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과 골리앗과 사울
삼상17:45-47
(삼상 17:45)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삼상 17:46, 개역)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줄 알게 하겠고』
(삼상 17:47, 개역)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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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내용은
시대마다 바뀝니다.
전에 노아홍수의 경우에는
자연을 수단으로 기적을 일으켰다면
본문의 경우에는
사람을 상대로 기적을 일으킵니다.
즉 하나님께서 저 원수들 물리쳐 주십시오”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이땅에 오시고
하나님의 기적은
특별한 인간이 아니라
나 자신을 상대로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즉 “너라는 인간은 죽었다 깨어나도
예수님의 피를 못 믿는 인간이다.
하지만 내가 믿도록 조치하는 기적을
베풀겠다”입니다.
그렇다면 이 외중에서
뭔가 하나님쪽에 개입하는게
있어야 합니다.
즉, 인간의 개입을 차단시키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쪽에서 제시된 그 어떤 것도
우리의 구원에
도움이 못되기 막아두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식으로 개입하시느냐하면
본문에서
바로 소년 다윗입니다.
소년 다윗은
기존 사람들의 눈에는
그야말로 무장이 불가능한 아이요
목동일 뿐입니다.
비무장으로서는
전쟁터에 나설 수 없습니다.
반면에 골리앗은 완전무장입니다.
이 골리앗의 존재감은
이쪽 이스라엘 진영에서도
부러워할수 밖에 없습니다.
모든 인간들이 기대하는 기적은
실은 하나님의 기적을
도로 모독하는 성격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겁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그런 기적은
사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원하는 기적을
수용해버리면
진정한 구원의 근거가
흐려지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사도행전 4:12에 보면,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이름은 이미 삭제된 채
들어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벌리시는 모든 일에는
다음 두 가지 과정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이름의 본질을
드러내는 작업과
그리고 다른 하나는,
우리 이름의 삭제 작업입니다.
왜 우리 이름이 삭제되어야 하면,
사도행전 4;12에 보면
그 이유가 나와있습니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즉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이름은,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은 이름’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쓸모짝 없다고 버려진
쓰레기 더미에서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능력을 찾아내시는
방식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흔히들 “예수가 누구냐?
그 분은 안타깝게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구나”는 식으로
추가적으로 내용을 채울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은 자가 있구나.
어? 예수님이네!”라는 식으로
예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 비밀병기는 사람들의 인식으로는
전혀 보탬이나 도움이 되지 않는
인물이라는 인식을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이와같은 취지를 잘 반영해 주고 있는 것이
골리앗과의 전쟁입니다.
골리앗은 블레셋 나라의 장수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는
그만한 장수가 없었습니다.
1대 1로 대적할 만한 위인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덩치로만 대결하고자 하는
사고방식 때문에 그러합니다.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생각할 수 없는
다른 비밀병기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적들이나 이스라엘이나
아무리 연구해도 알 수 없는
비밀스러운 전쟁무기입니다.
이방나라에서 아무리 모방해도
도저히 모방할 수 없는 무기입니다.
하지만 이미 이스라엘에
상주하고 계셨습니다.
민수기 23:20-24에 보면,
“내가 축복의 명을 받았으니
그가 하신 축복을
내가 돌이킬 수 없도다
여호와는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
여호와 그의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시니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 중에 있도다
하나님이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었으니
그 힘이 들소와 같도다
야곱을 해할 사술이 없고
이스라엘을 해할 복술이 없도다
이 때에 야곱과 이스라엘에 대하여 논할진대
하나님의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뇨 하리로다
이 백성이 암사자 같이 일어나고
수사자 같이 일어나서
움킨 것을 먹으며
죽인 피를 마시기 전에는
눕지 아니하리로다 하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이 축복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이스라엘 속에 축복을 만들어내시는 분이 상주해계시기 때문입니다.
외부에서 아무리 저주가 가해지더라도
저주가 통하지 않게 됩니다.
저주가 비켜가고
저주는 복이 되고
저주는 도로 저주를 퍼부은 쪽으로
향하여 날아가게 되고 마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이러한 비장의 무기.
완전한 무기가 있다는 점을
이스라엘 진영에서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골리앗이 키가 2m 93cm 같으면
이스라엘 쪽에서는 4m50cm 정도의 거인이
나서야 비로소 적을 이긴다고 여기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이런 아이디어는
순전히 ‘인간의 이름’에서 나온 겁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이런 아이디어의 원천을
삭제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벌리는 전쟁이란
다른 이름에서 나온 무기가
어떤 무기인가를 알리는 식으로
전개됩니다.
그래야지만
승리가 오로지 인간의 이름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으로만
되돌아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 상주하시는 하나님께서
내세운 비밀병기는
소년 다윗이었습니다.
사울왕은 소년 다윗이 안스러워서
어른들이 입는 갑옷을 입히고
투구를 씌우고
칼을 들게 했습니다.
하지만 소년 다윗에게는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인간들이 내세운 형식이란
기적의 내용을 지켜내지를 못합니다.
실은 내용이 전혀 없는 자들이
그 위에다 종교적 형식들을
잔뜩 쌓아올려놓지만
막상 그 형식을 벗겨내면
아무런 내용이 없어지게 됩니다.
참으로 내용이 있는 자에게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게 마련입니다.
골리앗의 약점이 무엇인지를
인간 세계에서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악마의 약점을 알고 계시는 분은
하나님 뿐이십니다.
따라서 악마를 무너뜨릴 비장의 맞춤 무기도
오직 하나님만이 쓸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소년 다윗에게
돌맹이를 가지고
이마를 맞추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기적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차를 마주보면서 몰고 와서
먼저 피하는 자를 비겁한 자로
패배케 하는 게임에서 승리하는 방법은,
상대방이 보는 앞에서
먼저 차 핸들을 뽑아내는 것 뿐입니다.
그러면 상대에게
선택권이 넘어가버리는 겁니다.
바보가 아닌 이상
상대는 자신의 핸들을 틀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악마 앞에서
우리 이름의 가치를 뽑아내십니다.
그 이름에는 우리의 장점과
우리의 의로움과 거룩함과
수고함과 정성이
다 담겨있습니다.
그것을 뽑아버리는 겁니다.
이로서 쓰레기 같은 우리가,
우리 보다 더 쓰레기 취급받으신
예수님의 의해서 구원되는 겁니다.
이 방법이 하나님의 구원 방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