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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북민주항쟁동지회 엮음, <광부는 힘이 세다>, 푸른사상, 2020년 7월 25일.
사북항쟁의 역사성
맹문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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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북민주항쟁동지회가 운영하는 카페를 포털 사이트 다음(Daum)에서 발견해 들어가 보았다. 2019년에 개설된 것으로 보이는데, 회원수가 18명에 불과하고 게시한 자료도 많지 않았다. 그렇지만 ‘사북항쟁 사진첩’에 게시된 사진들은 1980년에 일어난 항쟁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었고, ‘진실 규명’에 게시된 피해자들의 증언은 사북항쟁에 대한 역사적 규명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일깨워주었다. 고인이 된 이명득, 박노연, 김분년은 물론이고 전효덕, 이원갑, 노금옥, 신 경, 윤원철, 윤병천 등의 증언은 당시 수사를 맡았던 계엄사령부 군인들이 얼마나 잔인하게 광부들을 짓밟았는지를 생생하게 들려주었다. 광부들은 빨갱이로 몰려 가혹하게 폭행과 고문을 당해 이빨이 부러졌고 고막이 터졌고 무릎이 나갔고 발목이 부러졌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성적 학대도 당했다.
카페의 ‘타이쓴통신―배신당한 사북의 봄’에는 사북항쟁의 배경과 의의가 정리되어 있었다. ‘타이쓴통신’은 황인오 사북민주항쟁동지회 회장의 말에 따르면 전 헤비급 세계챔피언을 지낸 마이크 타이슨의 이름을 딴 카드 뉴스이다. 보다 공격적으로 뉴스를 전하려는 의지로 읽히는데, 이 글에서 주목되는 점은 사북항쟁을 노동 문제의 차원을 넘어 정치 문제로 해석한 것이다. 실제로 1980년 4월 21일에 일어난 사북항쟁은 국민들의 저항을 잠재우며 권력을 장악해가던 신군부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리하여 신군부는 사북에 관한 보도를 사흘 만에 허가하면서 광부들을 폭도로, 사북을 무법천지로, 항쟁을 노노갈등으로 몰아갔다.
위의 글에 따르면 당시의 공권력은 광부들에게 적어도 세 번의 배신을 했다. 첫 번째는 광부들을 산업전사로 부르면서 석탄 증산만을 앞세워 가장 위험한 재해 환경에 몰아넣은 일이다. 1980년 전체 탄광노동자의 56,173명 중 총 재해자가 5,885명으로, 10명 중 1명이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었다. 두 번째는 기업주와 어용 노조의 편에 서서 광부들의 노동권익을 침해한 일이다. 1980년 4월 21일 오후 2시경 노조사무실에 모인 광부들 사이에 숨어 있다가 발각된 사복 경찰은 지프 차량으로 광부들을 깔아뭉개고 도주했다. 광부들의 목숨조차 경시한 경찰의 그 행동이 사북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세 번째는 항쟁을 촉발한 당사자로서 원만한 수습을 약속하고도 불법적으로 광부들을 연행한 뒤 폭행과 고문을 가한 일이다. 계엄당국과 강원도경은 1980년 5월 6일 수습회의를 한다고 광부 대표들을 사북읍 사무소로 유인한 뒤 영장 없이 체포해 밀실에서 잔혹하게 고문을 자행했다. 뿐만 아니라 광부들 간에 서로 고발해야 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광산촌의 인심을 파괴했다.
사북민주항쟁동지회의 이와 같은 기록과 의견은 사북항쟁을 이해하고 역사적인 평가를 내리는 데 나침반 역할을 한다. 더 이상 사북항쟁을 부정적인 상황을 나타내는 ‘사태’로 명명해서는 안 되고, 노노 갈등으로 국한시켜서도 안 된다. 사북항쟁은 기업주와 어용 노조의 횡포로 말미암아 오랫동안 임금, 인권, 안전, 보건, 재해 보상, 복지 등에서 고통받아온 광부들의 집단 항의를 공권력이 왜곡시켜 폭행하고 고문한 반민주적이고 반인권적인 사건이다. 따라서 광부들의 항쟁은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저항한 부마항쟁, 5·18광주항쟁과 같은 차원에서 그 진상을 규명하고 역사적인 의의를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2
가진 것 없고 배운 것도 없고
아무런 빽도 없어 선택한 막장인생
열심히 탄을 캐면 돈을 벌 줄 알았다
열심히 일하면 희망이 있을 줄 알았다
죽기 살기로 일하면 막장인생 벗어날 줄 알았다
하지만 도급제 노동은 그게 아니었다
땀 흘린 대가는 너무도 보잘것없고
회사는 늘 안전보다 생산이 먼저였다
노동조합은 한 번도 우리 편이 아니었고
공권력마저도 한통속이었다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보고도 못 본 채 듣고도 모른 채
‘주면 주는 대로 받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라’
그렇게 짐승이길 강요했다. 노예처럼 살라 했다
짐승도 발길에 차이면 눈빛이 달라지기 마련
더는 참고 살 수가 없었다
둑이 무너지듯, 활화산 불길처럼 폭발해 버렸다
계엄령 서슬에 꽁꽁 얼어붙은 대한민국
지식인들은 침묵했지만 우린 무식했기에 용감했다.
1980년 4월 사북항쟁의 역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인권 사각지대 안전 사각지대에 버려진 막장 인생들
‘광산쟁이도 사람’임을 세상에 선언한 거다
이러한 원인과 시대 상황을 무시하고서
누가 우리를 폭도로 내몰았나?
언론은 왜 폭동으로 진실을 왜곡했던가?
그 시절 역사의 현장에 함께했던 주역들은
고문 후유증과 생활고에 하나둘 쓸쓸히 죽어가고
사북광업소마저 폐광으로 2004년 10월 문을 닫았다
우리의 억울한 사연도 무너진 갱도에 묻히고 마는가?
이 세상천지에
우리의 검은 손 잡아줄 사람 아무도 없단 말인가?
이제 늙은 아버지 어머니 된 우리의 소원은
‘폭도’라는 이름의 주홍글씨
‘사북사태’란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다
얼마 남지 않은 인생,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기 전에.
―성희직, 「1980년 ‘사북’을 말한다」 전문
광부들은 “열심히 탄을 캐면 돈을 벌 줄 알았”고 “열심히 일하면 희망이 있을 줄 알았”으며 “죽기 살기로 일하면 막장인생 벗어날 줄 알았다”. 그렇지만 “땀 흘린 대가는 너무도 보잘 것 없”었다. “회사는 늘 안전보다 생산이 먼저였”는데, “도급제”의 시행이 그 구체적인 것이었다.
도급제란 돈내기라고 불리는 작업 방식이다. 작업의 성과에 따라 임금을 지불하는 방식으로 일제 강점기에 조선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해 일본 기업주들이 사용했는데, 해방 뒤 조선의 기업주들도 활용해 노동자들로부터 원성을 샀다. 일하는 대로 번다는 허황된 생각을 노동자들에게 심어주어 그들의 노동력을 쥐어짜는 것 이상 아무것도 아니었다. 도급제 형식은 막장이 여러 개 있는 광산에서 갱 작업자에게 나눠주는 갱 도급제 또는 갱도 도급제, 출근 조별(갑, 을, 병)로 작업량을 계산하는 방도급제 또는 가다 도급제, 3∼5명이 한 조를 이루는 막장 도급제 또는 마구리 도급제 등이 있다.
“가진 것 없고 배운 것도 없고/아무런 빽도” 없는 광부들이 “더는 참고 살 수가 없”다고 “활화산 불길처럼 폭발”한 것은 이와 같은 상황 때문이었다. 기업주의 노동 강요뿐만 아니라 임금 착취, 반인권, 어용 노조, 암행독찰대에 의한 감시, 목욕탕조차 없는 주거 환경, 즐비한 퇴폐업소, 부실한 의료시설 등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조건은 전무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노동조합은 한 번도 우리 편이 아니었”고 “공권력마저도 한통속이었다”. 언론도 지식인도 예술가도 침묵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광부들은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보고도 못 본 채 듣고도 모른 채” 있어야 했다. “주면 주는 대로 받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그렇게 짐승”처럼 또 “노예처럼”로 살았다.
그렇지만 광부들은 “짐승도 발길에 차이면 눈빛이 달라지기 마련”이듯이 가만있지 않았다. “지식인들은 침묵했지만” “무식했기에 용감했다”. “1980년 4월 사북항쟁의 역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인권 사각지대 안전 사각지대에 버려진 막장 인생들”이 “‘광산쟁이도 사람’임을 세상에 선언한” 것이다.
“이러한 원인과 시대 상황”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한 관련이 있다. 주지하다시피 10·26사건은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대통령 경호실장이 정치와 경제 문제에 불만을 가진 민중들의 항쟁(구체적으로는 부마항쟁)에 온건하게 대처한다고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을 질타하면서 일어났다. 반항하는 민중들을 모두 탱크로 눌러버려야 한다는 박정희와 차지철의 강경론에 대해 김재규는 재판의 최후 진술에서 밝혔듯이 더 많은 국민들의 희생을 막기 위해 대통령과 경호실장 등을 제거한 것이다.
10·26사건의 도화선이 된 부마항쟁은 1979년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 부산과 마산 지역에서 일어난 민중 항쟁이다. 박정희의 유신체제는 반정부 인사들을 연행, 체포, 고문하는 등 독재 정치를 심화시켰다. 또한 1978년 12월 26일부터 이듬해 3월 5일까지 이란의 석유 수출 정지(제2차 오일쇼크)에 따른 석유 수급의 어려움, 가격 상승, 세계 경제의 혼란 등으로 한국 경제가 위기에 빠지면서 기업들의 부도가 늘어났다. 특히 노동집약적 제조업이 집중된 부산과 마산 지역에서 타격이 커 노동자들과 하층민들의 삶이 어려워졌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부산대학교 학생들이 반정부 시위를 시작하자 다른 대학교 학생들과 다수의 시민들이 합세했고, 18일에는 마산으로 확대되었다. 박정희 정부는 부산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마산에 위수령을 발동하는 강경책으로 대응했다. 그 결과 표면적으로는 진압되었지만 언제 다시 일어날지 모르는 민중들의 항쟁에 박정희 정권은 상당한 부담을 가졌다.
10·26사건에 대한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은 전두환은 하나회(신군부)를 중심으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불법적으로 연행한 12·12군사쿠데타를 감행했다. 군권을 장악한 신군부는 국방부며 중앙청 등을 점령해나가면서 국가 권력을 탈취했다. 방송국과 신문사를 통제하는 한편 1980년 ‘서울의 봄’을 짓밟고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적으로 확대한 뒤 5·18광주항쟁을 잔인하게 진압했다.
1980년 4월 21일에 일어난 사북항쟁은 이와 같은 시대 상황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신군부는 12·12군사쿠데타를 감행한 뒤 국가 권력을 탈취해나가는 과정에서 광부들의 항쟁을 무시할 수 없었다. 정권 탈취에 방해되는 세력은 무조건 진압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신군부는 사북항쟁의 광부들을 “폭도로 내몰”았고, 광부들의 항쟁을 “폭동으로 진실을 왜곡”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시절 역사의 현장에 함께했던 주역들은/고문 후유증과 생활고에 하나둘 쓸쓸히 죽어가고” 있다. “사북광업소마저 폐광으로 2004년 10월 문을 닫았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화자는 “우리의 억울한 사연도 무너진 갱도에 묻히고 마는가?”라고, “이 세상천지에/우리의 검은 손 잡아줄 사람 아무도 없단 말인가?”라고 안타까워하고 있다. “얼마 남지 않은 인생,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기 전에” “이제 늙은 아버지 어머니 된 우리의 소원은/‘폭도’라는 이름의 주홍 글씨/‘사북 사태’란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 일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3·1운동은 물론이고 4·19혁명, 5·18항쟁, 6월항쟁, 촛불항쟁 등의 민중항쟁이 그 역사적 의의를 획득한 데서 잘 볼 수 있다. 그렇지만 민중항쟁의 역사적 의의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각고의 동참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배우고 센 놈들이
폭동이야 하고 외치면
광부는 폭도가 되고
누구는 빨갱이도 되었다가
명. 예. 회. 복.
그들에겐 너무 무거운 네 글자
40년간 밀고 온
사북의 광부들은 힘이 세다.
―김연희, 「힘이 센 광부들」 부분
그동안 “배우고 센 놈들이/폭동이야 하고 외치면/광부는 폭도가 되고/누구는 빨갱이도 되었다”. 광부들에게 “명. 예. 회. 복.”은 “너무 무거운 네 글자”였다. 그렇지만 사북항쟁은 신군부가 통제하고 있던 언론들이 불렀던 사태와 폭동으로 함몰되거나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사북항쟁을 알게 된 노동자들은 빼앗겼던 노동권을 되찾을 용기를 얻었고, 지식인들과 대학생들은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인식하게 되었다. 언론들도 사북항쟁의 실정을 더 이상 왜곡시킬 수 없었고, 기업 관계자나 정부 관계자들도 광부들의 주장을 무조건 무시할 수 없었다. 그만큼 “40년간 밀고 온/사북의 광부들은 힘이 세”었던 것이다.
“광주민중항쟁도 공수부대가 광주시민을 학살하면서” “걷잡을 수 없는 들불이었”듯이 “일시에 사북을 해방구로 만들어버린 항쟁은/피를 먹고 자라는 민주주의의 접점이었다”(양기창, 「사북, 봄날의 교향곡」). 이처럼 “사북민중항쟁 40년 세월”은 “되살아오고 있다”(이승철, 「사북의 노래 2」). “광부들이 일으킨 민주주의 함성/사북항쟁은 영원”(김창규, 「사북항쟁」)한 것이다.
3.
솔모랭이 돌아 신작로 걷다보면
넌지시 발걸음 끌어당겨
비탈진 돌계단 내려서게 하는 곳
때로는 미닫이 유리 쪽문 열릴 때마다
거나한 노랫가락에 섞인 푸념들이
빛바랜 푸른 페인트 조각처럼
점점이 떨어져 마당을 떠돌던 곳
씻어내도 파고드는 검은 분진이
그날의 노역으로 쌓인 가슴들 열고
느릿하게 군정거리며 익는 삼겹살을 안주 삼아
흰 막걸리 한 사발을 감로수처럼 비우던 곳
폐광 뒤 모두 떠난 좁고 깊은 마당에는
벌겋게 달아오르던 무쇠난로 하나
뼈만 남은 연탄재 끌어안은 채
녹슬어 구멍 뚫린 몸통으로 삭아가고 있다
검은 루핑 지붕을 들썩이던 목소리들
빈 항아리 밑바닥에 엉켜 붙어 있다
솔바람도 쉬어가는 길 아랫집
꿈을 향해 검은 인주를 찍어
꾹꾹 옮기던 발걸음 받쳐주던 돌계단은
먼 길 떠난 몇몇 이 소식 전해 주려는 듯
단단했던 허릿살 드러내며 허물어지고 있다.
―서승현, 「길 아랫집」 전문
광부들이 삶을 영위하던 광산촌은 “때로는 미닫이 유리 쪽문 열릴 때마다/거나한 노랫가락에 섞인 푸념들이/빛바랜 푸른 페인트 조각처럼/점점이 떨어져 마당을 떠돌던 곳”이었다. “씻어내도 파고드는 검은 분진이/그날의 노역으로 쌓인 가슴들 열고/느릿하게 군정거리며 익는 삼겹살을 안주 삼아/흰 막걸리 한 사발을 감로수처럼 비우던 곳”이기도 했다. 탄광 일이 힘들고 임금이 착취당하고 도서관이나 영화관 하나 없을 정도로 환경이 열악했지만, 서로 푸념을 나눌 수 있고 삼겹살을 안주 삼아 막걸리를 나눌 수 있는 터전이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1989년 정부의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이 발표되면서 광산촌은 급속하게 무너졌다. 석유 가격이 하락하는 국제 에너지 환경의 변화에 비해 석탄 가격은 상승하고, 국민 소득의 증대로 가스나 전기 등의 고급에너지를 선호하는 추세가 늘면서 석탄산업 구조조정 정책으로 추진했지만, 대책을 마련하지 않고 졸속으로 시행해 광산촌은 큰 타격을 입었다. 그 바람에 탄광 일에 몸 바쳐온 광부들은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광산촌을 떠나야 했다. “광부들을 싹 쓸어버리겠다는 석탄합리화 진압대”에 “봄눈처럼 순진한 광부들은 저항 한 번 못해보고” “서울은 근처도 못 가보고/그저 안산으로, 수원으로, 부천으로”(정연수, 「사북은 봄날」) 쫓겨 간 것이다.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이 발표된 뒤 광산촌은 탄광 일을 하다가 부상당하거나 진폐나 규폐의 재해로 말미암아 노동할 수 없는 광부들만 남게 되었다. “폐광 뒤 모두 떠난 좁고 깊은 마당에는/벌겋게 달아오르던 무쇠난로 하나/뼈만 남은 연탄재 끌어안은 채/녹슬어 구멍 뚫린 몸통으로 삭아가고 있”는 것이다. “검은 루핑 지붕을 들썩이던 목소리들/빈 항아리 밑바닥에 엉켜 붙어 있”거나, “꾹꾹 옮기던 발걸음 받쳐주던 돌계단”이 “단단했던 허릿살 드러내며 허물어지고 있”는 모습도 그러하다. 그리하여 “우리들 삶의 터전 잃지 말고/일어나자”(최승익, 「생환하는 그날까지」)라는 외침 대신 폐광촌에 카지노가 들어서게 되었다.
사북 갱구 막은 자리에 카지노 간판을 달았다
탄광이나 카지노나
살고 죽는 확률은 마찬가지
막장으로 선택한 갱구가 닫히면서
그래도 몇이야 잭팟을 터트렸겠지
탄광은 밤을 새워 석탄을 실어 나르고
카지노는 밤을 새워 코인을 실어 나르는
탄광촌의 병방은 오늘도 막장
이마에 희미한 안전등 달고도 수만 명 죽었는데
갱도보다 삐까번쩍
얼마나 더 죽이자고 카지노 불빛 저 난린지
카지노 불나방의 눈은 점점 커지고
채탄 막장이야 뺏길 것도 없이 찾아왔다지만
있는 것 다 뺏고도 새로운 막장으로 떠미는 카지노
갱도보다 더 독한 막장.
―정연수, 「카지노 불나방」 전문
“사북 갱구 막은 자리에 카지노 간판을” 달고 있는 것이 현재의 광산촌 모습인데, 화자는 “탄광이나 카지노나/살고 죽는 확률은 마찬가지”라고 진단한다. “탄광은 밤을 새워 석탄을 실어 나르고/카지노는 밤을 새워 코인을 실어 나르는/탄광촌의 병방은 오늘도 막장”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마에 희미한 안전등 달고도 수만 명 죽었는데/갱도보다 삐까번쩍/얼마나 더 죽이자고 카지노 불빛 저 난린지” 화자는 걱정하고 안타까워한다. “채탄 막장이야 뺏길 것도 없이 찾아왔다지만/있는 것 다 뺏고도 새로운 막장으로 떠미는 카지노/갱도보다 더 독한 막장”이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정부가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을 전면적으로 시행하면서 광산촌은 회복 불가능한 상태로 무너졌다.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미처 떠나지 못했거나 부상당하거나 진폐 재해로 말미암아 폐광촌에 남은 광부들은 불안과 고통에 시달렸다. 그리하여 1994년 12월 정부에 핵폐기물 처리장을 설치해달라고 요구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전문가들의 검토 결과 폐광촌이 핵폐기물 처리장 시설을 설치할 장소로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진단되어 광부들의 요구는 취소되었다. 그 대신 광부들의 절실한 요구에 의해 폐광촌에 카지노가 들어서게 되었다.
강원랜드는 1995년 12월 ‘폐광지역 개발지원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 공포되면서 내국인 카지노 개설의 근거를 마련했다. 1997년 2월 강원도의 ‘탄광지역 개발촉진지구 개발계획’ 지정 고시에 이어, 8월 카지노 사업 대상 지역으로 정선군 고한읍 백운산 지구 200만평을 지정했다. 그리하여 2003년 4월 강원랜드 호텔, 카지노 및 테마파크를 개장했다. 2004년 10월 방문객 500만 명을 넘어섰고, 2005년 3월 ‘폐광지역 개발지원에 관한 특별법’ 개정으로 2015년까지 시효를 연장했다. 2007년 12월 강원랜드 창사 이래 첫 매출 1조 원과 자산 2조 원을 넘어섰다. 2009년 3월 강원랜드 카지노 방문객이 1,500만 명을 넘어섰고, 2011년 12월 ‘폐광지역 개발지원에 관한 특별법’ 개정으로 2025년까지 시효가 연장되었다.
강원랜드는 폐광 지역의 경제 발전과 국가 경쟁력을 높인다는 명분으로 카지노를 소유하고 있다. 2007년 매출액이 1조 원을 넘어섰고, 2009년 방문객이 1,500만 명을 넘어섰을 정도로 호황을 누리고 있다. 그렇지만 폐광촌 주민들의 삶에 큰 기여를 하지 못하고 있다. 강원랜드가 2006년 진폐 재해자 복지사업에 지원한 사업비는 9천만 원으로 폐광 지역 진폐 재해자 1만 3천여 명에 배분하면 “1인당 6천 원짜리 국밥 한 그릇 지원이 전부인 셈이다.”
뿐만 아니라 용역업체와 비정규직 노동자들과의 차별 문제가 심각하고, 신입사원 채용 과정에서의 비리 또한 심각하다. 주지하다시피 강원랜드는 탄광이 정부의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에 따라 문을 닫으면서 지역민의 일자리 창출에 기여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그리하여 폐광 지역에서 태어나 자란 청년들은 강원랜드에 입사하기 위해 관광학과 등에 들어가 공부하며 준비해왔다. 그렇지만 그들은 소위 ‘빽’이 없어 낙방했고, 국회의원을 비롯해 힘 있거나 연줄 있는 부모를 둔 자녀들은 채용되었다. 2012∼2013년 강원랜드에 채용된 518명 전원이 청탁 대상자였다는 언론 보도는 공정한 기회를 기대한 폐광촌 주민들은 물론이고 국민들에게 큰 상실감을 주었다.
강원랜드 홈페이지에는 사업 분야로 호텔&콘도, 워터월드, 스키, 골프, 카지노, 사회공헌 등 여섯 가지를 소개해놓고 있다. 사회공헌의 세부 사업으로는 미래 인재 육성, 지역경제 활성화, 지역 복지, 나눔과 치유 등 네 가지인데, 지역 복지의 세부 내용은 진폐 복지 사업, 취약 계층 복지 사업, 복지 협력 사업 등 세 가지이다. 진폐 복지 사업은 “2004년 진폐단체 지원사업을 시작으로 재가진폐재해자 및 요양환자들의 건강, 여가, 생활과 관련된 다양한 지원사업을 추진하고 있으며, 탄광 사고로 인해 사망한 순직자 유가족의 경제적, 정서적 어려움을 나누기 위한 사업도 2015년부터 진행하고 있습니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너무 늦게 시작한 사업이어서 진폐재해자는 물론 순직한 유가족에게 어느 정도의 위로가 되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이 또한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4.
가슴조차 검었던 광부들이
광부가를 부르며 행진했던
구 안경다리 옆의 새 안경다리 밑
하얀 비옷 입은
강원랜드 사내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
비정규직 철폐가 부르며 지나간다
지상의 직업 가지기 소원이었던 아비 대신
막장만 헤집고 다니던 남편 대신 가진 첫 직업
강원랜드 사내하청 비정규직 노동자
첫 번째 출정이다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출정의 행렬
진폐병동에서 시든 남편이 지켜볼까
굴진하다 석탄 더미에 묻힌 아비가 들어줄까
노래는 흔적도 없이 거센 빗줄기에 묻히고
장례의 행렬처럼 강원랜드 카지노를 향해
묵묵히 나아간다
그들 뒤를 구 안경다리의 어둑한 눈빛이
조용히 뒤따르고
기차는 길게 소리를 내지르며
행렬의 맨 뒤를 쫓아간다
―김용아, 「안경다리를 지나」 전문
“가슴조차 검었던 광부들이/광부가를 부르며 행진했던/구 안경다리 옆의 새 안경다리 밑”을 “하얀 비옷 입은/강원랜드 사내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철폐가 부르며 지나”가고 있다. 그들은 “지상의 직업 가지기 소원이었던 아비 대신/막장만 헤집고 다니던 남편 대신 가진 첫 직업/강원랜드 사내하청 비정규직 노동자”이다. 정규직 노동자보다 사내외의 영향력이 크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첫 번째 출정이”어서인지,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다. “진폐병동에서 시든 남편”도 여건이 안 되기 때문에 그들의 행진을 바라보지 못하고, “굴진하다 석탄 더미에 묻힌 아비”도 그들의 행진곡을 들어주지 못한다.
그렇지만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행진을 멈추지 않는다. 자신들의 “노래는 흔적도 없이 거센 빗줄기에 묻히”지만 “장례의 행렬처럼 강원랜드 카지노를 향해/묵묵히 나아”가는 것이다. 자신들의 출정에 사용자는 물론 정규직 노동자나 언론이 관심을 가져주지 않더라도 행진을 멈추지 않는 것은 “그들 뒤를 구 안경다리의 어둑한 눈빛이/조용히 뒤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광부의 자식으로서 “안경다리”에서 1980년 4월에 일어났던 사북항쟁의 역사를 알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결코 외롭지 않은 것이다.
1980년의 사북항쟁을 노조 부인의 린치사건으로 떠올리는 이들이 많다. 그만큼 신군부가 언론 통제를 통해 사북항쟁을 왜곡시킨 영향이 큰 것이다. 사북항쟁의 본질이나 총체는 그와 같은 불미스러운 일이 아니라 광부들이 기업주와 어용 노조의 비인간적인 횡포에 저항한 것이고, 신군부의 잔인한 탄압에 맞선 것이다. 따라서 가혹한 환경에 억눌려 있던 광부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신군부의 잔혹한 폭력과 고문의 진상을 밝혀야 한다. 나아가 사과는 물론 재발 방지를 위한 약속을 받아야 한다.
사북항쟁에 관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조사위원회는 “국가는 인권 침해와 가혹 행위에 대하여 피해자들에게 총체적으로 사과하고 피해자들과 화해를 이루는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 국가는 사북 사건 관련자와 그 가족들이 입은 정신적 피해와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등을 권고한 적이 있다. 그동안 국가는 사북항쟁의 역사적 의의를 제대로 알리고, 광부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공동체 회복을 위한 노력을 제대로 했는가? 공권력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야만적인 폭력의 진상을 밝히고, 광부들에게 사과하고, 재발 방지 대책을 표명했는가? 사북항쟁 40년 기념 시집에 함께한 시인들이 다시금 묻고 있고 또 요구하고 있다.
孟文在 | 문학평론가·안양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