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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용어500(23)아귀~아란나행~아비규환~아수라장~여래선
300. 아귀 (餓鬼)
목마름과 배고픔 등 고통으로 가득찬 세상에 사는 중생.
탐욕이 많은 자가 사후에 떨어지는 생존상태로서, 불교에서 육도(六道:地獄·餓鬼·丑生·修羅·人間·天) 중 하나인 아귀도에 있는 자를 말한다.
인도에서 ‘아귀’란 말은 산스크리트어 프레타(preta)를 번역한 것으로 그저 ‘귀신’이라고도 번역한다.
프레타는 옛말로서 두 가지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 하나는 ‘죽은 사람’이란 뜻이고 또 하나는 ‘죽긴 했지만 아직 ‘사핀디카라나’라는 의식이 그를 위해
행해지지 않은 사람’이란 뜻이다.
‘사핀디카라나’라는 것은 일종의 장례의식으로서 제사 관련 문헌에 따라 내용이 다르긴 하지만,
대체로 사후 1년째, 사후 11개월째 (또는 6개월이나 4개월째), 그리고 사후 12일째 행해지는 의식이다.
이 의식은 바라문에 대한 사례를 증정하는 것으로 완결되고, 이에 의해 프레타는 ‘조상들의 영혼’ 축에
끼게 된다고 한다.
따라서 ‘프레타’란 것은 ‘죽은 후에 아직 조상들의 영혼 축에 끼지 않은, 죽은 이의 넋.’이라고 말할 수
있다.그 때문인지 프레타는 별로 좋은 이미지가 주어져 있지 않다.
한편 불교는 이것을 도입하여 인간이 이 세상에서 행한 행위가 어떤 것이냐에 따라 다음 세상에서 받을
생존 상태의 하나에 포함시켰다.
그 생존상태는 대체로 여섯 가지이므로 육취(六趣) 또는 육도(六道)라고 부르는데 지옥ㆍ아귀ㆍ축생ㆍ
아수라ㆍ인간ㆍ천(地獄,餓鬼,畜生,阿修羅,人間,天) 등 여섯 가지이다.
불교문헌에는 아귀에 대해 여러 가지로 나타나고 있는데 대체로 다음과 같다.
첫째 아귀들은 항상 목이 말라 고통 받는데 어쩌다 물을 발견하고 마시려 고 하면 그것이 피고름으로
바뀌어서 먹지 못하는 아귀이고,
둘째 입이 꼭 바늘처럼 가늘고 배는 산만큼 불룩하여 음식을 먹지도 마 시지도 못하는 아귀들이고,
셋째 무엇을 마시거나 먹으면 그것이 불이 되어 타오르므로 전혀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배고픔과
목마름에 몹시 고통 받는 아귀들이다.
또한 똥밖에 먹지 못하는 아귀, 제 살 만을 먹는 아귀도 있다고 한다.
간혹 우리는 먹는 것을 몹시 탐내거나 미친 듯이 먹어대는 사람을 가리켜서 ‘아귀’같다느니 ‘아귀병’에
걸렸느니 하고 비웃거나 욕하기도 한다. 티벳에서는 아귀를 ‘이다(yidvags)'라고 하고 일본에서는
’가키‘라고 그 한자어를 읽는데 먹을 것을 몹시 보채는 아이를 나무랄 때 욕하는 말로 쓴다고 한다.
301. 아나율존자 (阿那律 尊者): 천안제일 아나율 존자
천안제일(天眼第一) 아나율 존자는 부처님의 숙부인 곡반왕(斛飯王)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성격이 착하고 활달하였으며, 매우 총명하였을 뿐 아니라 음악, 기예(技藝),
그림 그리기 등의 재주에도 뛰어났습니다.
그리고 보시하기를 좋아하여 일곱 살이 되었을 때 엿, 가자, 떡 등을 들고 길거리에 나가 오가는 어려운
이들에게 나누어 주다가 어머니의 꾸중을 듣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꾸중을 들으면서도 계속해서
보시를 하였으므로, 어머니는 장차 큰 복을 받을 인물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착한 아나율에게는 한번 잠이 들면 잘 깨어나지 못하는 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출가한 다음, 늘 부처님의 꾸중을 들어왔습니다.
한번은 부처님의 설법을 듣던 도중 졸고 말았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아나율을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애닯고 애닯도다, 아나율아, 너를 깨우기 힘듬이 반합조개와도 같구나, 한번 잠들면 천년을 깨어나지
못하는 반합이 되어서야 어찌 수행하는 사문이라 하겠느냐?”
조용하면서도 호된 부처님의 꾸지람을 듣고 아나율 존자는 용맹심을 일으켰습니다.
“생사의 고뇌를 벗어나고자 출가한 내가 깊은 잠으로 인해 남들보다 수행에서 뒤떨어질 수는 없다.
도를 이루기 전에는 절대로 자지 않으리라.”
분발한 아나율은 눈을 감겨지지 않도록 양쪽 눈에 버팀대를 하고, 층암절벽 꼭대기로 가서 합장을 하고
발뒤꿈치를 든 채 정진했습니다. 버팀대를 하였기 때문에 눈은 하루도 못가 뻣뻣해졌고, 시간이 지나자
눈물이 흐르다가 진물이 나다 결국 피고름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적절히 잠을 자면서 정진하라.”고 타이르셨으나 아나율 존자는 계속 정진했습니다.
다시 부처님은 의성(醫聖) 기바를 보내 치료하도로 했습니다.
“잠깐만 주무시면 약을 발라 눈을 낫도록 해드리겠습니다.”
“방해하지 마시오.”
이윽고 7일이 되자 눈이 물러 빠져서 아나율 존자는 장님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아나율 존자는 낙견조명금강삼매(樂見照明金剛三昧)라는 법문을 깨달아 천안통을 얻었고,
삼천대천세계를 손바닥 위의 구슬을 보듯이 했다는 천안제일의 존자가 된 것입니다.
실로 부처님의 제자 중에서 심원한 통찰에 있어서는 아나율 존자를 능가할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용맹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 용맹심을 잡아 일으킬 때 번뇌의 구름은 스스로 사라지고, 마음 달은 스스로 밝은 빛을 뿜어냅니다. 아나율 존자는 바로 이 용맹심을 발하여 잠을 이겼습니다.
비록 육안(肉眼)은 잃었지만 모든 것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법안(法眼)을 얻었습니다.
<월간 법공양:조계종 원로위원 석주스님 글>
302. 아란나행 (阿蘭那行)
"세존(世尊)이시여, 만약 제가 아라한(阿羅漢)의 도(道)를 얻었다는 생각을 가졌다면 세존께서는
수보리는 아란나행(阿蘭那行)을 즐기는 사람이다. 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수보리는 실로 행하는 바가 없기 때문에 아란나행을 즐기는 사람이라고 이름하는 것입니다."
불교의 승려가 닦는 수행 방법 가운데 하나로 아란나(阿蘭那)란 범어 아란야(aranya)의 음역으로
무쟁처, 적정처(無諍處, 寂靜處)라고도 하며 시끄러움과 번잡(煩雜)함이 없는 숲이나 들판 같이
조용하고 다툼이 없는 수행하기 좋은 고요한 장소를 말하며 또한 번뇌(煩惱)와 시비(是非)가
끊어진 고요한 마음자리를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아란나행(阿蘭那行)이란 숲이나 들판 등 수행하기 좋은 고요한 곳에서 일체의 상(相)을 떨쳐 버리고
일체의 다툼이 없는 경지에서 고요히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비구(比丘)의 생활규범(生活規範)인
12두타행(頭陀行)의 첫번째 '재 아란야처(在 阿蘭若處)' 규범에 해당된다.
두타(頭陀)란 범어 ‘dhu-ta’를 음역한 것으로 ‘버린다ㆍ떨어버린다ㆍ씻는다ㆍ닦는다’ 등의 뜻을
내포(內包)하고 있다.
출가수행자가 세속의 모든 욕심이나 속성(俗性)을 떨쳐버리고 몸과 마음을 깨끗이 닦으며, 참기 어려운 고행을 능히 참고 행하는 것을 두타(頭陀) 또는 고행자(苦行者)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를 두타행(頭陀行) 또는 두타행자(頭陀行者)라고 하였다.
두타행(頭陀行)의 세부조목(細部條目)으로는 12頭陀行ㆍ13頭陀行ㆍ16頭陀 行ㆍ25頭陀行法이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12두타행법(頭陀行法)을 많 이 채택하고 있다.
☀ 12두타행(頭陀行)은 석가모니 당시부터 행하여졌던 것으로,
① 在阿蘭若處: 고요한 곳에 머무르면서 世俗을 멀리한다.
② 常行乞食: 언제나 걸식하여 信徒나 國王 등의 供養을 따로 받지 않는다.
③ 次第乞食: 乞食할 때는 마을의 일곱 집을 차례로 찾아가서 빈부를 따지지 않고 걸식하며,
일곱 집에서 밥을 얻지 못하면 그날은 먹지 않는다.
④ 受一食法: 하루에 한 차례를 한자리에서 먹고 거듭 먹지 않는다.
⑤ 節量食: 항상 배고프지 않을 정도로만 먹고 발우 안에 든 음식만으로 만족한다.
⑥ 中後不得飮漿: 정오가 지나면 과일즙ㆍ석밀(石蜜:사탕) 따위도 마시지 않는다. 漿:마음장
⑦ 著弊衲衣: 좋은 옷을 입지 않고 헌옷을 빨아 기워서 입는다. 비단폐
⑧ 但三衣: 內衣ㆍ上衣ㆍ重衣 등 세 가지 옷만을 가진다.
⑨ 塚間住: 무덤 곁에 머물면서 무상관(無常觀)을 닦는다.塚무덤총
⑩ 樹下止: 쉴 때에는 정자나 집을 택하지 않고 나무 밑에서 쉰다.
⑪ 露止坐: 나무 아래에서 자면 습기ㆍ독충ㆍ새똥 등의 피해를 입을 수 있으므로 한데에 앉는다.
⑫ 但坐不臥: 앉기만 하고 눕지 않는다.
석가모니의 제자 중에서는 대가섭(大迦葉)이 두타행을 가장 충실하게 닦았다고 한다.
결국 두타행은 애욕(愛慾)과 의식주(衣食住)에 대한 탐착(貪着)을 떠나서 심신을 깨끗하게 한다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석가모니 이후 많은 승려들이 두타행(頭陀行)을 닦았으며, 그 전통은 우리나라에도 이어져서 대부분의
고승들이 이 행을 닦았다.
☀ 12두타행(頭陀行)이란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에 의하면,
① 음식에 대한 탐욕에는 맛있는 음식을 탐내는 미식탐(美食貪)과 많은 음식을 탐내는
다식탐(多食貪)의 두 종류가 있으며,
⌾ 美食에 대한 탐욕을 제거하기 위해서 걸식과 次第乞食을 수행하고,
⌾ 多食에 대한 탐욕을 다스리기 위해서 일식(一食)과 절양식(節量食)을 수행하는 것이다.
② 의복에 관한 탐욕에는 많은 옷을 소유하려는 다의탐(多衣貪)과 부드러운 촉감의 옷을 입으려는
연촉탐(軟觸貪)과 비싸고 귀한 옷을 입으려는 상묘탐(上妙貪)의 세 종류가 있으며,
⌾ 이것을 치유하기 위해서 분소의(糞掃衣) 등을 입는 것.
③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놀고 싶어 하는 훤잡탐(?雜貪)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 아란야(阿蘭若)에 머물고,
④ 좋은 집에 대한 욕심인 옥우탐(屋宇貪)을 제거하기 위해서
⌾ 수하주(樹下住) : 나무 아래 머물다
⌾ 노지주(露地住) : 길에서 머물다
⌾ 총간주(塚間住) : 무덤에서 머물다 등을 수행(修行)하며,
⑤ 항상 기대거나 눕고 싶어지는 의락와락(倚樂臥樂)을 다스리기 위해서
⌾ 장좌불와(長坐不臥)를 수행하며,
⑥ 푹신한 방석과 침구을 바라는 부구탐(敷具貪)을 제거하기 위해서
⌾ 수좌(隨坐)를 수행한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303. 아미타경 (阿彌陀經) *불설아미타경의 개요
『아미타경』은 석존이 설법하신 모든 경전의 뜻을 통하게 하는 것이라 하여 고래(古來) 이것을
일대(一代)의 결경(結經)이라고 하고 있으며 질문도 없이 설법을 시작하셨다하여
무문자설경(無問自說經)이라고도 한다.
서분에는 이 경전의 육사성취가 이루어지는데 석존께서 법문하시는 장소는 사위국(舍衛國)의
기원정사(祇園精舍)이고 이 때 이 설법을 듣는 이들은 1250인의 아라한과 대승의 보살들이다.
정종분으로 가면 석존께서는 누구의 물음도 기다리지 않으시고 자진해서 사리불(舍利佛)을 부르시고
설법(說法)을 시작하시는데 극락의 의정(依正)과 중생의 인과(因果) 그리고 제불(諸佛)의 증성(證誠)들을 설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극락의 의정(依正)을 설하는 곳에서는 정토의 아름다운 보배 나무와 보배 연못, 꽃비, 법음(法音)등의 장엄상(莊嚴相)과 아미타불과 성중들의 광명과 수명의 무량(無量)함을 설하신다.
그리고 중생의 인과로써 극락정토에 왕생하는 인(因)을 설하시는데 그것은 다선근(多善根)
다복덕(多福德)의 염불(念佛)이외에 다른 것이 아님을 밝히신다.
그리고 제불(諸佛)의 증성(證誠)으로서 동, 남, 서, 북, 하, 상의 육방(六方)의 제불들이 염불(念佛)의
가르침이 진실하다는 것을 입마추어 찬탄함을 밝히신다.
극락의 의정(依正)에 대하여 보다 자세하게 설명하면 의정에는 의보(依報)와 정보(正報)가 있고
의보(依報)는 환경세계이고 정보는 극락왕생한 중생들의 신심(身心)을 말한다.
그리고 보(報)란 과보(果報)를 말하는 것이니 정보(正報)는 바르게 생존하는 자에게 보답되는 과보를
말하며, 의보(依報)는 정보(正報)가 의존하는 곳으로 극락국토와 그 산하 등을 말하는 것이니
과거의 업에 의하여 바른 마음과 육체는 정보(正報)인 것이다.
그러니 극락세계에 왕생한 중생들의 심신(心身)과 그 심신이 의지하고 살아가는 환경세계는 모두가
그 사람이 지어놓은 업에 의한 보답인 의정(依正)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유통분(流通分)은 사리불을 위시하여 많은 제자들이 법문을 듣고 그 회좌(會座)를
떠나는 것으로서 이 본경(本經)은 끝이 난다.
304. 아비규환 (阿鼻叫喚) ☀불교에서 나온 말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참상이라는 말.
아비지옥은 불교에서 말하는 8대 지옥 중 가장 아래에 있는 지옥으로 ‘잠시도 고통이 쉴 날이 없다’ 하여 무간지옥(無間地獄)이라고도 한다.
이곳은 오역죄(五逆罪)를 범한 자들이 떨어지는 곳이다. 즉 부모를 살해한 자, 부처님 몸에 피를 낸 자,
삼보(보물·법물·승보)를 훼방한 자, 사찰의 물건을 훔친 자, 비구니를 범한 자 등이다.
이곳에 떨어지면 옥졸이 죄인의 살가죽을 벗기고 그 가죽으로 죄인을 묶어 불수레의 훨훨 타는 불 속에
던져 태우기도 한다. 야차들이 큰 쇠창을 달구어 입·코·배 등을 꿰어 던지기도 한다.
이곳에서는 하루에 수천번씩 죽고 되살아나는 고통을 받으며 잠시도 평온을 누릴 수 없다.
고통은 죄의 대가를 다 치른 후에야 끝난다.
305. 아비발치 (阿鞞跋致): 불퇴전,
보살의 지위에서 다시는 물러나지 않으며 반드시 성불할 것이 결정되어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경지라는 뜻.
극락세계에 태어나면 왜 아비발치의 계위에 머물 수 있는 것인가?
"첫째는 아미타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기 때문이고,
둘째는 아미타 부처님의 광명을 입기 때문이며,
셋째는 흐르는 물과 새들이 항상 설법을 해 주기 때문이고,
넷째는 보살마하살들이 공부를 도와주는 도반이 되어 주기 때문이며,
다섯째는 죽지 않고 끝없이 공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라고 한다.
306. 아수라장 (阿修羅場) ☀불교에서 나온 말
끔찍하게 흐트러진 현장.
'아소라', '아소락', '아수륜' 등으로 표기하며 약칭은 '수라(修羅)'라고 하는데, '추악하다'라는 뜻이다.
아수라는 본래 육도 팔부중(八部衆)의 하나로서 고대 인도신화에 나오는 선신(善神)이었는데 후에
하늘과 싸우면서 악신(惡神)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증오심이 가득하여 싸우기를 좋아하므로
전신(戰神)이라고도 한다. 그가 하늘과 싸울 때 하늘이 이기면 풍요와 평화가 오고,
아수라가 이기면 빈곤과 재앙이 온다고 한다.
인간이 선행을 행하면 하늘의 힘이 강해져 이기게 되고, 악행을 행하면 불의가 만연하여 아수라의 힘이
강해진다. 아수라는 얼굴이 셋이고 팔이 여섯인 흉칙하고 거대한 모습을 하고 있다.
307. 야단법석 (野壇法席) ☀불교에서 나온 말
떠들썩하고 시끄러운 모습이라는 뜻.
《불교대사전》에 나오는 말이다. ‘야단(野壇)’이란 ‘야외에 세운 단’이란 뜻이고,
‘법석(法席)’은 ‘불법을 펴는 자리’라는 뜻이다. 즉,
‘야외에 자리를 마련하여 부처님의 말씀을 듣는 자리’라는 뜻이다. 법당이 좁아 많은 사람들을
다 수용할 수 없으므로 야외에 단을 펴고 설법을 듣고자 하는 것이다.
그만큼 말씀을 듣고자 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석가가 야외에 단을 펴고 설법을 할 때 최대 규모의
사람이 모인 것은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했을 때로 무려 3백만 명이나 모였다고 한다.
사람이 많이 모이다 보니 질서가 없고 시끌벅적하고 어수선하게 된다. 이처럼 경황이 없고 시끌벅적한
상태를 가리켜 비유적으로 쓰이던 말이 일반화되어 일상생활에서 흔히 쓰이게 되었다.
⌾ “너는 왜 그리 야단법석을 떠니?” 떠들썩하고 시끄러울 때 흔히 쓰는 용어가 야단법석이다.
줄여서 ‘법석을 떤다.’고 한다. 그러나 야단법석의 본래 뜻은 나쁘지 않다. 단어상 의미를 보더라도
“들판에 단을 세우고 부처님 가르침을 펴는 일”이 야단법석이다. 사부대중이 불법을 배우기 위해
한자리에 모여 법회를 여는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계실 때에는 야외에서 열리는 법회가 많았다. 많은 사람이 모이면 자연
시끌벅적해졌던 것이다. 부처님이 처음으로 야단법석을 연 것은 녹야원이다.
부처님은 영축산에서도 법화경을 설하는 야단법석을 폈다.
부처님 설법은 문답(問答)형식으로 진행됐고 활발한 토론이 이뤄졌다.
308. 약사여래 (藥師如來)
약사여래란 약사유리광여래(藥師琉璃光如來)의 준말로 약사불(藥師佛)이라고도 한다.
<약사경(藥師經)>에 이 여래(如來)의 본원(本願)과 그 국토, 이익이 기록되고 있다.
이 경전에 의하면 동방에 정유리세계(淨琉璃世界)가 있고 그 부처님을 약사유리광여래라고 한다.
이 부처님은 원래 보살이던 때에 12대원을 세웠다. 그 중에도 어둠 속에 있는 자에게 광명을 주고,
더러워진 자를 깨끗하게 해주고, 특히 몸에 결함이 있는 자는 내 이름(약사여래)을 듣고 차츰
그 불구의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고, 제병식재(除病息災)하고 원래의 몸으로 되게 하는 것이
본원 중의 본원이라고 서원하고 그 수행에 힘썼다.
이 부처님이 보리를 얻게 된 뒤 사람들이 널리 이 여래를 믿고 흠모하여 그런 이름을 붙였다.
<약사경>에는 다섯 가지가 있는데 현장(600~664)이 인도에서 가져와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 대표적이다. <약사유리광여래공덕경(藥師琉璃光如來功德經)>이라고 1권에 불과하지만 그 대신에 힘차게 기술되어 있다.
12신장(神將)이란 분들은 약사여래의 시종으로 있으면서 수행자들을 수호하는 궁비라와
11야차대장(夜叉大將)들을 말한다. 12대원을 하나씩 맡은 이들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그 중에서도 궁비라(宮毘羅)는 금비라(金毘羅)라고도 하는데 항해(航海)하는 사람들을 지켜준다고 한다.
선림(禪林)에서 저녁식사를 약석(藥石)이라고도 한다. 선림에서는 원래 밤참이 금지되어 있으므로
야간의 시장기와 체온의 하락을 막기 위해서 따뜻하게 데운 돌을 배에 품었다. 그 돌이 약석이다.
또한 약식(藥食)도 본래 저녁밥 대신에 먹던 죽을 말한다.
인간들은 부처님의 응병여약(應病與藥)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난치병의 소유자라
할 수 있다.
현장 역의 <약사유리광여래본원공덕경(650년)>에서 약사여래의 성격을 구체적으로 나타내고 있은데,
약사여래는 다음과 같은 12가지의 대원을 세워 중생들의 병고와 재난을 제거한다.
광명보조원(光明普照願): 모두에게 광명이 끝없고 상호가 원만하고자 하는 원
수의성변원(隨意成辨願): 위덕(威德)이 높아 중생을 깨우치려는 원
시무진물원(施無盡物願): 중생으로 하여금 만족하게 하려는 원
안림대승언(安立大乘願): 중생으로 하여금 대승교에 들어오게 하려는 원
구계청정원(具戒淸淨願): 중생으로 하여금 깨끗한 업을 지어 삼취계(三聚 戒)를 구족하게 하려는 원
제근구족원(諸根具足願): 일체의 불구자를 완전케 하려는 원
제병안락원(諸病安樂願): 병을 없애어 몸과 마음을 안락케 하려는 원
전여득불원(轉女得佛願): 여인들을 모두 남자가 되게 하려는 원
안립정견원(安立正見願): 나쁜 소견(所見)을 없애고 부처의 바른 지견을 보게 하려는 원
제난해탈원(除難解脫願): 나쁜 지배자나 포악(暴惡)한 무리로부터 구제하 려는 원
포식안락원(飽食安樂願): 중생의 기갈을 면하고 배를 불리게 하려는 원
미의만족원(美衣滿足願): 의복이 없는 중생에게 좋은 옷을 입히려는 원
309. 약사당 12지신
약사여래는 그의 곁에 12명의 신장을 거느리고 중생을 제도한다. 질병과 재난을 면하게 해주고
의식주 여건이 부족한 이들에겐 그것을 충분히 마련해주며, 외국의 침략군까지도 물리쳐 안심하고
살 수 있게 해준다.
약사여래에 대한 신앙은 약사여래의 주처인 동방유리광세계(東方琉璃光世界)에 다시 태어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이러한 동방지향의 약사여래 신앙이 사방불신앙(四方佛信仰)으로 확대 발전하여 방위신앙과 관련을
맺게 되면서 방위적 성격을 가진 십이지와 자연스럽게 결합되어 갑주(甲冑) 무장(武將) 십이지상이
탄생된 것이다.
약사행자를 수호하는 12약차신은 궁비라(子:쥐), 벌절라(丑:소), 미기라(寅:호랑이), 안저라(卯:토끼),
아니라(辰:용), 산저라(巳:뱀), 인드라(午:말), 파이라(未:양), 마호라(申:원숭이), 전달라(酉:닭),
초드라(戌:개), 비갈라(亥:돼지) 이들은 약사여래의 12대원(大願)에 따라 12시간을 각각 수호합니다.
이들 하나하나의 대장 마다 맹, 중, 계(孟 仲 季)의 세 짐승을 거느리고 있으므로 36수가된다.
단 7각지(覺支)에 천여(天如)를 갖추므로 12신장 각각이 1인당 7000의 야차권속을 거느리는데
7000x12신장하면 곧 팔만사천(84,000)신장(神將)이 되어 8만4천 번뇌를 없애는 호법신장(護法神將)이 된다고 한다.
310. 약사전 (藥師殿)
약사전은 약사여래를 모시는 전각으로 유리광전이라고도 하는데 이 여래(如來)가 동방정유리광세계
(東方淨琉璃光世界)의 교주이기 때문이고 약사전의 위치를 동쪽에 두는 예가 많은 것은 이 여래의
주처(主處)가 동방이라는 것과 관련돼있다.
약사여래는 과거세에 약왕이라는 이름의 보살로 수행하면서 중생의 아픔과 슬픔을 소멸시키기 위해
열두 가지 원을 세운 부처님이다.
약사여래 12대원(大願)중에는 지혜의 빛으로 가없는 세계를 비추고, 높은 위덕으로 중생을 깨닫게
한다는 등의 형이상적인 내용도 포함되어 있으나, 이보다는 굶주린 자를 배부르게 하고, 헐벗은 자에게
옷을 준다든가, 온갖 병과 괴로움에 고통 받는 이를 구제하여 심신의 안락을 얻게 해주거나,
여인의 몸으로 핍박받는 자를 장부로 태어나게 하는 등의 구병(救病)이나 현세 복덕에 관한 내용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약사여래의 이러한 성격 때문에 현세 복락을 희구하는 일반 대중들은 다른 어떤 부처님보다
약사여래를 가까이 하기를 원했고, 그의 권능에 힘입어 복덕을 누릴 수 있게 되기를 희망했다.
“유리와 같이 맑은 세계에 큰 의왕(醫王)인 부처가 있으니, 광명이 해와 달보다도 더 밝아서 모든
찰토(刹土)를 비춘다ㆍㆍㆍ, 부처님의 자비한 음덕을 힘입으면 이익이 얼마나 크겠는가,
이에 선대의 끼쳐준 법도를 좇아서 엄숙히 법식을 차리어, 훈훈한 음식을 장만하고 가지가지의
향(香)을 태우나니, 이 훌륭한 인연을 의지하여 곧 잘 보호하여줌을 입어서, 복(福)이 모이고 빛나서
오래 명(命)을 누리는 기간이 늘어나고,
나라가 안정되어 이미 이룬 사업을 길이 보전하여지이다.”
이것은 <약사전행향문(藥師殿行香文,동문선 제114권)>의 내용이다.
이와 같은 일반 대중들의 생각과 믿음이 약사전을 사찰의 중요 건축물의 하나로 등장하게 했고,
오늘날까지 약사여래에 대한 신앙이 유지되어 오게 된 배경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약사전(藥師殿) 내 불단에 모셔진 약사여래상은 일부 예외도 있으나 대부분 왼손에 약합(藥盒)을 든
수인을 갖춘 형태로 되어 있다.
이 약합은 대의왕불로서의 약사여래의 지혜와 권능을 드러내는 대표적 상징물이다.
경에 의하면 약사여래는 12대원에 대응하는 십이신장을 거느리고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약사후불탱화에 나타나는 경우가 종종 있긴 하지만 별도로 조성한
십이신장상을 약사전에 봉안한 예는 드물다.
현존하는 약사전(藥師殿) 건물 중에서 건축사적으로 중요시되고 있는 것으로
창녕 관룡사 약사전(보물 제146호), 강화 전등사 약사전(보물 제179호), 순천 송광사 약사전(보물 제302호) 등이
있다.
이 약사전(藥師殿) 건물 외에도 양산 통도사 약사전(경남유형문화재 제197호), 경주 기림사 약사전(경북문화재자료 제252호) 등을 꼽을 수 있으며, 유리광전이라고 이름을 붙인 불전으로는 당진 영탑사 유리광전,
대구 동화사 유리광전, 통일신라 철불좌상(보물 제667호)으로 유명한 예천 한천사 유리광전 등이 있다.
그리고 만월보전이라 지칭한 전각으로는 평면이 육각형인 남양주 흥국사 만월보전,
그리고 등명 낙가사 만월보전 등이 있다.
<사찰100美100選 上卷61쪽에서 발췌, 허균 글, 불교신문사>
311. 안거 (安居)
출가 수행자들이 일정기간 동안 교화활동을 그만두고 한곳에 모여 일념으로 정진하는 것을
안거(安居)라고 한다. 이 안거에 들어가는 것을 결제(結制)라 하고 안거를 마치는 것을 해제(解制)라 한다. 안거(安居)는 수행자들이 일체의 외부 출입을 삼가고 수행정진에만 몰두하는 기간을 가리키는 말이다.
선종(禪宗)에서는 음력 4월15일부터 7월15일까지를 하안거(夏安居)라 하고 음력 10월15일부터
이듬해 1월15일까지를 동안거(冬安居)라 하고 90일간의 이 기간에는 사찰에 금족령을 내린다.
수행자들은 오로지 좌선을 중심으로 수행에 힘쓰며 해제일을 맞아서는 큰스님이 해제법어를 내리고
그간의 공부를 점검한다.
안거(安居)는 범어 ‘varsa'에서 만들어진 말이다.
인도의 전통에서 유래된 것으로 3개월간의 우기(雨期) 동안 외출을 하면 왕성한 활동을 하는
작은 벌레, 초목을 죽일 염려가 있다고 하여 동굴(洞窟)이나 절(寺刹)에서 수행한 데서 유래한다.
312. 안심 (安心) ☀불교에서 나온 말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해 마음의 평안(平安)을 얻어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지니게 된 경지를 말한다.
안심이란 말처럼 편안한 용어는 없을 것이다. 좋은 뜻을 담고 있어 세속에서도 안심이란 말이 자주
이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불교에서는 안심을 “사견(邪見)과 불안(不安)을 떠나서 부처의 정법(正法)에
안주(安住)한 마음상태”라고 설명한다.
<왕생론주(往生論註)>에서는 “수행하여 안심의 집에 이르러야 할 것이다”라고 강조하고 있다.
<지관보행(止觀輔行)>에는 “법성(法性)으로서 스스로 그 마음을 편히 하기 때문에 안심이라 한다.”고
풀이한다.
<불교인도사상사전>에는 보다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정토종에서는 염흔심(厭欣心)으로 하고, 지성심(至誠心)을 총안심(總安心)으로 하고, 지성심(至誠心)ㆍ심신(深心)ㆍ회향발원심(回向發願心)의 삼심(三心)을 별안심(別安心)으로 하여 행자(行者)가 일으키는
마음이 안심(安心)이다”
313. 여래 (如來)
불교는 말 그대로 부처님의 가르침이므로 부처님을 떠나서는 이야기될 수 없다.
부처님은 범어로는 붓다(buddha)이며 불타(佛陀)라고 음역하고 각자(覺者)라 번역한다.
이 부처님에게는 십호(十號)라는 것이 있다. 그 첫째가 바로 ‘여래(如來)’이다.
<법화경>에 ‘여래의 옷을 입고 여래의 방에 들어가서 여래의 자리에 앉다.’라고 쓰여져 있다.
그 옷은 인욕의 옷이요, 자비의 방이요, 자리는 법공이라는 진리의 자리이다.
이것들을 홍경(弘經)의 삼궤(三軌), 즉 불교 전법의 3법칙이라고 말한다.
여래(如來)는 산스크이트어로 타타가타(tathagata)라고 하는데 그 중 ‘타타’는 갖가지 사물의 모습을
뜻하므로 ‘여(如)’라고 번역되었다. 그리고 아가타(오다)와 가타(가다)란 말을 합친 것이 ‘타타가타’이므로 ‘여래(如來)’라고 번역되었으나 그 말뜻으로 보아 ‘여거(如去)’라고 번역되어도 괜찮을 말이다.
불교의 깨달음에는 생사(生死)에서 열반(涅槃)속으로 나아간다는 뜻이 있다.
그러나 진여(眞如)의 도(道)를 타고 인(因)의 수행을 통해 과(果)의 성불(成佛)에 이르는 것이라는
의미에서는 역시 여래일지라도 진여에서 래생(來生)한다는 것 쪽이다. 여거(如去)가 지혜 쪽이라면
진여(眞如) 래생(來生)으로서 부처님의 참된 모습은 대자대비(大慈大悲)의 여래(如來) 속에 있다고
할 것이다.
자비 없는 지혜란 오히려 가혹(苛酷)한 것이다. 그리고 자비에는 반드시 올바른 지혜가 뒷받침되어 있다. 그래서 부처님의 자리는 대지대비(大智大悲)라고도 하고 비지원만(悲智圓滿)이라고도 한다.
314. 여래선 (如來禪)
선가(禪家)에도 그 본질은 같으나 깨달음의 경지나 방법에 대해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 졌다.
남종과 북종, 조사선과 묵조선 등 다양한 선사상체계에 대한 활발한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
여래선(如來禪)은 조사선의 개념이 제시되기 이전 최상승선으로 불려왔다.
여래선에서는 여래청정선(如來淸淨禪)을 불법(佛法)의 최고단계 혹은 선(禪)의 최고 단계로 보고 있다.
조계혜능ㆍ하택신회ㆍ규봉종밀 선사들의 어록에서도 이와 같은 흔적들을 곳곳에 보일 정도다.
혜능선사는 여래선과 관련 “만법을 통달하고 만행을 갖추며 일체 섞이지 않고 법상을 떠나 짓되
얻는바가 없는 것이 최상승이다”
규봉종밀 선사는 또 “자심이 본래 청정하고 원래 번뇌가 없으며 새어나감이 없는 지혜의 성품을
스스로 갖추고 있음을 문득 깨달으니 이 마음이 곧 부처이고 결국에는 다름이 없다는 선리에 근거하여
닦는 선법이다”고 말하고 있다.
담주선사가 대영선사에게 물었다. “스님은 혜능대사의 처소에서 오셨는데 대사께서는 어떤 법으로
스님을 가르쳤습니까”
“대사께서는 나에게 정(定)에 드는 것도 산란함도 아니며 앉는 것도 선(禪)을 행함도 아님이
여래선이라 하였다”
이렇듯 여래선은 조사선이 확립되기 전에 최상승선으로 통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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