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수요일 1월 27일 서생포 왜성부근에 있는 유석청덕비를 찾으로 갔다.
오래전 부터 가려고 하었으나 시간이 나지 않고 겨울이 아니면 볼수 없는 碑라 위치를 물어 갔으나
처음에는 찾지 못하고 위치를 아는 울산 남구 문화원에 연락을 취하여 정확한 위치를 알아내어 사진을 찍었다.
비석은 고사리 모양을 한 이수 형태이고 장방형의 碑이다.
앞면에는 각자가 되어 있고 뒷면에는 세운 간지가 새겨져 있다.
이 비석을 찾으려고 울산대 송수환교수와 통화도 하였으나 위치를 모른다 하여 울산 문화원 관계자와 통화한 결과 알아 냈지만 울산박물관에 비치된 울산금석문에는 柳奭이라는 어사가 없다 하여 자료를 찾으니 재미 있는 결과가 나왔다.
즉 유석의 이름은 한글은 같으나 한자가 틀리면서 행적은 같으니 이상스런 결과에 머리가 아프다.
금석문--사진
먼저 의문이 드는 것은 실록과 승정원 일기에 나타나는 이름이 다른데 이에 글을 써본다.
1-고종실록에 나타나는 유석자료
고종 2년 을축(1865, 동치4) -- 4월 13일(정축) 맑음
흥덕 현감(興德縣監)에 유석(柳奭)을 단부하였는데, 1년을 더 잉임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그 직의 임기가 만료된 뒤에도 옮기지 않고 계속하여 그 직을 맡겨둠. 留任
고종 2년 을축(1865, 동치4) ----6월 22일(을묘) 비
김철원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김철원(金哲源)을 우림위장(羽林衛將)으로, 이종건(李鍾健)ㆍ이희일(李熙一)을 도총부 경력으로,
유석(柳奭)을 공충도 병마우후(公忠道兵馬虞候)로
-공충도- 충청도 옛이름
2년 을축(1865, 동치4)
7월 4일(병인) 비
전 흥덕 현감 유석을 잉임시킬 것에 대해 품처해 주기를 청하는 전라 감사 조재응의 장계
○ 전라 감사 조재응(趙在應)의 장계에서 “전 흥덕 현감(興德縣監) 유석(柳奭)이 5년동안 재직하면서 청렴하고 신중하고 치밀하게 처신하고 사재를 털어서 보조하여 농사를 권장하였으므로 온 고을에 칭송이 자자합니다. 지금에 자리를 옮기게 되어 백성들이 유임시켜 주기를 원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실적이 있는 사람에게는 포상을 내려야 합당합니다. 특별히 잉임시키도록 하는 일을 해조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소서.
”라고 한 것에 대하여 전교하기를,
“실적이 이와 같고 백성들의 소원이 이와 같으니, 특별히 1년을 잉임시키도록 하라. 새로 제수하였던 현감 오영운(吳永運)은 더 나은 자리가 나는 대로 우선 의망하도록 전조에 분부하라.”
하였다.
고종 2년 을축(1865, 동치4) ---7월 13일(을해) 맑음
흥덕 현감(興德縣監)에 유석(柳奭)을 단부하였는데 1년을 연장하여 잉임시키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고종 2년 을축(1865, 동치4) ---- 8월 29일(신유) 맑음
- 장계의 격례를 어긴 전라 감사 조재응 등을 추고할 것을 청하는 정원의 계
○ 또 아뢰기를,
“방금 전라 감사 조재응(趙在應)과 흥덕 현감(興德縣監) 유석(柳奭)이 임소에 돌아가 올린 장계에서 성(姓) 아래에 서명하지 않아 다시 묻게 하였습니다. 해도 도신을 추고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윤허한다. 봉납한 승지도 추고하라.”---推考
예전에, 벼슬아치의 죄와 허물을 문초하거나 캐어물어 고찰(考察)하던 일.
고종 3년 병인(1866, 동치5) --- 6월 15일(임인) 맑음
흥덕 현감(興德縣監) 유석(柳奭)은 온 고을에 은혜를 베풀어 아전과 백성들이 즐겁게 생업에 종사하였고, 군산 첨사(群山僉使) 이면주(李冕周)는 조세를 서울로 운반하는 비용을 줄여 백성들이 많은 혜택을 입었습니다. 포상의 은전이 있어야 마땅하니, 모두 해조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흥덕 현감(興德縣監) 유석(柳奭)은 온 고을에 은혜를 베풀어 아전과 백성들이 즐겁게 생업에 종사하였고, 군산 첨사(群山僉使) 이면주(李冕周)는 조세를 서울로 운반하는 비용을 줄여 백성들이 많은 혜택을 입었습니다. 포상의 은전이 있어야 마땅하니, 모두 해조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네 고을과 한 진(鎭)이 많은 치적을 나타내었으니 이것은 정성스런 마음의 결과이다. 관리가 그 자리에 합당하고 백성들이 생업에 안주하니, 이 얼마나 기쁜 소식인가. 여산 부사 민희호와 운봉 현감 강우진에게는 모두 영장(營將)의 경력으로 잡아 주며, 만경 현령 이병일과 흥덕 현감 유석에게는 모두 품계를 높여 주고 영장의 경력으로 잡아 주며, 군산 첨사 이면주는 두 번의 조운(漕運)이 끝난 후 방어사의 경력으로 잡아 주어 가상히 여기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고종 3년 병인(1866, 동치5) ---7월 15일(신미) 맑음
춘당대에서 칠석제 시취를 하고 도목 정사를 행할 때 행 도승지 조석원 등이 입시하였다
유석(柳奭)을 무산 부사(茂山府使)로
고종 3년 병인(1866, 동치5)---8월7일(계축) 맑음
무산 부사 유석에게 장궁 등을 사급하라는 비망기
○ 비망기에,
“무산 부사(茂山府使) 유석(柳奭)이 하직하니, 장궁(長弓) 1장(張), 장전(長箭) 1부(部), 편전(片箭) 1부(部), 통아(筒兒) 1개를 사급하라
고종 4년 정묘(1867, 동치6) ---2월 22일(병오) 맑음
부령 부사 마행일과 무산 부사 유석을 서로 바꾸라는 전교
○ 전교하기를,
“부령 부사(富寧府使) 마행일(馬行逸)과 무산 부사(茂山府使) 유석(柳奭)을 서로 바꾸라.”
하였다.--茂山--함경북도 북서쪽에 있는 군
위의 글은 1865부터 1867년 까지 실록의 자료인데 유석이라는 이름이 한자로는 柳奭이라 되어 있어 서생면에 있는 어사청덕비와 같으나 어사로서 활동 했다는 기록이 없다.
2-승정원 일기
고종 8년 신미(1871, 동치10)
5월 24일(계축) 맑음
권지 승문원부정자 김용규 등을 구전으로 시행할 것을 청하는 이조의 계목
○ 이조 계목(吏曹啓目)에,
“권지 승문원부정자에 김용규(金容圭), 유석(柳㙽), 정원화(鄭元和), 유종식(柳宗植), 김학진(金鶴鎭), 홍재찬(洪在瓚), 서정순(徐正淳), 이근명(李根命), 임용상(林瑢相), 한기동(韓耆東), 유진학(兪鎭學), 강찬(姜), 조병필(趙秉弼), 이재덕(李載德), 조종익(趙鍾翼), 김덕균(金德均), 윤용구(尹用求), 윤선주(尹善柱), 윤조영(尹祖榮), 이윤우(李允宇), 이회룡(李會龍)을 모두 구전으로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그대로 윤허한다고 하였다
고종 8년 신미(1871, 동치10)
5월 30일(기미) 맑음
주천을 하였다
○ 주천(注薦)에서 4점을 받은 조병필(趙秉弼), 유종식(柳宗植), 유진학(兪鎭學), 김용규(金容圭), 조종익(趙鍾翼), 유석(柳㙽), 윤조영(尹祖榮), 정원화(鄭元和) 이상 8명을 기용하였다
10월 4일(신유) 맑음
] 자미당에 동지경연사 서경순 등이 입시하여 《시전》을 진강하였다
○ 진시(辰時).
상이 자미당에 나아갔다. 진강하는 데에 입시하였다. 이때 입시한 동지경연사 서경순(徐璟淳), 참찬관 조정희, 검토관 홍재찬, 가주서 유석(柳), 기사관 조종익ㆍ이근명이 각각 《시전》 제2권을 가지고 차례로 나와 엎드렸다.
상이 이르기를,
“사관은 좌우로 나누어 앉으라.”
하고, 이어 책을 폈다. 서경순이 ‘첨피기욱(瞻彼淇奧)’부터 ‘기욱삼장(淇奧三章)’까지 읽고, 계속해서 뜻을 풀이하였다.
호조 정랑 유승근(柳承根)에게 지금 통정대부(通政大夫)를 가자하였는데, 나이가 70세이고 시종신 전 교리 유석(柳)의 아비이다. --유석의 아버지로 인것으로 보인다.
고종 20년 계미(1883, 광서9)
9월 22일(기해)
20-09-22[03] 우부승지 유석에게 속히 올라오도록 하유할 것을 청하는 홍문관의 계
○ 박주양이 아뢰기를,
“우부승지 유석(柳)이 현재 경기 교하(交河)에 있으니, 속히 역말을 타고 올라오도록 하유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체차하고 전망 단자를 들이라.”
하였다.
위의 승정원일기에 나타나는 유석의 행적인데 거기에보면 여러 관직을 지낸것으로 보인다.
기사관-수차-부수찬-검토관--문신겸선전관--병조전랑-서학교수--강원도 어사-교리=장령- 사직--지평-필선-부호군-승지*부수찬-1883년에 충청어사--1886 경상좌도 어사 1894년-진주목사 등을 지냈는데
승정원 일기에 마지막으로 나오는 거록이 1900년 고종 37년이 마지막이다.
실록과 승정원 일기에 나타나는 현상은 이름의 한자가 다르나 행적이 같다.
위의 기록은 柳(王+奭--이 글자는 사전에 나오지 않음) --다른 기록은 柳奭이라 되어 있어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이 이 글을 적는 목적이다.
그래서 주목한 것이 유석의 부친이 호조정랑 유승근이라는 기록이 있어 찾아 보았으나 전주유씨로 나와 있을뿐 유석과의 관계는 부자일 가능성만 있을 뿐 별다른 내용이 없다.
여기서 주목할 일은 여러 자료에서 언급한 것이 한사람을 지칭 하지만 이름의 한자가 달라서 同名異人인지 아니면 同名一人 지는 정확하게 구별하기는 어렵지만 어떻게 보면 기록의 誤謬로 보아야 할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통도사 부도전 부근 암벽에 새겨진
유석이라는 글자도 柳奭이라는 글과 다르지만 암행어사로 활동한 시기가 1886년에 이므로 그 당시에 새겨진 것으로 보아야 하는 것으로 생각되고 서생면에 있는 수의 암행어사 유석과는 동일 인물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다만 아쉬운것은 기록의 오류로 보기에는 조선사회가 기록이 아주 중요시 여기는 유교 사회이지만 조선말기라
정확한 기록이 될수 없었던 시기라 생각되기에 그렇다.
언젠가는 정확한 기록을 밝혀줄 자료가 있을것으로 생각된다.
繡衣相國 淸德碑를 보면서 우리나라의 기록이 조선 말기에는 어수선한 분위기로 인하여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드니 기록의 중요성이 얼마나 중요한 것 같다.
그리고 한 가지 추가 할것은 비석이 세워졌다 하여 비석에 새겨진 분이 그 지역에 왔다는 것은 아니다.
여러 사람이 찾아가서 격쟁을 하여 해결 하였을때 민원 발생한 지역에 세우는 경우도 있다.
서생면 수의상국 유석 청덕비를 보면서 2가지를 찾았다는 것이 큰 수확이라 본다,
하나는 부친이 유승근이고 전주이씨이며 繡衣라는 글이다.
수의는 수 놓은 옷 즉 금실을 수 놓은 옷이며 금의를 뜻하며 고관이라는 뜻과 어사를 뜻하는 것이 유석 비를 조사하면서 얻은 수확이다.
한자 柳奭
성별 남 --생년 1841년(헌종 7)
몰년 미상 --본관 전주(全州)
대표관직(경력) 경흥부사|경상좌도암행어사|내무부참의|대사간
1841(헌종 7)∼?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공필(公弼). 승근(承根)의 아들로 어머니는 박간(朴幹)의 딸이다. 1871년(고종 8) 친림경무대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874년 1월 의정부의 추천으로 강원도암행어사가 되어 평해·강릉의 허결(虛結)을 탕감할 것을 건의하였다. 다시 1883년 충청좌도암행어사로 임명되어 삼정(三政)의 폐해, 수령과 향리의 부정을 규찰하였다.
다음해 경흥부사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아서 중화부에 잠시 유배되기도 하였다. 각지에 큰 흉년이 들고, 화적이 횡행하던 1886년 경상좌도암행어사로 파견되어 민정을 살폈다.
또, 1889년에는 내무부참의로서 전주의 이서(吏胥)가 관노(官奴)를 학대하여 일어난 소요를 진압, 조사하기 위한 안핵사가 되었다. 1894년 대사간을 마지막으로 관계에서 물러났다.
첫댓글 현재까지 확인된 유석의 비는 영천 신녕면 사무소와 영산면 비석군에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