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성교요지(聖敎要旨) - 광암 이 벽(曠菴 李 檗)
3. 이 벽(1754~86)의 생애와 사상 -9-
다산은 자기 자신에 관하여도 그의 「자찬 묘지명」 집중본(集中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갑진(1784)년 여름 이 벽을 좇아 배를 타고 두미(斗尾: 현재 八堂)의 골짜기를 내려오며 처음으로
西敎에 관하여 듣고 한 권의 책을 보았다.」
고 말하고,
* 자찬 묘지명(自撰 墓誌銘) - 다산은 그가 61세 때 회갑년을 맞이하여 지은 글이다. 즉 그 자신이 살아왔던 파란만장
했던 생애와 그의 철학과 정신 및 학문적 저서들을 기록한 자서전이라 할 수 있다. 이 「자찬묘지명」에는 집중본
(集中本)과 광중본(壙中本)이 있는데, 집중본은 문집에 실어 넣어서 전하려고 좀 자세하게 장문으로 쓴 글이며,
광중본(壙中本)은 무덤 속에 넣으려고 짧게 기록한 자서전적 기록이다.
다시 「자찬 묘지명」 광중본(壙中本)에서는,
「이 벽을 좇아 놀며 西敎를 듣고 西書를 보았다. 정미(1787)년 이후 사오 년간 온 마음을 거기
기울였다. 신해(1791)녀 이래 나라에서 엄히 금하므로 마침내 뜻을 끊었다.[逐絶意]」
고 하였다.
* 서교(西敎)- (서양 교회) 천주교
* 서서(西書)- 서양 서적(천주교 서적을 의미)
이처럼 다산이 천주교에서 뜻을 끊은 것은 결코 자의(自意)가 아니었다. 외부의 압력, 특히 나라
에서 금하기 때문이었다. 1784(甲辰)년 이 벽으로부터 처음 천주교를 들은 뒤, 1787(丁未)년부터
1791(辛亥)년까지 사오 년간은 그가 술회한 그대로 온 마음을 거기 기울이었던 것이다.
이같이, 다산의 형제들이 개종한 것도 모두 이 벽의 전교에 의한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다산
의 셋째 형 정약종(아오스딩)은 가장 독실(篤實)하였다.
「그는 성교를 듣자 독실하게 믿고 힘써 행하였다. 신해(1791)년 박해 때 그의 형제와 친구들 중
에서는 믿음을 온전히 한 사람이 적었는데도, 오직 그만은 조금도 동요되지 아니했다.」
고 「황사영백서」는 전하고 있다.
* 독실(篤實) - ①성실(誠實)하고도 극진함 ②열성이 있고 진실함 /篤: 도타울 독 實: 열매실, 가득찰실
* 황사영백서[黃嗣永帛書] - 조선 순조 원년(1801)에, 황사영이 신유박해의 내용을 중국 베이징에 있는 주교 구베아
에게 알리려고 비단에 적은 글(帛書). 천주교 박해에 대한 사정을 알리고 우리나라 교회 재흥·개국 촉진을 요청한 것
으로, 현재 로마 교황청에 보관되어 있다. /帛:비단백
* 정약종(丁若鍾) - 조선(朝鮮) 시대(時代) 22대 정조(正祖) 때의 학자(學者). 본은 나주(羅州). 다산 정약용(丁若鏞)의
셋째 형. 서학을 연구하고 천주교에 입교하여, 정조 19(1795)년 이승훈과 함께 청(淸)나라 신부 주문모(周文謨)를 맞
아들여 천주교 회장으로 전도에 힘쓰다가 23대 순조(純祖) 1(1801)년 신유사옥 때 옥사함
그(정약종)는 1801년 신유 교난 때 순교하였지만, 본 「聖敎 要旨」와 더불어 한국 교회 사상 최초
의 호교론인 「主敎 要旨」를 한글로 지어 어리석은 부녀자들까지 읽을 수 있도록 하였다.
* 주교요지(主敎要旨) - 정약종 성조가 쓴 책으로, 일반백성들을 상대로 해서 굉장히 쉽게 한글로 서술한 책이며, 주문모
신부님도 '주교요지'를 읽고 이렇게 쉽게 풀어서 천주교 교리를 잘 설명하고 있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 성조(聖祖) - 신앙의 조상. / 聖:성스러울 성 祖:조상 조
16) 성교요지(聖敎要旨) - 광암 이 벽(曠菴 李 檗)
3. 이 벽(1754~86)의 생애와 사상 -10-
이렇게 다산의 형제들을 전교 ? 개종시키는 데 성공한 이 벽은 그의 처남 권철신(權哲身) ?
권일신(權日身) 형제들도 개종시켰다. 다산이 쓴 「鹿菴 權哲身 墓誌銘(녹암권철신묘지명)」에 보면
「처음으로 이 벽이 西敎를 선교하자 그를 좇는 사람이 이미 무리를 이루었다.
공(권철신)의 아우 日身이 열심히 이 벽을 좇으매, 공은 ‘우제의(虞祭義)’ 라는 글 한 편을 지어
제사의 뜻을 밝히었다.」고 하였다.
* 우제의(虞祭義) - 장례(葬禮)를 치룬 후 곧이어 지내는 제사. 사체(死體)를 매장한 뒤 그 혼백(魂魄)을 달래기 위해
지내는 제사로서 초우(初虞) 재우(再虞) 삼우(三虞)의 절차가 있음. 초우는 장례를 치룬 당일 한낮에 지내는 것이 원칙
이며, 최소한 해가 지기 전에는 지내야 함. 재우는 초우를 지낸 후 처음으로 돌아오는 유일(柔日)에 지내며, 삼우는 재우
를 지낸 뒤 강일(剛日)에 지냄.
* 유일[柔日] - 천간(天干)이 을(乙)·정(丁)·기(己)·신(辛)·계(癸)인 날. 음(陰)에 해당하는 날이므로 이날 집안일을 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 강일(剛日) - 척일(隻日)이라고도 한다. 일진(日辰)의 천간(天干)이 갑(甲)·병(丙)·무(戊)·경(庚)·임(壬)의 양(陽)에 해당
하는 날이라 하여, 이날을 택하여 바깥일을 하면 잘된다고 하였다.
★ 책력을 보면 365일이 모두 육십갑자(즉, 甲子, 乙丑, 丙寅 등등)로 정하여 있는데 그 앞 글자가 甲,丙,戊,庚,壬자 이면 강일
(剛日)이고, 앞 글자가 乙,丁,己,辛,癸자 이면 유일([柔日)이다.
이같이, 권일신이 천주교를 신앙하기 시작한 것도 이 벽의 전교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
에는 권철신은 천주교를 신앙하지 않고, 다만 그의 아우 權日身만이 믿은 듯이 기록되어 있으나,
「 황사영 백서」에는 이와는 달리 ‘全家’가 신앙하였음을 증언하고 있다.
* 권철신(權哲身) - 본관 안동. 호 녹암(鹿庵). 세례명 암브로시오. 일신(日新)의 형. 이익(李瀷)의 문인(門人). 이승훈
(李承薰)에 의해 천주교에 입교(入敎)하였고, 1777년(정조 1) 경기도 양주(楊州)에서 정약전(丁若銓) ·정약용(丁若鏞) ·
이벽(李蘗) 등의 남인(南人)의 실학자(實學者)들과 함께 서학교리연구회(西學敎理硏究會)를 열면서부터 본격적인 신앙
생활을 시작하였다.
1801년(순조 1)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정약종 ·이가환(李家煥) ·이승훈 및 중국인 신부(神父) 주문모(周文謨) 등과 함께
체포되어 사형되었다.
* 권일신(權日身) - 본관 안동. 자 성오(省吾). 호 이암(移菴). 철신(哲身)의 동생. 세례명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남인(南人)
에 속한 학자로 양명학(陽明學)을 연구하다가 1782년(정조 6) 이벽(李蘗)의 권유로 천주교에 입교(入敎)하였다. 청(淸)
나라에서 영세(領洗)를 받고 온 이승훈(李承薰)에게 최초로 영세를 받았다.
1785년 서울의 역관(譯官) 김범우(金範禹)의 집에서 수차 집회를 가진 얼마 후, 이 집회가 발각되어 김범우는 처형되고 그
외는 양반 출신이라 하여 용서를 받았다. 1787년 한국인 교인들끼리 모여 가성직제(假聖職制)를 결정할 때 신부가 되고
1789년 교인 우모(禹某)를 베이징[北京]에 보내어 신부(神父)의 파견을 요청함과 동시에 성사(聖事)의 집행 및 재래의
제사(祭祀)의 가부를 문의한 결과, 교황이 임명하지 않은 주교는 성사를 집행할 수 없으며, 제사는 폐지해야 된다는 회답을
받았으나 계속 전도에 힘썼다.
1791년(정조 15) 전라북도 진산(珍山:錦山)의 윤지충(尹持忠)·권상연(權尙然) 등이 제사를 폐한 일로 참형된 신해박해
(辛亥迫害)때 예산(禮山)으로 유배를 가다가 심한 장독(杖毒:태형으로 인한 상처독)으로 죽었다.
「권철신은 南人 (곧, 東人) 大家의 후예로 경기도 양근군(楊根郡)에 살고 있었다. 그는 본디 경학과
예학으로 세상에 이름난 유학자이었는데, 성교가 동국에 들어오자 온 집안이 이를 신앙하고 좇았다.
본디가 名家이므로 비방과 방해 또한 매우 심하였다. 그 아우 日身이 신해(1791)년 교난(敎難)으로
죽자, 그 뒤로부터는 감히 드러내 놓고 계율(戒律)을 지키지는 못하였다.」
고 기록하고 있다.
* 경학(經學) - 중국 유가(儒家) 경전(사서오경 등)의 글자 ·구절 ·문장에 음을 달고 주석하며 연구하는 학문.
* 예학(禮學) - 예(禮)의 본질과 의의, 내용의 옳고 그름을 탐구하는 유학(儒學)의 한 분야.
* 교난(敎難) - 종교상의 박해. 또는 그로 인한 고난.
* 계율(戒律) - 불교에서 나온 말로, 불자(佛者)가 지켜야 할 규범. 계는 깨끗하고 착한 습관을 익혀 지키기를 맹세하는 결의
를 이르며, 율은 불교 교단(敎團)의 규칙을 이른다. 즉, 천주교의 십계명과 지킬 도리와 규칙를 말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