 기록에 '미불유초 선극유종(靡不有初 鮮克有終)'이 나온다. 시강관 이찬(李澯)이 석강(夕講)에 임문(臨文)해 이렇게 아뢰었다. 임문은 책을 펴놓고 읽는 것이다.
'옛말에 시작은 누구나 하지만 유종의 미를 거두는 사람은 드물다 했습니다. 즉위 초년엔 어느 임금이나 잘 다스리겠다는 마음으로 정무에 힘쓰지 않는 이가 없지만 정사를 본 지 오래고 연세가 높아지면 점점 처음만 못함은 물론 나태한 마음이 뒤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古云; 靡不有初, 鮮克有終. 人君爲治之心, 卽位之初, 無有不勤者, 至於臨政日久, 春秋已晩, 則漸不如初, 而怠倦繼之.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 성묘(成廟)께서는 크게 능력을 발휘한 임금이셨는데도 신하가 '시작은 누구나 하지만 유종의 미를 거두는 이는 드물다'고 아뢰자 '지당한 말이다. 내 마땅히 머리맡 병풍에 써놓고 스스로 경계하겠다'고 하셨다 합니다.' 성묘는 성종이다.
과연 이보다 62년 전인 성종 8년(1477) 9월 13일에 그에 관한 기록이 있다. 지평(持平) 김언신(金彦辛)이 경연 때 '靡不有初 鮮克有終 여덟 자를 판자 위에 써 좌우(座右)에 두고 출입하실 때 관성(觀省)하여 잠시도 잊지 않으시면 (중략) 아름다울 것입니다'고 말했다.
성종은 '그대 말이 대단히 좋다. 다만 침실에 이미 설치했고, 또 예전 사람의 경계하는 말을 병풍 위에 기록해 관성한다'고 답했다.
(참고)
1️ 윤대죄기조(輪臺罪己詔)
한무제 유철(劉徹)은 뛰어난 재능과 원대한 계략을 가진 제왕이었다. 그의 재위 기간에 한나라 영토는 약 두 배로 늘어났고, 중국민족의 명성이 멀리까지 전해졌다. 특히 독보적인 유가(儒家)의 학술로 유가사상은 이후의 역사에서 정통 사상이 됐다.
하지만 무제가 말년에 수년 동안 정복전쟁과 토목공사를 크게 일으키는 등으로 국고가 탕진돼 백성의 원망이 들끓고 도적이 사방에서 횡행했다.
그뿐 아니라 '무고지화(巫蠱之禍; 태자가 무제를 저주했다는 모함의 사화)'로 위 황후와 태자를 비롯한 수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는 말년에 믿고 의지했던 대장군 이광리(李廣利)가 전쟁 중에 흉노에 투항하는 일이 발생하는 등 일련의 불미스러운 일을 당하게 되어 뼈저린 후회를 하게 됐다.
정화(征和) 4년(기원전 89년) 3월 무제는 태산에서 천지에 제사를 올린 후 여러 신하에게 말했다. '짐이 즉위한 후로 분별이 없고 도리에 어긋나 천하를 근심하게 했으니 후회해도 소용이 없도다. 오늘 이후 백성을 해치고 천하의 것을 낭비하는 일을 모두 그치노라!'
같은 해 6월 68세인 한무제는 서역 윤대(輪臺: 현재 신장위구르 지역)에 병사를 보내 둔전을 경작하며 변경을 지키게 하라는 상홍양(桑弘羊) 등의 건의를 묵살하고, 스스로 반성하는 조서를 내렸다.
이것이 바로 중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죄기조(罪己詔; 임금이 자신을 꾸짖는 조서)'인 윤대조(輪臺詔)다.
무제는 조서에 이렇게 썼다. '앞서 백성에게 30전을 더 부담시켜 변방에서 쓰자는 주청이 있었으니, 이는 노약자와 고독한 자를 어렵게 하는 것이다.'
일전에 상홍양 등이 상소를 올려 백성 한 사람당 세금 30전을 올려 변방의 비용에 보태자는 주청을 했다. 이렇게 하면 노약자와 고독한 자의 부담을 분명히 가중하게 된다.
'(…) 이전에 이사(이광리)가 패해 군사가 죽고 흩어져 비통함이 늘 짐의 마음에 있노라. 오늘 멀리 윤대에 밭을 갈고, 진지를 짓자고 함은 천하를 어지럽히는 일이니 짐은 오늘 차마 들어줄 수가 없도다.'
이사 장군이 패하여 장졸들이 죽거나, 포로로 잡히거나, 도망했으니 이 비통한 일은 늘 짐의 마음을 맴돈다. 지금 어떤 사람이 병사를 멀리 윤대로 보내 둔전을 경영하고 보루와 초소를 짓게 하자는 주청을 올렸다.
이것은 천하의 사람을 괴롭히고 힘들게 하는 것이며, 백성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니 지금 짐은 차마 이런 말을 들어줄 수 없다.
'(…) 지금 해야 할 것은 잔인하고 난폭한 것을 금하고, 독단적인 부과를 멈추며, 본업인 농사에 힘쓰는 것이다.'
지금 가장 중요한 임무는 각급 관리가 백성을 가혹하고 잔인하게 대하는 것을 엄금하고, 함부로 세금을 올리는 법령을 폐지하고, 농업 생산증대에 힘쓰는 것이다.
동시에 한무제는 승상 전천추(田千秋)를 부민후(富民侯)에 봉해 백성을 쉬게 하며, 넉넉히 기르고자 했다.
그는 또 농업에 밝은 조과(趙過)를 수속도위(搜粟都尉)로 명해 대전법을 보급해 농업생산증대를 이루게 했다.
무제는 한나라 초기의 '황로사상(黃老; 황제와 노자의 무위사상)'을 중시해 무위로 다스리며 백성과 함께 휴식했는데, 이는 이후 '소선중흥(昭宣中興; 소제와 선제 시기의 번영)'에 좋은 기초가 됐다.
황제의 권한이 절대적이던 시대에 황제가 스스로 잘못을 반성할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죄기조'라는 글을 써서 천하에 공포하고, 온 천하의 사람을 향해 스스로 잘못을 인정한 것은 지극한 용기가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다.
한무제의 조서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었고, 꾸밈이 없었다. 그는 이후의 시정으로 일체를 여유 있게 증명했다.
역사상 '진황한무(秦皇漢武; 진시황과 한무제)'를 동시에 거론하는바, 확실히 진시황과 한무제는 많은 면에서 서로 비슷한 데가 있으며, 심지어 한무제는 진시황의 정치 구도와 계획을 완성했고, 후대 역사의 대략적인 방향을 결정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한무제는 '진(秦)을 망하게 한 과오를 살펴 멸망을 피했다.' (사마광의 말)
이는 그가 죽어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은 진시황과는 정치를 대하는 태도가 달랐기 때문이다. 그는 적시에 자신의 잘못을 뉘우칠 수 있었고, 지난날의 잘못을 철저히 고침으로써 진나라처럼 신속하게 패망하는 운명을 피했다. 당연히 이런 평가가 대세인 것은 아니다.
진시황도 공신을 처형하지 않았고, 여섯 나라의 군주와 귀족과 백성을 몰살하지 않았고,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이 민란을 일으켰을 때 '기한을 어기면 참수한다'고 했지만 당시 진나라의 법령이 전혀 아니었다.
진시황이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고, 2세의 자질이 너무 부족했으니, 이것도 진나라가 빨리 멸망한 원인 중 하나였다.
'윤대죄기조'는 중국 역사상 첫 번째로 공식적이고 완전하게 보존된 '죄기조'다.
한무제 이후 한명제, 당태종, 송이종, 명희종, 청옹정 등 후대의 제왕이 잇달아 '윤대죄기조'를 모방했는데, 황제는 국가와 백성에게 재앙을 초래하는 큰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늘 '죄기조'로 신하와 백성 앞에 공개적으로 자신을 반성했다.
그러나 중국인 8천만 명을 학살하고, 무수한 사람에게 비극을 초래한 중국공산당은 현재 한 사람도 국민 앞에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고, 여전히 초지일관 '위광정(偉光正; 위대하고 광명정대함)'을 떠벌리고 있지만, 실상은 외광증(畏光症; 빛을 두려워하는 증상)을 선전하고 있는 것이다. 어찌 괴이하지 않으랴!
2️ 진시황과 한무제의 같음과 다름에 대하여
중국 최초의 황제 진시황 영정(B.C.259년 ~ 210년)과 여덟 번째 황제 한무제 유철(B.C.156년 ~ 87년)은 많은 공통점과 다른점을 갖고 있다.
우리가 한무제의 행동 하나 하나가 진시황과 너무 닮았기 때문에 진황한무(秦皇漢武)라고 부르기도 한다.
진시황은 신선이 되어 장생불사하려고 서북을 시켜 불로초를 찾게 하였고, 한무제 또한 신선과 방술에 빠져 이소군과 소옹같은 도사를 가장한 사기꾼들에게 속으면서도 '어느 날 아침 내가 하늘을 나는 신선이 된다면 처자식을 잃는다 해도 무슨 상관이랴! 이는 마치 헤진 신발 한 짝을 잃어버린 것과 같다'고 하였다.
진시황도 '내가 황제처럼 하늘을 나는 신선이 된다면 헌신 짝 버리듯 처자식을 버릴 수 있다'고 하였으니 과연 신선이 되고자하는 그들의 열망이 얼마나 큰지를 엿볼 수 있다.
진시황은 북방 기마민족인 흉노의 침입을 저지하기 위하여 만리장성을 증축하였으며, 몽염장군에게 흉노를 700리 밖으로 몰아내게 하였다.
한무제는 주전파인 이회와 주화파인 한안국의 설명을 들은 후 흉노와 양립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여러 차례 위청과 곽거병을 파견해 대규모 전쟁을 벌임으로써 흉노를 진나라 때보다 더 멀리 쫓아냈다.
진시황은 6제후국을 통일한 후 군현을 설치하여 가혹한 형벌을 시행하여 중앙집권을 강화하였다. 한무제도 혹리를 기용하여 호족세력을 억압하고 민란을 진압했으며, 수시로 이족을 침략해서 많은 사람을 학살하였다.
진시황이 아방궁과 여산에 황제묘를 축조하느라 막대한 예산을 탕진하였듯이 한무제도 방탕한 생활과 향락을 즐기느라 백성들을 혹사시키고 특히 상림원의 토목공사는 멈춘 적이 없었다.
진시황이 분서갱유를 통하여 강압적으로 사상과 문화를 통제하였듯이 한무제도 백가를 정리하고 유가만을 존숭하여 문화전제주의의 시발점이 되었다.
진나라는 수년간의 전쟁을 통하여 통일을 이루었고, 만리장성, 아방궁, 묘지조성 등 대규모 토목사업으로 국고 탕진으로 쇠퇴의 길로 접어 들었듯이, 한나라 역시 한무제 말기에는 국고가 텅 비게 되어 지방 곳곳에서 백성들의 반란이 소소하게 일어난 것을 보면 두 황제가 직면한 형세는 유사하였던 것 같다.
그런데 진나라는 2대황제 호해에서 멸망하였지만 한나라는 무제 이후 오히려 증흥의 역사를 맞이한 것은 결국 한무제의 뒤늦은 깨달음으로 인한 전쟁중단, 경제부흥조치, 후계자선정의 혜안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겠다.
한무제는 황태자 유거(위황후의 소생)를 폐위시키고 자살하게 한 후 황태자가 억울한 누명을 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후 한무제는 온 백성에게 머리를 숙이고 사과하는 윤대죄기조(輪臺罪己詔)를 발표하고 전쟁보다는 경제정책에 전념하게 되었다.
'자치통감'의 제자인 사마광은 한무제의 죄기조에 대하여 '한무제와 진시황은 닮은 점이 너무 많았다. 그들 모두 커다란 공적을 세웠지만, 집권 후반기에 나라의 운명을 끝으로 몰아 넣었다. 하지만 한나라는 진나라처럼 멸망의 길을 가지 않은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진시황은 죽음에 이르러서도 자신의 잘못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 반면, 한무제는 늦었지만 이를 뉘우치고 고쳤기 때문이다. 일반백성들 조차 이를 행하기 쉽지 않은데 천하를 주재하는 황제가 이를 행하였으니 얼마나 대단한가'고 평가하였다.
'잘못을 깨닫고 고치는 것보다 훌륭한 일은 없다'는 평범한 진리는 지도자나 평범한 시민이나 모두에게 해당된다고 하겠다.
3️ 성군 한무제의 자아비판이 한중 지도부에 주는 교훈
실수를 부인하면 할수록 국민은 불행
사람은 에고(자의식)가 강하다. 주위의 누가 옳은 소리를 해도 잘 듣지 않는 것이 기본이다. 자신을 비판하지 않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이러니 금수저 인생을 사는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정말 희귀한 경우라고 단언해도 좋다.
일반적으로 주위의 아부로 무오류의 삶을 살아야 하는 운명인 황제는 더욱 그렇지 않나 보인다. 스스로에 대한 비판을 하는 것은 아예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그러나 지고무상의 권력을 향유했던 황제가 자아비판을 한 경우가 전혀 없지는 않다. 중국인에게는 성군으로 꼽히는 한(漢)나라 때의 무제(武帝)가 그랬다.
자신보다 훨씬 못한 황제들이 고개를 빳빳하게 쳐든 채 신하들과 백성들만 닦달한 케이스가 과거 역사에 수도 없이 많았으나 그는 인생 말년에 자신에 대한 혹독한 비판을 마다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의 참회록으로 불리는 윤대죄기조(輪臺罪己詔)는 지금까지 전해지면서 진정한 위정자의 자세가 어때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는 당연히 완벽한 인간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흉노를 토벌하기 위한 정복 전쟁을 일으켜 백성들을 피곤하게 만들었다.
또 당대 최고의 역사가인 사마천(司馬遷)에게 궁형(宮刑)의 치욕을 안기는 선물을 선사했다. 남성의 심볼을 거세했으니 당시의 시각으로도 대단히 잔혹한 형벌을 가한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당시의 정치 사상인 노자(老子)의 무위자연 철학을 유교로 바꾸는 과정에서 세상이 적지 않은 시행착오도 겪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당시 황제의 권력으로 볼 때는 충분히 저지르고 남을 잘못이었다.
아니 조금 좋게 평가하면 다소 과한, 시대를 앞서 간 정치를 했다고 변명을 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을 비판하는 데 정말 소홀하지 않았다.
이후의 황제들은 말할 것도 없이 그와 완전히 달랐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경우는 간혹 없지 않았으나 참회록을 쓴 경우는 정말 거의 없었다. 한무제가 지금도 대단히 돋보이는 이유가 아닌가 보인다.
마오쩌둥(毛澤東) 전 주석은 신중국이 건국되던 1949년 이후부터의 황제였다. 중국이 왕조 국가는 아니었으나 황제에 버금가는 권력을 구가했다고 말해도 좋다.
솔직히 그는 자질이 대단히 우수한 지도자였다고 단언해도 괜찮다. 철학과 문학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통치술 역시 남달랐다.
1976년 사망하기 전까지 무려 40여 년 가까운 기간 동안 공산당의 권력을 한 손에 움켜쥔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그런 그의 지적 능력으로 볼 때 그는 윤대죄기조를 알고 있었던 것 같다.
10년 동안 대륙을 완전히 암흑천지로 몰아넣은 문화대혁명을 발동하면서 내건 것이 바로 '조반유리(造反有理; 반란을 일으키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라는 슬로건 외에 자아비판이었으니 말이다.
실제로 그는 문혁을 통해 실각한 당정 지도자들에게는 하나 같이 자아비판을 하도록 만들었다. 국가 주석을 지낸 류사오치(劉少奇)가 대표적이 아닐까 싶다. 물론 그는 그럼에도 죽음을 면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문제는 마오 그 자신은 문혁 동안이나 이후에 전혀 본인의 과오에 대해 반성이 없었다는 사실이 아닐까 싶다. 최소한 2000만∼3000만 명이 문혁의 와중에 죽어갔는데도 그랬다.
문혁이 끝난 이후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는 변명의 말을 주위에서 하기는 하나 솔직히 말이 안 된다.
덩샤오핑(鄧少平)에서 부터 시진핑(習近平) 총서기 겸 국가주석에 이르는 이후의 중국 지도부 역시 공이 많은 만큼이나 과도 없지 않다.
황제로 불리는 지금의 시 총서기 겸 주석은 더 말할 것이 없다. 각종 굴기(우뚝 일어섬)라는 말을 통해 중국을 막강한 국가로 이끌었으나 사회적으로 여러 부작용도 많이 만들고 있다.
한국이라고 다를 것이 없다. 적폐라는 말이 국민들에게 먹혀 들어가는 상황이라면 과거 정권이 어떠했는지는 굳이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설사 양국 민초들의 입에서 과거와 현재 지도자들이 이제라도 한무제의 윤대죄기조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더라도 지나친 말은 아닌 것 같다.
▶️ 有(있을 유)는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달월(月; 초승달)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𠂇(우; 又의 변형)로 이루어졌다. ❷회의문자로 有자는 '있다, '존재하다', '가지고 있다', '소유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有자는 又(또 우)자와 月(육달 월)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러나 여기에 쓰인 月자는 肉(고기 육)자가 변형된 것이다. 有자의 금문을 보면 마치 손으로 고기를 쥐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내가 고기(肉)를 소유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有자는 값비싼 고기를 손에 쥔 모습으로 그려져 '소유하다', '존재하다'라는 뜻을 표현한 글자이다. 그래서 有(유)는 (1)있는 것. 존재하는 것 (2)자기의 것으로 하는 것. 소유 (3)또의 뜻 (4)미(迷)로서의 존재. 십이 인연(十二因緣)의 하나 (5)존재(存在) (6)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있다 ②존재하다 ③가지다, 소지하다 ④독차지하다 ⑤많다, 넉넉하다 ⑥친하게 지내다 ⑦알다 ⑧소유(所有) ⑨자재(資財), 소유물(所有物) ⑩경역(境域: 경계 안의 지역) ⑪어조사 ⑫혹, 또 ⑬어떤 ⑭12인연(因緣)의 하나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있을 재(在), 있을 존(存)이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망할 망(亡), 폐할 폐(廢), 꺼질 멸(滅), 패할 패(敗), 죽을 사(死), 죽일 살(殺), 없을 무(無), 빌 공(空), 빌 허(虛)이다. 용례로는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음을 유명(有名), 효력이나 효과가 있음을 유효(有效), 이익이 있음이나 이로움을 유리(有利), 소용이 됨이나 이용할 데가 있음을 유용(有用), 해가 있음을 유해(有害), 이롭거나 이익이 있음을 유익(有益), 세력이 있음을 유력(有力), 죄가 있음을 유죄(有罪), 재능이 있음을 유능(有能), 느끼는 바가 있음을 유감(有感), 관계가 있음을 유관(有關), 있음과 없음을 유무(有無), 여럿 중에 특히 두드러짐을 유표(有表), 간직하고 있음을 보유(保有), 가지고 있음을 소유(所有), 본디부터 있음을 고유(固有), 공동으로 소유함을 공유(共有), 준비가 있으면 근심이 없다는 뜻으로 미리 준비가 되어 있으면 우환을 당하지 아니함 또는 뒷걱정이 없다는 뜻의 말을 유비무환(有備無患), 입은 있으나 말이 없다는 뜻으로 변명할 말이 없음을 일컫는 말을 유구무언(有口無言), 있는지 없는지 흐리멍덩한 모양이나 흐지부지한 모양을 일컫는 말을 유야무야(有耶無耶), 형체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이라는 뜻으로 천지간에 있는 모든 물체를 일컫는 말을 유상무상(有象無象), 이름만 있고 실상은 없음을 일컫는 말을 유명무실(有名無實), 머리는 있어도 꼬리가 없다는 뜻으로 일이 흐지부지 끝나 버림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유두무미(有頭無尾), 다리가 있는 서재라는 뜻으로 박식한 사람을 이르는 말을 유각서주(有脚書廚), 만물은 조물주가 만드는 것이지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님을 일컫는 말을 유생불생(有生不生), 다리가 있는 양춘이라는 뜻으로 널리 은혜를 베푸는 사람을 이르는 말을 유각양춘(有脚陽春), 뜻이 있어 마침내 이루다라는 뜻으로 이루고자 하는 뜻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성공한다는 것을 비유하는 말을 유지경성(有志竟成), 벗이 있어 먼 데서 찾아온다는 뜻으로 뜻을 같이하는 친구가 먼 데서 찾아오는 기쁨을 이르는 말을 유붕원래(有朋遠來), 시작할 때부터 끝을 맺을 때까지 변함이 없음을 일컫는 말을 유시유종(有始有終), 무슨 일이든 운수가 있어야 됨을 이르는 말을 유수존언(有數存焉), 있어도 없는 것과 같다는 뜻으로 있으나 마나 함을 이르는 말을 유불여무(有不如無), 말하면 실지로 행한다는 뜻으로 말한 것은 반드시 실행함 또는 각별히 말을 내 세우고 일을 행함을 이르는 말을 유언실행(有言實行), 끝을 잘 맺는 아름다움이라는 뜻으로 시작한 일을 끝까지 잘하여 결과가 좋음을 이르는 말을 유종지미(有終之美), 입은 있으되 말을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사정이 거북하거나 따분하여 특별히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하지 아니함을 이르는 말을 유구불언(有口不言), 행동이나 사물에 처음과 끝이 분명함 또는 앞뒤의 조리가 맞음을 일컫는 말을 유두유미(有頭有尾),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서로 융통함을 이르는 말을 유무상통(有無相通), 장차 큰 일을 할 수 있는 재능 또는 그 사람을 일컫는 말을 유위지재(有爲之才), 끝까지 일을 잘 처리하여 일의 결과가 훌륭함을 이르는 말을 유종완미(有終完美),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은 그대로 있지 않고 인연에 의하여 변해 가는 것이라는 말로 세상사의 덧없음을 이르는 말을 유위전변(有爲轉變), 가기에 잎을 더한다는 뜻으로 이야기에 꼬리와 지느러미를 달아서 일부러 과장함을 이르는 말을 유지첨엽(有枝添葉), 가르침에는 차별이 없다는 뜻으로 배우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배움의 문이 개방되어 있음을 이르는 말을 유교무류(有敎無類) 등에 쓰인다.
▶️ 初(처음 초)는 ❶회의문자로 衣(의; 옷)와 刀(도; 가위)의 합자(合字)이다. 재단을 하는 것은 의류를 만드는 시초의 일이라는 뜻이다. ❷회의문자로 初자는 '처음'이나 '시작'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初자는 衤(옷 의)자와 刀(칼 도)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여기서 衤자는 衣(옷 의)자의 부수자이기 때문에 初자는 옷과 칼을 함께 그린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初자는 옷을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천이나 가죽에 칼질을 시작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처음'이나 '시작'이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初(초)는 ①처음, 시초(始初) ②시작(始作) ③시종(始終: 처음과 끝) ④초승(初生), 초순(初旬) ⑤근본(根本), 근원(根源) ⑥본래(本來) ⑦옛일 ⑧이전(以前), 종전(從前), 옛날 ⑨첫, 첫째 ⑩처음으로 ⑪비로소 ⑫느릿하다 ⑬조용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마칠 종(終)이다. 용례로는 처음 시기를 초기(初期), 보행의 첫걸음을 초보(初步), 바둑이나 장기 등에서 승부의 첫판 또는 한 대국의 첫 단계를 초반(初盤), 처음으로 있음을 초유(初有), 맨 처음의 등급을 초등(初等), 삼복의 첫째를 초복(初伏), 처음으로 선출됨을 초선(初選), 어떤 계통의 최초의 사람 또는 그 사람의 시대를 초대(初代), 사람이 죽어서 장사 지낼 때까지의 동안을 초상(初喪), 시문의 초를 잡은 원고를 초본(初本), 처음으로 대해 봄을 초면(初面), 처음에 가진 마음을 초심(初心), 한 소리마디의 첫 자음을 초성(初聲), 명단 위에 합격 따위의 표시로 첫 번째 점을 찍음을 초점(初點), 가을이 되어 처음 내린 이슬을 초로(初露), 어떠한 시대의 초기를 초엽(初葉), 맨 처음을 최초(最初), 일이 생긴 처음을 당초(當初), 새해의 첫머리를 연초(年初), 그 달의 처음 무렵을 월초(月初), 실마리나 일의 첫머리를 단초(端初), 시작한 처음 무렵을 시초(始初), 천지가 개벽한 처음을 태초(太初), 정월 초순이나 그 해의 처음을 정초(正初), 어느 기간의 첫머리를 기초(期初), 사물이 비롯된 맨 처음을 창초(創初), 사물 현상이 비롯되는 처음을 원초(元初), 처음에 세운 뜻을 이루려고 끝까지 밀고 나감을 일컫는 말을 초지일관(初志一貫), 첫번에 실패한 것이 세 번째는 성공한다는 뜻으로 꾸준히 하면 성공할 수 있음을 이르는 말을 초부득삼(初不得三), 처음 보는 타향을 일컫는 말을 초면강산(初面江山), 처음으로 대하여 보는 벗을 일컫는 말을 초면친구(初面親舊), 여우는 죽을 때 구릉을 향해 머리를 두고 초심으로 돌아간다는 말을 수구초심(首丘初心), 신부의 교육은 시집 왔을 때에 바로 하라는 말을 교부초래(敎婦初來) 등에 쓰인다.
▶️ 終(마칠 종)은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실 사(糸; 실타래)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冬(동, 종)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冬(동, 종)과 바느질을 다 하고 나서 실(실사(糸; 실타래)部)을 매듭짓는다는 뜻이 합(合)하여 마치다를 뜻한다. 冬(동; 겨울)은 네 계절(季節)의 끝이므로 실 사(糸; 실타래)部를 덧붙여 감긴 실의 끝이 되고 널리 끝의 뜻으로 되었다. ❷회의문자로 終자는 '끝나다'나 '마치다', '죽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終자는 糸(가는 실 사)자와 冬(겨울 동)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冬자는 새끼줄 양 끝에 매듭을 묶어 줄이 풀리지 않게 일을 마무리했다는 의미에서 '끝내다'나 '마치다'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그러나 후에 冬자가 '겨울'이라는 뜻으로 가차(假借)되면서 지금은 여기에 糸자를 더한 終자가 '끝내다'라는 뜻을 대신하고 있다. 그래서 終(종)은 끝, 마지막이라는 뜻으로, ①마치다 ②끝내다 ③사람이 죽다 ④다하다 ⑤이루어지다, 완성되다 ⑥채우다, 상당하다 ⑦끝, 마지막 ⑧사방 백 리의 땅 ⑨열두 해 ⑩윤(閏)달 ⑪항상(恒常), 늘 ⑫마침내, 결국(結局) ⑬비록,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마칠 료(了), 마칠 졸(卒), 마칠 필(畢), 마칠 준(竣), 마칠 파(罷), 그칠 지(止), 끝 말(末), 끝 단(端),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처음 초(初), 비로소 시(始)이다. 용례로는 일을 마침을 종료(終了), 끝이나 끝판을 종말(終末), 끝을 냄을 종결(終結), 그 날의 업무를 마침을 종업(終業), 맡아보던 일을 끝냄을 종무(終務), 죽을 때까지를 종신(終身), 필경에 또는 마침내를 종내(終乃), 마지막과 처음을 종시(終始), 전쟁이 끝남을 종전(終戰), 한 때 매우 성하던 것이 주저앉아서 그침을 종식(終熄), 간행을 끝냄 또는 끝낸 그것을 종간(終刊), 마지막에 다다른 판국을 종국(終局), 아침부터 저녁까지의 사이를 종일(終日), 최종으로 도착함을 종착(終着), 끝을 냄이나 끝이 남을 종지(終止), 죽거나 없어져서 존재가 끝남을 종언(終焉), 결정이 내려짐을 종결(終決), 맨 끝이 되는 곳을 종점(終點), 사람의 목숨이 끊어지려 할 때를 임종(臨終), 단계나 차례에 있어서 맨 나중을 최종(最終), 오복의 하나로 제명대로 살다가 편안히 죽는 것을 고종(考終), 한 해의 마지막 때를 연종(年終), 끝을 완전히 맺음을 유종(有終), 나중으로 얼마의 시간이 지난 뒤를 내종(乃終), 사람의 목숨이 끊어져 죽는 때 또는 일의 마지막을 망종(亡終), 끝이 없음을 무종(無終), 좋지 않은 최후를 악종(惡終), 유종의 미를 거둠을 선종(善終), 처음과 끝 또는 처음부터 끝까지를 시종(始終),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 같음을 일컫는 말을 종시일관(終始一貫), 끝내 소식이 없음을 일컫는 말을 종무소식(終無消息), 이 세상 끝날 때까지 계속되는 사모의 정을 이르는 말을 종천지모(終天之慕), 그 사람을 한평생 인간다운 대접을 해 주지 않는 일을 이르는 말을 종신불치(終身不齒), 죽을 때까지 고칠 수 없는 질병을 일컫는 말을 종신지질(終身之疾), 빚돈을 갚지 않음을 일컫는 말을 종불출급(終不出給), 끝내 방문하지 않음을 일컫는 말을 종불투족(終不投足), 어떤 일을 한번 끝내어 마쳤다가 다시 시작함을 일컫는 말을 종이부시(終而復始), 끝내 회개하지 않음을 일컫는 말을 종불회개(終不悔改), 식사를 하는 짧은 시간이라는 뜻으로 얼마 되지 않는 동안을 이르는 말을 종식지간(終食之間), 하루낮 동안 들이는 수고를 일컫는 말을 종일지역(終日之役), 영원히 계속되는 슬픔을 일컫는 말을 종천지통(終天之痛), 처음부터 끝까지 이르는 동안 또는 그 사실을 이르는 말을 자초지종(自初至終),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관철함을 일컫는 말을 시종일관(始終一貫), 처음이나 나중이 한결같아서 변함 없음을 이르는 말을 시종여일(始終如一), 처음에는 부지런히 하나 나중에는 게으름을 이르는 말을 시근종태(始勤終怠), 끝까지 굳게 참고 견딤을 이르는 말을 견인지종(堅忍至終), 부모가 돌아가시는 날까지 봉양하기를 원하다는 뜻으로 부모에 대한 지극한 효성을 이르는 말을 원걸종양(願乞終養), 우정을 끝까지 잘 지켜 나가지 못함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흉종극말(凶終隙末)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