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초 마산 전경>
1920년대 초 마산 전경 사진 몇장 소개합니다.
도시의 형태는 지금과 완전히 다릅니다만 자연은 그대롭니다.
첫번째 것은 산복도로 쯤에서 파노라마로 찍은 신마산 일대 사진입니다.
오늘 쪽 끝부분의 노란 점이 당시 마산부청,
지금의 경남대학교 평생교육원(옛, 창원군청)입니다.
멀리 돝섬과 오른 쪽 이시미곶(MBC송신소 자리)가 선명하게 보입니다.
다음은 신마산 쪽에서 마산포(원마산) 쪽을 바라보며 촬영한 사진입니다.
붉은 점이 3.15의거탑 쯤이고 노란 점이 지금 봉암다리가 있는 곳입니다.
매립되기 전이라 3.15의거탑 바로 앞까지가 바다였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신월동 뒤쪽에서 신마산 일대를 찍은 사진입니다. 일본 사람들이 살았던 곳이라
집들이 제법 반듯합니다.
위 사진 확대본입니다.<<<
<1920년대 신마산 거리>
오늘은 1920년대 마산의 거리 사진들을 소개합니다. 모두 신마산 쪽 거리입니다.
당시 일본인들 사이에 주로 사용되던 상업용 엽서 사진들이 때문에
그들의 도시였던 신마산만 있습니다.
사진을 찍은 시기는 편차가 좀 있는 것 같습니다.
넉 장은 소인 일이 1922년(대정11년) 7월 11일이니 1920년-1922년쯤으로 보이고
소인이 없는 한 장도 건물 들어선 상태로 보아 비슷한 시기인 듯합니다.
모두 창원천 인근에서 찍은 것들입니다.
아래 두 사진은 京橋(?)ノ櫻과 馬山川(橋?)ノ櫻이라고 적힌 걸로 보아
두월동 통술거리 입구와 인근에 있었던 다리 부근에서 찍은 사진이며,
시기는 벗나무가 만발했던 4월인 것 같습니다. (푸른 색 화살표)
아래 두 사진은 京町이라 했으니 통술거리 남쪽 입구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붉은 색 화살표)
(마산보훈청앞 창원천 다리)
(무진 회사란 현재 상호 신용 금고와 같은말)현재 마산 보훈지청 자리
다음 사진은 本町通リ라 되어 있고 좌측에 바다가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까지
바다 쪽은 매립되지 않았던 월남동 1가 거리, 즉 지금의 경남은행 신마산 지점 앞
도로를 경남대 쪽으로 바라보고 찍은 사진 같습니다. 매립되지 않은 해변에
수양버들이 늘어선 것이 이채롭습니다. (노란 색 화살표)
사진에 보이는 다리는 신월천을 건너던 창원교인데 지금은 복개되어 하천이 사라졌습니다.
대형 일장기 두 개와 인력거, 파라솔과 어린 아이의 모습이 왠지 생소한 느낌을 줍니다.
위 사진의 찍은 위치를 추정해보았습니다.<<<
다음 사진은 1930년대의 두월동, 즉 신마산 일본인 상권의 중심지 입니다.
지금은 통술거리라고 부르지만 당시에는
쿄마치(京町)라 불렀던 신마산 최고의 번화가였습니다.<<<
쿄마찌(현 두월동) 입구 사진입니다. 현재 통술거리로 널리 알려진 곳입니다.
입구 오른쪽 건물은 현재도 똑 같은 모습의 건물이 있습니다만 동일한 건물은 아닙니다.
아마 저 건축물이 갖은 상징성 때문에 예전 모습 그대로 지은 것 같습니다.
3. 원전(原田 / 하라다)양조장
1904년에 설립한 마산최초의 일본 술 공장입니다. 원래 이름은 아즈마(東)주조장이었습니다.
상표는 '한목단'이었고 경남대 정문 앞, 옛 일성펌프 자리에 있었습니다.
1904년에 한목단(寒牧丹)이라는 상표를 가졌던 아즈마(東)주조장을 시작으로
마산에는 일찌감치 양조산업이 들어왔습니다.
한목단(寒牧丹)이라는 상표를 가졌던 아즈마주조장은 나중에 원전(原田)주조장으로
회사명을 바꿨는데 현 경남대 정문 앞, 옛 일성펌프 자리에 있었습니다.
아래 사진 1930년대 중반의 원전(原田)주조장입니다.
청수(淸水 / 시미즈) 양조장
1921년 창업하였고 신창동, 현 무학아파트 자리(전 무학소주 자리)에 있었습니다.
가장 규모가 컸으며 만주에 까지 수출하였는데 만주에서는 마산에서 온 청주를
‘조선의 나다자케(당시 일본에서 가장 유명했던 청주)’라 불렀습니다.
상표는 ‘大正櫻(대정앵)’과 ‘井筒平(정통평)’을 사용했습니다.
이 공장이 있던 곳 옆을 흐르는 창원천(대곡천이라고도 함)에는
이 공장의 이름 그대로 사용하는 청수교(淸水橋)가 있습니다.
소화(昭和 / 쇼와) 주류 주식회사 양조장
1929년에 창업하였고 월남동에 있었습니다. 현 무학소주의 전신입니다.
지난 주 포스팅한 야마무라(山邑)청주 양조장의 계열회사였으며
종합주류회사로 소주, 포도주, 위스키, 브랜드를 생산했습니다.<<<
산읍(山邑 / 야마무라) 청주 양조장
1929년에 창업하였고 월남동에 있었습니다. 만주에 수출하였는데
만주에서는 마산에서 온 청주를 ‘조선의
나다자케(당시 일본에서 가장 유명했던 청주)’라 불렀습니다.
상표는 ‘櫻正吉(앵정길)’이었고 지금 중리에 있는 무학주정 전신입니다.<<<
11. 서전(西田 / 니시다)양조장
1907년 설립하였고 상표는 계림(鷄林)이었습니다. 위치는 홍문동, 즉 현 신동아빌라 자리입니다. 마산의 토호 이승훈 씨가 운영한 백광청주가 바로 해방 전 이 회사입니다.
상당히 규모가 큰 양조장이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12. 촌기(村崎 / 무라자키)양조장
1925년 설립하였고 상표는 염록(艶錄)이었습니다. 홍문동에 있었습니다.
마산상공회의소백년사에는 1923년에 설립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진의 앞 건물은 사무실, 뒷 건물이 공장이었던 것 같습니다.<<<
<술과 꽃의 도시, 마산 3>
지난 두 번의 글을 통해 마산이 ‘술과 꽃’의 도시였다는 사실을 말씀드렸습니만
‘사쿠라’라는 일본어로도 우리 귀에 익숙한 벚꽃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아래 그림들은 강점기 마산의 벚꽃이 담긴 사진입니다.
직전 포스팅에서 이미 설명했듯이 꽃과 술은 마산을 상징하는 요소였습니다.
심지어 1929년 간행된『馬山現勢錄(마산현세록)』에서는 목차에「酒の馬山(술의 마산)」과
「花の馬山(꽃의 마산)」이라는 항목을 넣어 마산의 술과 꽃에 대해
집중적으로 설명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당시 마산 벚꽃이 하도 유명해 봄철에는 전국 각지에서 몰려드는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으며, 매년 4월 10일을 전후하여 부산․대구․대전․경성 방면에서
꽃구경을 위한 임시열차까지 있었습니다.
일제시대를 기억하는 한국인 중에는 당시 마산의 술이 유명했던 까닭을
단지 술 만이 아니라 이런 벚꽃과 함께 술을 마셨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마산이 술과 꽃의 도시였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글 한편 소개합니다.
강점기 마산에 거주했던 일본인 지식인 추방사랑(諏方史郞)이
자신의 저서 『마산항지』에서 술과 꽃으로 마산을 노래한 시구(詩句)를 소개한 부분입니다.
번역은 경남대학교 국문학과 배대화 교수가 했습니다.
花の馬山か 馬山の花か 秋は冱えたる 月の浦
꽃의 마산이냐 마산의 꽃이냐, 가을 깊어가는 달의 포구
酒の馬山か 馬山の酒か 花もさけさけ 水はこんこん
술의 마산이냐 마산의 술이냐, 꽃도 술술 피어나고 물은 용솟음치네
그렇습니다, 강점기 마산은 「술과 꽃의 도시」였습니다.<<<
<술과 꽃의 도시, 마산 2>
마산은 술 생산량에서도 이름이 높았지만 더 유명했던 것은 마산 술의 품질입니다.
마산 술의 향과 맛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습니다.
마산 술이 얼마나 유명했는지를 알만한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소개합니다.
식민지 시대,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술은 나다자케(灘酒, 탄주)였다고 합니다.
「나다자케(nadazake)」는 일본의 효고켄(兵庫縣)의 나다(灘)지방에서 나는
고급 청주를 말합니다. 지금도 생산되는 일본 고급 전통주입니다.
「나다자케」가 생산된 것이 1624년이라는 설도 있지만 실제 그 기원은
그로부터 훨씬 더 오래전인 14세기경이라고 합니다.
문헌에 의하면 무로마치(室町: 1338-1573)시대에 이미「僧坊の酒(승방의 술),
酒屋の酒(술집의 술)」이라고 불렸다고도 합니다. 가히 일본 최고의 술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산 술이 이 나다자케에 필적할 만 하다고 했으며,
만주에서는 마산의 술이「조선의 나다자케(灘酒)」라고 불릴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고 합니다.
직전 포스팅에서 말씀드린 대로 맑고 깨끗한 물과 술 빚기에 적당한 좋은 기후,
그리고 질 좋은 쌀, 삼박자 덕 아니었겠나 싶습니다.
「나다자케(灘酒)」급이냐, 아니냐, 라는 말을 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마산 술이 그만큼 특별한 평가를 받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음은 꽃에 대한 이야깁니다. 정확히 말해 '벚꽃'에 대한 이야깁니다.
1908년 삼증(三增)이사관이 신마산에 살던 일본인 유지들과 협의하여
동(洞)의 명칭을 일본식인 정(町, 마찌)으로 명명하고 정(町)의 경계를 획정하는 과정에서
어린 벚나무 5천 그루를 가로 양쪽에 4칸마다 심었던 사실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 자료를 종합해 보면 삼증 이사관이 벚나무를 심기 이전부터 마산에는
벚나무가 많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봄철이 되면 마산 전역에 벚나무가 만개하여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는
기록이 여기저기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증 이사관에 의해 식재된 창원천 좌우도로의
벚나무가 가장 아름다웠다고 전합니다. 일본인들이 남긴 기록이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장전 순(長田 純)과 고수마공(高須瑪公)이 쓴 『마산현세록』에 의하면
당시 창원천의 벚꽃은 4월 7일경부터 피기 시작하여 10일, 11일에 70% 개화하고
13, 4일부터 만개하여 17, 8일 경까지가 절정이었다고 합니다.
특히 창원천(옛 마산시장 관사 앞을 흐르는 하천. 대곡천,대곡하,마산천 혹은
일화계라고도 불렀음)의 맑은 물 위에 떨어지는 낙화가 일품이었다고 합니다.
이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이 부근에 앵정(櫻町, 사쿠라마찌, 벚꽃동네,
현재의 문화동)이라는 지명도 있었습니다.
당시 마산에서 가장 유명했던 요정 망월루가 창원천변에 있었습니다.
경남신문 조용호 기자는 마산개항 100년을 맞아 특집 기획기사로 연재한『마산개항백년』
1999년 4월 5일자에서, 망월루 주인의 딸이었던 모쯔스키는 일본에 살면서도
최근까지 3-4년에 한번 씩은 신마산을 찾았는데 망월루 앞의
창원천 벚꽃을 그렇게도 그리워했다고 적고 있을 정도입니다.
이와 같은 ‘술과 꽃의 도시’ 마산의 특징을 잘 나타내주는 자료가 남아 있습니다.
1937년 마산부에서 관광안내서로
간행한「觀光の 馬山(관광의 마산)」이라는 리플렛의 표지입니다.
아래 사진이 그것입니다.
일본인들에게 마산을 소개하기 위해 마산부가 만든 이 조그마한 인쇄물에는
마산을 둘러싸고 있는 무학산과 마산만, 그리고 다도해의 섬과 마산만을 출입하던
수많은 선박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 가운데 명주(銘酒)라고 적힌 술통과 함께 만개한 벚꽃이 흐드러진 것을 묘사하여
이 도시 마산이 가히 「술과 꽃의 도시」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쿠라 캉이라 불렀던 극장 앵관입니다.
마산 극장입니다.
마산 부두국 사무소입니다
<강점3시기의 건축물>
회사령 폐지로 시작된 마산의 산업시설 확충은 20년대의 주조 및 장유공장을 비롯하여
1930년대에는 대형 방직공작과 창고 등이 들어섰습니다.
군수산업과도 관련이 있는 이런 시설들은 동 시기에 매립된 해안지역에 대부분 배치되었지만
원마산 쪽에도 일부 들어서는 등 마산 전역에 걸쳐 건설되었습니다.
원마산 쪽 건설의 예로는 조선물산주식회사가 오동동에, 조선신흥방직회사가 산호동에
대규모로 들어선 것을 들 수 있습니다.
한편, 개항기에 신마산 쪽으로 집중 배치되어 불편을 더했던 관공서 건물들이
하나 둘 중앙마산으로 옮겨와 현재 합포구청(옛 마산시청) 일대인 중앙마산지역이
공공업무지역으로 본격 형성되는 변화도 보였습니다.
강점제3시기에 건축된 마산의 대표적인 건물들은 다음 표와 같습니다.
한상술의 논문에다 몇 건물을 추가하였습니다.
박영철 강정기시대의 주택
첫댓글 우와~ 정말 귀하고 소중한 자료인것 같습니다! 혹 다모아님의 개인 소장 자료인가요!! 다모아님 고맙습니다!!!
와..!! 대단하다..그래서 마산이 술과 벗꽃으로 유명했구나
위에서 8번째 사진은..
마산 제일극장에서 통술 거리 방향으로 볼때.. 2시 방향의 건물인데.. 옆에는냇물이 흘렀지..
여기서 몇몇 친구와 함께 고교때 수학 과외 수업을 받은 적이 있는데..2009 년 경에도 보았지.. 아직도 있을까..?
7 년 전.. 일재 강점기때의 집..백년 古屋의 다모아 집을 방문 했을때..그때 모습이 세롭다....소중한 자료다..!!
정말 - 좋은 자료!!
이런 소중한 자료를 어디서 구했어며- 이제사 발표하나- 그런데 이렇게 좋은 도시가- 이제 이름도 잃어 버리고-
안타갑다--나는 마산 내려가서 마산 이름 되찾기 운동 좀 하고 싶다-
정말 귀한자료입니다 신마산 보훈지청자리 마산극장 자리 정말 새롭습니다
내가 오래동안 살았던 동네인데 추억이 새롭습니다
나는 창원군청 근처에 일성펌프 앞에서 잠시 살았습니다 과연 역사적인 의미가있는 곳이었구요
허주님은 소생이 살았던 적산 가옥을 어떻께 아셨을까..!!
당시 국민학교 입학할때 손잡고 들어간 완월국민학교 동기였다는 것을 나는 늣게 알았네요...
왼쪽 가슴에 하얀 손수건 달고..
교문앞에는 당시의 지패 1환으치면 왼종일 씹을수 있는 천연 껌(칡)으로 내 주둥이는 검게 물들고..ㅎ..
5살때 였을까...!!
세상에 태어나 활동사진이라는 걸..처음 본 나..!! 당시 어머니와 함께 마산극장엘 갔었는데..의자가 길죽한 "밴치" 였고
극중 내용은..서울에서 항일 첩보원들의 암약상을 그린 독립운동으로 생각된다..2 번째 본 영화가 "딸 7형제" 란 코믹 영화였지..참으로 까마득 하다..65 년 전의 기억이 아직도 뇌리에..++
사람의 인본을 보다 밝게 비춘다..다모아의 자료가..!!!
은산!
우리동네극장이라서 마산극장, 제일극장 정말 많이 구경하려 다녔지!
제일극장은 예술악극단이 도착하면 배우들이 한줄로 걸어가면서 북과 악기와 마이크를 들고 다니면서
온동네를 돌아다녔고 낮1시나 시작할쯤은 극장 꼭대기에달린 스피커에서 흘러간 옛노래가 귀를 간지럽혔지!
헌데!이제는 희미한추억!!!!
지금 생각하면 정말 그리원지는 시절이니깐~~~~~~~~~~~~
@다모아 그래..그래..기억난다..ㅎ
내가 살던 중앙동 거리에도..
나는 대학교, 군대를 제외하고는 이곳을 떠나 살아 본적이 없다!
그만큼 이곳을 사랑하고 그리워한다!
그리고 아름답게 가꾸어가면서 멋진곳을 만들려고 노력한다!
옛날 만큼 낭만이 깃들지는 않치마는 창원천변이나 만날고개, 현병분견대등 내나름 대로 이지역을 위해서
헌신한 결과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근데, 마산에 몇안되는 근대화 유산이 이슬처럼 사라져가는것을 바라보면서 마음이 무겁네요!
장군동에있는 삼광청주가 시장의 무능으로 사라져갔고 개인의 적산가옥은 폐허가 되어 없어지고 있어니
나는 지금 활용하고 있는근대화 유산을 잘 관리하고 생애 마지막까지 즐기려합니다!
집내부 한컷 구경하고싶어면 사진올려도될까요!
나도 일본 강점기때의 적산 가옥에서 한 10년 살아..가끔은 일본집의 정취가 생각난다오..ㅎ
일본집에는 반드시..다다미 방과 놋쇄로 된 목욕통이 있고..웃물도 있었고..그리고 깔끔하게 잘 정돈된 신을 모시는 "제단" 같은 게 있었지..
다모아의 집 구경 좀 합시다..ㅎ
@김대규 그래 맞아요!
집집마다 신당이 다있습니다!
그신당의 격이 권력과 가문의 척도가 된다하니 알만합니다!
이번에 새로 집단장하고 보수를 했네!
다음기회에 시간이 나시면 우리 마고 동기생이라도 촣고 차라도 한잔 하면 어떨까 싶네요!
좋은 음악과 차 한잔 그리고 분위기!~~~~
클릭!!
와..!! 대단타..!! 차 한잔이 문제가 아니라..!!
이거 그냥 두어서는 안될것 같네요..!! 지방 향토 문화제로 등록후.. 시에다 기증하면 시에서 관리해주는데 ..
물론 관리비가 지불되고..영구적으로 존속된다오..까득이나 문화제가 부족한 다른 지자체에서는 이와 같은 문화제를 찿아 혈안이 되어 있다지요..!!
이제..사후 어떤 형태로던 찿아 올 변화에 대비하여..참조 하시길.
여기에다 손화백님의 걸작과 함께 현제 소장하고 있는 10000 여점의 한국 古미술품이 전시된다면..과연 어떻께 될까..
많은 관람객들이 줄을 서겠지요..!!!!이름하여.." 박영철 문화재단" 아니 "일암 문화재단" 앞에서..!! ㅎ
은산!
아직까지는 미공개로 하고,집사람 화실로 사용하고,
친한지인이 있어면 차나한잔 하면서 소박한 이야기 나누고 그렇게 지낸다오!
큰욕심 없이 조용하게, 그다음 문제는 시간을 두고 차분하게 생각하면서 그때가서 판단 할일이네!
여태까지 모두가 처자식 뒤바라지 한다고 고생많이 했어니
지금부터 남어지 여생은 자기 하고싶은것하고 신명나고 행복하게살아야 하지않겠나!
은산!
깊은생각에 고견 감사드립니다!
정원!
6 번째 사진은 ..이렇께 추측된다
마산극장 4거리에서 제일극장 방향으로 약 100 M 정도에 있는 다리 였지..
그 다리에서 10시 방향쯤에 "락히구락부"라는 건물이 있었고.. 서양 춤 추는 곳(요즘의 카바레)으로 기억된다..
마산 친구 김성규가 알꺼야..!
유년기의 대부분을 신마산 적산 가옥에서 보낸 나는 남달리 감회가 세롭다
처음 내가 살았던 일본식 가옥의 위치는
지금의 마산 경찰서에서 마산극장 방향으로 약 100 여M 진행방향 우측의 적산 가옥 2 층집 이였지..!!
집에 불 난적도 있었고..
동란 직후라 휴가 나온 군인이 "jeep차"에 총을 두고 잠시 화장실 간 사이..또래 친구의 총기 오발로 동네 꼬마가 죽었다..
슬픈 추억 였다
6.25 동란 직후.."크리스마스"가 가까이 오던 어느날 였을까 - 신마산 중앙동 비포장 신작로에는 미 군용 "쓰리코다" 한대가 뽀얀 먼지를 일어키며 달린다..
동네 아이들은 미군들이 던지는.. 껌..초코렛..비누..비스켓등을 주어려 힘끝 달렸고..나도 달렸다..
기아속에서 붂받치는 설움의 까닥을 그들은 알리야 만 ..
주림의 고통을 일찍 체험한 네~ 다섯살 아이들은 검은 매연 속에서도 넘어지고 찟기고 다쳐도.. 다시 일어나 달렸다..
멀게만 느껴지던 세월..잠던 숲속의 새벽 동화를 깨우려 함일까..
주린 뱃속을 까시로 찌르던 찔레꽃 피는 5월이 오면. .난 시절의 아픈 흔적에 가끔 젖는다.
옛 자료에서 한 시절로 되돌아 보는 시간이다
옛사진 볼 수 있게 해주시는 다모아님.. 오래간만 입니다.
좀 자주 나오시고 자주 좋은 것들 보여 주세요.
일제강점기는 "일제시대"로 바꾸어 부르느게 옳을 것입니다.
"미제강점기"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크든요.. 좌빨들의 장난인 것입니다.
꼭 그런것은 아닌것 같습니다!
왜정, 일제, 식민지 등의 표현 또한 일본 제국주의의 불법적인 침략에 의해 강제적으로 국가의 주체성을 상실했던 그 당시의 상황 표현에는 미흡한 표현이다 하여, 2000년대에 들어와서 국어학자나 역사학자들을 통해, 민족국가사의 입장에서 보아 가장 교육적이고 적절한 표현으로서 “일제강점기”라는 용어를 사용하게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민족의 압살정책을 펼쳤던 저 왜놈들에 대하여..
자라나는 이나라 이땅의 청소년들에게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 시킬수 있는 역사적 교육 관점에서 본다면..
단순 "일제시대"라는 말 보다는 "일제강점기"라는 표현이 훨신 더 강한 느낌으로 가슴에 다가 오니..
대단~ 대단합니더! 난 손 놔야 쓰겄습니더!!!
@달마봉 원.. 별 말씀을..!!
지금 생각하니..참으로 아름다운 마산였다..시대의 아픈 흔적이 고스란이 남아있어 더욱 애착이 간다..
여기가 내고향 마산 아니든가..+
무라자기양조장 건물 사진이 장군동 소재 삼광청주의 건물과 같아 보이는데 말입니다.
우리가 중학고 다닐 시절 토요일 하교길에 점심은 저집 차남 손정웅이 점심차릴 때 같이 차려주어 많이 얻어 먹었죠.
마산중.고등학교 등교하러 갈 때 저 양조장에서 조금 더 가면 허국중이 집도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