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소한 개인과 거대한 세계가 만났을 때 피 흘리는 쪽은 언제나 개인이다. 거대한 조직의 폭력성 앞에 피 흘리고 신음하는 왜소한 개인들의 아픔은, 그러나 역사 속에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가브리엘 살바토레 감독의 [지중해]는, 따뜻한 유머감각으로 폭력적 세계를 비판하고 있다. 폭력적 세계의 폭력적 드러냄이라는 타란티노 스타일과는 전혀 다르게, 폭력적 세계의 이데올로기 대립에서 훌쩍 일탈해 버린다. 그는 분명 아나키스트다.
[아임 낫 스케어드]는 [지중해]나 [푸에르토 에스콘디도]같은 살바토레 감독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외형적으로는 소박한 것처럼 보인다. 작품을 끌고 가는 화자로 어린 소년을 내세울 때, 기성 세대들이 잃어버린 순수하고 무구한 시선을 드러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그만큼 세계는 단순해진다는 위험이 있다. 하지만 [아임 낫 스케어드]에서는 폭발할 듯한 에너지나 내적 긴장감이 훨씬 증폭되어 있고 내러티브도 물 밑에서 치밀하게 짜여져 있다.
니꼴로 아만티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 한 이 작품은 1970년대 이탈리아 가난한 남부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황금빛 밀밭을 수평으로 움직이는 첫 쇼트만 보더라도, 이 영화가 단지 폭염이 내리쬐는 시골 마을의 순박함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소년의 상체 밖에 드러나지 않는 황금빛 밀밭 속에는 비밀스럽고 감추어진 많은 것들이 있다.
[아임 낫 스케어드]는 결국 감추어진 세계의 추악함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어린 소년의 순수함은 거대한 세계의 폭력성 앞에서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다. 언제나 희생당하는 것은 왜소한 개인들이다. 미카엘의 가족은 단순하다. 안경을 낀 어린 여동생, 무뚝뚝하고 무섭지만 가족에 대한 사랑은 넘쳐나는 아버지, 잔소리 많지만 누구보다도 자식들을 사랑하는 어머니. 가족구성원들로 이루어진 이 작은 세계는 얼마나 깨지기 쉬운 것인가.
황금 밀밭 건너에 있는 폐가에서 놀던 미카엘은 마당 구석에서 웅덩이를 발견한다. 그 속에는 놀랍게도 발목에 사슬이 묶인 한 소년이 갇혀 있다. 로마에서 살던 필리포를 이 곳에 감금한 사람들이, 자신의 아버지와 그 친구들이라는 사실을 미카엘은 믿을 수 없다. 몸값을 받아내기 위해, 다시 말하자면 가족들에게 조금 더 안락한 생활을 제공하기 위해 미카엘의 아버지는 필리포를 유괴했지만, 어른들 몰래 미카엘은 음식과 물을 필리포에게 갖다 주면서 우정을 쌓아가게 된다.
미카엘과 필리포의 세계는 마당 구석에 숨겨진 웅덩이 같은 것이다. 햇빛이 닿지도 않는 진흙구덩이 속에서는 바깥 세계에 황금빛 태양과 맑은 물이 존재하리라는 것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문제는, 동굴의 안온함이 언제까지나 그들을 지켜줄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불과 10살에 지나지 않는다. 혼자 힘으로 세계와 마주 서기에는 아직 너무나 어린 것이다. 어른들의 범죄와 폭력으로 파괴되어가는 소년들의 세계를 비극적으로 그리고 있는 이 영화는, 성장 영화이면서 동시에 생의 비극적 의미를 깨닫게 해주는 어른들의 우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