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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따르라
(디트리히 본회퍼, 허혁 역, 대한기독교서회)
이신건
왜, 벌써부터 교회 개혁을 말하는가?
기독교가 언제부터 한국 땅에 들어오기 시작했는지 잘 모르지만, 본격적인 선교는 약 2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카톨릭 교회의 역사는 약 200여년을 헤아리고, 개신교의 역사는 약 100여년을 헤아린다. "천년이 뒤바뀐 이 마당에 고작 100-200년을 가지고 왠 자랑이냐?"고 말하실 분이 있으리라.
이만한 역사라도 자랑거리가 된다고 싶어서 새삼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다. 개신교에 국한해서 말한다면, 100여년 정도의 역사를 겨우 넘긴 이 마당에 여기저기서 개혁(改革)이라는 단어가 난무하는 현상이 하도 서글퍼서 하는 말이다.
유럽교회는 1,500여년만에 자타가 공인하는 "개혁"을 일구어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수많은 개혁의 몸부림이 있었고, 교회의 역사가 갈등과 대립, 순교와 분파로 얼룩져 왔다. 하지만 진정한 "교회 개혁"은 마틴 루터가 비텐베르크(Wittenberg) 성당문에 반박문을 써 붙인 그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불행히도 이 사건은 동-서방 교회의 분열 이후로 교회가 가장 크게 분열한 사건이 되었지만, 개신교 측으로서는 교회의 역사에서 최초(최종일까?), 최대의 개혁사건으로 해마다 기념되는 사건이다.
유럽교회에 비해 한국교회의 역사는 턱없이 짧건만, 벌써부터 개혁이라는 말이 무수히 나오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좋게 말해서,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남달리 반성하기를 잘하기 때문일까? 나쁘게 말해서,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지나칠 정도로 부정적이기 때문일까? 한국인들은 늘 개혁을 표방해야만 인기를 모을 수 있기 때문일까? 한국교회가 너무 일찍 썩어버렸기 때문일까? 이런저런 까닭들이 있겠지만, 솔직히 우리끼리 터놓고 말한다면, 유감스럽지만 마지막 것이 가장 그럴 듯한 답변이 될 것 같다.
평신도들이야 무슨 큰 잘못이 있겠는가? 목사들이 가르쳐 준대로 살아보려고, 그들만을 쳐다보고 살아온 죄(?) 밖에 더 있겠는가? 나 같은 사이비, 삯군, 아니 돌팔이 목사가 한국교회를 이토록 망쳐놓지 않았는가? 너무나 잘 아는 사실이지만, 우리 한번 간단한 사례만을 집어보자.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가 한국에 있고, 한국교회의 양적 성장은 교회사에서 유례없을 정도로 폭발적이라고 자화자찬하지만, 세계에서 가장 많이 분열하고 원수처럼 물어뜯고 싸운 교회도 바로 한국교회다. 사이비-이단성 교회, 사기꾼-정치꾼 목사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배출되었다. 자칭 하나님이 세명, 자칭 그리스도가 열댓명 나왔다. 자칭 교황, 자칭 교주는 또 얼마나 될까?
목사의 신뢰도는 어떠한가? 은행에서 신용카드 발급을 가장 꺼리거나 신용이 불량한 자는 바로 목사라고 한다. 국회위원, 아니 하나님 앞에서 성경에 손을 얹어놓고 거짓말하는 평신도들의 기막힌 연출극을 텔레비전에서 지켜보아야 했지만, 그게 어디 그들만의 잘못인가? 목사들이 미대사관에서 비자를 받으려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수다하게 거짓 맹세를 해온 일은 이미 익숙한 관례에 속한다.
그 탓에 젊은 목사들은 비자를 받으려고 가급적 목사의 신분을 가리려고 한다. 비록 일부 정치꾼 목사에 국한되는 일이겠지만, 감투와 명예 때문에 목사들이 거짓말하거나 서로 거래, 담합하는 수준은 세상 정치가들의 뺨을 칠 정도다. 차라리 거룩과 신앙으로 위장하지 않았더라면, 죄의 무게를 덜 수 있지나 않았을까?
우리는 지금까지 어떤 예수를 따라다녔는가?
이런 현실 앞에서 자연히 다음과 같은 물음이 생겨난다. 한국 교회는 지금까지 도대체 누구를 따라다녔는가? 물론 "예수"라고 즉각 대답할 것이다. 과연 그럴까? 오히려 목사를 따라다닌 것이 아닐까? 목사를 따르는 것이 불가피했다면, 목사는 과연 예수를 제대로 따랐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설사 예수를 따랐다고 표방하였다고 하더라도, 대개의 목사가 따른 예수는 성경이 말하는 그분이 아니라 어쩌면 목사가 자신의 편의대로 주무르고 길들여놓은 그런 예수가 아닐까? 한국 땅에 온 예수, 아니 한국 목사가 모셔온 한국적 예수는 누구일까? 이 짧은 지면과 필자의 좁은 식견으로 이를 말한다는 것은 애당초 무리겠지만, 상식적으로 나열하면, 아마도 해방자 예수, 무당 예수, 복 방망이 예수, 솜사탕 예수, 액세서리 예수 등이리라.
"해방자 예수" 하면, 70-80년대 노동-민중 운동과 더불어 이 땅에 소개되기 시작한 민중-해방신학의 예수를 언뜻 떠올리겠지만, 이는 가장 오래된 한국인의 예수가 아니었겠는가 생각된다. 잘 아시다시피, 카톨릭 교회의 전래는 고난과 순교로 얼룩져 있다. 그런데 초기 한국 카톨릭 신자들 중에는 주기도문이나 사도신경은 물론이거니와 중요한 교리조차 모르고도 용감히 순교한 자들이 적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왜 그런가? 고난당하는 민중들의 피눈물나는 저항에도 불구하고 몇 백년 동안 무너지지 않았던 계급 사회를 교회가 과감히 허물기 시작하였다는 사실 만으로도 그 당시 민중들은 열광하지 않았겠는가? 개벽 세상을 애타게 기다리던 조선의 민중들에게 해방자 예수는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은 분이 아니었을까? 물론 이 해방자 예수는 70-80년대의 민중항쟁의 역사 속에서 가장 생생히 되살아났다. 지금은 맥없이 사라지고 말았지만.
"무당 예수"는 아마도 한국 그리스도인의 집단 무의식에 가장 끈질기게 붙어있는 예수가 아닌가 생각된다. 무병장수와 물질풍요 등을 비는 기복신앙은 인류의 보편적인 현상이겠지만, 만주 땅을 거쳐 한국에 내려온 샤만 전통은 집요하게 생명력을 이어왔다. 한국의 고등 종교들도 한결같이 샤머니즘을 흡수하고서야 비로소 번성할 수 있었다. 한국교회를 가장 성장시킨 원인이면서 동시에 한국교회를 가장 타락시킨 것도 바로 샤머니즘이 아닌가 생각된다.
특히 물질주의와 이기주의, 윤리의식과 공동체 의식의 부재는 가장 큰 해악 중의 하나다. 70-80년대에는 해방자 예수와 함께 복 방망이 예수도 인기를 누린 예수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주도한 경제성장 구호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는 부흥사가 주도한 물질축복의 구호 "우리도 한번 복 받아보세"와 한 통속을 이루었다. 교회에서 소외된 해방자 예수가 공장과 거리에서 노동해방과 노사투쟁을 부추겼다면, 무당 예수와 복 방망이 예수는 복빌기 좋아하는 우리의 어머니를 비롯한 많은 민중들을 교회와 기도원 안으로 끌어들였다.
하지만 이제 어느 정도 먹고 살 정도가 되고 나니, 해방자 예수와 무당 예수, 복 방망이 예수의 인기도 상당히 시들해진 것 같다. 특히 젊은이들에게 예수는 목에 매달려 있는 액세서리로 박제화하였다. 설사 그들이 박제화한 예수의 가르침을 조금은 알고 믿는다고 하더라도, 그를 따를 - 그의 십자가를 등에 지고 갈 - 의지는 거의 없다.
위선적인 종교 지도자들, 지배하고 억압하는 권력자들, 생명과 행복, 안녕의 근거를 허망한 재물에 두고 끌어 모으기만을 좋아하는 어리석은 부자들을 향해 때로는 포효하는 사자처럼, 때로는 통쾌한 독설가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던 살아 있는 예수는 거리의 낭만인 솜사탕처럼 달콤하고 포근한 예수로 변하였다.
딱딱하고 거북한 것을 다 없애고 달콤하게 정제된 예수는 오늘날 교회의 강단에서도 자주 설교된다. 솜사탕은 먹기도 편하고 보송보송하여 귀엽다. 영양 가치도 별로 없지만, 소화 걱정할 필요도 없다. 이처럼 오늘 우리의 예수는 없으면 서운하지만 있어도 큰 부담이 없는, 아니 인스턴트로 적격인 달콤한 일회용 예수다. 오래 되새김할 필요도 없고, 더욱이 피와 살이 될 이유도 없다.
솜사탕을 사기 위해 비싼 대가를 치를 필요도 없고, 멀리까지 가서 힘들게 사 올 마음도 없다. 눈에 띄면 쉽게 구하여 먹고, 곧장 잊을 수 있는 값싼 예수, 달콤한 예수, 편안한 예수가 오늘 우리의 예수가 아닐까? 그래도 옛날의 예수는 우리에게 꽤 큰 희생과 대가를 요구하였건만, 지금의 예수는 지천에 늘려 있어 너무 값싸다. 그는 매우 넓고 쉬운 길로 인도한다. 대중화한 예수인가? 만인을 위한, 만인의 예수인가?
값싼 은혜는 교회의 대 원수다!
하지만 성경 속에 살아 있는 예수는 결코 넓은 길로 인도하지 않으며, 결코 싸구려 은혜를 무더기로 내던지지 않는다. 히틀러(Hitler)가 독일의 정권(제3제국)과 교회를 장악했건만, 대다수의 독일교회가 비겁함 속에서 침묵하거나 히틀러를 독일의 구세주로 추앙하고 있을 때, 젊은 목사요 신학자였던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는 외로이, 이렇게 외쳤다. "은혜를 값싸게 보는 우리의 견해는 교회의 대 원수임을 알아야 한다. 은혜는 홀로 무엇이나 원만히 처리하기 때문에 다른 것은 모두 옛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어도 좋다. 순종 없는 은혜, 십자가 없는 은혜,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무시한 은혜가 값없는 은혜다."
"나를 따르라"(Nachfolge, 허혁 역, 대한기독교서회, 1999년 29쇄)라는 그의 책을 다시 읽노라면, 젊은 목숨을 걸고 어두운 시대의 교회를 매섭게 질책하던 그 당시의 본회퍼가 되살아나서, 시대와 환경의 차이를 뛰어넘어 한국교회를 흔들어 깨우는 것 같다.
그가, 아니 그를 통해 예수가 지금 우리에게 외치는 말은 너무나 절박하고 진실하다. 예수의 산상설교에 관한 그의 탁월한 해석은 단지 우리의 지성에만 호소하지 않는다. 그것은 거짓되고 안일한 삶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심장을 예리한 단도처럼 찌른다.
이 칼 앞에서 비겁하게 피해가든지, 뜨거운 피를 흘리고 죽어야 한다. 다른 제3의 대안은 없다. 도망가는 자는 다행히 구차한 목숨만은 건질 수 있겠지만, 그의 영혼은 음부의 권세에 담보로 잡혀야 할 것이다. 칼에 맞아 죽는 자는 당장은 아프고 괴롭겠지만, 죽어서 다시 살 것이다. 예수의 진정한 제자로, 참 그리스도인으로! 여러분은 어찌 하시겠는가? 이 칼을 한번 쳐다보시기라도 하겠는가?
지금껏 한국교회는 설교와 찬양 등을 통하여 주로 감정에 호소해 왔다. 그리고 새삼 감정 지수(EQ)를 강조하는 목소리가 우리를 압도한다. 지성을 추구하는 학자인 필자도 감정이 꽤 풍부한 편이어서, 감동적인 영화나 설교 중에 가끔 굵은 눈물을 줄줄 흘린다. 하지만 감정이 나를 대상에 오래 묶어두기는 하지만, 나의 인생을 크게 흔들어 놓은 적은 없다.
미국에서 설교학과 예배학을 전공하고 최근에 돌아온 나의 친구 교수는 오늘의 한국교회의 설교를 폭죽(爆竹)에 비교한 적이 있다. 이번 새천년 맞이 행사장에서도 전 세계에 얼마나 많은 폭죽이 터졌겠는가? 하지만 폭죽 때문에 새 세상이 오진 않는다. 한국교회의 강단도 폭죽처럼 신선한 감동을 주다가는 별 결과도 없이 잊혀진다. 신자들의 인상(印象)과 심상(心象)에 그 무언가를 남기긴 하겠지만, 그것도 잠시뿐이다. 신자의 생활은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자화 운동"이니 하면서, 교회마다 성경공부에 열을 올렸다. 성경공부는 무조건 믿는 소박한 신자를 매우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든 게 사실이다. 그리고 성경지식이 풍부한 교인들도 많이 양산되었다. 하지만 문자숭배를 버리지 못한 보수적-근본주의적 성서관 때문에 성서와 역사를 보는 신자들의 태도와 그들의 삶의 방식이 크게 변화된 사례를 보기란 쉽지 않다.
똑똑한 지성 지수(IQ)가 훌륭한 삶의 필요 조건이기는 하겠지만, 필요충분의 조건은 되지 못한다. 의지의 굴복, 의지의 순종이 없는 감정과 지성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행함이 없는 믿음은 병든 믿음, 죽은 믿음이다. 감정에 겨워 "주여, 주여" 해도, 예수와 전혀 상관이 없을 수 있다. 오직 실천만이 믿음을 입증하고, 오직 열매만이 나무의 가치를 결정한다.
의지를 굴복시키고, 예수를 따르자!
마치 예수가 저주한 열매없는 무화과인 양, 감정과 지식으로만 비대한 한국의 그리스도인, 아니 나 자신의 형편없는 몰골을 보면서, 어떻게 하면 예수의 말씀에 의지를 굴복시킬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에 읽은 본회퍼의 책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앞에서 말한 친구 교수에게 나의 고민을 나누었더니, 그도 비슷한 고민을 하던 중에 의지 지수(DQ=Diaconite Quotient)를 고안하느라 궁리하고 있다고 했다.
Diaconite는 집사의 직책을 뜻하는 말인데, 이 말은 헬라어로 섬김, 봉사, 하인을 뜻하는 단어에서 유래하였다. 섬김의 지수, 그것은 곧 그리스도인의 행함의 지수일 것이다. 언젠가 우리의 나약해빠진 의지를 재어볼 수 있는 잣대가 마련된다면, 그 잣대로 우리의 종아리를 피나게 때려봤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런 잣대가 손에 쥐어지기를 마냥 기다릴 순 없지 않는가? 그러므로 좁은 길, 값비싼 은혜의 길, 십자가의 길, 순종의 길을 권면하고 스스로 그 길을 걸어간 사람의 책을 읽고, 그로부터 도전을 받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그러한 길을 간 사람을 따르려고 할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예수를 따르려는 각오가 날로 더해질 것이다. 바로 여기에 본회퍼의 책의 가치가 있다.
실로 본회퍼도, 예수도 우리의 결심을 대신해 주지는 않는다. 결심은 여전히 우리의 몫이다. 하지만 본회퍼가 강조한대로, 예수가 지어주는 멍에는 결코 무거운 것이 아니라 가장 쉬운 멍에다. 십자가는 오직 십자가를 통해서만 극복되며, 십자가를 회피하는 것은 오히려 무거운 짐이 되어 되돌아온다. 하지만 십자가를 지는 삶, 순종의 길, 좁은 제자의 길은 가장 큰 약속으로 다가온다.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약속! 너도나도 말하는 식상한 "개혁"이라는 말도 이제 그만 하고, 나부터 먼저 묵묵히 이 길을 가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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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회퍼 - 세속 안에 계신 하나님
본회퍼, 옥중서간, 대한기독교서회
1. 우둔
우둔은 악보다도 훨씬 위험한 선의 적이다. 악에 대해서는 대항할 수 있으며 그것을 폭로하고, 필요한 경우에느 힘을 가지고 방해할 수 있다.... 우둔한 자와 말하고 있으면 그가 자기 자신, 즉 그의 인격과 관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힘을 떨치고 있는 '슬로건'이나 표어 같은 것과 관계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우둔이 악마적으로 악용될 수 있는 위험이 있다.(p.18-19)
2. 좌절들
최상의 의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소박하게 현실을 오해하고 지리멸렬에 떨어진 세계를 이성적인 것으로 다시 묶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합리주의자'들의 실패는 분명해졌다.(p.13)1. 합리주의 역사의 실패가 비판자들에게 승리를 선언하는 것이 결코 아님 2. 비판자들의 본질적인 문제는 합리주의자들의 도전을 통해 얻은 역사적 변화와 결과물에 대해 전체적으로 인식하며 그것들을 어떻게 계승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여전히 준비되지 않았다는 것.
보다 가련한 것은 윤리적 열광주의가 모조리 좌절되어 간다는 사실이다. 열광주의자는 원리의 순수성이 악의 힘에 대항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p.13) 1. 윤리적인 내용과 그것을 통해 얻고자 하는 지향점 사이의 처절한 간격. 그 간극의 문제는 열정과 믿음-광란과 신비적 힘에 의해 매꿔지지 않음. 2. 자연과학, 사회과학등의 발전을 통해 세계가 '신비적-추상적(철학적 or 선험적)-윤리적'인 부분 이상으로 구성된 면이 있다는 사실을 대한 발견. 새로운 세계의 이해에 대한 전망의 부족
너나 할 것 없이 누구나가 사회적 대결에서 도피하여 사적 덕행이라는 피난처를 구한다.(p.14) 조급한 현실 저항주의 역시 마찬가지 / 개혁과 혁명의 문제도. 그 내용성과 체계성의 문제에도 새로운 인식 필요
세상과 인간 존재의 공공성에서 신을 배제한 결과 적어도 '개인적인 것', '내면적인 것', '사적인 것' 영역에서 계속해서 신을 확보하려고 꾀하게 되었네.(p.205)
3. 용기 : 시민적 용기란?
시민적 용기의 결여를 개탄하는 배후에는 도대체 무엇이 숨어 있을까? 근년에 우리는 많은 용기와 희생적 행위를 보았다. 그러나 시민적 용기는 거의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으며 우리들 자신에게도 그것은 없다. 그러나 이 같은 시민적 용기의 결여를 단순히 인간의 비겁으로 돌리는 것은 너무나 소박한 심리학일 것이다. 그 배후에 있는 이유는 결코 그러한 것이 아니다.
우리들 독일인은 오랜 역사를 두고 순종의 필요성과 그 힘을 배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우리는 모든 개인적 희망과 사상을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에 종속시키는 것이 우리의 생의 의미요, 위대함인 줄로 알았다.
우리의 시선은 노예적 공포에 있어서가 아니라 사명 속에서 직업을, 직업 속에서 소명을 보는 자유로운 신뢰에 있어서 위로 향하고 있었다. 누구나 자기 자신의 판단에서보다는 오히려 '위(oben)'로 부터의 명령에 기뻐서 복종할 용의가 있다는 것은 자아중심의 마음에 대한 정당화된 불신뢰의 일부분임을 의미한다.
독일인의 순종하고 소명을 받고 사명을 느끼고 최악의 것이라도 이를 용감하게 생명을 걸고 수행해 왔다는 데 대해서 누가 반대하려고 할 것인가? 그리고 독일인은 전체에의 봉사에 있어 자의로부터 자기를 해방하려고 함으로써 자유를 지켰다-세계의 어디에서 루터로부터 관념철학에 이르기까지 독일에서보다 더 열심히 자유에 대해 말해진 적이 있을까? 독일인에게 소명과 자유는 동일한 것의 두 면을 의미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독일인은 세계를 오해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명을 위해서 복종하고 생명을 바칠 용의가 있다는 것이 악을 위해서 오용될 수도 있다는 것을 독일인은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오해가 생기게 되고 따라서 소명의 수행 그 자체가 의심스럽게 될 때 독일인의 모든 도덕적 근본 개념은 흔들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뿐만 아니라 독일인에게는 자유롭고 책임있는 행위가 필연적으로 소명이나 사명과도 대립되는 것이라는 데 대한 결정적인 근본 인식이 결여되어 있음이 밝혀지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한 입장에서 한편으로는 무책임한 무양심이, 다른편으로는 결코 행동화하지 않는 자학적인 양심이 가책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시민적 용기는 자유로운 인간의 자유로운 책임성에서만 생길 수 있는 것이다. 독일인들은 오늘에야 비로소 자유로운 책임이 무엇인지 발견하기 시작하고 있다. 그러한 자유로운 책임이란 책임있는 행위의 자유로운 신앙적 모험을 요구하고, 그 때문에 죄를 범하게 되는 인간에게 용서와 위로를 약속하시는 하나님께 근거를 두는 것이다. (p.15-16)
4. 함께 괴로워 하는 것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아들이고 자유로우셨다. 물론 우리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자기의 행위와 자기의 고난에 의해서 세계를 구원하도록 부름받은 것도 아니다. 우리는 불가능한 것을 스스로 지지 말아야 하지만 그것을 질 수 없음을 괴로워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역사의 주인은 아니지만 역사의 주인의 손 안에 있는 도구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고통을 실제에 있어서는 전혀 한정된 범위 안에서만 함께 괴로워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독교인이 되려면, 우리가 자유롭게 시간을 포착하고 위험과 맞서는 책임 있는 행위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의 풍성함에 동참하여야 하며, 불안에서가 아니라 자유함을 주고 죄를 사하여 주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부터 모든 수고하는 자에게 넘쳐 흐르는 참된 동정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마음의 풍성하심에 동참하여야 한다. 행위가 수반되지 않는 기대와 우둔한 방관은 결코 기독교적인 태도가 아니다. 행위와 동정 속으로 기독교인을 부르는 것은 먼저 자기 자신의 체험에서가 아니라, 그것 때문에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신 형제들의 체험에서이다.(p.26)
5. 고난에 대해서
사람의 명령에 복종해서 고통을 받는 것이 자기 자신의 책임 있는 행위의 자유에서 고통을 받는 것보다 훨씬 쉽다. 공동으로 고통을 받는 것이 혼자서 고통을 받는 것보다 훨씬 쉽다.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으면서 고통을 받는 편이 혼자 떨어져서 수치를 당하며 고통을 받는 것보다 훨씬 더 용이하다.
육체적 생명의 위험을 받으면서 고통을 받는 것이 정신적으로 고통을 받는 것보다 더 용이하다. 그리스도는 자유로이 혼자서 고독 속에서 부끄러움을 당하며 육체와 정신으로 고난을 받으셨다. 그 이후로 많은 기독교인이 그와 함께 고난을 받았다.(p.27)
6. 낙관주의
비관적인 편이 오히려 현명하다. 왜냐하면 실망은 잊혀지고 사람들의 웃움거리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명한 사람에게는 낙관주의가 금물이다. 낙관주의는 그 본질상 현재의 상황을 일체 고려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의 생명력이고, 다른 사람들이 단념했을 때 희망을 품는 힘, 만사가 실패한 것으로 보일 때 머리를 높이 쳐드는 힘, 반동을 이겨내는 힘, 미래를 결코 적에게 넘겨주지 않고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요구하는 힘이다....
그러나 미래의 의지로서의 낙관주의는 비록 그것이 몇 번 거듭해서 실패할지라도 결코 경멸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병에 걸리는 일이라고는 없는 생명의 건강이기 때문이다.(p.28)
내면성과 양심의 시대, 즉 일반으로 '종교의 시대'도 지나갔지. 우리는 완전히 무종교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네. 있는 대로의 인간은 이미 단순히 종교적으로는 될 수 없다네. 분명히 '종교적'이라고 보이는 사람들도 결코 그것을 실제의 행위에는 나타내지 않거든...
우리들의 1900년에 걸친 기독교의 선교와 신학은 인간의 '종교적 선험성'위에 세워져 있네.. 그런데 이 선험성이 전연 존재하지 않고, 언젠가는 그것이 역사적으로 제약된 잠정적인 인간의 하나의 표현 형식이었다는 것이 분명하게 되고, 그 결과 인간이 정말 철저하게 무종교적으로 된다면-이러한 사태는 '기독교'에 대해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우리들은 지금까지의 전 기독교의 기반을 빼앗기고, 다만 소수의 '최후의 기사들' 혹은 지적으로 불성실한 사람들만이 남게 될 것이네. 그러한 사람들과는 종교적으로 상대할 수 있을 뿐이지. 그러한 사람들의 소수의 선택받은 사람들일까?
무종교의 세계에서 교회, 개체교회, 설교, 예전, 기독교의 생활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이네... 우리들은 자기를 종교적으로 특별한 우대를 받고 있는 자로 생각하지 않고 차라리 온전히 세상에 속해 있는 자로서 에클레시아, 곧 부름을 받은 자가 될 것인가? 그리스도는 이미 종교의 대상이 아니라 그것과는 전연 별개로, 진정으로 이 세상의 주시라네... 무종교성 속에서 예배와 기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할례가 의인의 조건인가 아닌가 하는 바울의 물음은, 내 생각으로는 오늘날에는 종교가 구원의 조건인가 아닌가 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네. 할례로부터의 자유는 종교로부터의 자유이기도 하지. '기독교적 본능'이 나를 종교적인 인간보다는 무종교적인 인간에게 끌리게 하는 때가 많은 것은 무엇 때문일까 하고 가끔 스스로에게 묻는다네.
신은 본래 언제나 '기계장치의 신'이며, 그것을 종교적인 인간들은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의 피상적 해결을 위해서라든가, 그렇지 않으면 인간이 실패에 부딪쳤을 때의 힘으로서 불러낸다. 따라서 언제나 인간의 약점을 이용해서, 다시 말하면 인간이 한계에 부딪칠 때 불러내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인간이 자기의 힘으로 그 한계를 더욱 넓히고 기계장치의 신이 소용이 없게 되기까지는, 적어도 변함없이 불가피한 일이다. 인간의 한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나로서는 암만해도 의문스러운 일이다.(오늘날에는 인간은 이미 죽음 자체도 거의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고, 죄를 거의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죽음이나 죄가 아직 참된 한계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인식론적 초월성은 신의 초월성과는 무관하다네. 신은 우리들의 생활 한가운데서 피안적이지. 교회는 인간의 능력이 미치지 않는 곳, 한계가 아니라, 마을의 한가운데에 있네.
도대체 구약성서에 영혼의 구원이라는 것이 문제된 곳이 있을까? 일체의 중심점이 이 세상에 있어서의 신의 의와 신의 나라에 있는 것이 아닐까? 로마서 3장 24절 이하도 하나님만이 의롭다고 하는 생각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지, 개인의 구원의 설교가 아니지 않을까? 문제는 내세가 아니라 창조되었고, 유지되고, 율법에 붙잡혀 있고, 속죄되고 새롭게 된 그대로의 이 세계가 아닐까?
인식의 한계가 부단히 확대되어 가면 이와 더불어 항상 신이 옆으로 밀려나고, 거기에 따라서 후퇴일로를 거듭하게 된다네. 우리는 우리가 인식하지 않는 것에서가 아니라, 우리가 인식하는 것에서 신을 발견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일세. 신은 미해결의 문제에서가 아니라 해결된 문제에서 우리를 붙잡으시기를 원하신다네.
신은 우리의 가능성의 한계에서가 아니라 생의 한가운데서 인식되지 않으면 안된다네. 하나님은 죽음에서가 아니라 생에서, 고난에서가 아니라 건강과 힘에서, 죄에서가 아니라 행위에서 비로소 인식되기를 원하시지. 이것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계시에 있네. 결코 우리들에게 미해결의 문제를 대답하기 위해서 '여기에 오신' 것이 아니라네. 어떤 문제든 생의 중심에서 생기는 것이며, 마찬가지로 그러한 문제에 대한 대답 역시 생의 중심에서 생기는 것이라네.(p.186-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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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주님의 뜰-행원소구
글쓴이 : bloomy 원글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