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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넨베르크에 있어서의 역사적 예수
장호광(조직신학, 경성대학교)
들어가는 말
기독교는 하나의 특정한 과거, 즉 일회적인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나사렛 예수에 절대적 의미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세상의 다른 모든 종교들과 세계관으로부터 구별된다. 이와 더불어 나사렛 예수는 기독교 신앙의 절대적 근거를 이룬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역사적 일회성과 예수의 의미를 연결시키는 과제가 신학에 주어진다.
기독교 창설 이래 근대에 이르기까지 나사렛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는 구분되지 않고 동일시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지상에 있는 동안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과 메시아로서 간주했고 그리고 부활 후 그리스도의 지칭을 자신에게로 적용 시켰다는 것은 신학적으로 자명한 사실이었다. 왜냐하면 그 때까지의 기독론은 두 가지 본성교리(신-인 으로서의 예수)를 전제했기 때문이었다.
역사적 예수와 기독론적인 교리사이에서의 이러한 일치는 계몽주의시대 이래 역사-비평학의 등장과 더불어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이것은 석의학과 교리의 길은 더 이상 나란히 병행되지 않음을 뜻한다. 지상의 예수는 신적인 본성을 가진 신-인으로서 더 이상 간주 되지 않고 그의 인간적 존재가 전면에 부각 되어진다. 또한 기적사를 포함한 신약 성서의 역사성이 의문시 되어진다. 라이마루서(Reimarus)로부터 칸트(Kant), 쉴라이어마허(Schleiermacher), 헤겔(Hegel), 스트라우스(Strauss) 그리고 르낭(Renan)을 지나 브레데(Wrede)까지의 예수 생애 연구는 이러한 면을 잘 나타내고 있다. 즉 합리주의와 관념주의에 영향을 받은 이들의 예수 생애 연구는 역사적 사실(Faktum)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예수에 의해 선포 되어진 초시간적인 가르침이나 이념의 역사적 형성에 관심을 두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의 예수 생애 연구의 주된 관심사는 사실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예수의 행위, 자기 이해와 특성 안에 있는 그의 의미에 있었다.
또한 20 세기 초, 불트만에 의한 양식사 비평의 발전과 칼 바르트에 의해 시작 되어진 변증 신학의 등장은 역사적 예수 연구의 필연성을 신학으로부터 배재시킨다. 복음서에 있어서의 역사적 예수는 부활 후의 케리그마(Kerygma)를 통해 채색되어 졌다는 인식이 특히, 양식사 비평에 의해 주장 되어진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 입장과 더불어 케리그마 그 자체가 하나의 규준적 기능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예수가 어떻게 이 땅에 실제적으로 존재했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 예수에 대한 신학적 해석이 중요 했었다.
그러나 역사적 예수 생애 연구는 에른스트 케제만(Ernst Kaesemann)을 통해서 다시 활기를 띠게 되었고 제임스 엠 로빈슨(James M. Robinson), 에른스트 푹스(Ernst Fuchs), 귄터 보른캄(Guenter Bornkamm)과 게르하르터 에벨링(Gerhard Ebeling)을 통해 더욱 더 심화 발전되어진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케리그마의 근거를 역사적 예수로부터 찾으려고 했으며 그리고 불트만과의 논쟁에서 역사적 예수를 기독교 신앙의 근거로서 입증 하려고 노력했다. 이와 더불어 역사적 예수에 대한 그들의 물음은 부활 전 예수의 선포와 부활 후 케리그마 사이에서의 연속성에 대한 물음과 연결 되어진다.
또한 1985년 이후의 예수 생애 연구는 “역사적 예수를 위한 제 3의 탐구(third quest for the historical Jesus)"으로 묘사 되어진다. 이러한 역사적 예수 연구는 특히 영미 권을 중심으로 활발하며 그리고 보다 더 많은 역사적 요인들과 자료들이 첨가 되어진다. 즉 제 3의 역사적 예수 연구는 심리적이며 사회적 -예를 들어 게르트 타이센(Gerd Theissen)의 ”예수 운동의 사회학(Soziologie der Jesus-Bewegung)"- 이며 그리고 문화 현상적이거나 종교 현상적인 방법과 더불어 예수의 현상에 근접하려고 시도하며 그리고 이전의 교리적 기독론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노력한다. 그들은 또한 유대 학자들과의 대화를 통해 역사적 예수를 유대교 관점에서 찾으려고 하며 또한 성서 이외의 자료들도 역사적 예수를 위한 제 3의 탐구를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예수 생애 연구를 신학사적으로 살펴보면, 역사적 예수 연구는 이제 기독교 신학에 있어서 중요한 과제중 하나이며 동시에 커다란 도전 중에 하나로 나타나게 되었다. 특히 최근에 있어서 예수 생애 연구는 그것의 의도와 결과에 있어서 신학적으로 중요한 과제중 하나이며 필연성으로 여겨진다. 즉 역사 비평적인 연구의 결과들은 교리적 기독론을 위한 근거와 기준을 형성한다. 양자 사이에서의 이러한 관계는 이제 독일 뮌헨 대학에서 조직 신학을 가르쳤던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Wolfhardt Pannenberg)의 기독론을 통해 더욱 더 명백해 질 것이다.
판넨베르크는 “역사로서의 계시”라는 그의 근본적인 신학사상 위에서 역사적 예수 연구와 기독론의 필연적 연관성을 주장한다. 그는 또한 헤겔로부터 영향을 받았고 역사 비평학을 기초로 한 역사신학에 힘입어 역사적 예수를 증명함으로서 성서의 권위에 호소하는 신앙의 획일성에서 합리적으로 근거 지워진 신앙의 확실성으로의 전환을 시도한다. 이 같은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위해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와 역사적 실재성을 부활사건으로부터 입증하려고 노력한다. 왜냐하면 판넨베르크에 있어서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서의 부활사건은 인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증명되어지고 이 땅에서의 그의 선포를 가능케 하는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은 종말의 선취적 사건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판넨베르크는 이러한 예수 부활의 종말론적 특징과 함께 역사적 예수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의미를 보편사적 차원에서 입증하려고 노력한다.
이제 이러한 판넨베르크의 기독론적 신학사상을 보다 구체적으로 다룰 것이며 그리고 마지막 장에서 비판적으로 고찰해 보려고 한다.
I. 나사렛 예수에 대한 역사적 질문의 필연성
판넨베르크는 역사적 예수에 대한 그의 신학적 입장을 특히 불트만과의 논쟁에서 발전시킨다. 불트만은 나사렛 예수의 역사적 재구성과 그것을 통해 신앙의 근거를 세우려는 모든 노력은 불가능하며 무의미하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불트만은 예수 생애 연구에 의해 야기 되어진 신학과 신앙의 문제를 신약성서의 케리그마의 실존론적 해석을 통해서 해결할 수 있으리라 여기며 동시에 그것을 통해 기독교 복음의 현재적 의미를 새롭게 조명해 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판넨베르크는 불트만 학파와 더불어 예수의 전기를 정확하게 재구성 할 수 없을 지라도 예수 자신에 대한 사도들의 증언으로부터 역사적 예수를 추론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1. 역사적 예수 연구에 있어서 해석학(Hermeneutik)의 중요성
판넨베르크에 의하면 현재적이며 미래적인 존재형태(Daseinsgestaltung)의 가능성들은 인간에게 단순히 주어지지 않는다. 인간은 그것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야하며 찾아야만 한다. 즉 현재와 미래를 위한 존재 실현(Daseinsverwirklichung)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기 위해 인간은 역사적 유산과 과거의 텍스트로 돌아가야만 한다.
판넨베르크는 과거 어느 한 텍스트의 주장을 올바르게 인지하기 위해서 해석자는 처음부터 자기의 고유한 삶과 체험을 통해 해석을 규정하고 한정 시키려고 하는 선 이해(Vorverstaendnis)로부터 벗어나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해석자는 “그 당시의 특수성에 완전히 내 맡겨져야 한다. 그는 텍스트와 연관되어진 그 당시의 상황을 자신의 현재의 다양성 안에서 파악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판넨베르크에 있어서 과거의 텍스트를 이해하기 위한 첫 번째 전제는 역사적 간격의 유지이다. 그리고 나서야 해석은 현재와의 연결을 위한 텍스트의 적용으로 나타난다. 판넨베르크는 이러한 사실을 가다머와 더불어 “지평융해(Horizontverschmelzung)"로 표현한다: 텍스트가 해석자에 의해 만나게 되는 지평과 해석자의 이해의 지평은 하나의 새롭게 확대되어진 지평으로 융해 되어진다.
판넨베르크는 이제 이러한 해석학의 원리를 성서, 특히 신약성서에 적용 시킨다: 성서의 증언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로서 하나님이 행동하셨고 행동하시게 될 사건들에 관해 말한다. 성서의 진술들은 실제적으로 일어난 사건들을 지시한다. 그러므로 해석자가 성서의 진술들 속에 있는 본래의 의도와 특성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해석자는 현재에 대한 적용의 신학적 관심으로부터 그러한 진술들을 추적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성서의 선포가 역사 속에서 실재적으로 일어난 사건이라면 해석자는 필연적으로 다음과 같이 질문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서의 선포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적용되어 지는가? 그러한 질문에 대해 판넨베르크는 성서의 텍스트와 연관지어 다음과 같은 대답을 준다: 과거의 텍스트를 올바르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텍스트 자체 안에 스며 들어있는 사실의 배후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러한 사건을 암시하는 텍스트 자체의 의도를 통해 요구되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석학적 원리는 신약성서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진다. 왜냐하면 신약성서의 케리그마는 나사렛 예수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행위를 통해 그 정당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판넨베르크는 예수 자신에 대한 사도들의 증언으로부터 역사적 예수를 추론할 수 있음을 확신한다. 이러한 확신과 더불어 판넨페르크는 다음과 같은 예수에 대한 역사적 질문을 제기한다:
예수의 부활을 염두에 두지 않는 역사적 예수의 주장은 오늘날 우리의 신앙의 근거가 될 수 있는가? 예수의 주장의 역사성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그 주장에 내포되어 있는 원래의 의도를 밝혀내고 현대인들을 위한 적용과 해석을 필요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적 신앙의 근거로서의 예수에 대한 질문은 보편사(Universalgeschichte), 하나님 그리고 예수의 부활에 대한 질문으로 계속해서 인도되어 진다.
2. 전승사(Ueberlieferungsgeschichte)로서의 역사
판넨베르크는 나사렛 예수는 누구였으며, 그리고 그의 주장의 정당성은 오직 역사-비평적 방법의 도움을 통한 역사적 예수 연구에 의해서만 증명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역사적 질문이 올바르게 제기 되었는지, 즉 역사적 질문의 대상이 처음부터 적절 했는지에 달려있다. 이러한 대상 - 역사적 실재성 - 은 순수한 역사적 사실(bruta facta)로서가 아니라 전승사와의 연관 안에서 규정되어진다. 판넨베르크에 의하면 그것은 역사적 질문의 근간을 이루는 이해의 전제조건(Verstehensvorausseztung)이다.
“인간역사로서의 사건은 역사 안에서의 희망과 회상에 대한 이해(Verstehen)와 더불어 읽혀지며, 그리고 이러한 이해의 변화는 그 자체로서 역사의 사건이다. 양자는 초창기 역사의 소여성 안에서 분리되지 않는다. 그래서 역사는 항상 전승사이다.” 또한 판넨베르크는 다른 곳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역사의 과정은 - 또한 역사적 질문이 관계하고 있는 사건의 흐름은 - 본질적으로 전승의 과정이다." 다시 말해서 단순히 사건 그 자체는 하나의 추상에 불과할 뿐이다. 모든 역사적 사실들은 다른 요소들, 즉 전통, 이해사건(의미), 기대 그리고 두려움과의 관련성안에 있으며, 이러한 관련으로부터 사실들은 하나의 특정한 의미를 동반하다. 역사가는 역사적 사건을 이러한 의미와 함께 만나게 된다. 그러므로 역사적 사건은 그것의 원래적이며 역사적인 장소와 더불어 이미 주어진 의미를 가지고 있다. 판넨베르크는 역사의 이러한 이해를 무엇보다 구약성서의 연구에서 얻는다.
이러한 사실을 역사적 예수에 대한 질문에 적용시킨다면, “예수 당시의 역사적 실재성은 의미들이 임의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실증주의의 의미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순전한 사실(bruta Facta)로서 구성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예수의 출현과 운명에 그것의 원래적인 사건과 전승의 관련성 안에 있는 의미가 이미 내포되어 있다. 즉 예수의 출현과 운명은 하나의 특정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그러므로 판넨베르크는 역사가는 모든 역사적 사건들에 있어서 사실(Faktum) -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예수사건”을 말한다 ― 과 의미(Sinn) - 하나님의 행위와 계시로서의 의미“ -를 분리 시켜서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판넨베르크는 이러한 신학사상의 전개는 보편사로서의 역사의 그의 이해에 있다. 즉 하나의 역사적 사건 안에 포함되어 있는 의미는 항상 그 사건이 서있는 역사적 관련으로부터 밝혀진다. 그러나 그러한 관련은 다시금 보다 큰 관련들안에 서 있게 되며, 그리고 그것의 의미는 보다 더 큰 관련들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한 사실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과가 나타난다: 최종적인 결정이 나타나지 않는 한, 그리고 역사가 계속 진행되고 있는 한, 사건 자체에 내포되어 있는 실제적이며 전체적인 의미를 위해 계속해서 모든 사건들이 연관되어질 수 있고 그리고 연관 되어져야만 하는 보다 큰 관련들이 존재한다.
판넨베르크의 이러한 신학적 사상의 전개를 간단히 요약해보면, 개별적 사건들의 의미는 역사의 전체성(Totalitaet)으로부터 결정되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역사는 보편사로서 그리고 하나의 커다란 전체성으로서의 시간의 끝에서 결정지어질 사건의 연속으로서 이해되어진다.
II. 예수의 출현과 보도의 전승사적 컨텍스트로서의 묵시문학
이러한 판넨베르크의 기독론적 구상의 방법론적인 고려에 따라 예수와 그의 보도의 역사적 인식은 다만 그것의 전승사적 연관성 내에서만 가능하게 된다. 우리는 여기서 역사적 간격을 유지시키려는 판넨베르크의 노력을 다시 보게 된다.
판넨베르크는 지상에서의 예수의 주장과 보도들이 유대인의 묵시문학의 사상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매우 높은 개연성을 보여 준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원시 기독교의 전승사는 처음부터 묵시문학적으로 각인되어졌다는 것이 계속해서 나타난다. 이와 더불어 예수의 출현, 주장 그리고 그의 보도는 다시금 구약 성서적이며 선지자적인 전통과 밀접하게 연결되어있는 묵시 문학과의 연관성 안에서만 인식되어질 수 있고 이해되어진다.
이러한 이해의 바탕위에서 판넨베르크는 예수의 메시아적 자의식(Selbstbewusstsein)에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판넨베르크는 다른 많은 성서학자들의 주장과 더불어 이러한 예수의 자의식은 예수 자신에게로 소급할 수 없으며, 오히려 예수의 특징적인 주장은 하나님 나라의 가까움에 관한 그의 선포를 통해 결정적으로 규정되어 진다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선포는 “예수의 전체적 선포와 가르침, 예수의 출현과 태도를 지배하는 중심으로서 판단되어진다.” 예수에게 하나님의 통치는 새로운 시대로서 구원으로 가득 찬 삶의 영역으로 되어진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행위로서 이해되어진다.
판넨베르크에 의하면 묵시문학적 종말론은 역사의 끝에 일어나게 될 하나님의 최종적인 계시의 수행을 통해 결정되어진다. 그러한 결과로부터 예수의 주장은 예수 당시의 상황에만 유효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 종말에 있게 될 하나님의 마지막 계시의 연장선에서 이해되어진다. 그러한 사실로부터 묵시문학은 나사렛 예수의 사역과 운명의 정신사적 컨텍스트로서 의미를 가지게 된다.
1. 묵시문학적 하나님상과 역사상
이미 언급한대로 판넨베르크는 묵시문학은 이스라엘의 선지자적 전통과의 관련 안에 있다라고 말한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이해되어지고 경험되어진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와 관련되어 있다. 그러므로 묵시문학적 현실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전승사적 관련 안에 있는 이스라엘의 전통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판넨베르크는 주장한다. 판넨베르크는 예수를 묵시문학적 전통 위에 세우며 이러한 전통을 다시금 이스라엘의 전체 역사와의 밀접한 연관성 안에서 보면서, 그는 신약성서와 구약성서의 연속성을 강조한다.
그러면서도 판넨베르크는 하나님의 최종적인 계시를 구약성서에서 찾을 수 없다라고 말한다. 신약성서, 그 중에서도 특히 그리스도에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최종적인 계시를 발견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판넨베르크는 “ 예수의 길은 온전히 이스라엘의 전통사 안에서 근거 지워져 있으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그의 하나님이며, 그래서 예수의 역사를 결코 자기 자신으로부터가 아니라 다만 이스라엘의 전승사의 컨텍스트안에서만 이해되어질 수 있다” 라고 주장한다.
판넨베르크에 의하면, 역사로서의 현실성의 경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경험에 존재한다.
하나님은 세계의 원근거(Urgrund)로서 혹은 항상 되풀이 되는 사건과 소여성의 기원으로서 경험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더불어 행동하는 자로서 그리고 예언되어진 방법과 자기 창조의 과정 안에서 간섭하시고 그 안에서 새로운 것을 엮어나가시는 자유로운 자로서 경험되어진다. 또한 하나님은 알려진 현실성의 시원이 아니며, 변하지 않고 고정되어진 우주 질서의 원 근거도 아니다. 그는 우주 만물의 하나님이며 특히 이스라엘의 하나님임을 알리기 위해 역사 속에서 행동하시는 하나님으로 경험되어진다. 이스라엘 민족들은 살아있는 하나님의 행위를 언약과 위협 속에서 경험했기 때문에 그들은 모든 역사적 소여성들을 언약의 성취를 위한 하나님의 길로서 이해했다.
그러나 판넨베르크는 하나님의 이러한 행위를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적용시키는 것이 아니라 세계 전체 민족에게 적용시킨다. 이와 더불어 야훼는 모든 민족의 하나님으로 되고 전체 역사는 하나님의 신성의 종국적인 자기증명을 수행해 나가는 장으로서 이해한다. 이러한 선상에서 이스라엘의 출애굽후의 묵시문학은 “창조와 세계종말 사이에서의 세계흐름의 전체를 향한 역사의 확장”으로서의 의미를 가지게 된다. 이와 더불어 하나님의 우주적인 통치 안에서 수행되어지는 계시를 통해서 세계와 인간의 고유한 규정이 명백하게 나타난다. 새로운 시대의 종말론적 도래에서야 비로소 현재적 시간의 의미가 계시되어지며, 세계역사의 전체성이 명백해진다.
이러한 인간과 세계 그리고 역사의 최종적인 규정은 묵시문학에 나타나는 죽은 자들의 보편적 부활과 영원한 생명으로서의 창조의 새로움으로 변화되어진다. 그러므로 묵시문학은 세계창조로부터 종말까지의 전체역사를 다루고 있다. 이와 더불어 역사의 의미는 완전한 계시이며, 죽은 자들의 보편적 부활과 새로운 창조를 실현시켜나가시는 하나님의 자기해명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판넨베르크에 의하면 예수의 주장은 전체 역사에 대한 묵시문학적 관점과 분리되어 생각되어 질 수 없으며 그리고 그러한 묵시문학적 관점은 예수의 주장의 본질을 이룬다.
또한 이러한 묵시문학적 역사관은 하나의 보편사적 관점이다. 왜냐하면 보편사적 관점은 역사를 역사의 시작부터 종말까지 죽은 자들의 보편적 부활안에서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관을 구원사적 신학 안에서 나타난 것처럼 판넨베르크는 믿음을 통해서만 수용할 수 있다는 것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역사관은 주관적 확신으로서의 믿음을 통해 수용되어진 초자연적인 관점이 아니기 때문이다.
판넨베르크는 불트만의 역사성이 결핍되어진 실존론적 신학과 초자연적인 구원사적 신학에 대해 묵시문학의 보편사적 관점을 대립시키고 오늘날의 역사학(Geschichtswissenschaft)의 도움을 통해 역사적 예수를 증명하려고 노력한다. 이와 더불어 판넨베르크는 역사-비평적 방법을 수용하면서, 그는 역사-비평적 연구를 보편사적 지평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판넨베르크는 그의 논문 “역사적 그리고 신학적 해석학에 관하여(Ueber Historische und Theologische hermeneutic)”에서 역사적 연구는 모든 개별적 사실들 속에 스며있는 의미의 발견으로부터 출발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역사적 실재성은 결코 순수한 사실성 자체 안에서만 발견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적 연구는 역사적 개별성의 단순한 사실성을 넘어서서 인식론적 선취를 필요로 한다.
이러한 사실과 더불어 판넨베르크에 있어서 역사는 전승사로서 이해되어진다. 왜냐하면 하나의 개별적 사건은 단순한 사실로서의 개별적 사건을 넘어서는 그 어떤 보편적 의미로서 경험되어지는 사실을 통해 역사는 전승사로 되어지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역사는 언어 안에서 유지되고 그리고 선취의 빛 안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며 또한 이러한 새로운 경험으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것이 다시금 변화되고, 그래서 다음 세대로 계속 이어지는 전통 안에서 유지되어진다. 그러므로 하나의 사건과 그 사건 안에 스며있는 의미의 뒤섞임은 전체로서의 의미의 선취 안에서 자기의 존재론적 근거를 가진다.
2, 보편사적 가능성의 조건으로서의 역사적 선취(Vorwegnahme)
판넨베르크에 의하면 모든 개별적 사건들은 세계사의 지평 안에 스며있는 완전한 의미 안에서 가치를 얻으며 이해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역사적 연구는 종국적으로 보편사적 구상을 필요로 한다. 판넨베르크는 만약 역사의 끝이 발견되어진다면 우리는 역사의 전체성에 대해 언급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것으로부터 그는 “역사의 전체를 다만 역사의 끝으로부터만 인식될 수 있다” 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래서 역사적 이해는 다만 보편사적 지평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의 끝은 인간에게 인식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 제기되어진다.
판넨베르크는 이러한 질문에 인간이 역사의 끝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현존(Dasein)의 역사성에 대한 미래의 우월성의 인식”을 주장하는 하이데거의 사상과 연결시키면서 인간의 삶의 의미는 미래, 즉 역사의 끝으로부터 형성되어진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판넨베르크는 이러한 역사의 끝은 개념(Begriff)으로는 파악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역사의 끝은 우리 인간에게 다만 임시적인 희망의 상들 안에서 인식되어지며, 그러므로 개념 안에서가 아니라 선취(Vorgriff)안에서 예견 되어질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말은 우리에게 비밀로 가득 차 있으며 그리고 우리의 현재적 인식의 가능성을 넘어서 있다. 이와 더불어 미래는 우리에게 열려져 있으며 모든 사건의 개별성과 우연성이 유지되어진다.
판넨베르크는 이러한 사상을 인식론을 위해서는 그의 논문 “신앙과 이성(Glaube und Vernurft)" 과 ”무엇이 진리인가?(Was ist Wahrheit)“에서 다루고 있으며, 그리고 존재론을 위해서는 그의 논문 ”미래적인 것의 도래로서의 현현(Erscheinung als Ankunft des Zukuenftigen)" 에서 다룬다. 또한 판넨베르크는 칸트와의 논쟁에서 모든 것을 개념적으로 파악한다는 것은 선취(Vorgriff)안에서 수행되어진다는 것을 의미 한다라고 말한다: “모든 주장되어진 의미는 선취위에서 그리고 마지막 미래의 예견위에서 근거하며 그것의 빛 안에서 개별적 사건의 참된 의미가 적절하게 진술되어질 수 있다.”
이러한 인식 구조는 인식대상 자체의 구조에 일치한다. 현재적 현상은 마지막 미래의 예견일 뿐이며 그리고 현재적 존재는 완전히 그것이 존재하게 될 것으로부터 규정되어진다.
3. 보편사적 구상의 총체로서의 죽은 자들의 부활
판넨베르크에 의하면 묵시문학적 역사관은 예수의 주장과 연결되어 있으며 또한 역사의 전체성으로서의 보편사적 구상을 가진 모든 역사적인 연구에 있어서 필연적이다. 묵시론 자들은 역사의 종말을 죽은 자들의 보편적 부활과 우주적 심판, 새로운 창조 그리고 영원한 삶으로서 표상했다.
판넨베르크는 이러한 표상들의 진리를 예수의 부활 자체로부터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표상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죽은 자들의 보편적 부활사상은 맨 먼저 예수의 부활로부터 증명할 수 없다. 부활의 기대는 전통적으로 이미 주어졌거나 혹은 인간론 적으로, 철학적으로 근거 지워진 진리로서 전제되어 있음이 틀림없다.” 이와 더불어 판넨베르크는 예수부활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 죽은 자들의 보편적 부활의 진리를 언급하고 있는 고전 15,16절에서의 바울의 사상을 소개한다.
판넨베르크는 그러나 이러한 묵시문학적 역사관은 비유적으로만 설명되어질 수 있다라고 말한다. “우리가 지금 미래적 삶에 대해 말하며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다만 하나의 비유(Gleichnis)에 불과하다. 그것이 어떻게 실재적으로 존재하게 될 것인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묵시문학적 표상들 중 가장 중요한 사실, 즉 죽은 자들의 보편적 부활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진다.
그러므로 역사의 끝은 “죽은 자들의 부활”로서 성취되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인간의 유한성으로부터 표상되어진 하나의 상(Bild)일 경우에 이러한 종말은 우리의 개념 안에서 파악되어질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의 흐름은 종말의 알려짐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종말에 대해 열려있으며 참된 미래가 가능한 것이다.
판넨베르크는 이처럼 예수의 주장 안에 내포되어진 묵시문학의 역사관을 죽은 자들의 보편적 부활의 기대와 더불어 증명해 보려고 노력한다. 또한 하나님에 대한 판넨베르크의 신학사상 역시 같은 선상에서 전개되어진다.
4. 우주 역사의 총체로서의 하나님상
역사적 연구는 종국적으로 전 역사의 보편적 구상을 내포하고 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포괄하는 역사의 일치에 대한 선 이해 없이는 모든 개별적 사건들 안에 스며있는 의미를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 역사의 흐름은 - 개별적 사건들의 우연성과 개별성에도 불구하고 - 하나의 일치 안에서 진행되어진다. 그러므로 판넨베르크의 역사 안에서의 모든 사건들의 우연과 일치는 함께 생각되어진다. 또한 역사의 일치와 우연은 하나의 초월적 근거와 초월적 자유, 즉 하나님을 암시한다. 오직 자유롭고 인격적인 하나님만이 역사 속에 있는 우연적인 것의 기원일 수가 있으며 동시에 이러한 우연적인 것의 일치를 만드신다.
그러나 판넨베르크에 의하면 하나님은 결코 인간에 의해 증명될 수 없다.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생각은 주관적이며 선취적인 구상을 넘어서지 못한다.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진술들은 질문과 가설로 머물러 있다: “역사적 전승을 통해 미리 주어진 하나님 사상은 형식적으로는 가설로서 나타난다.”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질문은 하나님의 계시를 암시하며 그리고 계시는 철저하게 권위적인 요청으로서가 아니라 신적 실재성의 고지의 의미 안에서만 이해되어진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질문은 하나님의 계시, 즉 하나님의 자기 자신을 해명하는 자기계시에 대한 질문이며 그리고 죽은 자를 소생시키시는 그의 행위 안에서 구체적으로 수행되어지는 역사의 종말에 대한 질문이다. 하나님의 계시는 직접적이지 않으며 간접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현재적 증명은 불가능하며 미래에 열려져 있다.: “모든 사건의 끝에서야 비로소 하나님은 자기의 신성 안에서 계시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더불어 역사적으로 연구되어진 예수의 주장에 제기되어지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죽은 자들의 보편적 부활을 가진 묵시문학적 역사관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유효한가? 이러한 질문은 판넨베르크에 있어서 우선 긍정적으로 대답되어진다. 또한 이러한 대답의 종말론적 유보가 주목되어진다. 즉 하나님, 우주역사 그러고 죽은 자들의 부활은 인간들에게 증명되어 질 수 없는 선취이며, 필연적 가설이다. 그러므로 예수 역사의 묵시문학적 지평은 또한 오늘날의 현실성 이해의 지평으로 계속해서 확장되어진다.
III. 부활을 통한 예수의 주장의 정당성과 예수의 보편사적 의미의 근거로서의
부활
지금까지 진술된 것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판넨베르크는 전체성과 상대성의 통일성을 이스라엘의 묵시문학적 현실성의 이해 안에서 발견했다. 그는 동시에 그러한 이해 안에서 인간의 삶의 전체성으로서의 구원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한다. 그러나 이러한 대답은 마찬가지로 선취적인 것이기 때문에 가설적인 것으로 남아있다.
이와 더불어 우리는 이제 예수의 부활에 대한 질문에 이르게 된다: “예수 부활의 절대성은... 그의 지상의 출현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의 제자들이 예수의 부활을 선포했었던 사건을 통해서야 비로소 결정되어진다” 부활안에서 예수역사의 실제성이 나타난다면 예수자신은 종말의 선취로서 증명되어진다. 이와 더불어 역사적 예수에 대한 질문은 예수의 부활에 대한 질문으로 나타난다.
판넨베르크에 의하면 원시 기독교의 증인들은 역사의 공간에서 진행되어졌던 예수의 주장의 정당성에 관해 언급했으며, 그러한 정당성을 예수부활에 관한 보도 안에서 찾았다. 판넨베르크는 여기서 다시금 그의 보편사적인 관찰방법을 도입한다.
1. 전승사적 연관 하에서의 예수부활의 의미
예수부활에 관한 언급은 첫 번째 증인들에게 일어났었던 예수의 현현(Erscheinungen)들 안에서 근거 지워진다. 그러므로 이러한 현상들은 묵시문학적이며 종말론적인 죽은 자들의 보편적 부활이 예수의 부활안에서 선취되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유대인으로서의 그들에게 한 개인의 부활의 표상은 통용되지 않았지만 그러나 살아있는 주와의 만남은 빈 무덤의 발견과 더불어 묵시문학적 이해의 지평선과 상응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하나님은 이러한 예수를 소생시키셨다."
하나님에 의한 죽은 자들의 보편적 부활은 이러한 사실로부터 다음과 같은 사실을 추론 한다: “예수가 만약 부활하셨다면 세상의 종말이 이미 도래했다.” 그러나 예수부활에 의해 야기 되어진 종말의 도래는 보편적 종말의 즉각적인 시작으로서가 아니라 종말의 선취로서 이해되어진다. 이와 더불어 예수의 부활은 하나님 자신이 부활 이전의 예수의 출현을 확언하였으며 그러므로 그의 주장에 정당성이 부여되어진다는 의미를 가지게 된다.
묵시문학적으로 생각하는 유대인들을 위해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의 종국적인 계시였으며 하나님의 신성의 종국적인 자기증명이었음을 뜻한다. 왜냐하면 예수의 부활은 하나님의 계시는 역사의 끝에서야 비로소 실현되어 진다는 묵시문학적 실재관에 일치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역사의 끝에서야 가능한 하나님의 자기 증명은 이러한 사건을 통해서 이미 현재안에서 이루어졌다.
만약 예수의 부활에서 전체역사의 끝이 선취되어졌다면 하나님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의 하나님으로서 계시되어졌으며 이와 더불어 이방선교의 길이 열려지게 된다. 왜냐하면 모든 사물의 끝의 선취로서의 그리스도 사건의 종말론적 특징은 이방인들에게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한분이신 참된 하나님으로 인식할 수 있게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에게 일어난 이러한 사건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최종적인 계시로서의 결정적인 의미를 가진다. 이와 더불어 이제 예수의 부활에 대한 역사적 질문에 이르게 된다.
2. 예수 부활의 역사성
예수의 부활은 특정한 시간과 공간내에서 일어난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었다. 판넨베르크는 이러한 역사적 사건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인식될 수 있기 위해서는 역사적 연구 외에는 다른 방법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2000년 전 하나의 특정한 사건의 발생은 신앙이 아니라 오직 역사적 연구만이 우리에게 확실성을 가져다준다.
예수부활에 대한 질문은 먼저 부활한 자들을 보았다고 주장하는 자들의 증언에서 대답되어진다. 이와 더불어 신약성서의 텍스트에 기록되어진 이러한 증언들의 정당성에 대한 질문이 제기되어진다. 여기서 판넨베르크는 알려지지 않은 것은 이미 역사연구가들에게 알려진 것과의 유사성 안에서 인식되어질 수 있다고 주장하는 트뢸취의 “유비원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트뢸취에게 있어서 유비원리는 “모든 차이들은 모든 것을 일치하도록 만드는 동질성에 의해 둘러싸여져 있다.” 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판넨베르크에 있어서 이러한 가정은 역사의 실재성을 깨닫지 못하게 하는 하나의 교리적 요청일 뿐이다. 판넨베르크는 오히려 역사적인 것의 동질성이 아니라 고유한 것(Eigentuemliche)과 비 동질적인 것에 관심을 가진다. 만약 유비의 원리가 역사적 연구에 적용된다면 부활의 역사적 인식은 처음부터 배제되어질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의 부활사건과 그 이외의 모든 역사적 사건들 사이에는 어떠한 유사성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부활의 역사적 사건은 어떻게 증명될 수 있는가? 판넨베르크는 예수 부활사건의 역사적 증명을 위해 두 가지 상이한 부활절 전승, 즉 부활한자의 현현들과 예수의 빈 무덤의 발견으로부터 출발한다.
1) 부활한 자의 현현
판넨베르크는 부활한 자의 현현에 대한 역사적 질문을 위해 우선 바울의 보도인 고전 15,1~11절로부터 출발한다. 판넨베르크는 바울의 보도를 예수의 부활의 역사적 사실성을 위해 신뢰할만한 증언으로 여긴다. 왜냐하면 베드로와 열두 명 앞에서의 현현 , 한번에 500명이나 되는 그리스도인의 형제들과 예수의 형제 야고보 그리고 모든 사도들과 바울 자신 앞에서의 현현들은 명백한 증명으로서 제시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판넨베르크는 텍스트의 오래됨을 그 증거로 제시한다. 그러므로 바울의 보도는 그 사건에 가장 가까이 근접되어져 있었다. 또한 현현들의 빈번한 숫자들과 그것들의 시간적 분산들은 예수부활사건의 개연성을 더 높여준다.
2) 빈 무덤 전통
두 번째 부활전승은 예수의 빈 무덤 전승이다. 판넨베르크에 의하면 바울이 빈 무덤을 언급하지 않았던 사실은 예수의 빈 무덤의 전승이 신뢰성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현현 사건들과 빈 무덤사건은 예수부활의 두개의 독립된 전승들이며 그것을 통해 예수부활의 사실성을 더욱더 높여준다. 만약 현현 전승들과 빈 무덤전승이 서로서로 독립된 채, 즉 예수의 현현은 갈릴리 지역에서 빈 무덤의 발견은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다면 그것들은 예수부활의 사실성의 주장을 그들의 상대적인 보충을 통해 역사적으로 매우 높은 개연성을 나타낸다.
그러나 빈 무덤 전통은 그것 자체로는 예수부활의 역사성을 증명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빈 무덤 전통은 현현 전통의 연구로부터 나타난 결과들과의 연관 안에서 역사적 사실성이 입증되어진다. 물론 엄밀한 의미에 있어서 현현전승들과 빈 무덤전승을 통한 완전한 역사적 증명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판넨베르크는 만약 역사가가 부활의 가능성을 선험적으로 배제하지 않는다면 예수부활의 실재성은 묵시문학적 컨텍스트를 가진 그 당시의 상황 하에서 매우 높은 개연성을 가지고 있음을 확신한다. 이러한 관점 하에서 판넨베르크는 예수의 부활은 그 당시 실제적으로 일어났었던 역사적인 사건 이라고 말한다.
3. 예수 부활의 역사성으로부터 나온 결과들
1) 부활의 소급적인 힘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서의 예수부활의 역사성은 부활하기 이전의 나사렛 예수의 모든 주장들과 사역들을 확정시킨다. 예수의 주장이 하나님에 의해 확정되는 동안에 예수는 그의 지상 생애동안 이미 하나님과 그의 통치의 현재 이었음을 확정시킨다. 그러나 이러한 확증은 인식론적 기능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소급하는 힘(rueckwirkende Kraft)을 가지고 있다. “그의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과 하나이다라는 사실이 입증되어졌다.” 그러나 이와 더불어 예수가 부활을 통해 이전에 그가 아니었던 그 어떤 것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부활의 소급하는 힘은 예수가 항상 미래적 하나님의 현재였으며 그리고 그가 과거의 그런 자였다는 사실은 부활안에서 그리고 부활을 통해서 결정되어진다. 이와 더불어 전체성과 하나님에 대한 질문의 최종적인 대답은 역사적 예수 안에서 발견될 수 있다. 그러므로 보편사의 가설과 이러한 보편사의 가능성의 조건으로서의 하나님의 가설에 대한 증명은 마찬가지로 역사적 예수 안에서 발견 되어진다.
그러나 예수부활의 사건 자체는 다시금 선취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예수부활의 선취적 특성은 종말론적 삶의 실재성에 대한 완전한 참여 안에 있다. 만약 예수의 부활이 종말의 선취이며 그리고 종말은 죽은 자들을 소생시키시는 하나님의 행위로서 여겨진다면 예수의 부활은 하나님의 자기증명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실제성에 대한 질문은 예수사건에서 대답되어지고 “하나님은 존재하신다”라는 진술은 종국적으로 예수부활의 역사성과 연결되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안에서의 하나님의 계시는 항상 선취이며 예견으로 남아있다. 그래서 미래는 이미 일어난 사건의 설명, 즉 예수 사건 안에서의 하나님의 계시의 설명으로서 특징 지워진다.
그 외에도 예수의 신성은 그의 부활로부터 증명되어진다. 판넨베르크에 있어서 하나님은 자기의 신성을 모든 사물에 대한 힘으로서 증명한다. 하나님의 계시는 바로 이러한 통치의 수행 안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의 존재에 있어서 계시와 분리되어질 수 없다. 만약 부활한 예수가 하나님의 계시라면 하나님은 예수를 통해 이해되어지고 설명되어지는 자로서 생각되어질 수 있다. 그러한 사실로부터 예수의 신성이 유추되어진다.
2) 믿음의 가능성으로서의 예수의 부활
판넨베르크에 있어서 믿음은 초자연적이며 초역사적인 진리의 무조건적인 수용이 아니다. 믿음은 인식, 즉 하나님과 죽은 자들의 보편적인 부활을 가진 역사의 전체성에 대한 인식에 존재한다. 또한 믿음은 예수와 그의 주장과 무엇보다도 그의 부활의 역사적 인식을 전제하며 그러므로 예수의 운명 안에서의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지식을 전제한다. 그것으로부터 하나님과 역사의 전체성에 대한 지식의 불확실성이 극복되어진다. 그러므로 계시의 진리는 결코 초자연적인 진리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개방되어진 진리이다. 그러나 판넨베르크에 있어서 하나님과 보편사 그리고 죽은 자들의 보편적인 부활에 대한 지식은 그것이 비록 예수의 부활 안에서 입증되었다 할지라도 결코 개념적인 것으로 파악될 수 있는 지식이 아니다. 왜냐하면 완전한 종말과 하나님의 종국적인 계시는 역사의 종말까지 유보되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안에서의 하나님의 계시의 인식은 믿음을 위해서 아직도 열려있다. 이러한 신뢰로서의 믿음은 계시의 사건에 대한 지식을 전제한다. 왜냐하면 계시의 이러한 인식은 선취적 구조를 자신 안에 가지고 있는 사실의 인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식하는 자는 사건자체를 통해서 믿음의 운동 안으로 인도 되어진다. 그러므로 판넨베르크에 의하면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예수는 인식의 대상이며 또한 그가 그의 부활을 통해 이미 하나님의 절대적 미래에 속해있을 경우에 그는 또한 믿음의 대상이다.
맺는말
판넨베르크의 기독론적 관심사는 나사렛 예수의 사역과 운명을 오늘날의 현실이해의 지평 안에서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증명해 나가는데 있다. 예수말씀의 무비판적 수용 대신에 판넨베르크는 이러한 말씀의 유효성의 증명을 요구한다. 초자연적이며 실존론적 신학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에 그는 합리적으로 증명되어지는 역사의 신학을 대립시킨다. 판넨베르크에 있어서 역사적 예수의 주 관심사는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리고 모든 인간들의 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획득할 수 있느냐에 놓여있다. 이와 더불어 판넨베르크는 이러한 지식은 역사적 연구를 통해 얻을 수 있다고 확신한다. 또한 판넨베르크의 기독론의 주된 특성은 기독론은 예수부활의 역사성으로부터 출발해야 하며 그 역사성은 기독론의 중심에 서있다 라는 사실에 있다. 부활의 이러한 역사적 인식은 또한 부활전 그리고 부활후의 예수의 역사적 인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진다.
그러나 예수부활을 역사적으로 증명하려는 판넨베르크의 시도는 이제 비판적으로 고찰되어진다.
1. 예수부활에 대한 역사적 증명의 문제성
판넨베르크는 예수부활의 확실성은 역사적 연구를 통해 가능하다라고 주장한다: “만약 예수의 부활이 역사적인 것으로 주장되지 않는다면 예수의 부활은 실재적으로 일어난 사건으로서 주장할 아무런 근거가 없다. 2천년 전 하나의 특정한 사건이 일어났었는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믿음이 아니라 다만 역사적 연구만이 우리에게 확실성을 제공해 준다.” 그러나 이러한 판넨베르크의 주장에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되어 진다: 예수의 부활은 참으로 역사적 예수연구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판넨베르크는 먼저 예수부활의 역사성을 이스라엘의 묵시문학에서 나타나는 죽은 자들의 보편적 부활의 희망을 통해 증명 한다: “다만 묵시문학적 부활의 표상 안에서만 예수의 부활사건은 역사적으로 개연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되어 질 수 있다.”
그러나 판넨베르크의 이러한 묵시문학적 전제에 대해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 되어진다: 예수부활의 역사성을 묵시문학에서 나타나는 죽은 자들의 보편적 부활의 기대에 의존하는 것은 과연 오늘날의 역사관과 상충될 수 있는가? 죽은 자들의 보편적 부활의 기대는 다만 가설적인 특성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역사의 종말에서야 비로소 일어나게 될 선취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부활사건이 믿음을 통해 수용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들의 보편적인 부활의 묵시문학적 전제를 동반한 역사적 연구를 통해 증명되어 질 수 있다는 사실은 의문시된다.
이와 더불어 예수부활사건의 역사성을 역사 비평적 방법의 도움을 통해 역사적으로 증명하려고 하는 판넨베르크의 시도는 예수부활의 역사성을 전제하는 묵시문학에 나타나는 “죽은 자들의 보편적 부활의 희망”이 먼저 검증 되어야만 할 것이다. 판넨베르크는 이스라엘의 묵시문학의 내용에 대해서는 역사-비평적 방법의 도움을 통해 증명하려하지 않는다. 판넨베르크의 논리를 따르자면 이스라엘의 묵시문학에 대한 역사적 증명 없이 더구나 역사의 종말에 일어나게 될 죽은 자들의 보편적 부활사건이 과연 예수부활의 역사성을 전제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예수가 부활했다”라는 진술을 역사적으로 증명하려고 하는 판넨베르크의 시도는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에 의해 부활 하셨다는 것과 게다가 영원히 썩지 않을 육체를 입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사도들의 증언들은 우리 인간의 경험영역에는 나타나지 않는 사건과 상태에 관한 것들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증언의 내용들을 역사적으로 증명한다는 것은 불가능 한 일이다. 다시 말해서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결정적인 사건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사건의 진리는 다만 역사-비평적 방법의 도움을 통한 역사적 증명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주시는 믿음에 있다. 나사렛 예수의 신성을 입증하는 부활절사건은 역사적 사실로서 재구성하거나 혹은 다른 요소를 통해 보충할 수도 없는 것이다. 부활절사건은 우리의 외부로부터(extra nos) 시행 되어졌다.
2. 판넨베르크에 있어서 십자가의 의미
판넨베르크의 신학에 있어서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은 그렇게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는 부활사건에 의존한다: “바로 예수의 부활로부터 왜 예수가 십자가로의 고통의 길을 가셔야만 했는지에 대한 질문이 제기 되어야만 했었다.” 판넨베르크에 있어서 예수의 십자가는 “묵시문학적 기대의 전승사적 관련 안에서의 중간휴지” 일 뿐이며 그리고 하나님이 그를 일으켜 세우셨고 역사의 종말을 그 안에서 선취적으로 일어나게 할 수 있기 위한 전제인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사건의 차별성은 예수부활에 관한 판넨베르크의 일방적인 해석에 근거를 둔다. 물론 예수의 부활사건은 기독교에 있어서 중요하며 결정적인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은 예수의 십자가사건으로부터 올바르게 이해되어지고 해석되어질 수 있다. 그것을 위해 몰트만이 다음과 같이 올바르게 지적 한다: “후기 유대적 묵시문학과 그리고 기독교적 종말론의 기대사이에는 예수의 십자가가 서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기독교의 부활의 종말론에 십자가의 종말론의 특성이 각인되어진다.” 예수의 부활은 예수의 십자가 없이 이해될 수 없으며 해석될 수 없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우리의 신앙의 근거는 판넨베르크의 주장대로 예수부활의 역사성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부활한 자로서 이해되어진 이 땅의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 안에 있다.
이제 “판넨베르크에 있어서 역사적 예수”에 대한 결론을 내리려고 한다.
신약성서의 텍스트 안에는 역사적 실재성과 사도들의 신앙고백, 그리고 개개 시대와 연결되어진 표상의 형태에 의해 각인 되어진 해석이 서로 함께 뒤섞여 기록되어져있다. 다시 말해서 신약 성서 안에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보도들과 신앙고백 그리고 선포 등이 서로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져 기록되어있다. 그러므로 역사적 예수연구는 역사적이며 해석학적이고 그리고 기독론적 작업이 기독교적 신앙의 내용과 근거에 대한 새로운 질문들과 더불어 수행 되어져야만 한다.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 판넨베르크가 그의 신학에서 시도했었던 역사의 전체성(Totalitaet)에 대한 증명은 그때그때의 현재에 있어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가 계속 진행되는 동안에 이러한 전체성은 획득되어 질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의 근거는 신약성서의 그리스도 선포의 역사적 증명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적 수용과 들음 그리고 행위를 통한 대답에 있다. 이와 더불어 나사렛 예수는 주로서 그리고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동등한 분으로 고백되어지고 그리고 이 땅에 존재했던 자로서 그리고 부활했던 자로서 믿음을 통한 우리의 인격적인 만남 안에서 증명되어지고 인식되어진다.
Der historische Jesus bei Wolfhart Pannenberg
Das Christentum unterscheidet sich von allen anderen Religionen und Weltanschauungen, dass es einer historisch einmaligen Erscheinung, die als solche einer bestimmten Vergangenheit angehoert, naemlich der Person Jesu von Nazareth, absolute Bedeutung zuschreibt. Jesus von Nazareth ist im Selbstverstaendnis des christlichen Glaubens der bleibenden Grund dieses Glaubens. Darum stellte sich der Theologie die Aufgabe, geschichtliche Einmaligkeit und bleibende Bedeutung Jesu miteinander zu verknuepfen.
Innerhalb der evangelischen Theologie hat sich mit einer gewissen Unausweichlichkeit die Frage nach Jesus Christus als dem Fundament des christlichen Glaubens verwandelt in die Frage nach dem historischen Jesus, wie er hinter kirchlicher und biblischer Tradition greifbar wird. Zugleich ist aus der Verbindung des Christentums mit diesem historischen Ursprung eine nicht zu bewaeltigende Aporie geworden: Wie kann Jesus von Nazareth angesichts des von der historischen Forschung entdeckten Abstandes zwischen seinem "Damals" und unserem "Heute" gegenwaertiger Grund des Glauben und die Theologie?
Das Ziel dieser Arbeit ist der Versuch, die positiven und negativen Ergebnisse des historischen Jesu bei W. Pannenberg und damit den Zusammenhang von neutestamentlicher Wissenschaft und systematischer Theologie zu erschliessen, und die gegenwaertige Bedeutung der historischen Jesusforschung fuer die Theologie darzustellen.
Dies muss vor allem im Blick auf die verschiedenen Versuche einer Zuordnung von historischer Jesusforschung und dogmatischer Christologie aufgrund Pannenbergs These von der Offenbarung als Geschichte geschehen.
In dieser Arbeit wird auch versucht, den historischen Jesus im Blick auf Pannenbergs Christologie darzustellen. Pannenberg ist davon ueberzeugt, dass Jesus von Nazareth der kritisch gesicherten und methodisch reflektierten Geschichtswissenschaft zugaenglich ist. Somit ist der Frage nachzugehen, welche Bedeutung dem in diesem Sinne verstandenen historischen Jesus in der Theologie des Systematikers Wolfhart Pannenberg zukommt.
Hier handelt es auch nicht um die Darstellung der ganzen Theologie Pannenbergs, sondern es wird die Untersuchung der Frage ausgefuehrt, wie sich die christologiesche Konzeption Pannenbergs in seiner systematischen Theologie ausdrueckt und welche Bedeutung die Leben-Jesu-Forschung fuer seine Christologie. Letzter Teil der Arbeit bringt abschliessend einige kritische Reflexion zur Christologie Pannenbergs.
Key words
Pannenberg, der historische Jesus, Christologie, Apokalypt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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