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주 와부의 유래
남양주 와부 (향토유래) 남양주 시의원 이명승
1. 남양주시(南楊州市)
남양주 지역은 수석리 선사 유적지와 토성에서 나타나듯이 한강을 중심으로 선사문화를 꽃피웠던 곳이다. 삼한시대에는 마한의 영역으로 고리 국에 속해 있었고 (삼국지 동이전)기원후 4세기 후반에는 백제가 고구려에 대항하여 아차 산성(구리, 워커힐 뒷산)을 수축하여 방비(삼국사기 24권 백제본기)한 것으로 보아 백제영토였고, 그 후 고구려는 396년 (광개토왕6년)에 남진정책으로 고구려의 영토에 속하게 되었다. (광개토왕릉비 기사, 점령지역 중 고리성: 현 진접,진건) 고구려 관할이던 한강주변이 551년 (성왕29)백제가 신라와 연합하여 한강하류지역을 되찾음으로 일시적 백제의 영역으로 복귀했다.
하지만 2년 후 553년 신라가 백제를 공격하여 신라의 영역에 속하게 된다.
신라는 3국을 통일하고 확대된 영토를 9주5소경의 지방체제로 개편하여 고구려의 옛 영토에 3주를 두었으며 남양주는 “한주”에 속하게 되었다.
이후 고려 성종2년(983)에 지방제도를 정비하며 (양주의 이름이 등장) 지방 관제를 12목(양주, 광주, 충주, 공주, 진주, 상주, 전주,나주, 승주, 해주, 황주)으로 설치하여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게 되며 고려 문종21년(1067)에는 지리도참설에 의해 양주가 남경으로 승격된다.
남경은 서경(평양) 동경(경주)과 더불어 3경 체제를 이루어 지방제도상 최고의 지위를 점한다.
숙종 원년에 김위제는 상소문에 도선이 남경을 답사하고 “비기”에 기록하기를 “국도 송악은 뿌리가 가늘고 약하며 지엽도 그러니 백년을 버티면 나라가 망한다. 남경은 사해의 어룡이 한강으로 모여들 것이요 나라와 백성이 편안하여 태평세상을 이루리라”하셨습니다.
한강 양지쪽은(강북) 왕업이 장구하며 온 세상이 입조하고 왕실이 번창할 것이니 이는 실로 명당 터입니다. 또 답사기에 “후대에 현명한 사람이 인간의 운기를 알아낸다면 한강을 건너지 말아야 그 운수가 오래 간다”고 하였고, 삼각산 명당 기에 이르기를 눈을 뜨고 머리를 돌려 산세를 두루 살펴보니 북을 등지고 남을 향한 곳이 명당이로다. 음과 양이 맞아 겹겹이 꽃이 피니 자손이 번창하고 국가를 수호하리라..........
이에 따라 숙종6년(1101) 남경에 궁궐을 완성하게 된다.
이후 200년 간 지속된 남경은 고려 말 충렬왕34년(1308년)
한양부로 격하되어 왕의 휴양지 내지 사냥터로 전락되었다가
고려시대 말부터 조선 세종 초까지 풍양이라 불렸으며 직제 개편이
거듭되며 한양의 일부 포천의 일부 또는 광주의 일부로 지역이 나눠진다.
1906년 9월 양주군의 32면이 편제되었다.
1980년 4월 1일에 양주군에서 남양주군이 분리되었고
1986년 1월 1일에 남양주군에서 구리시를 분리 시켰고
1989년 1월 1일에는 남양주군에서 미금시를 분리 시켰고
1995년 1월 1일에는 남양주군과 미금시를 통합하여
도농복합도시인 남양주시가 탄생되었다.
2. 와부읍(瓦阜邑)
한말까지 이 지역 대부분이 양주군 와공면과 광주군 초부면, 동부면 에 속해 있었다.
1906년 초부면 이 양주군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됨에 따라 와공면에 “와”(瓦) 자와 초부면의 “부”(阜) 자를 따서 와부면 이라 하였으며 율석, 덕소, 도곡,월문, 능내, 조안, 진중, 송촌, 삼봉, 시우, 팔당리의 11개리로 구성되었다.
여기서 와공(瓦孔) 이란 기와 “와”(瓦) 구멍 “공”(孔)으로 한옥에 쓰이는 기와를 주로 생산하던 지역으로 조선시대부터 우리나라의 최고 기술을 장인들이 도심부락에 모여 살았으며 지금까지 그 대를 잇고 살아 각종 궁궐이나 사찰의 복원에 중심을 이루고 있다.
초부(草阜)란 풀 “초”(草)에 언덕“부”(阜)로 송촌리, 삼봉리, 북한강 변에 넓은 곡창지대(?)에 풍부한 먹을거리로 60년대 초 까지도 농업이 위주였던 시대에는 떡소보다 넉넉하고 풍요로운 생활을 영위했던 지역이다.
3. 덕소리(德沼里)
조선후기 가장 많이 필사된 베스트셀러는 “택리지”와 “정감록”이며 택리지에 현장 정신을 계승한 신 정일에 “다시 쓰는 택리지"에 의하면 부산에서 서울로 가는 영남대로는 세 갈래 코스가 있었는데 열 사 흘길(14일)은 청도-상주를 거쳐 문경새재를 넘는 길이요, 열닷새길(15일)은 울산-의성-풍기-죽령을 넘어 단양에서 남한강 상류의 배를 타고 서울로 가는 길이요, 열엿새길(16일)은 김해-성주를 거처 추풍령을 넘는 길로 과거보는 선비는 죽령은 “쭉 미끌어진다”추풍령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고 해서 피하고 반대로 문경새재는 “경사스러운 일을 듣는다”고 선호 했다한다.
아무튼 한강 514km중 남, 북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를 지나 하류에 속한 덕소는 한강물이 지금의 두산APT가 자리한 암반지대를 힘차게 돌아 미사리 쪽으로 물이 굽이치면서 한솔, 진도, 현대 홈 타운, 삼익APT자리 앞쪽으로 큰 소를 이루게 된다. 그래서 이 지역은 큰 덕(德), 늪 소(沼), 덕소로 불리게 되며 남북한강 을 이용하여 서울로 향하는 백성들과 물류의 중심에 자리한다.
그러던 중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진도, 현대 홈 타운, 삼익APT지역 즉 중앙선 남쪽이 엄청난 재해로 큰 늪이 유실되어 지대가 비교적 높은 지금의 읍사무소 지역으로 옮기게 되어 중앙선 남쪽을 원덕(원래 덕소-예, 와부농협원덕지소)이라 부르고 읍사무소 지역을 신촌(새롭게 만든 촌락)으로 구분 지어 부르게 되며 와부읍민회관에 우시장 터가 생기고 와부의 중심이 우시장을 중심으로 5일장(4~9일)이 70년 초까지 번창한다.
또 덕소지역 일부였던 평구는(삼패삼거리) 고려, 조선시대 빠질 수없는 중요한 역참(驛站)이었다. 고려사에 의하면 이 평구역을 통해 충주-죽령-봉화 와 양평-원주-제천-영월에 이르는 역로를 담당했으며 조선시대에 평구도(平丘道) 는 11개의 역을 거느린 종6품의 찰방이 관리했다. 평구(平丘)는 평평한 언덕이 박 넝쿨처럼 흩어져있다고 붙여진 이름이며 이곳에 청풍 김씨인 김식, 김육, 김좌명의 3기 신도비가 있어 삼패동이며 일패, 이패역시 신도비가 한기, 두기 있기에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 또 평구에는 역말, 역촌이란 곳이 있다. 이곳에서 말을 기르고 훈련시켰으며 말이 죽으면 덕소초교 앞에 묻어 그 마을을 말무더미라 불린다.
잠깐! 여기서 일패, 이패, 삼패에 얽힌 해학적인 이야기가 있다.
물론 현 지역과는 관계가 없는 내용이다. 조선시대에 영, 정조에 판소리로 자리 잡은 배비장전은 기생 어랑과 제주목사 배비장과의 해학적인 내용이 판소리에 등장하는데 그 내용 일부에 “일패기생 안되면 빨리 삼패기생이라도 돼서 품 팔아 오라는 양반이셔” 란 가사가 나온다. 이렇듯 유교문화와 더불어 사대부들의 문학예술이 기생들 사이에서 유행하면서 황진이, 이매창, 송이, 소춘풍 같은 명인들이 문명을 날렸다.
조선 말기에 오면서 기생들은 일패, 이패, 삼패 등 셋으로 구분되는데 일패는 전통 무가 보존의 전승자로 뛰어난 예술 감각을 지닌 기생들이며 대부분 관기로 그들 내부에서 규율도 엄했고 자부심도 굉장했다.
이패는 밀매음(密賣淫), 삼패는 공창(公娼)의 기능을 했다. 이 내용은 기생들의 분류를 일, 이, 삼패로 했다는 것이지 이 지역에 그런 기생문화가 있었다는 것으로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4. 도곡리(陶谷里)
갑산 에서 한강을 바라보고 미사리쪽으로 쭉뻗은 산이 금대산이며 이 금대산의 능선을 기준으로 덕소와 도곡리, 도곡리와 월문리 경계를 이루고 있다.
금대란 금 금(金)에, 터 대(垈)로 도선의 “도선비기”에도 최고의 명당은 양주를 지칭하고 있으며 그 이후 조선시대에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임금의 유택은 동구릉(구리), 홍유릉(금곡), 광릉(광릉내)등에 정하게 되나 저명한 한 풍수가(최 창조)는 홍유릉이 있는 금곡이
사람의 등쪽에 해당하며-금대산의 중심부분이 사람의 전면에 해당되어 명당이라 하였다.
금대란, 금터, 최고의 명당 터이며 금대를 임금의 혁대로(金垈->金帶) 허리띠를 풀어야 왕자가 태어날 터(?)라 하였다. 금대산 주변엔 중종반정의 일등공신이던 영의정 박원종대감의 생가와 유택이 금대산 안골에 위치해 있으며 금대산 남쪽기슭에는 수많은 명문대가의 유택들이 자리 잡고 있다.
또[신증동국여지승람] [동국여지지]에는 금대(金臺)로 표기되어 금이 많이 나는 지역으로 일제시대에는 이 지역과 궁벌초입에 긴등 (문용에서 연세대 농장으로 가는 팻말지역)에서 일본인들이 금을 채굴하여 지금도 긴등에는 채굴된 폐 금광 굴이 남아있다. 특히 도곡리에서 덕소를 가기 위해 벽산과 두산APT사이 6번 국도 상에 고개가 금사당고개로(가파른 고갯길-지금은 낮아졌지만) 노다지꾼(금 캐던 사람 들:미국인들이 금에 손대지 말라고 no touch에서 유래) 들이 제사를 드리는 장소로 금사당 고개라 불린다.
이 금대산을 기준으로 동쪽이 도곡리이며 도곡은 질그릇 도(陶)에 계곡 곡(谷)으로 질그릇을 굽던 계곡으로 갑산 자락의 질 좋은 황토 흙으로 기와, 도기, 생활자기를 구웠던 곳으로 곳곳에 가마흔적이 있으며 특히 도곡초교와 도심마을을 중심으로 조선시대 초부터 60대까지 도자기가 번성하던 곳이다.
여기서 도심마을은 질그릇도 (陶)에 마음심(心)으로 질그릇같이 투박한 마음을 지닌 정이 넘치는 사람들이 살던 마을로 지금의 도곡4,리 지역이고 기와를 많이 굽던 문용 마을 산기슭에는 기와 골이 있다.
또 도곡1리에는 갑산이 도곡3리에는 적갑산이 쌍벽을 이루며 버티고 있는데 여기서 갑은 갑옷갑(甲), 첫째갑(甲)이요 적은 붉을적(赤)으로 산중에 으뜸 되는 갑산(甲山), 단풍이 아름다운 으뜸 되는 적갑산(赤甲山)이란 뜻도 있지만 이 지역은 조선시대 한양과 가깝고 강을 건너지 않아도 되는 지역이며 산과 구릉 지대가 많아 왕실의 강무장이나 사냥터로 자주 이용되었다.
강무는 조선의 만조백관과 군사가 일체가 되어 야영을 하면서 국가 의 보위를 위하여 군사행위를 하는 거국적 행사였으며 이때 경기, 충청뿐 아니라 전라, 경상, 황해도에서 보통 일 만명을 징집하여 훈련하던 장소로 1447년(세종29) 8월 기록에 의하면 기병이 7,800여명 보병이 2,400명이고 강무시 군인들은 보행훈련 구보, 산등성 오르내리기, 전투작전의 진도, 행렬대오, 기마전술 등을 하던 장소로서 갑산과 적갑산이 그 중심에 있었으며 갑옷 입은 군인들의 훈련장으로 사용되어 갑산, 적갑산으로 불렸으며 강무시 적갑산능선 중앙부분에 제바위란 곳에 제단을 쌓아 국태민안을 기원하고 제바위 하단(어룡과 동막사이 수자원공사 관로 지나는 곳)에 강무시 임금이 기거하던 외상릉(外常陵)이 있어 지금까지도 제바위, 외상릉이라 불리고 있으며 조선 세조, 태종, 세종조에왕궁의 사냥터로 절정을 이루었으며 태종은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풍양(양주)에 이 궁을 짓고 사냥을 즐겼다는 기록이 나오며 연세대 농장, 풍한농장지역을 궁벌, 문용 마을을 궁말, 어룡에서 한강에 이르는 개울이 궁촌천으로 이는 활궁(弓)자로 이 지역이 사냥터로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갑산(갑산)을 와부보건지소에서 바라보면 여자가 반듯하게 누워있는 멋진 모습이 연출된다.(?) 그래서 주민들은 여자 산, 미녀 산이라 불리고 있다. 미녀 산의 공제선(산과 하늘이 닿는 부분)을 바라보면 (여명이나 일몰직전 더욱 선명)긴 머리를 뒤로 풀어 놓고 반듯하게 누워 있는데 이마, 속눈썹, 긴 목선, 심지어 젖가슴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보면 볼수록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그 미녀 산아래 마을은 여인들의 기운이 드세어 바람이 많이 난다(?)는 마을의 속설이 있어 가정불화가 많았으나 우성APT건축이래 남서쪽의 음기를 막아서 마을이 평온을 찾았다고 한다.
현재 도곡1리 와부보건지소가 있는 안 동네가 금대산 안쪽에 자리 잡아 안골이며 이 안골에 중종반정에 1등공신인 영의정 박원종대감의 생가와 유택이 있고 왕에 등극한 중종 임금은 박원종 대감에게 정자를 지어 하사하게 되는데 지역 내 산수가 수려하고 경관이 빼어날 뿐 아니라 폭포와 노송, 온갖 기화요초가 산재한 문우골을 택하게 된다.
이 문우골은 글월 문(文) 벗 우(友)로 글을 배우는 서당과 학생들이 많이 모여 살던 지역으로, 지금의 문용(느티나무농원 동네)초입에 정자를 짓고 조정대소신료와 지역유림들이 시, 가무를 즐겼던 장소이다.
문용이란 문우골의 문(文)과 윗마을 어룡에 용(龍)자를 따서 문용(文龍)이라 하였으며 어룡은 고기 어(魚)에 용 용(龍) 으로 도선비기에도 사해의 어룡이 한강으로 모여든다고 했는데 이중 한강의 어룡이 궁촌천을 따라 올라와 하늘로 승천하였다 하여 어룡이라 불렀으며 승천하던 용 하나가 박원종 대감 정자 터가 있는 폭포에 떨어져 이무기가 되었다 한다.
그래서 문용 마을을 일명 폭포 마을이라 하고 폭포바위 및 이무기 굴이 한강과 연결되었다하며 빨래하던 아낙네와 큰 소가 빨려 들어갔다(이무기가 먹었다)는 마을 어른들의 이야기가 있다.
또 박원종대감의 정자주변엔 사람의 등짐을 져서 서북향을 막는 대역사를 감행하고 작은 동산을 만들어 삭풍(북서풍엔 인, 마, 작물이 해를 입는다 함)으로부터 정자를 보호했으며 폭포 좌우에 넓은 바위와 즐비한 노송, 진달래, 단풍, 깎아지른 절벽이 아름다워 60년대 초까지 덕소초등학교 학생들의 원적(소풍)장소로 애용되었다. 이 문용과 어룡이 합하여 현재 도곡3리이다.
도심초등학교, 덕소 중학교와 고대농장 진입로 사이의 계곡을 쑥배미라 불리는데 이 쑥배미에 현 도곡4리 이장 이 훈주씨 집에 김영한 작가가 행랑채에서 살 때 쓴 소설이 우묵배미 사랑이다. 쑥배미를 작가는 우묵하게 들어갔다 표현하여 그 집안 내역에 대하여 쓴 소설이 우묵배미 사랑이며 이후 왕룽 일가, 머나먼 쏭바 강등의
유명한 소설을 쓰게 된다.
5. 팔당리(八堂里)
팔당리는 예봉산의 철문봉 줄기를 따라 한강에 연하는 마을로, 팔당이란 여덟 팔(八)에 집당(堂)자로 지역주변에 여덟 개의 명당이 있는 지역으로 팔당이라 불린다.
여기서 예봉산(禮峯山)은 본래 구름도 머물고 가는(구름 운치가 좋은) 운길산(雲吉山)이었고 현 운길산은 조곡산(朝谷山)이었으나 (東國輿地勝覽) 일제시대 에 토지 정리를 하면서 옆에 (동쪽 무명고지)있는 예빈산(禮賓山)의 예(禮)자와 봉안(峯安)마을에 봉(峯)을 따서 예봉산 (禮峯山)이라 불리게 된다.
예봉산 서쪽 630무명고지가 철문봉(哲文峯)으로 다산 정약용, 약전, 약종.형제가 능내리
마재의 여유당에서 집뒤 능선을 따라 쉬엄쉬엄 올라와 예봉산을 지나 이곳까지 와서 학문의 도를 밝혔다 하여 밝을 철(哲) 글월 문(文)자를 써 철문봉 이라 불리 운다.
예봉산이나, 철문봉이나 그 정상에서면 한양이 지척에 보이고 북한산, 관악산이 한 시야에 들어오며 백운대 남장대에 눈을 돌린 순간 임금이 계신 궁궐이 눈앞에 그려지니 이들 형제들이 자주 찾은 이유를 알 것 같다.
여기서 예봉(禮峯)이나 예빈(禮賓) 모두 받들어 모신다는 뜻이니 한눈에 보이는 한양에 임금을 받들고 또 산허리에서 강무를 지켜보는 임금을 받든다는 의미일 것이다.
또 예봉산의 두 봉우리는 주민사이에 견우봉과 직녀봉이라 하여 큰사랑산 작은 사랑산이라 불린다.
팔당은 예로부터 남북한 강에서 모이는 두물머리를 지나 최초로 들리게 되는 큰 나루터로서 물류교역의 중심이었으며 항상 많은 사람과 물건이 흔하고 풍족한 생활을 하던 지역으로 60-70-80년대까지 서울 지역에 제일 많이 찾는 매운탕의 고장으로 와부의 경제를 움직이는 중심지역 이었으나 80년대 말 한강종합개발과 90년 초 경강국도 개통으로 스쳐 지나가는 지역에 불과하여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지역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또 팔당은50년대 이승만 대통령이 낚시를 즐겨하던 곳으로 팔당 향토 사료관 에 이대통령이 사용하던 고기잡이 뜰 채가 보관되어 있다.
또 고기잡이하던 어부들의 고통과 애환이 담긴 고기잡이 12마당의 노래가 있었으나 기능을 가진 분들이 한분 두 분 유명을 달리하고 있어 하루빨리 복원이 시급한 상황이다.
팔당지역 중 최고의 명당으로 불리던 터가 풍한 농장에 궁벌지역으로(지금은 도곡리) 이곳은 이승만 대통령당시 국립묘지가 이곳에 위치토록 되어 있었으나 외국사절과 국내외 참배인사들의 교통편이 적절치 않아 동작동으로 정하게 되었다.
이후 그곳은 한국전쟁 후 미켈로 부대 (HID:특수정보부대)가 60년대 초까지 주둔하게 된다. 이 궁벌에서 연세대 농장 올라가는 작은 고개를 무너미 고개라 하며 무너미란 물 넘기란 뜻으로 궁벌의 기름진 땅과 하단천수답에 물을 대기 위해 도랑을 파 물을 넘겨 농사를 짓게 되어 무너미 고개라 불리고 있다.
또 궁벌 하단에 갬벌이란 마을이 있었는데 이는 미주둔군부대이름이cable로 켐블을 주민이 갬벌로 불렀으며 엄나무가 많아 엄나무 배기라고도 한다.
6. 월문리(月文里)
월문리(月文)는 월문 초교를 중심으로 한 월곡(月谷)리와 현 월문5리 글계울 중심의 문곡(文谷)리를 합쳐 월문(月文)리로 불리게 된다. 문곡(文谷)리는 글계울(글개울) 글 읽는 소리가 시냇물 흘러가듯 끊이지 않던 마을이라 해서 불린 이름으로 조선시대 “문곡(文谷)”이란 호를 가진 선비가 살았기 때문이란다.
과연 문곡이 누구였을까?
효종 7년에 창건된 석실서원(현 덕소5리)은 김상헌의 도덕과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으나 김상용, 김수항, 민정중, 이단상 ,김창집 등 안동 김씨 세도정치로 연결되어 사색당쟁에 휘말리는 조선시대에 당쟁의 근원지였다.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김수항의 호가 문곡(文谷)이며 석실서원과 문곡리는 지척으로서 김수항의 저서가 문곡(文谷)집으로 보아 깊은 관련이 있는 듯하다.
월문리는 백봉산(묘적산)과 갑산 사이를 말하며 백봉 산의 백은 잣나무 백(栢)으로서 잣봉산 또는 잣봉 이라 불리며 대동여지도 대동지지에는 묘적(妙寂)산이라 부르기도 하고 묘적 산에는 묘적사(妙寂寺)가 있으며 지금부터1,300여 년 전 신라 문무왕 때 당대 고승 원효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며 국왕 직속의 비밀 요원을 훈련시키기 위해 절을 짓고 선발된 인원을 승려로 출가시켜 승려교육과 군사훈련을 받게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특히 임진왜란 때에는 사명대사가 이 절에서 승군을 훈련시켜 왜적과의 전투에 출전시켰다고 전해지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후에는 승려들이 무과에 대비하는 훈련장으로서 “호국불교의 정신"이 구석구석 배어 있는 사찰이다. 지금도 대웅전 옆 활터에는 간혹 화살촉이 발견되며 사령각 이나 나한전과 돌탑은 유구한 역사의 흐름을 넘어 우리에게 신비감을 전해주고 있다. 묘적 사를 지나 백봉산에 오르는 7~8부 능선상의 커다란 분지는 비밀 훈련장으로 승군의 함성이 들리는 듯하다.
백봉 산의 맞은편 송촌리를 연결하는 계곡이 구선동이다. 구선동은 시우리고개 에서 발원하는 맑은 물에 9선녀가 내려와 목욕을 하고 올라갔다 하여 구선동(九仙洞)이라 한다.
마을 앞산을 신선봉(神仙峰)이라하며 산꼭대기에 좋은 우물이 있어서 선녀들이 놀다 갈만한 경치를 가지고 있었다 한다.
월문 천이 덕소리와 만나는 곳에(현 신양제지) 다리골(중광 마을)이란 마을이 있다. 이 다리 골은 태종의 후손 이 인한(李 仁漢)의 후손들이 낙향하여 살던 마을로 동쪽은 갑산과 예봉산이 솟아 있고 서북쪽으로 백봉산 줄기가 병풍처럼 두르고 있을 뿐 아니라 월문 천이 한강으로 유입되는 등 아늑하여 살기 좋은 마을로 이 씨의 집성촌이 형성되어 많을 다(多) 오얏리(李)로 다리 골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60년대 중반까지 물레방아를 돌려 월문 뜰의 곡식을 탈곡했다.
7. 율석리 (栗石里)
율석리는 율북(栗北)리와 석실(石室)리에 율(栗)자와 석(石)자를 따서 율석리라 부르게 되었다. 율석리는 백봉산 서쪽으로 밤나무골로 널리 알려진 마을이다. 석실마을은 (지금은 덕소5리) 우리나라 팔 명당의 하나라는 ‘옥호 저수형’의 명당으로 옥병에 물을 담은 형국인데 덕소리쪽이 병 입구이고 장산 에서 내려온 산줄기가 율석리 쪽에서 봉우리를 맺으며 병마개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곳은 남양 홍씨의 선산이었으나 남양 홍씨의 여식이 안동 김씨 가로 출가하여 인연을 맺게 되어 석실서원이 세워지게 된다. 석실서원은 북벌론의 이념적 표상으로 추앙되었던 청음(淸陰) 김상헌(金常憲)의 도덕과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서원으로 이후, 김상용(金尙容), 김수항(金壽恒), 민정중(閔鼎重), 이단상(李단相), 김창집(金昌집), 김창협(金昌協), 김창흡(金昌翕), 김원행(金元行), 김이안(金履安), 김조순(金祖淳)이 배향된 서원이다.
1656년(효종7)에 창건되어 서인계서원으로 노, 소론 분당 후엔 노론 계에 속하며 장김(長金) 세도정치 70년의 산실이었다.
또한 백천사에는 김교각 기념관이 있는데 김교각은 통일신라 선덕왕의 아들로 태어나 부귀영화를 버리고 홀홀 단신 중국으로 건너가 구도의 삶을 산 인물로 지장이란 법명을 받고 출가하였으며 구화산 화성사를 창건하여 중국에 불교 4대 성지의 하나로 자리 잡게 하였다.
김교각기념관에는 그가 입적하기 전에 사용했던 신발과 모자 그의 발자국을 담고 있는 돌등이 전시되어 있다.
율석리는 밤나무가 동네를 둘러싸고 우거져 있다해서 율정 마을로 불리는 율석 1리,
큰 마을이란 뜻의 대동(大洞)의 율석2리, 그리고 나무가 많이 우거져 깊숙한 곳이라 하여 목식골 또는 목심골의 율석3리로 나뉜다.
대동마을 남서쪽에 도당미라 하여 굿을 하던 장소가 있으며 도당미에서 굿을 하던 무당들이
대동마을 북쪽 산모퉁이에 살던 곳을 무당골이라 부르고 죽은 후 이곳에 뭍혔다 하여 무덤골이라 부른다.
대동마을 북쪽 봉우리는 매의 형상을 닮아 매봉이라 하며 매에 쫓긴 꿩한마리가 매봉 서쪽에 엎드려 숨었다하여 복치혈이라 부른다. 그 외 목식골 북쪽에 위치한 피사골에는 한국전쟁으로 많은 피난민과 군인들이 몰려왔을 때 적의 무차별한 공격으로 많은 사람이 죽게되어 피사골이라 불리게 되었다.
또 지금은 군부대가 주둔하여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목식마을 동남쪽 온수 물이 나는 곳이 있는데, 옻이 오른 사람은 이곳에 와 물로 씻으면 깨끗이 나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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