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약전 4 - 발포 만호 시대
성웅 이순신(이은상 지음)에서 발췌 요약한 글
다시 한 해가 지나 공의 나이 36세 되는 해 가을 7월에 흥양(지금 고흥) 발포(鉢浦)의 수군 만호(萬戶)로 전근하니, 만호란 것은 그 지역을 맡아 다스리는 수비대장이었다.
그때 전라감사 손식(孫軾)이 어떤 자의 모략을 듣고 공을 벌주고자 하여 능성(綾城)에 앉아서 공을 불러다 놓고, 진치는 법을 강(講)하게 하고 또 그것이 끝난 뒤에는 진치는 그림을 그리라고도 하였다. 공은 붓을 쥐고 진도(陳圖)를 정확히 그려내니, 감사가 그것을 한참이나 내려다 보고
"내가 남의 말을 잘못 들었군!"
하며 공의 집안을 묻고, 자기의 잘못 인식했던 것을 뉘우쳤던 것이다.
그러나 정의의 뒤에는 매양 악마의 시샘이 따르기 마련인 것이다. 그 때 전라좌수사 성박(成搏)이란 사람이 발포로 심부름꾼을 보내어, 객사 뜰에 있는 오동나무를 찍어다가 거문고를 만들려는 것이었다.
공은 하도 어이가 없어
"이것은 나라의 물건이다. 수사인들 어찌 사사로이 쓰기 위해서 찍어 갈 수가 있을 것이냐. 더구나
이같이 오래된 나무를 하루 아침에 찍어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고 좌수사의 심부름꾼을 꾸짖어 돌려보냈다. 그 때문에 성박수사는 크게 노했지마는, 마침내 오동나무를 찍어가지는 못했다.
그러자 뒤이어 이용(李용)이란 이가 수사로 부임해 왔다. 어떤 사람이 어떤 자리에 오든지 가든지, 공은 다만 정의와 공명정대함으로써 대할 따름이었다.
상관에게 아부하지 아니하는 공이라, 새 수사 또한 공을 가만히 둘리가 없었다. 그래서 새 수사는 공을 짐짓 죄주려는 계략으로 갑자기 자기 관하에 있는 다섯 포구의 군대들을 점검하는 것이었다.
그랬으나 다른 네 군데의 군대에는 결석자가 너무도 많았지만는 공이 있는 발포 군대에는 단 네 명 밖에 결석자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사는 오직 공의 이름만 걸어, 서울로 장계를 올려 죄를 청했다. 공은 이것을 알고 곧 네 포구의 결석자명단 초본을 얻어다가 말없이 쥐고 앉았었다.
수사영에 있는 사람들이 수사에게 말하되
"발포에는 결석자가 넷 밖에 없었고, 다른 네 군대는 결석자가 많기도 했거니와, 순신이 벌써 네 군데 결석자의 명단 초본을 가지고 앉았으니, 사또의 장계 올린 것은뒷날 도리어 후회가 될 것이오."
하자 수사는 놀라서, 사람을 급히 달려 그 장계를 도로 찾아오게 하는 것이었으니, 공의 지혜 있는 행동과 수사의 허둥거리는 모습이 참으로 대조적이었던 것이다.
그 뒤에 수사가 전라감사와 같이 앉아, 수비하는 장수들의 우열을 논하는데, 공을 가장 아랫자리에 두려는 것이었다.
그 때, 공보다 한 살 위인 중봉(重峰) 조헌(趙憲)이 전라도 도사(都事)로서 그 자리에 같이 앉았다가 붓을 놓고 말하되
"듣건대 이순신의 군사 다스리는 법이 우리 도에서는 가장 으뜸이라고 하는데, 다른 모든 장수들을 그의 아래 둘지언정, 그를 도리어 남의 아래 두자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오."
하여 수사로 하여금 무안스럽게 했던 것이다.
그러자 38세가 되는 해 봄 정월에 서울로부터 군기경차관(軍器敬差官)이 발포로 내려왔다. 군기경차관이란 군대의 무기들을 조사하는 벼슬아치다.
공의 군사 처리하는 법이 너무도 엄격하고 정밀한 것은 이미 정평이 있었던 일이아, 발포의 군기야말로 너무도 잘 정비되어 있덨던 것은 물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기경차관은 완전히 반대로 보고을 올려, 그 때문에 공은 발포만호에서 파직되고 말았는데, 실상인즉 그 군기경차관이 다른 사람이 아닌, 서익이었던 것이다.
진작 훈련원에서 어떤 친한 사람을 순서 없이 함부로 승직시키려다가 자기 뜻대로 하지 못했던 그 분풀이를 했던 것이니, 그가 얼마만큼이나 소인이었던 줄을 알 수 있다.
이같이 파직되어 올라온 공이지마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 억울한 것이 저절로 알려져서 넉달이 지난 뒤 5월에 도로 훈련원 봉사로 복직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물론 강등된 복직이었다.
하지만 공은 조금도 불평하지 않았다. 높거나 낮거나 자기에게 맡겨지는 대로 그 일에 충실함 만이 있을 따름이었다.
그때 재상 유전(柳전)이란 이가 공에게 좋은 화살통이 있다는 말을 듣고, 공을 불러 직접으로 그 화살통을 자기에게 달라고 청하는 것이었다.
공은 부드러운 말로 그것을 거절하되
"화살통 하나 쯤 드리기가 우엇이 어렵겠습니까마는 남들이 들으면 대감과 저를 무엇이라 할지, 그것이 두렵습니다. 화살통 하나로 이름이 욕된다 하면 얼마나 미안한 일이겠습니까?"
하여 유재상으로 항여금 깨닫게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