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려드는 봄 햇살로 도시는 유월의 신부처럼 화사하다. 나의 작은 정원도 덩달아 푸르르다. 제일 먼저 봄을 맞은 목련은 순결한 흰 꽃잎들을 땅 위로 떨어낸다. 그것이 신호탄인 듯 나무들은 땅 밑에서 솟구치는 봄기운을 길어 올린다. 삭정이 같던 나뭇가지들이 금세 파래지고 겨우내 갈무리했던 봄을 선물꾸러미처럼 풀어놓는다.
신록의 압권은 상록수다.
지난해의 검푸른 묵은 잎 위에서 연둣빛 고운 새순은 그대로 꽃이다. 그 고운 빛도 여름을 지나면 묵은 잎으로 편입되고 말 것이다. 고운 눈의 아이들이 청년기를 지나 기성세대로 편입되듯 그러나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으랴. 모든 것이 절정에서 정지되길 바라지만 그것은 얼마나 헛된 소망인가. 고운 신록이 묵은 잎이 되어버려도 지난겨울의 무채색의 정원을 생각하면 서운할 것은 없다. 아이들이 다 자라 떠나도, 주변의 인연이 다한 것이 떠나도 견딜만하다. 본시 나에겐 없었던 것이므로.
꽃들은 다투어 피어나 수틀 위에서 완성되며 선명해지는 자수무늬처럼 화려해지고 윙윙 벌들이 날아 줄 것이다. 지난겨울, 꺾은 꽃으로 왔던 가불된 봄이 아니라 참 봄을 나는 온몸이 촉수가 되어 더듬는다. 봄은 늘 옛 친구처럼 융융하다.
여기서 살아 온 십수 년의 시간 동안, 아이들은 종아리가 튼실해져 헌헌장부가 되었고 세월을 부둥켜안은 나무들도 둥치가 굵어졌다. 조붓한 정원이나 제 넓이에 비하면 제법 나무가 많다. 커버린 아이에게 어릴 적 입던 작은 옷을 그대로 입혀 넣은 것 같아 안쓰럽지만 가지치기란 구조조정으로 공생을 도모하고 있다. 오래, 같이 살다보니 그들의 언어를 해독할 수 있어 한 그루라도 퇴출시킬 수가 없는 것이다.
식물은 움직이지 않지만 교묘하고 복잡하며 깊은 생각을 하며 살아간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의 면면을 살펴보는 것은 흥미롭다.
성미 급한 목련은 지난겨울부터 가지 끝에 봄을 매달고 있다가 저 먼저 봄의 전령이 된다.그 옆의 모과나무는 엄청난 둥치에 비하면 아주 여린 가지들이 몸통 군데군데 자상을 입힌채 심어져 있다. 돋아난 가지가 아니라 굵은 나뭇등걸에다 어린 새순들을 칼집을 내어 이식해 놓은 것이다. 식물원에서 고통스런 이식수술을 받은 후 분재모양의 아름다운 수형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여기 와서 많이 자랐다. 나무가 받았을 고통을 생각하면 그를 완상하는 것이 좀 미안하다. 나는 아름다운 분재를 보면 키운 이의 노작(勞作)이라는 생각보다, 하필이면 분재감으로 선택된 나무의 한이 떠올라 그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담과 이브가 금단의 열매를 따먹은 후 몸을 가렸다는, 이름처럼 꽃이 없는 무화과는 잎과 푸른 열매가 같이 돋아나 익어간다. 그 옆으로 하늘이 내린 선물이라 할 만큼 사람에게 이(利)해서 백익홍(白益 紅)이라는 대추, 또 모란이 있다.
영랑 시인의 감성의 원초를 이루었을 그 꽃은 잎이 돋기 전의 볼품없는 줄기로는 그렇게 화려한 꽃이 피리라 상상하기 어렵다. 짙푸른 잎들 사이로 점점이 붉은 색이 보이는 듯 하면 금방 슬프도록 붉고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 어리숙한 모란은 실속 없이 화려하기만 하여 사흘을 견디지 못하고 꽃잎을 접기 시작한다. 만개의 화려함은 삽시간에 ‘허무하게 지고 말아’ 그 단명이 보는 이의 마음을 못내 아쉽게 한다. 부호의 아들로 태어난 영랑이 약지 못한 모란꽃의 이미지와 중첩되어 온다.
동백은 남도에서 흔했다. 보성의 차밭 입구에도 있었고 땅 끝으로 가는 해남의 노변에도 있었다. 꽃잎이 시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자진(自盡)하듯 모가지가 똑똑 꺾어져 시들지 않은 고운 모습을 다복다복 누인다. 제 설움에 겨운 청상의 모습이다.
바위틈에서 붉게 꽃 사태를 이루는 영산홍, 묘목인 채로 새 식구가 된 매화, 산수유, 꽃사과, 산자락에서 얻어 온 한줄기의 쑥, 돌나물도 제 식구를 불려가고 있다. 묵묵히 기다리다 고적한 가을에서야 홀로 피는 국화는 화중군자이다.
이른 봄 목련에서 무서리 내리는 가을의 국화까지, 그들은 터울을 두고 피고 지며 뜰을 지킨다.
모두 그렇게 제 지분의 햇살과 땅을 갖고 살아가는데 그 질서를 깨뜨린 것이 감나무다. 혼자 부쩍 자라 폭군처럼 군림하며 햇살을 가로채어 그늘을 짙게 드리우니 제 주변의 작은 나무들은 늘 앙앙불락이었다. 맛있는 단감의 수확이 대폭 줄어들 것이나 가을의 전정 때 그 녀석의 가지들을 절반쯤 잘라버렸다.
강인한 잡초도 무성하지 않을 만큼 그늘이 짙었던 것이다. 그들에겐 결례가 되는 말이지만 이름모를 작은 풀꽃들을 잡초라고 통칭한다. 그들은 양으로 승부하였다. 뽑고 또 뽑아도 저항은 끝이 없었다. 특히 비온 후는 반란군의 기세로 돋아났다. 나는 전의를 잃고 그들과 화해하였다. 그 끈질긴 생명력은 어디서 오는가. 자세히 보니 전혀 강인하지 않은 여리디 여린 풀잎들이었다. 왁살스럽게 웃자라는 것만 뽑고는 대강 그냥 두니 흙의 맨살이 드러나는 것보다 보기가 낫다. 그들도 이름이 있을 것이나 그것이 무엇이든 상관이 있으랴. 대접받지 못하고 툭하면 뽑혀나가는 고단한 한살이를 이어가지만 창조주의 피조물로서 사명을 다할 뿐인 그들을 모질게 뽑아내지 않으려 한다.
그들을 보려고 쪼그리고 앉는다.
꽃들은 좁쌀처럼 고만 고만하게 크고 작으며, 보라색이며 희고 노랗기도 하다. 너무 작아서 애잔하게 아름답다. 세상에는 큰 것에 가려진 작은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꽃이라 불리우는 아름다운 모든 것들, 그들은 이 작은 풀꽃들의 현란한 각색일분.
장미에서 잡초까지 모두 제 생존의 의미대로 , 그리고 서로 어우러져 살아간다. 그들이 아우르는 푸르름으로 나는 시나브로 생기를 얻는다. 숲으로 가던 새가 인심 쓰듯 잠깐 앉아 주기도 하는, 뜰엔 햇살이 가득하다. 아파트 숲에 갇히지 않고 대문을 지나 현관에 이르기까지 거쳐 갈 한 뼘 뜰이 있음이, 그리고 그들로부터 공생의 지혜를 배울 수 있음이 얼마나 다행한가.
(남영숙 님의 수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