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파란만장한 삶을 사셨다. 그는 젊은 시절에 교도소에서 교도관으로 근무를 했다. 교도관으로 근무하면서 의무에 관심이 있어 의무관의 일을 했다. 그러다가 홀홀단신 중국의 만주로 넘어가서 생활을 하셨다. 그곳에서 생활을 하다가 6.25를 맞이하고 홀로 남한으로 돌아오셨다. 죽을 고비를 넘기며 집으로 돌아온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 결혼을 했다. 할아버지의 권유로 결혼을 하기는 했지만 그는 원래부터 자유의 영혼이었다. 그는 집을 나와 홀로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생활을 했다. 어머니는 시집에서 가정을 지키며 나를 출산했다. 출산을 한 후 어머니는 친정으로 돌아갔고 나는 아버지에게 맡겨졌다. 아버지는 그 때 논산에서 의무관의 경험을 살려 진료소를 열어 일을 했다. 나는 친척 집 이곳저곳을 전전하다가 아버지가 일하는 진료소에서 같이 살았다. 그때 놀다가 넘어져 눈썹을 다쳐 피를 흘리며 아버지가 품에 안고 병원에 간 기억이 있다. 그러다가 아들이 없는 당숙에게 양자로 입양되었고 그들과 같이 살게 되었다. 그 후 어머니가 나를 데려와 어머니와 같이 지내면서 신학교 들어가게 되었다. 신학교를 마치고 목회와 결혼을 하며 살던 나에게 어느 날 연락이 왔다. 아버지란 사람이 만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 동안 나는 간간히 그의 소식을 듣기는 했다. 그는 원주 병원에서 직원으로 일하고 있었고 나는 조금의 신학교 학비를 받은 적이 있었다. 나는 즉각 만남의 답을 주지 않았다. 지금에 와서 그를 만날 특별한 이유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아내와 딸이 나에게 아버지를 만나라고 권면을 했다. 그러다가 문득 만나서 묵은 원을 풀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언젠가 한번은 풀어야 하는 것이고 이대로 가지고 죽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나와 아내는 아들과 함께 그를 만나 같이 식사를 했다. 그는 자기와 같이 살던 부인과 떨어져 홀로 지하방에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는 구청 주민자치센터에서 중국어 강사를 하고 있었다. 그의 지하실 방에는 노래자랑대회에서 받은 시계와 상패들이 가득했다. 그는 나에게 오리털 자켓과 등산바지 등을 선물로 주었다. 나는 그를 나의 집으로 초대를 해서 하룻밤을 같이 지내기도 했다. 6.25 때 순교하신 할아버지의 묘소를 같이 돌아보며 성묘를 하기도 했다. 그때 나는 네팔에서 선교사로 일하던 때라서 한국에 돌아오면 전화를 해 만나기도 했다. 그는 나에게 적금을 부어 탄 목돈 2천만 원을 송금해주기도 했다. 그러다가 나는 네팔에서 그의 부음의 소식을 들었다. 나는 장례식에 가지 못하고 아들을 보내 조문을 하게 했다. 나는 아버지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지는 않았다. 평생 동안 5번 정도 만났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씨를 받아 세상에 태어나게 되었다. 이것만 해도 내가 그를 기억하며 감사할 충분한 이유가 되는 것이다.
첫댓글불가에서ㅡ는 전생에 400번을 만나야 금생에 옷깃을 스치는 인연으로라도 만날 수 있다고 합니다. 부친과의 만남 역시 한 생에 있어 위대하고 존엄한 만남일 것입니다. 모든 만남이 특별한 만남이 아닐 수 없듯이 아버지와 만남 역시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 아닐런지 생각해봅니다. 말씀에 깊이 공감하며.. 평화 가득하소서. ^^*
첫댓글 불가에서ㅡ는 전생에 400번을 만나야 금생에 옷깃을 스치는 인연으로라도 만날 수 있다고 합니다.
부친과의 만남 역시 한 생에 있어 위대하고 존엄한 만남일 것입니다.
모든 만남이 특별한 만남이 아닐 수 없듯이
아버지와 만남 역시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 아닐런지 생각해봅니다.
말씀에 깊이 공감하며.. 평화 가득하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