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드라마 <야인시대>를 계기로 김두한과 구마적·신마적·김무옥·문영철, 그리고 같은 시대 싸움꾼 '시라소니' 이성순과의 진짜 관계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야인시대>와 김두한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는 김두한과 이들의 관계에 대해 궁금해하는 네티즌의 문의가 하루도 그치지 않고 쏟아지고 있다.
이들은 김두한 관련 서적과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선을 오가는 인물로 처리되다 보니 진짜 이들과 김두한의 관계가 어땠는지 궁금해한다. 이들의 진짜 모습을 협객계의 전설적인 인물인 '당개' 윤봉선옹(86)과 김두한의 평생지기 김동회옹(86), 낙화유수 김태련옹(70), '신상사파'의 영원한 대부 정점수옹(75), 김두한의 후계자인 조일환씨(66), 주먹계의 '그림자' 최종국씨(66) 등이 5일 오후 서울 중구 무교동의 한 일식집에서 만나 본지 기자에게 최초로 털어놓았다. '야인시대 X파일'인 셈. 이미 전설이 돼 버린 이들의 얘기는 드라마 <야인시대>만큼이나 흥미진진했다.
▲구마적〓김두한과 정식으로 싸운 적은 없다. 그는 종로 우미관의 보스가 아니었다. 구마적은 서커스단을 따라다녔던 '기도'였다. 기도는 공짜 구경꾼들을 잡아내거나 혹시 모를 불상사에 대비해 서커스단이 고용한 사람이다.
구마적과 김두한은 구마적이 종로에서 서커스단 기도로 있을 때 한차례 맞붙을 뻔했다. 김두한이 공짜 구경을 원하자 이를 제지하면서 두 사람이 승강이를 벌였다. 그러나 김두한이 제압하고 서커스단 안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구마적의 체면이 구겨졌다. 이로 인해 구마적은 서커스단 기도에서 물러났다. 이것이 김두한과의 싸움에서 패한 것으로 잘못 전해지게 됐지만 이때는 김두한이 기로 밀고 들어가 '공짜 구경'을 했을 뿐 둘 사이에 물리적 충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구마적은 서울 종로구 명륜동에서 60년대 중반까지 살다가 운명을 달리했다. 그는 윤봉선옹과는 둘도 없이 친하게 지냈으며 성품이 어질고 너그러워 후배들을 많이 챙겼다.
▲신마적〓휘문고보를 졸업했다. 그는 상당히 엘리트였다. 일본어도 잘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시절이라 자신의 지식을 사회에서 활용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이 때문에 그는 술로써 나라 잃은 슬픔을 달랬다.
그 역시 김두한과 맞닥뜨려 싸운 적이 없다. 그와 김두한은 특별히 친한 관계는 아니었지만 나라 잃은 슬픔에 대해서는 뜻을 같이했고, 주먹으로 일본인들을 혼내준 적은 있었다. 신마적은 광복 이후에도 삶이 나아지지 않았다. 그는 광복 후 명동에서 터를 잡았다. 명동에서도 술로써 한 세월을 보내다가 구마적과 비슷한 시기인 60년대 중반 사망했다.
▲김무옥〓천하의 싸움꾼이었다. 그는 자신의 주먹을 너무 믿었던 탓인지 처음에는 김두한의 부하가 되기를 거부했다. 한때 두 사람은 지존이 누구인지 가리기 위해 한판 승부를 벌일 뻔했다. 그러나 김무옥은 김두한이 김좌진 장군의 아들인 데다 국가와 민족적 사명감이 투철한 것에 반해 그의 부하가 되기로 했다.
김무옥은 30년대 중반 김두한의 부하가 된 이후 그의 그림자였다. 김두한이 종로 천하통일을 한 후 전설적인 협객으로 자리잡는 데에도 김무옥의 도움이 컸다.
그러나 김두한과 김무옥은 같이 '사고'를 쳐도 종로경찰서에는 김두한만 잡혀갔다. 김무옥이 종로경찰서에 잡혀 가지 않았던 것은 종로서에서 유도를 가르쳤기 때문이다. 당시 종로경찰서는 김무옥을 조선 제일의 유도왕으로 인정하면서 그에게 유도를 배운 경찰들이 많았던 관계로 김무옥은 항상 검거에서 제외됐다. 김무옥이 경찰서에 잡힌 김두한을 빼낸 적도 있다.
▲문영철·김영태〓문영철은 신사였다. 그 역시 김무옥과 마찬가지로 김두한 곁을 지켜주던 의리맨이다. 문영철은 후배들이 많이 따랐다. 마음이 너그러웠다. 싸움도 곧잘 했다.
드라마에서 김두한 참모로 나오는 김영태는 드라마에서처럼 김두한과 30년대 초반에 만나지 않았다. 원로 협객들의 증언에도 다소 차이가 있지만 김영태와는 광복 이후 만났던 것으로 전해진다. 김영태는 김두한 참모가 아니라 가끔씩 술을 마시며 세상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얘기하는 사이였다.
▲정진영〓김두한과 절친한 친구였다. 그러나 정진영이 좌익사상에 물들자 김두한이 그를 죽였다는 게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 둘 사이의 '친구' 스토리다. 그러나 김두한은 정진영을 죽이지 않았다.
당시 정진영은 '화운정'의 '오야붕' 노릇을 했다. '화운정'이란 두목과 부하의 서열에 상관없이 음식과 돈이 생기면 똑같이 분배하며 평등을 추구했던 주먹패의 또 다른 조직이었다. 그것이 확대 재생산돼 정진영이 마치 좌익인 것처럼 알려졌다. 그가 죽은 것은 김두한 조직과 약간의 알력을 보였고, 그것이 원인이 돼 김두한 부하들이 남산의 한 사찰에 있던 정진영을 몽둥이로 두들겨팼기 때문이다.
당시 정진영이 맞았다는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달려간 윤봉선옹이 정진영의 시신을 수습했다. 그는 김두한이 친구를 죽였다는 생각에 그에 대해 반감을 가졌다. 이 때문에 김두한과 멀어지기도 했지만, 훗날 그가 지시해 정진영을 죽인 것이 아니라는 얘기를 듣고 오해가 약간 풀렸다. 윤옹은 정진영 사후 그의 가족들을 보살펴 줬다.
▲시라소니〓김두한(1918년생)보다 두 살 위다. 두 사람은 절친했다. 본명이 이성순인 그가 왜 시라소니로 불렸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일반인들은 시라소니라면 그저 새끼 호랑이 정도로만 생각한다. 그에게 시라소니라는 별칭을 붙여준 것은 일본군 장교였다.
중국 톈진(천진)에서 장사를 했던 시라소니 이성순은 당시 한 식당에서 일본군 장교와 시비가 붙었다. 그때 일본군 장교가 칼을 뽑아 이성순의 목을 치려는 순간 이성순이 이마를 들이댔다. 시라소니라는 별명을 얻기 전 이성순의 별명은 '평양박치기'였다. '칼보다 박치기가 빠르다'는 의미에서 이마를 들이댄 것이다. 이마로 한방에 일본군 장교를 쓰러뜨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본 일본군 장교는 이성순의 배짱을 사무라이에 비교하며 "당신이 진정한 시라소니다"라고 말했다. 그 이후 이 별명이 굳어진 것이다.
시라소니는 1대1에서는 진 일이 없었던 천하의 주먹꾼이었다. 아쉽게도 '잇뽕' 김두한과 시라소니 이성순은 한차례도 싸운 적이 없다. 과연 '잇뽕'의 발차기와 시라소니의 박치기가 붙었다면 누가이겼을까? 자못 궁금한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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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변화시키는 인터넷①』
(≫≪) 미군 희생 여중생들의 죽음을 애도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