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롤즈(1921~2002)는 윤리학과 정치철학 분야에 아마도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미국 철학자일 것이다. 특히 미국 민주당의 정치 이데올로기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쳐, 1999년 당시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한테서 인문학 분야 국가훈장까지 받았다. 어쩌면 이 잡지의 일부 독자들은 일간지 칼럼이나 대학 강의실에서 “공정으로서의 정의”나 “공적 이성” 등 원래 롤즈가 한 말들을 들어 봤을지도 모르겠다. 롤즈의 주저 《정의론》(원서 초판은 1971년 출판됨)은 고전의 반열에 올라 철학자는 물론 정치학자·법학자·경제학자·사회학자·신학자 등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이 인용하고, 미국의 사법부와 영·미의 여러 정치인들이 흔히 언급한다.
《정의론》은 미국에서 “이데올로기의 종언”(다니엘 벨 우익 사상의 키워드)이 의기양양하게 선언되던 바로 그때(1960년대) 분출한 이데올로기 위기의 산물이었다. 미국은 건국 때부터 자유와 민주주의와 정의에 관한 공문구를 남발하며 마침내 냉전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1960년대 공민권 운동과 반전 운동은 정의 부재 현실에 의문을 던졌다. 이어 학생·여성·동성애자·소수인종 들이 뒤따랐다. 이들은 미국 지배자들이 발행한 정의라는 이름의 백지수표를 받았지만 그것을 현금으로 바꾸려 하자 부도수표였음을 알게 된 것이다. 자연히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새 이론이 미국 지배자들에게 필요했다. 자유민주주의 전통을 업데이트한 이론이 절실히 필요했던 것이다. 이때 롤즈가 등장했다. 롤즈의 정의론은 사회의 근본적 변화 없이 천대받는 사회집단(롤즈가 말한 “최소 수혜자”들로, 요즘 말로는 “사회적 약자” 또는 “소외 계층”)의 동의를 이끌어 내고자 한 시도였다.
롤즈는 자신이 보편적인 정의 원칙들을 발견하고 입증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그런 원칙들을 설명한 《정의론》은 시공을 초월한 원칙이 있을 수 없다고 보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도전이었다. 마르크스주의는 정의의 원칙들이 언제나 주로 역사적·사회적 조건의 영향을 받는다고 보았다. 이것이 마르크스주의 정의관의 출발점이었다. 20세기에 득세한 정의관은 14세기에 득세한 정의관이나 그 시대에 생각해 낼 수 있는 정의관과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또한 마르크스주의 정의관에 따르면 계급으로 분열한 사회의 정의관은 본질적으로 계급적 정의관이다. 계급사회의 정의관들은 하나로 뭉뚱그려진 의미에서 ‘인간’의 이익이 아니라 특정 사회계급들의 이익을 표현한다.
이 글은 롤즈 정의론의 도전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응답이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제대로 된 마르크스주의적 응답이 될 수 있을까? 여러 정치철학자들처럼 필자(이하 1인칭 ‘나’)도 롤즈 이론이 논리적 근거가 취약함을 논증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런 방식에 특별히 마르크스주의적인 것은 없다. 오히려 내가 채택하고자 하는 방식은 마르크스주의적 방법으로 롤즈 이론을 분석해, 정의를 “영원의 상相 하에서[롤즈가 사용한 스피노자의 말로, 쉽게 풀이하면 ‘보편적이고 영원한 진리 문제로’라는 뜻]”(《정의론》, 750쪽. 이하 숫자만 표시) 보면서 확립했다는 롤즈의 정의 이론이 실제로는 정의 이데올로기, 즉 특정한 사회적·역사적 상황과 그 상황에서의 특정한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신조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런 인식 방법의 본보기는 마르크스의 종교 분석이다. 마르크스 종교론의 주된 관심은 신 존재 증명 논쟁에 끼어들어 반론을 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다른 곳에서 주장했듯이 종교가 사회적 산물임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1 그러므로 나의 주된 목표는 롤즈가 비논리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주장의 근저에 있는 숨은 사회적 논리를 드러내는 것이다. 사실, 내 보기에 롤즈는 논리적이다. 그가 모순을 드러낼 때는 시대적 제약 속에 있는 자신의 이론을 시대를 초월한 보편적 이론으로 격상시키려 할 때인 듯하다.
나는 나의 《정의론》 분석이 온전하다고 주장할 생각은 감히 하지 않는다. 빽빽하고 장황한 저서의 온갖 세세한 측면을 다룰 능력 자체가 내게는 없는 듯하다. 그러나 그의 핵심적 주장들은 그 논지 전개 순으로 두루 다룰 작정이다.2
1. 바탕에 깔린 가정들
롤즈는 정의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답하고자 근대 초 정치철학의 핵심 가설인 사회계약론에 기댄다. 그래서 정의의 원칙들에 도달하기 위해 롤즈는 상호 무관심한 계약 당사자들이 사회·정치 제도들에 관한 합의를 이뤄야 하는 가상의 시초 상황(롤즈는 이를 “원초적 입장”이라고 부른다)을 가정한다. 그 당사자들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 타고난 재능, 가치 개념 등을 알지 못한다. 롤즈는 이를 “무지의 베일(장막)”이라고 불렀다. 롤즈는 당사자들이 정의의 두 원칙에 도달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첫째 원칙은 전통적인 자유주의적 자유들을 포함하고, 둘째 원칙은 유명한 “차등의 원칙”을 포함한다. 차등의 원칙에 따르면,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은 그것이 “최소 수혜자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때만 용인될 수 있다.
1) 사회계약 모델
방법으로서 사회계약론이 이데올로기를 초월한 보편성을 갖고 있는지부터 살펴보자. 홉스·로크·루소·칸트가 발전시킨 사회계약론은 봉건제 사회에서 자본주의와 중간계급인 자본가들이 등장한 역사적 사실과 관계 있다. 게다가 분명히 자본주의와 사회계약 개념 사이에는 본질적인 이데올로기적 연관이 있다. 첫째, 권리와 기회가 동등한, 공정한 사람들이 서로 교섭한 결과는 반드시 정의롭고 공정할 것이라는 주장은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지지하는 주장과 잘 어울린다.3 둘째, 사회윤리와 정부의 계약적 토대를 철학적으로 규명하려는 노력은 물질적 생산의 계약적 토대를 놓으려는 노력과 잘 어울린다. 달리 말해, 사회계약론은 봉건제가 자본주의로 전환하는 시기의 계급구조 변화(봉건 영주 대신에 자본가가, 농노 대신에 임금노동자가 두드러지는 사회 변화)를 반영한다. 결국 사회계약이란 고용 계약의 이상화인 것이다. 사회계약론의 주적은 왕권신수설이었는데, 이에 맞서 사회계약론은 이성과 민주주의를 지지했다. 사회계약론의 민주주의적 측면을 가장 명료하게 설명한 것은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의 다음 말이다.
한 당[왕권신수설 지지자들인 토리당]은 정부의 기원을 신에게로까지 추적해 정부를 신성불가침의 것으로 만들려 애쓴다. 그리하여 정부가 아무리 전제적일지라도 정부를 조금치라도 건드리거나 침해하는 것은 신성모독이 되고야 만다. 다른 당[입헌군주제를 지지하는 휘그당]은 정부의 기초를 완전히 국민의 동의에 둬, 일종의 원초적 계약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계약에 따라 신민은 특정 목적을 위해 자발적으로 군주에게 권위 행사를 맡겼는데, 군주가 행사한 권위로 피해를 볼 때마다 군주에게 저항할 힘을 암묵적으로 남겨둔 셈이다.4
그러나 사회계약론의 이 비판적이고 심지어 혁명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장-자크 루소가 가장 날카롭게 벼린) 예각은 결코 자본주의 사회라는 한계를 넘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그 예각이 살아 있지 않고, 또 그럴 수도 없는 것이다. 사회계약이 이미 현실화했기 때문이다. 사회계약의 보편화는 노동력 판매로, 또 입헌민주주의 제도를 통한 정부와의 계약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오늘날 사회계약론은 정치철학에 조금치도 진보를 가져올 수 없다. 새로운 통찰도 제공하지 못한다. 그저 체제 변호 이데올로기 구실만을 할 뿐이다. 오늘날 정치철학이 진보하려면 오히려 사회계약이라는 개념 일체를 비판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특히 고용의 계약적 토대라는 관념을 비판해야 한다. 마르크스가 소외론과 잉여가치론을 통해 비판했던 것도 바로 그가 “생활의 사회적 생산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맺을 수밖에 없는 확정된 관계들”이라고 부른 사회적 생산관계였다.
이와 대조적으로, 신자유주의의 20세기 중시조라고 할 수 있는 밀턴 프리드먼은 자본주의 하의 “개인이 특정 교환에 참가할 것인지 말 것인지 실제로 자유로이 결정할 수 있어 모든 거래가 엄밀히 자발적”이라고 주장했다.5 그러나 프리드먼은 “거래가 완전히 자발적”일 수 있는 조건이 “어떤 교환이든 할 수 있는 자유”가 아니라, 그 어떤 교환도 하지 않을 자유라는 점을 놓치고 있다. 사실, 프리드먼은 자본주의 경제를 독립 생산자들의 단순 교환 경제와 혼동하고 있다. 양자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직접 생산자가 생산수단에서 완전히 분리돼,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조건에 있다는 것이다. 선택이 없다면 그것은 강제인 것이다.
사회계약이라는 개념은 실로 자본주의의 산물이자 반영일 뿐 아니라, 밀턴 프리드먼의 ‘비강제적·자발적 시장경제’ 개념처럼 이데올로기적 편견을 반영하고 오늘날 본질적으로 보수적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원칙을 초역사적인 공정한 처지에서 세우고자 하는 롤즈가 사회계약 모델을 이론적 출발점으로 삼는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6
2) 합리성 개념
롤즈가 처음에 (사회계약 당사자들의) “합리성”이라는 조건을 도입할 때 그는 이 조건에 독자성을 부여하면서, “합리성이라는 개념을 … 주어진 목적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수단을 취한다는 뜻”(48)으로 비교적 거슬리지 않게 정의한다. 하지만 (당사자들의) “상호 무관심”이라는 조건을 명시하면서부터 합리성은 이기적 목적을 달성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롤즈가 “나는 지금까지 원초적 입장에 있는 자들이 합리적이라는 가정을 해 왔다. 원칙을 선택함에 있어 각자는 자기 이익을 증진하기 위해 가능한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202)고 말할 때 두 개념은 하나가 된다. 그러나 합리성을 합리적 이기심으로 정의하는 것은 이데올로기적이다. 사회적 개인들이 상호 무관심하다는 것이 과연 합리적인가 하는 매우 중요한 질문을 회피하고 사실상 은폐하기 때문이다.
합리적인 인생 계획(원초적 입장의 개별 당사자는 인생 계획의 내용은 모를지라도 자기에게 그런 계획이 있다는 것은 안다)에 관한 롤즈의 다음 말을 보면 롤즈의 합리성 개념을 더 잘 알 수 있다.
그러한 가치론의 요지는 어떤 인간의 가치(善)란 적절하게 유리한 여건 아래서 장기적으로 보아 그 인간에게 가장 합리적인 인생 계획이 무엇인가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사람은 이러한 계획을 실행하는 데 있어서 어느 정도 성공적일 경우 행복하다. 간단히 설명하면 가치(善)란 합리적 욕구의 만족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각 개인은 그가 당면하는 모든 여건 아래서 설계된 합리적인 인생 계획을 갖는다고 가정된다. 이러한 계획은 그의 관심을 조화있게 만족시키도록 짜여진다. 다양한 관심들이 상호 충돌 없이 충족될 수 있도록 행동들이 계획된다. 그 계획은 그러한 포괄적인 목적 달성을 성취하지도 제공하지도 못하는 다른 계획들을 배제함으로써 도달된다. 쓸만한 여러 대안들이 있을 경우 합리적 계획이란 그 이상 개선될 수 없는 계획이며 따라서 모든 것을 고려한다 하더라도 더 나은 다른 계획이 없는 것을 말한다.(142~143)
이 구절을 읽으며 내게 연상된 것은 안정된 지위를 누리며 연금 걱정 같은 것은 할 필요도 없는 만족한 부르주아가 이런 종류의 합리적인 장기 계획을 그저 꿈만 꿀 수밖에 없는 대다수 나머지 사람들의 사회적 조건을 새까맣게 잊은 채(모를 리는 없을 게다) 행복에 겨워 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급진적 철학자 울프는 롤즈의 합리성 개념이 심지어 안정되고 만족한 부르주아의 인생 경험과도 맞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곧,
롤즈가 여기서 원용하는 합리성 모델은 개인보다는 기업에 적합한 모델이다. … [롤즈는] 경제 활동에 걸맞은 현명한 합리성 개념에서 출발한다. 이와 연관된 개념은 합리적 기업이 세우고자 하는 장기적인 이윤 극대화 계획에 관한 것으로, 그날그날 주어지는 이윤 획득 기회는 무엇이든 붙잡는 정착된 경향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롤즈가 개인의 합리성 분석으로 경제 활동 이론에서 개발된 형식적 모델을 채택하는 것은 사람의 인생을 기업 경영과 비슷한 것으로 취급하는 것이다.7
요약하자면, 롤즈 이론 속에서 이성은 부르주아적 이성이 돼 버렸다.
3) 두 가지 가정
롤즈는 《정의론》의 논지 전체와 깊은 관계가 있는 두 가지 가정을 책 서두에서 다루고 있다. 그 두 가정은 (가) “정의는 사회 제도의 제1덕목” 이라는 것과(36) (나) 사회의 주요 불평등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40) 이 가운데 (나)의 가정이 즉시 눈에 들어온다. 전후맥락을 살펴보려면 롤즈의 말을 고스란히 인용해야 한다.
여기에서 직감적으로 생각나는 것은 이러한 기본 구조 속에는 여러 가지 사회적 지위가 속해 있다는 점과 서로 다른 지위에서 태어난 인간들은 정치 체제뿐만 아니라 경제적·사회적 여건들에 의해서 어느 정도 정해진 서로 상이한 기대를 갖게 된다는 점이다. 이런 식으로 사회 제도로 인해서 어떤 출발점에는 다른 출발점보다 유리한 조건이 부여된다. 이러한 것들은 특히 뿌리 깊은 불평등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것들은 지배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인생에 있어서 최초의 기회를 좌우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능력이나 공적이라는 개념에 의거해서도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다. 사회 정의의 원칙들이 제일 먼저 적용되어야 할 부분은 어떤 사회의 기본 구조 속에 있는 이와 같은 거의 불가피한 불평등인 것이다.(40~41)
이 주장은 중요하다. 그저 불평등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을 넘어 계급 격차의 불가피성(“어떤 [사람의] 출발점은 다른 [사람의] 출발점보다 유리함”)을 인정하는 것이기에 그렇다. 언뜻 보기에 계급 문제는 원초적 입장의 당사자들이 고려하는 주요 문제의 하나일 듯하지만, 실제로 계급 문제는 당사자들을 결속시키는 기본적 심의 조건으로, “사회 정의의 원칙들이 … 적용되어야 할”(40) 이미 아는 사실이다. 물론 계급 문제를 피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사회철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겠지만, 8백 쪽 가까이 되는 책에서 이 근본적 개념이 논의되지 않고 그저 “직관적”으로만 언급된다는 것은 두드러지는 대목이다.
(가)의 가정은 마치 세상물정 모르고 정의만을 앞세우는 것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나)의 가정과 짝을 이루기 때문이다. (나)의 가정과 관련해 (위의 인용문(40~41)에서 보듯이) 롤즈는 사회의 기본 구조 속에 있는 불평등에 정의의 원칙들이 적용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롤즈의 근본적 개념과 이론 전체에는 계급사회를 전제하고 완전히 무비판적으로 당연시한다는 문제점이 있다. 그러나 정의의 내용은 역사를 거치며 계속 변한다. 게다가 정의는 영원한 가치도, 영원한 염원도 아니다. 정의관은, 아니 정의 문제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는 개인들이나 사회집단들이 희소 자원을 차지하려고 경쟁하는 상황을 전제한다. 그리고 이런 자원의 희소성이야말로 계급사회가 발생한 조건이었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흔히들 희소성을 인류가 처한 어려운 조건의 본질적 특징으로 보지만, 이는 빈곤한 역사적 상상력의 소치일 뿐이다.
물을 예로 들어 보자. 음용수든 관개수든 수자원 공급이 인간 생사의 문제였던 상황은 많았지만, 선진 산업국에서 물 부족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공공요금 미납이나 체납으로 수도가 끊기는 것은 자원의 희소성과는 관계 없는 문제다.) 이런 상황에서는 물의 “정의로운” 분배 문제가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필요에 따라 분배되는 것이다(물론 대가를 치르고). 장차 사회적으로 유해하거나 낭비적인 프로젝트(특히 무기 제조)에 투여되는 자원을 주민 대중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데로 돌릴 수 있다면(물론 그럴 정치적 의지가 있고 그런 진보의 장애물이 제거되는 경우에 말이다), 지금 물에 해당하는 얘기가 다른 “기본 가치들”(롤즈의 용어로, 권리와 자유, 직위에 따르는 권한과 기회, 임금과 부富, 소득 등을 뜻한다) 일반에도 해당하는 얘기가 되지 못할 이유는 없다.
달리 말해, 정의는 사회 제도의 제1덕목이 아니다. 오히려 사회 제도가 부적절하게 발전했다는 표지다. 사회 제도들이 희소성과 계급 격차가 강요한 한계 안에 갇혀 있다는 징표인 것이다. 따라서 정의 문제의 해결은 정의 자체에, 이런저런 정의관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정의의 근거 자체를 뛰어넘는 곳에 있다. 롤즈도 이런 비판을 막연하게나마 의식한 듯이 “정의의 여건”(182~186)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지만, 난점과 모순을 안고 있을 수밖에 없다.(이 문제는 나중에 다룰 것이다.) 또한 롤즈가 “어떤 사람들은 완전한 공산주의 사회에 대한 마르크스의 이론을 이러한 의미에서 정의를 넘어서 있는 사회라고 풀이했다”8(376)는 각주를 단 데서도 그가 정의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견해를 약간 알고 있음이 드러난다. 그러나 이런 어렴풋한 인식만으로는 그의 전체적인 논지가 영향받을 리 없다.
지금까지 내가 개진한 주장은 상호 연관된 세 가지 문제에 관한 마르크스의 주장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다. 임금과 평등과 국가 문제가 그것이다. 마르크스는 ‘공정한 임금’이라는 생각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물론 마르크스는 노동력이 다른 모든 상품처럼 그 가치대로 교환된다는 점에서 임금이 ‘공정하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임금 제도 자체가 착취적 사회관계를 표현하므로 임금 수준이 얼마든 관계 없이 임금은 모두 불공정하다고 주장했다.9
엥겔스가 《반뒤링론》에서 지적했듯이 마르크스의 평등관은 역사적 상황에 따라 규정되는 것이다. “평등 개념은 부르주아적 형태든 프롤레타리아적 형태든 역사적 산물로, 평등 개념이 생겨나는 데는 그 자체로 기나긴 이전 역사를 전제로 하는 특정한 역사적 조건들이 필요했다. 그러므로 평등 개념은 결코 외부에서 출현한 것이 아니다.”10 마르크스는 평등권(“공정 분배” 같은)도 “다른 모든 권리처럼 내용상 불평등한 권리”라고 주장했다. 저마다 필요한 바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궁극 목표는 평등한 분배가 아니라 필요에 따른 분배라고 주장했다.11
국가 문제에서도 마르크스는 추상적 사고를 배격했다. 마르크스는 “자유 국가”나 “인민 국가” 요구를 비판하면서 국가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계급간 적대의 산물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계급간 적대가 사라지면 국가는 사회적 기능을 상실하고 사라질 것이라고 했다.
2. 원초적 입장
롤즈 정의론의 바탕에는 그보다 먼저 형성된 롤즈의 도덕철학·정치철학이 자리 잡고 있다. 롤즈가 보기에 이 분야의 철학을 평가하는 기준은 기존의 “숙고된 판단”을 설명하고 정당화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곧,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에게 알려진 다른 어떤 이론보다도 공정으로서의 정의관이 우리의 숙고된 판단에 대한 참된 해석을 가져오고, 우리가 내세우고자 하는 것에 대한 표현의 방식을 제공하는 것으로 판명되는지의 여부이다.(582)
이것은 단지 사후적 판단 기준이 아니라, 롤즈가 자신의 정의관을 세밀하고 면밀하게 표현하고자 사용하는 방법 전반에서 나타나는 지속적이고 두드러진 특징이다. 롤즈는 원초적 입장과 숙고된 판단 사이를 오가자고 제안한다.(56) 이런 왕복, 즉 “상호조정 과정”에서 원초적 입장과 숙고된 판단은 모두 어느 정도 수정돼 둘이 일치하는 지점에 도달한다. 이를 롤즈는 “반성적 평형”(56)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둘 중 어느 것이 결정적인 것인가 하는 것이다. 숙고된 판단이 원초적 입장에 더 큰 영향을 미치는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롤즈는 숙고된 판단이 결정적 구실을 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는 자신이 원초적 입장에서 출발해, 마침내 올바른 정의 원칙들을 논리적으로 연역할 수 있는, 원초적 입장의 기술記述에 도달한다고 설득력 있게 주장한다.(55~57) 그러나 이 과정에서 사회적·역사적 요인은 완전히 배제되지는 않더라도 그 효과가 제한되는 듯하다. 사실, 내가 위에서 인용한 구절은 숙고된 판단이 결정적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무엇보다 원초적 입장을 규정하는 조건들이 정말로 합리적 의심을 받지 않는다면(“일반적으로 공유되고 다소 미약”(56)하다면), 굳이 숙고된 판단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왕복·상호조정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이처럼 롤즈에게 숙고된 판단이 원초적 입장보다 결정적이라면, 그의 이론은 이데올로기적일 수밖에 없다. 사람들의 숙고된 판단은 역사적으로 변함없는 것도 아니고, 역사의 어느 시점에서 사회 간에나 사회 내에서 합의를 이루는 것도 아니다. 예컨대 “종교적인 편견이나 인종 차별 등은 정의롭지 못하다는 확신”(55)은 18세기 이전에는 거의 아무도 공유하지 않았다. 오늘날에도 세계 여러 나라에서 이 “확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 확신을 UN 총회에 서면으로 제출해도 합의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이런 시대적 변화나 나라 간 편차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역사적·사회적 요인들밖에 없다. 편협한 이기심이 공정한 판단을 막거나 왜곡시키는 것이 아니라, 상이한 역사적·사회적 상황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현실의 모습이 상이하게 보인다는 것이 문제다. 이기심에 사로잡히지 않아도 그렇다. 따라서 숙고된 판단이 실제로 결정적인 구실을 한다면 롤즈의 초역사적 방법에는 사실 애초부터 역사적·사회적 한계가 내재해 있는 것이다.
내가 이 글에서 핵심적으로 보여 주고자 하는 점은, 원초적 입장이 “일반적으로 공유되고 다소 미약한”(56) 가정들에 근거하기는커녕 특정한 역사적·사회적 처지를 분명히 반영하는 가치투성이 가정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는 것이다.
이제 원초적 입장 자체에 대해 살펴보자.(137~208) 원초적 입장을 규정하는 조건들은 브라이언 배리의 구별에 따라 다음 두 가지 범주로 나눠 볼 수 있다.12
(가) 당사자들에게 숙고의 동기를 부여하고 상이한 정의 원칙들을 평가할 기준을 제공하기 위한 조건들
(나) 도달할 결정이 공정하고 보편적이 되도록 하기 위한 조건들(무지와 인식에 관한)
전자는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이데올로기적 패턴을 이어가는 것이다. 후자는 자기모순적이다.
(가)의 범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최초의 상황의 당사자들을 합리적이고 상호 무관심한 것으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 그들은 서로 타인의 이해관계에는 관심이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48) 분명 롤즈 이론에는 이 조건이 필요하다. 그 이유는 첫째, 보편적 자비나 이타심을 가정하게 되면 롤즈가 피하고자 하는, 논란이 분분한 윤리적 요소를 도입하는 것이 될 뿐 아니라,(50) 아예 정의라는 문제 자체를 사라지게 하는 것일 것이다.(260~261) 반면에, 보편적 시기심이나 적의를 가정하게 되면 무슨 원칙을 선택해도 그것에 정의라는 말을 붙일 수 없을 것이다.
롤즈 정의론에 “상호 무관심”이라는 조건이 필요한 둘째 이유는 이 조건이 있어야 상이한 사람들이 원하고 요구하는 것들이 표준화·균등화·수량화돼, 원칙들을 연역할 수 있는 “일종의 도덕 기하학”(176)이 가능하기 때문이다.13 그러나 이런 목적 자체가 이 조건의 이데올로기적(자유주의) 성격을 드러낸다. 많은 친親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근저에 있는, 추상적인 고립된 비사회적 인간이 가정돼 있기 때문이다.(추상적인 고립된 비사회적 인간의 전형은 신고전파 경제학이 상정하는 호모 에코노미쿠스이지만, 데카르트 철학의 생각하는 자아나 행동심리학의 자극-반응 유기체도 마찬가지다.) 도대체 상호 무관심한 (비사회적) 개인이라는 것은 사회에 존재해 본 적도, 존재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관념에는 물질적 토대가 있다. 상호 무관심이라는 조건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순수한’ 작용에 의해 인간이 처하게 되기 쉬운 조건이다. 우선, 자본가의 조건이 그렇다. 사회적 결과(기후 변화 같은)야 어찌 되든 이윤 극대화와 자본 축적 경쟁으로 내몰리게 되는 조건 말이다. 또한 상호 무관심은 다른 노동자와 경쟁하며 노동시장에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내놓는 미조직 노동자의 조건이기도 하다. 결국 상호 무관심은 마르크스가 《경제학·철학 수고》에서 묘사한, 자신의 “유적 존재”로부터 소외된 인간, 다른 인간들로부터 소외된 인간의 조건이다. 그러므로 롤즈가 중립적이고 거의 자명한 것이라고 가정하는 원초적 입장은 자본주의의 핵심적 특징인 소외로 규정되는 상황인 것이다.
이제 (나)의 범주에 속하는 조건들을 살펴보자. 롤즈는 편견을 자아낼 수 있는 지식이나, 이기심에서 비롯한 주장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는 지식을 모두 차단하려면 “무지의 베일”이 필요하다고 한다. 곧,
무엇보다도 [원초적 입장의] 각자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나 계층을 모르며, 천부적 자산과 능력, 지능과 체력, 기타 등등을 어떻게 타고나는지 자신의 운수를 모른다. 또한 누구든지 선善에 대한 자신의 생각, 자신의 합리적 인생 계획의 세목을 알지 못하며, 또는 심지어 모험을 몹시 싫어한다든가 비관적, 혹은 낙관적인 경향과 같은 자기 심리적인 특징까지도 모르고 있다. 또한 나는 당사자들은 그들이 속한 사회의 특수 사정도 모른다고 가정한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그 사회의 경제적·정치적 상황이나 그것이 지금까지 이룩해 온 문명이나 문화의 수준도 모르고 있다. 원초적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어떤 세대에 속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정보를 갖고 있지 않다.(196)
그러나 분명 당사자들에게 추론의 근거로 삼을 정보는 약간 있어야 할 것이므로 롤즈는 그들이 다음과 같은 점은 안다고 가정한다. 즉, 당사자들은
(1) 사회가 “정의의 여건”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정의의 여건이란 그 아래에서 인간의 협동 체제가 가능하고도 필요한 정상적인 조건들로 설명될 수가 있다.”(182)
(2) “인간 사회에 대한 일반적인 사실들은 알고 있다.”(196)
이 두 가지 정보 중 첫째 것은 매우 중요한 제약 조건이다. 롤즈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 사회나 상황이 있거나 있을 수 있음을 시사하거니와, 마르크스가 전망한 사회주의나 심지어 그 도상에 있는 사회 체제처럼 “정의의 영역을 벗어난” 사회 체제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우회적으로 선을 긋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롤즈의 “정의의 여건” 정의는 만족스럽지 못한 데다 롤즈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문제들을 제기한다. 롤즈는 “정의의 여건이란 그 아래에서 인간의 협동 체제가 가능하고도 필요한 정상적인 조건들”이라면서 특히, “적절한 부족 상태”와 “상호 무관심”이라는 두 요소를 강조한다. 곧,
(객관적 여건 가운데서는) 적절한 부족 상태라는 조건을 강조하고 (주관적 여건으로서는) 이해관계의 상충이라는 조건을 강조하고자 한다. 그래서 요약해서 말하면 적절한 부족 상태 아래서 상호 무관심한 사람들이 사회적 이익에 대해 상충하는 요구를 제시할 경우 정의의 여건이 성립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이러한 여건이 성립하지 않는 경우에는 정의라는 덕목에 대한 필요성도 없어진다.(184)
그런데 인간의 협동이 꼭 필요한 것이라면, 개인들이 남의 이해관계에 어떻게 완전히 무관심할 수 있겠는가? 가령 (나처럼) 노동자들의 노동에 생활을 의존하는 사람이 그들의 조건에 무관심하다면 그게 합리적인 일인가? 물론 롤즈가 정말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상호 무관심이 아니라 경쟁일지도 모른다. 부족 상태라는 조건에 이게 함축돼 있기에 하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이 가정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이 더 분명해진다. 아무튼 “적절한 부족 상태”가 무얼 말하는지의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로 있다. “적절한 부족 상태”라는 개념에 함축된 생각은, 극단적인 부족 상태 하에서는 사회적 협동이 모두 파탄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는 없다. 오히려 역사적 경험이 시사하는 바로는, 극단적 부족 상태에서는 (흔히 권위주의적 또는 전제적 형태로라도) 더 고도의 협동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배급제가 하나의 예일 것이다. 물론 롤즈가 사회는 혹독한 조건에서도 존속하지만 자신의 원칙을 그런 사회에 적용하는 것은 실제적이지 못하다(역사적 경험도 이를 뒷받침해 준다)는 말을 하려 했을 수도 있다. 이런 해석이 맞다면, 롤즈는 자신의 원칙이 구체적으로 어느 경우에 적용되는지 명시해야 마땅할 것이다. 아쉽게도 그의 책 어디에서도 이 질문에 대한 명료한 대답을 찾을 수 없다. “정의롭고 가치 있는 사회가 고도의 물질적인 생활수준에 달려 있다고 믿는 것은 그릇된 것이다”(388)라는 주장을 볼 수 있는가 하면, “평등한 자유를 부정하는 것은 적절한 과정을 거쳐 그러한 자유가 향유될 수 있도록 문명의 수준을 변화시킬 필요가 있을 경우에만 옹호될 수 있다”(215)는 주장도 볼 수 있다. 게다가 이런 주장들은 지극히 개략적으로라도 분명한 역사적 시대 구분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다른 어디에서도 그런 시대 구분의 시도가 없다.
이런 누락과 혼동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롤즈의 이론에 역사를 끼워넣으려 해도 그 이론 구조가 초역사적이어서 가능하지가 않은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적절한 부족 상태”를 자본주의와 같은 것으로 가정할 수밖에 없는데, 그러면 정의를 “영원의 상相 하에서”(보편적이고 영원한 진리 문제로) 봤다는 롤즈 자신의 주장과 정면으로 상충하게 된다. 상호 무관심이라는 또 다른 조건의 경우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이런 모순은 훨씬 더 두드러진다.
《정의론》 전체에서 최대 약점의 하나는 당사자들이 “인간 사회에 대한 일반적인 사실들은 알고 있다”(196)는 (2)의 가정이다. “그들[당사자들]은 정치 현상이나 경제 이론의 원칙들을 이해하며 사회 조직의 기초와 인간 심리의 법칙들도 알고 있다”(196)는 것이다. 롤즈는 이 가정에 난점이 있다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그러나 “사회에 대한 일반적인 사실들”이 무엇인지를 놓고 의견 일치 같은 것은 없다. 하물며 보편적으로 수긍하는 정치 이론, 경제 이론, 사회 이론, 심리학 이론 같은 게 없음은 물론이다. 그렇기는커녕 인문·사회과학의 역사는 온통 논쟁과 대립으로 점철돼 있다. 사실에 대한 해석은 말할 것도 없고 도대체 ‘사실’이 무엇인지를 둘러싸고도 논쟁이 벌어졌다. 그렇다면, 분명 당사자들이 어떤 사실과 어떤 이론을 “알고 있고” 수용하는지가 엄청나게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가령 당사자들이 마르크스의 잉여가치론과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이론을 받아들인다면, 자본주의적 제도의 근거가 되는 정의 원칙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자본주의와 자유의 관계 그리고 사회주의와 독재의 관계에 대한 밀턴 프리드먼의 이론을 받아들인다면, 사회주의와 잘 맞는 원칙들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문제들에 관해 롤즈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그래서 당사자들이 “알고 있다”고 롤즈가 가정하는 사실과 이론은 실은 롤즈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과 이론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그러면 롤즈 이론의 보편적인 공정성도 희생된다.
당사자들이 알고 있다고 롤즈가 가정하는 사회적 지식은 훨씬 더 근본적인 다른 문제를 제기한다. 롤즈는 당사자들이 자기 사회의 발전 단계를 모른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당사자들이 안다고 롤즈가 인정하는 종류의 지식은 역사 지식과 완전히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원초적 입장에서 자본주의 시장경제 법칙들을 알고 있다면, 사회가 적어도 그 발전 단계에 도달했다는 사실도 알 수밖에 없다. 거대 다국적기업이 경제를 주름잡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또는 그 기업들과 긴밀히 연계된 국가들이 서로 갈등을 빚고 심지어 무력 충돌도 불사할 태세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자신이 사는 사회가 적어도 20세기에 도달했음도 알고 있을 터이다. 요컨대 롤즈가 자기 이론의 정합성을 위해 가정하는 것과 달리 사회 인식은 그 역사적 맥락과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이 문제를 좀더 파고들면 원초적 입장에서 결정될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하나인, 부富를 분배하는 정의로운 원칙이라는 문제가 시야에 들어온다. 이 문제를 다루면서 순전히 추상적인 공식을 몇 개 발견할 수 있기는 하지만, 분배받은 부로 가능한 인간 활동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지 못한다면 그 공식들을 제대로 평가할 수 없다. 반대로, 가능한 활동이 무엇인지 알면 사회의 역사적 위치도 꽤 알 수 있다. 그래서 만약 보유 가축 수를 기준으로 불평등을 생각한다면, 이는 부의 주된 형태가 토지냐 아니면 다른 재화냐처럼 해당 사회의 성격을 분명히 보여 주는 역사적 단서 구실을 한다. 화폐가 이 문제의 해답인 듯도 하지만, 사실은 화폐도 결코 초역사적인 것이 아니다. 화폐의 막대한 축장이 부의 가장 중요한 형태이기는커녕 쓸모없는 물체더미에 불과한 사회도 있다. 예컨대 오늘날 북한에서 화폐가 불평등을 재는 효과적인 잣대가 될 수는 없다. 얼마 전 단행된 화폐 개혁 문제도 있지만, 물자 부족으로 인민 대중은 인민소비품(생활필수품) 구하기도 쉽지 않은 데다, 잘 갖춰진 극소수 직매점(상점)은 특권 관료만이 드나들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보유 화폐 액수로 불평등을 생각한다면, 그 돈으로 살 수 있는 게 무엇이냐는 물음이 던져질 텐데, 답변도 필연적으로 사회 발전 단계를 드러낼 것이다.
울프는 “롤즈 이론 구성에 필요한, 인식과 무지의 특정한 결합이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면 … 이론 전체가 의문을 일으킬 것”이라고 지적했다.14 울프는 롤즈 이론 전체에 의문을 제기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내가 앞에서 충분히 보여 줬듯이 롤즈가 역사적 제약을 받지 않는 이론을 구성고자 도입한 매개물인 “원초적 입장” 개념은 온통 그릇된 전제다. 내가 한 말을 되풀이하면, “원초적 입장은 특정한 역사적·사회적 처지를 분명히 반영하는 가치투성이 가정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그래서 브라이언 배리는 원초적 입장에서 선택되는 원칙이 정의의 원칙임을 롤즈가 입증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15
3. 정의의 두 원칙
이제 롤즈의 계약론적 추론의 가장 중요한 결과인 정의의 두 원칙을 살펴보자. 이 원칙들이 원초적 입장에서 실제로 선택될 것인지 여부는 논란이 되는 문제일 뿐 아니라, 우리가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정말 중요한 문제도 아니므로 제쳐 놓기로 하자.16 대신에 롤즈가 다음과 같이 공식화한 원칙들에 대한 논의로 곧장 나아가자.(400)
제1원칙
각자는 모든 사람의 유사한 자유 체계와 양립할 수 있는 평등한 기본적 자유의 가장 광범위한 전체 체계에 대해 평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
제2원칙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은 다음 두 가지, 즉
(a) 그것이 정의로운 저축 원칙과 양립하면서 최소 수혜자에게 최대 이득이 되고,
(b) 공정한 기회 균등의 조건 아래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된 직책과 직위가 결부되게끔 편성되어야 한다.
이 원칙들에다 롤즈는 제1우선성 규칙(자유의 우선성)이라는 중요한 조건을 추가한다.(400)
내 비판의 출발점은 이 두 원칙 사이의 관계 문제다. 일반으로 경제적 복지보다, 그리고 특히 경제적 평등보다 자유가 우선한다는 규칙은 롤즈의 원칙들에만 핵심적인 것이 아니라 롤즈의 공리주의 비판 전체에도 핵심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 규칙은 실제 삶에서 자유와 경제적 복지·평등의 관계를 뒤집어 버린다. 최소한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또 자유를 위해서 일정 수준의 경제적 복지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그렇다. 게다가 평등한 자유와 경제적 불평등이 서로 잘 맞지 않음을 입증하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다. 부자와 빈자는 형식적 의미에서는 아닐지라도 실질적 의미에서는 평등하게(똑같이) 자유롭지 않은 것이다.(물론 형식적이기 이를 데 없는 자유조차 빈자들에게 무가치한 것은 결코 아니다. 언론·출판·결사의 자유는 노동자 운동에 중요하다.) 롤즈는 이 명백한 반대론을 의식해 다음과 같이 응답한다.
빈곤이나 무지 그리고 일반적으로 수단의 결여로 인해 자신의 권리나 기회를 이용할 능력이 없는 것이 때로는 자유의 특유한 제한 조건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나는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지 않고 그러한 것들은 제1원칙이 규정하고 있는 권리가 개인에 대해 갖는 가치, 즉 자유의 가치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생각하고자 한다. … 평등한 자유로서의 자유는 모든 이에게 동일하므로 평등한 자유보다 작은 자유에 대한 보상의 문제는 생겨나지 않는다. 그러나 자유의 가치는 모든 이에게 다 동일하지는 않다.(278)
그러나 이 주장은 달갑잖은 현실에 다른 명칭을 부여해 그 현실을 은폐하는 효과를 내는 궤변이다. 롤즈는 ‘자유’와 ‘자유의 가치’의 구별을 도입해 문제를 교묘하게 회피하려 한다. 그러나 어떤 자유를 사실상 행사할 수 없다면 그걸 과연 ‘자유’라 할 수 있을까? 내가 자유를 이건희와 평등하게 행사할 수 없다면 내 자유는 이건희의 자유와 평등하다고 말하는게 의미 있는 말일까? 롤즈는 경제적 요인들을 자유를 속박하는 요인들에서 배제하고 있다.(276~278) 그러나 경제적 요인들이 자유의 가치만 규정하고 자유 자체는 규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의적이다. 게다가 경제적 요인들은 제반 법률과 헌법 속에 재산권 등의 형태로 반영되게 마련이다. 적절한 의료 서비스를 받을 돈이 없는 환자에 대해 의사가 진료를 거부할 권리와 만일 그 환자가 진료를 요구하며 소동을 피우면 경찰이 그를 체포할 권리가 법에 명시돼 있기 때문이다. 롤즈는 평등한 자유를 지지하는 제1원칙과 평등한 자유를 파괴하는 효과를 내는 제2원칙의 조화를 추구하고 있지만, 이는 쟁점이 돼 있는 것을 진리로 가정하고 논의를 계속하는 것이다.17
우리의 논의에 더 중요한 점은 자유의 우선성이라는 관념과 자본주의 체제의 연관성, 특히 그 관념과 자본가 계급 이해관계의 연관성을 파악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이전 사회에서 자본주의 사회로 전환기에 신흥 자본가들은 경제력이 있어서 때로는 심지어 경제를 지배하는 계급이기도 했다. 그러나 상공업 발달을 저해하는 무수한 전前자본주의적 제약과 귀족들의 정치 권력 대물림과 독점으로 흔히 신흥 자본가들은 권익 증진을 방해받고 마땅히 차지해야 할 상층의 지위에 오르지 못하는 등 지위 상승도 방해받았다. 그래서 자본가들은 권력 투쟁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자유와 평등이라는 기치를 표방했다. 그러나 그들은 장인·노동자·농민 등과 비교해 경제적 특권층이었으므로 경제적 평등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따라서 자본가들이 요구한 자유와 평등은 경제적 자유, 구체적으로 말해 시장 거래의 자유, 정치적 자유, 정치적 평등(보통선거)을 뜻했다. 결코 경제적 평등을 뜻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은 자본주의가 확고하게 확립됐다. 따라서 이런 종류의 자유와 평등은 더는 자본가 권력에 절대로 필요한 조건이 아니게 됐다. 물론 자본가 권력에 부가되는 유용한 부속물 구실은 여전히 한다. 그런 종류의 자유와 평등이 만드는 그릇된 겉모습 뒤에서 자본가들은 “자유의 불평등한 가치”에 근거해 계속 지배할 수 있다. 자본가 지배의 정당성 유지에 상당히 가치 있는 종류의 자유와 평등인 것이다. 물론 자본가들이 그 거짓 외관을 내팽개치고 싶어하거나 내팽개치지 않을 수 없는 극단적인 상황이 이따금 있다. 하지만 보통 때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라는 그 가면이 여전히 중요하다. 바로 이 때문에, 그런 필요성과 아주 잘 들어맞는 ‘자유의 우선성’이라는 관념이 롤즈 이론뿐 아니라 모든 친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서 핵심적 구실을 하는 것이다.
이제 제1원칙에 관해 다룰 텐데, 긴 논의가 필요하지는 않다. 롤즈는 이 원칙이 적용되는 기본적 자유들을 열거하는데, 자유민주주의 이론을 조금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열거할 수 있는 권리들이다. 곧, 언론·출판·결사의 자유, 양심과 사상의 자유, 정치적 자유(선거권과 공무담임권), 신체의 자유, 개인 재산권, 임의적 체포·구금으로부터의 자유 등이다.(106) 그런데 “공공 질서나 안녕에 대한 공동의 이익에 비추어 양심의 자유를 제한하는 데 대해서는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288)라는 유보적 진술이 눈에 띈다.
나는 역대 한국 국가가 바로 이런 생각에 따라 헌법 37조 2항(제한 사유)[1]을 만들어 놓고, 실천에서 국가보안법을 헌법보다 상위의 법(슈퍼 법)으로 취급했다는 사실을 환기시키고자 한다. 내가 보기에 양심을 표현하는 방법이 비폭력적이라면 그 자유를 제한할 이유는 없다. 지배계급이 보기에는 한 가지가 있지만 말이다. 그것은 바로 아래로부터의 대중 운동이 체제를 위협하는 경우(지배자들이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은 마치 고무줄과도 같아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처럼 될 수 있다. 롤즈의 입헌민주주의는 이처럼 모호한 구석이 있다. 그럼에도 롤즈의 제1원칙에는 오늘날의 서방 정부를 성가시거나 난처하게 만들 것이 거의 또는 전혀 없다.
눈에 띄는 항목은 재산에 대한 롤즈의 태도뿐이다. 재산 소유·처분 권리는 소위 고전적 정치철학(특히 로크의)의 핵심 요소인데, 바로 이런 이데올로기에 따라 자본주의는 ‘자연스럽고’, ‘자유롭고’, ‘정의로운’ 사회 질서라고 선전되고 인정받는다. 롤즈가 단지 개인 재산권만 포함한 것은 이런 노골적인 이데올로기적 편견을 피하고 싶어서인 듯하다. 그러나 롤즈는 성공할 수 없다. 시장 자본주의 하에서 자본가가 공장이나 사무실 등을 개인 재산으로 소유한다는 점이 너무도 명백하기 때문이다. 뻔한 이데올로기적 성향을 띠지 않으려면 생산 수단 소유와 소비 수단 소유를 구별해야 할 텐데, 롤즈 이론에는 이 문제를 다루는 분야가 없다. 이데올로기적으로 중요한 이 누락 문제는 아래에서 다룰 것이다.
제2원칙인 차등의 원칙은 조금 복잡한 모호한 명제다. 맨 먼저 다뤄야 하는 문제는 이 원칙(그리고 더 일반적으로 롤즈 이론)이 한결같이 불평등 문제를 소비자에게 기본 가치들을 분배하는 문제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특정 원칙들과 그에 근거한 입법 행위에 따라 규제되는 문제로 말이다. 물론 현저한 불평등이 이런 식으로도 발생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든 그 전의 사회 형태든 부의 집중과 빈부격차 확대는 근본적으로 개인들이 생산 과정에서 차지하는 위치에서 비롯한다.18 그래서 자본주의 이전 사회의 부자는 많은 토지를 소유하거나 점유하면서 남들에게 거기서 일하라고 강제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고,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의 가장 중요한 원천은 자본 소유다. 즉, 불평등한 분배는 모종의 원칙에 따른 개인들의 의식적인 결정의 결과라는 면보다는 불평등한 생산관계의 결과라는 면이 훨씬 더 크다. 불평등과 평등에 관한 원칙들을 명확하게 정립하고자 하는 이론이라면 반드시 이 문제와 대결해야 한다. 아쉽게도 롤즈 이론에서 생산이라는 영역은 송두리째 실종돼 있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생산 영역을 무시하는 것이 친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전형적 특징의 하나라고 강조했다. 마르크스의 다음 말은 롤즈의 추론 방식 전체와 관련해 너무도 시사하는 바가 크므로 좀 길더라도 모두 인용하겠다.
노동력의 판매와 구매가 이루어지는 유통[또는 상품 교환]의 영역은 사실 천부인권의 진정한 낙원이었다. 이곳을 지배하는 것은 오로지 자유·평등·소유 그리고 벤담[Bentham: 공리주의자]이다. 자유! 왜냐하면 상품[예를 들어 노동력] 교환의 구매자와 판매자는 오로지 그들의 자유로운 의지에 따라 구매자와 판매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법적으로 자유롭고 대등한 인간으로서 계약을 맺는다. 계약은 이들의 의지가 공통된 법률적 표현으로 드러난 최종 결과물이다. 평등! 왜냐하면 이들은 오로지 상품 소유자로서만 서로 관계하며 등가물을 서로 교환하기 때문이다. 소유! 왜냐하면 이들 각자는 모두 자신의 것만을 처분하기 때문이다. 벤담! 왜냐하면 양쪽 모두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뿐이기 때문이다. 그들을 하나의 관계로 묶어 주는 유일한 힘은 그들 자신의 이익[즉, 각자의 개별적인 이익, 각자의 사적인 이해]이 발휘하는 힘이다. 이렇듯 그들이 자기만 생각하고 타인을 생각하지 않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모든 사람은 사물의 예정조화가 빚어내는 결과에 따라[또는 빈틈없는 섭리의 보호 아래] 오로지 그들 상호간에 이익이 되는 사업[즉, 공익의 사업, 전체에게 이익이 되는 사업]만을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속류 자유무역론자들이 자신들의 견해나 개념, 그리고 자본-임노동 사회에 관한 자신들의 판단 기준을 세운 것이 바로 이 단순 유통[또는 상품 교환]의 영역인데, 이제 이 영역을 떠나는 시점에서 우리는 등장인물들의 모습들이 벌써 약간 변해버린 것을 느끼게 된다. 옛날에 화폐 소유자였던 사람은 자본가가 되어 앞장을 서고 있고, 노동력의 소유자는 자본가의 노동자로서 그의 뒤를 따라간다. 전자는 의미심장하게 웃음을 띠면서 바쁘게 가고, 후자는 머뭇머뭇 마지못해서 마치 자기의 가죽을 팔아버리고 이제 무두질당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사람처럼 뒤따라간다.19
롤즈가 공리주의에 날카롭게 반대한 것은 사실이지만, 위 인용문에서 벤담 대신에 롤즈의 이름을 대입시켜도 그릇된 진술은 아닐 것이다.
차등의 원칙의 사각지대가 생산뿐인 것은 아니다. 권력 문제도 똑같이 무시되고 있다. 아마도 롤즈는 부와 소득이 권력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점에 주목했으니 자신은 권력 문제를 다룬 셈이라고 치부할는지도 모른다. “보다 큰 권한[권력]과 부는 병행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 최소의 권한과 최저의 소득 … 이들 두 가지가 서로 연결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143)에 권력 문제를 따로 고찰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중대한 혼동이다. 차등의 원칙은 부와 소득에 적용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권력에 적용될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롤즈가 말한 “물질적 가치”, 즉 부나 소득의 소유는 인간과 (인간 바깥의 자연인) 사물의 관계인 데 반해 권력은 인간들 사이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래 모든 사람의(빈곤층을 포함해) 물질적 가치의 양을 증대시키고자 물질적 가치의 불평등한 분배를 어느 한 시점에 허용할 수 있을지 몰라도 권력을 이런 식으로 다룰 수는 없다. 누군가의 권력이 증대된다는 것은 언제나 다른 누군가에게 미치는 권력이 증대된다는 뜻이요, 따라서 그 사람의 권력이 감소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권력은 물질적 가치와 달리 단순 합산할 수 없다. 이러한 권력 문제를 다루지 않는 사회정의론은 자본주의 사회의 권력의 현실을 숨기고 감추는 이데올로기로 전락한다.
롤즈가 정의의 두 원칙에 이르는 과정에서 한 추론도 살펴보자. “만일 소득과 부에서의 불평등들이 있고, 권위와 책임의 정도에 있어서 차등이 존재함으로써 그것이 최초의 평등이라는 기준점과 비교해서 모든 사람의 처지를 향상시키도록 작용한다면, 왜 이러한 불평등과 차등을 허용하지 말아야 하는가?”(213) 이는 자본주의 변호론자들이 불평등을 정당화할 때 언제나 들먹이는 인센티브(유인책) 논리다. 유인책론은 “파이를 키울 때까지”라는 단서를 달며 처음엔 타당성을 인정받지만, 문제는 파이가 커졌을 때도 계속 적용되거나, 이름을 바꾸며 계속 새로 생겨난다는 것이다. 롤즈는 점차 평등으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다고 시사하지만,(221) 차등의 원칙이 내포하는 것은 오히려 영속적이고 점증하는 불평등이다.
롤즈가 차등의 원칙을 최초의 평등한 상태(사회계약론이 말하는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하기보다는 이전부터 존재하는 불평등 상태, 즉 롤즈가 “어떤 사회의 기본 구조 속에 있는 … 불가피한”(40) 것으로 가정한 “특히 뿌리 깊은 불평등”(41) 상태에 적용하면서 문제가 더 복잡해진다. 그래서 차등의 원칙은 기존의 불평등에 더한층의 불평등이 덧입히는 것을 허용하는 셈이다. 따라서 본질적으로 차등의 원칙은 정의로운 사회와 양립할 수 있는 불평등의 정도에 아무런 제한을 두지 않는다. 이 문제점을 아는 롤즈는 “보상의 원칙”이라는 것을 도입하지만,(151~152) 이는 원초적 입장에서 도출되는 원칙도 아니고 롤즈의 이론에서 별로 부각되지도 않는 것이어서 추가로 삽입된 임시변통일 뿐이다. 그래서 롤즈가 “보상의 원칙”을 도입한 것은 오히려 차등의 원칙이 정의의 원칙으로서 적절한지 롤즈 자신이 미심쩍어 함을 입증하는 것이다. 게다가 롤즈는 문제점이 실제로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마저 한다. 차등의 원칙이 “개방 계층제와 더불어 경쟁적인 경제 체제 아래에서 (사유재산 제도의 여부를 불문하고) 심각한 불평등이 지배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에 근거해 있다”(221)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불평등이 “심각하다”는 것이 어느 정도를 말하는지, 또는 “개방 계층제”가 무엇을 뜻하는지가 불분명하기는 하지만, 롤즈가 염두에 두는 것과 구조가 가장 비슷한 사회(서구 부르주아 민주주의 체제)를 보면 이 주장이 완전히 잘못됐음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보았듯이 차등의 원칙은 평등주의적 원칙이라는 면보다는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구실을 한다는 면이 더 근본적인 것이다. 그래서 그저 야심찬 시도로 끝나고 말았다. 그런데 이것도 친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일반적 경향을 반영하는 것이다. 자본가 계급은 나무랄 데 없는 기치를 내걸고 집권해 계속 지배하고 있다. 자유, 평등, 인권, 민주주의 등등이 그것이다. 이를 가장 잘 표현한 미국 독립선언문은 만인이 평등하게 창조됐음이 자명하다고 주장하지만, 이 선언문 서명자 가운데는 노예 소유자들도 있었다. 오늘날 미국은 “극단적 폭력 세력”에 맞서 인권 등 인도주의적 가치 옹호를 표방하지만, 그들이 옹호하는 세력에는 가자지구 연대 평화운동가들을 잔인하게 학살한 이스라엘 시온주의자들이 포함돼 있다. 물론 파키스탄 독재 정권도 있고, 선거를 위해 북풍을 일으킨 이명박도 있다. 롤즈의 원칙들은 너무 추상적인 데다, 실질적이기보다는 형식적인 권리에 주목하고 있고, 불평등의 진정한 토대 문제를 회피하고 있어 이런 모순들을 제대로 다룰 수 없다. 결국 빛 좋은 개살구인 것이다.
4. 제도와 관련된 결론들
이제 롤즈의 ‘정의의 두 원칙’에서 비롯하는 제도 문제를 다루면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이러한 구조[정의의 원칙들을 만족시키는 기본 구조]를 가진 주요 제도들은 입헌민주주의의 제도들이라 할 수 있다”(267)는 롤즈의 진술은 실로 용두사미라 할 수 있다. 비록 추상적이기 이를 데 없어도 그토록 치밀하고 세심한 논의를 따라가다 만난 결론이 겨우 이것이라니!
그러나 롤즈는 경제 제도에 관해서는 자신의 입장이 열려 있다고 주장한다. “사유재산 경제와 사회주의 간의 선택은 줄곧 그대로 남겨두었으며 정의의 관점에서만 본다면 여러 가지 기본 구조가 그 원칙을 만족시키는 것으로 나타날 것이다.”(349) 벤저민 바버는 이 구절을 들어 롤즈 이론의 비정치적 성격을 지적한다. “이는 마치 평행선이 서로 만나는지 여부가 열려 있는 문제인 기하학을 전개시키는 것과도 같다. … 서구에서 정치 제도와 경제 제도가 긴밀히 상호 의존한다는 점과, 서구 역사 속의 부당한 일들에 자본주의가 책임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가운데 어느 것도 선택하지 않는다는 정의 이론은 지나치게 형식주의적이어서 완전히 있으나마나 한 것이든지 아니면 특정 사회경제 체제, 즉 ‘재산 소유 민주주의’를 위한 형편없이 위장된 합리화다.”20
1999년의 개정판 서문에서도 롤즈는 “정의의 두 원칙들이 재산 소유 민주주의 형태와 자유주의적 사회주의 체제 중 어떤 체제에서 가장 잘 실현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공정으로서의 정의는 이를 열린 문제로 다루고자 한다는 점을 밝혀두고자 한다”(22)고 했다. 그러나 롤즈는 공공 소유의 가능성을 인정하긴 하지만 시장경제를 고집한다.(363~368) 시장경제는 자본주의의 핵심 제도다. 시장은 경쟁과 상품 생산과 임금 노동을 반드시 수반하고, 이 요소들이 계급 불평등(롤즈가 불가피한 것으로 가정하는)의 존재와 결합되면 바로 자본주의의 본질적 특징들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롤즈가 열어 두는 옵션은 사회주의라기보다는 사회민주주의라고 해야 정확하다. 앞서 인용한 개정판 서문 구절에서도 롤즈는 “재산 소유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적 사회주의 체제” 사이의 선택에 대해 말하고 있다.(22)
2002년 롤즈의 사망에 부친 <파이낸셜 타임스> 조사弔詞에서 롤즈 지지자 브라이언 배리는 롤즈가 유럽 사회민주주의의 철학적 기초를 놓았다고 지적했다.21 뷰캐넌 같은 사람도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롤즈 비판이 일부 지나치고, 특히 체제 변호론으로까지 몰아세우는 것이 그렇다고 주장한다.22 실제로 롤즈는 자유주의적 좌파 사이에서 유행하는 분배 정의 이론을 정교하게 개발했다.
하기야 사회주의로 잘못 알려진 스탈린주의 체제는 제외해야 마땅한 옵션이다. 그러나 롤즈는 마르크스가 전망한 종류의 사회주의, 즉 노동계급이 스스로를 해방하고 다른 천대받는 사람들도 해방케 하는, 핼 드레이퍼가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라고 부른 것도 어젠다에서 배제했다.(그것도 선험적으로 그랬다. 부정적 뉘앙스로 ‘선험적’이라 함은 경험 ― 사회주의 운동의 역사적 경험과 이른바 ‘사회주의 국가’로 알려졌던 사회 체제의 경험 ― 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5. 맺으며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롤즈 이론을 비판적으로 볼 여지는 조금 더 있다. 특히, 롤즈의 이론에 현 사회를 그가 염원하는 정의로운 사회로 전환시킬 방법론이 없어서 사실상 공상적utopian이라는 지적이 그것이다.23 그러나 내가 앞서 논의한 것만으로도 이 잡지의 독자들에게는 충분할 듯하다. 이제는 그의 이론을 대략적으로 평가하면서 글을 마무리지어야 할 것 같다.
롤즈에 대한 가장 공정한 해설서로 정평이 난 논문집의 편집자는 서문에서 “롤즈의 저작이 마르크스주의자가 제기할 만한 반대 의견을 논의하지 않음에도 마르크스주의자에게 진지하고 세련되게 도전한다”고 지적한다.24
이 도전을 가장 진지하게 고려하는 마르크스주의자는 놀랍게도 알렉스 캘리니코스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에 체계적인 윤리학이 없거나 부족하다는 뜻에서 “윤리학적 적자”를 지적하고, 특정 사회 형태라는 맥락을 떠난 도덕적 입장이 있을 수 없다는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의 입장을 “상대주의적”이라고 비판한다.25 실제로,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의 윤리관에 체계적 윤리 이론이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체계적인 마르크스주의적 정의론이 제시되고 정교하게 다듬어져야 한다. 그러나 한층 더 놀랍게도, 캘리니코스는 이 부족분을 바로 롤즈의 “평등주의적 자유주의” 윤리학으로 메울 수 있다고 주장한다.26
그러나 크리스 하먼이 지적하듯이 진정한 마르크스주의, 고전적 마르크스주의를 “상대주의”라고 매도할 수는 없다.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스탈린주의를 그렇게 비판할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이런 비판이 부당하다는 점은 “서로 대항하는 도덕률의 충돌을 … ‘문명’을 ‘야만’으로 되돌릴 위험이나 ‘서로 싸우는 계급들의 공멸’을 부를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구질서를 온존시키고자 하는 사람들과 새로운 토대 위에서 사회를 재구성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사이의 충돌로 보면” 금세 알 수 있다.27 그러므로 캘리니코스가 상대주의적이라고 비판하는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에 스탈린주의나 사회민주주의뿐 아니라 고전적 마르크스주의까지 포함시킨다면 그것은 무리다.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에 체계적인 정의론/윤리학이 결핍됐음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 이론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의 포이어바흐에 대한 둘째 테제가 윤리와 도덕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된다. 그 테제는 다음과 같다.
… 인간은 자기 사유의 진리성을, 즉 현실성과 힘을, 그 차안성此岸性을 실천에서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실천에서 유리된 사유가 현실적이냐 비현실적이냐 하는 논쟁은 순전히 스콜라 철학적인 문제다.28
같은 취지로 안토니오 그람시는 마르크스주의를 “실천의 철학”이라고 불렀다. 인식뿐 아니라 도덕률도 인간 활동의 변화와 함께 변한다. 예컨대, 원시 공산사회에서 선善은 사회 성원들이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이었다.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어도 자신이 악惡을 행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계급 사회가 등장하면서 선에 대한 모순된 관념들이 등장했다. 선을 둘러싼 논쟁이 일어났고, 이 논쟁의 근저에는 현실을 둘러싼 이견이 도사리고 있다. 해고된 노동자들이 공장을 점거하는 것은 지배계급의 처지에서 보면 불법으로 ‘악’이지만, 노동계급의 처지에서 보면 ‘선’이다. 그러나 이것이 상대주의는 아니다. 왜냐하면 지구 온난화의 위협이 보여 주듯이 이윤 체제는 이제 모든 인류의 생존을 위협한다. 대량살상무기를 축적해 온 제국주의 열강들이 대규모 전쟁 위협을 고조시켜 온 것도 도저히 ‘상대적으로’ 해석될 수 없다. 반면에, 피억압자들의 연대와 나눔 등 평등주의적 개념들은 이러한 보편적 파괴의 탈출구를 가리키는 새로운 도덕을 위한 토대를 놓고 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를 “보편적 계급”으로 보았던 것이다.
진정한 정의론은 (롤즈 정의론과 달리) 사회와, 역사와 유리된 채 ‘순수이성’에서만 도출될 수 없다. 체계적인 마르크스주의적 정의론은 정의의 원칙들이 언제나 역사적·사회적 상황의 영향을 받는다는 점을 출발점으로 삼을 것이다. 21세기에 유력한 정의관은 이를테면 15세기에 유력했던 정의관과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체계적 마르크스주의 정의론은 자본주의의 사회·경제 관계들을 반영하는 가정들을 바탕으로 할 수도 없다. 사회가 계약에 근거한 것이 아니므로 사회계약론에 근거할 수도 없다. 무슨 버전의 것이든 말이다. 또한 모든 사람을 위한 공정한 몫의 문제도 될 수 없다. 생산·지배·권력의 문제이니까 말이다. 노동계급에게 더 큰 케이크 조각을 얻는 것은 전술 문제이지 (정의) 이론 문제가 아니다. 어느 것 하나 그들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으므로 바로 빵집 전체의 소유와 운영이 노동계급의 정의 이론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인간 활동 — 실천 — 이라는 관점에서 도덕 문제를 보면서 롤즈의 윤리학을 일부 수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달리 말해, 롤즈의 이론을 마르크스의 역사이론이자 사회이론인 역사유물론에 바탕을 두고 비판적으로 수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롤즈 정의론을 전폭 수용하는 개혁주의자들과 함께 공동 투쟁도 할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와 자유주의는 완전히 상충하는 것은 아니다. 따지고 보면, 자유주의는 위대한 부르주아 혁명 시대(1640년 영국, 1776년 미국, 1789년 프랑스)의 산물이다. 자유주의가 환기시키는 이상들, 즉 자유, 평등, 우애, 생명, 행복 추구 등은 자본주의적 착취와 억압이 폐지된 사회에서만 온전히 실현될 수 있다. 자유주의의 약속은 급진화됨으로써만 성취될 수 있다. 자유주의의 한계 안에서만 완전한 평등을 추구하는 것은 자유와 평등을 둘 다 배반하는 것으로 끝나고야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