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신 그리스도 축일 2024년 11월 24일 (연중 34주일)
요한 18:33-37. 다니 7:9-10, 13-14. 시편 93. 묵시 1:4하-8.
하느님 나라의 진리
왕이신 그리스도 축일, 한 해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1925년에 당대에 만연하던 무신론과 세속주의를 경계하고 그리스도의 통치가 온 세상에 충만하기를 기원하는 뜻으로 제정했습니다.
오늘 들은 본문 전체가 그분의 장엄하고 영광스러운 모습을 힘껏 표현하고 찬양하는 언어로 가득합니다. 특히 오늘 시편은 아주 짧고 간결하게 각 절마다 하느님의 통치하심을 세세하게 그리고 힘차게 선포합니다. 강물이 서로 부딪히며 울부짖듯 혼란스러운 세상이지만, 하느님의 왕좌는 요지부동으로 굳건합니다. 시인은 이 모든 혼란을 통치하시는 하느님의 주권을 힘 있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오늘 시편을 묵상하며 예수님께서 풍랑을 꾸짖으시며 잠잠하게 하신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마르 4:39) 예로부터 배는 교회를 상징했습니다. 모든 풍랑과 거친 물결처럼 세상 속에서
교회는 환란과 곤경을 당하기 일쑤입니다. 초대교회 당시는 더욱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이 함께
배에 타셨는데도 요동치는 배처럼 고난은 여전합니다. 그때 우리가 할 일은 부르짖으며 주무시는 예수님을 흔들어 깨우는 일 즉 기도입니다. 합심해서 한마음으로 주님을 부릅시다.
설령 왜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고 질책을 받더라도 말이죠.
주님께서 함께 계시면 결코 배가 뒤집히는 일이 없고, 다시 함께 나갈 수 있음을 기억합니다.
주님께서 거세게 도전해오는 모든 역경을 물리쳐 주실 것이라 믿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빌라도는 그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파송된 로마의 총독입니다. 그는 정치적 반란이 아니라면 종교 문화적 갈등 등 여타 문제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율법을 거스른 예수님을 로마에 반란을 일으킨 정치범으로 고발합니다. 종교 신념적 차이를 정치 법정으로 끌고 간 겁니다. 빌라도는 주님께 ‘그대가 유대인들의 왕?’이냐고 물었고, 예수님은 그것은 유대인들이 고발한 죄목일 뿐이라고 일축하십니다. 당시 로마의 식민지였던 이스라엘에서 사형 집행은 로마 총독의 고유 권한이었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 위한 술수를 쓴 것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정체를 물었지만,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에 대하여 답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내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라고 하십니다. 세상의 왕국이라 하면 싸우고 점령하고 굴복시키는 힘의 논리를 떠올리게 됩니다. 하지만 주님의 왕국은 그런 세상의 방식이 아닙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하느님 나라의 통치 원리는 ‘진리’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오직 진리를 증언하려고 이 세상에 왔으며, 진리 편에 선 사람은 그 말씀을 귀담아 듣는다.’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진리가 선포되고, 하느님의 진리로 통치되는 나라가 하느님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나라의 왕으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 살아 생전 가르치시고 행동하신 모든 일의 주제가 바로 이 하느님 나라였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제도의 개념이 아니라 질서의 의미입니다. 하느님께서 직접 통치하시고,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그 하느님의 뜻은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상식과 이성 너머에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세상의 질서와는 전혀 다른 하느님의 뜻과 의지로 세워 나가는 하느님의 질서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존재 방식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왕 축일은 지킨다면 그것은 예수님이 진리로 이끄시는 하느님 나라의 인도자이고 수호자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왕이신 예수님을 믿는 이유는 바로 그분이 그렇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희생’이라고 표현합니다. 세상을 위해 스스로 희생하신 그 모습에서 우리는 주님의 나라, 하느님 나라 통치자의 모본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왕으로 고백합니다. 세상의 나라에도 통치자의 유형은 많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먼저 낮아지고 먼저 섬기는 지도자를 사람들은 존경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희생과 헌신으로 지금을 사는 우리가 그분을 굳게 믿고 진심으로 따르는 것은 그야말로 마땅하고 옳은 일입니다. 세상의 나라와 다른 주님의 나라는 왕이신 예수님의 큰 희생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주님의 나라를 지탱하는 큰 기둥 중 하나가 바로 희생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진리를 증언하러 왔다.’고 하십니다. 그분이 증언하신 진리가 무엇일까요?
그 진리는 병든 사람을 죄인으로 규정하던 당시 율법을 거부하신 진리,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율법의 이름으로 돌로 치려 할 때 그녀를 구하시고는 “네 죄를 묻지 않겠다”고 하신 자비의 진리, 사람을 살리시고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는 일이 진리입니다.
예수님이 왕으로 통치하시는 하느님 나라는 용서하고, 살리고, 함께 길을 걷는 사람들이 희망으로 만드는 나라입니다. 걸핏하면 시기와 질투, 다른 사람을 누르고 일어서려는 경쟁과 다툼이 있는 세상입니다. 그런 세상에 살면서도 하느님의 일 즉 용서하고 서로 이해하며 자비의 눈으로 다른 이들을 바라보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는 일, 그것을 우리는 진리라고 고백합니다.
이를 우리를 사랑하신 나머지 자신을 던진 예수님의 희생과 열정을 기억한다고 표현합니다.
자신을 희생한다는 것은 사랑이라는 개념이 없이는 불가능한 본능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본능적입니다. 세상의 방식만을 고집하는 우리 모습에서 이제는 사랑의 눈, 애정의 시각으로 주변을 돌아봅니다. 그분이 왕이시라면 그 왕은 안 그래도 되는데도 기꺼이 낮은 곳으로 함께 하신 분을 뜻합니다. 세상을 살며 세상의 방식에 무조건 순응할 것이 아니라, 세상에 속해 있으면서도 세상의 방식에 ‘아니오’라고 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희생’과 ‘진리’는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신 본질을 알게 해주는 귀한 본질이고 도구입니다.
이제 세례가 거행됩니다. 만만치 않은 세상을 살되 세상의 방식대로가 아닌 하느님의 질서대로 살기를 결단한 분들입니다. 그리고 공동체가 되었음을 함께 확인하며 우리 모두는 이분들을 큰 소리로 화답하며 환영할 것입니다. 이제 주님과 우리는 한배에 타고 있음을 기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