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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요한복음 7장37~39절
제목▶목마르거든
저는 이런 생각이 가끔 듭니다.
어제도 밤늦게까지 상담을 하면서
어떤 한분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지금 제가 하는 이야기를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제가 그 문제에 대한 답을 드리겠습니다.”라고요.
무슨 말인 줄 아십니까?
그분께서 저를 떠볼려고 한다면
저는 그분께 해드릴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분이 머뭇 하시더라구요.
사람들이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상당히 두려워합니다.
아무리 그 말씀이 진리이고,
그 말씀이 나를 복되게 한다 할지라도
그 마음에 두려움이 든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유는 무엇일까요?
내가 가진 것을 내려놓아야 하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부자 청년을 보세요.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이렇게 물어보잖아요.
그때 예수님이 대답이 무엇입니까?
“네가 가지고 있는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하고 불쌍한 자에게 나누어 주고
너는 나를 따르는 삶을 살아라”
이렇게 말씀을 하신다는 것이죠.
그랬더니 그 청년이 어떻게 돌아갑니까?
근심하는 얼굴로 돌아간다는 것이죠.
왜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내려놓지 못하고 포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이
때론 내가 가진 것을 내려놓고
포기할 수 있는 영성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가진 것을 내려놓을,
내가 가진 것을 포기할 수 없는 욕심 때문에,
우리는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 앞에 두려워하시지 마세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러한 음성을 주실 때에는
감당할 수 있는 능력도 반드시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배 나오라고 말씀하시거나,
기도의 불을 끄지 말라고 하실때에는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실 것이기에
감사로 그 일을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감당할 수 없을 때에는
피할 길도 우리에게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단지 문제는 내가 감당하려고 하지 않으니까
우리 삶의 커다란 문제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밤에는
이렇게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을 정말 믿으십니까?”
이 질문 앞에 오늘밤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는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 37절을 보면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라고 적혀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외쳐 이르시되라는 것은,
헬라어 원문에 “절규하다”이렇게 쓰여있습니다.
예수님이 절규하시면서
“누구든지 목마른 자는 내게로 와서 마셔라”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밤도 주님은 우리에게 절규하시면서
“누구든지 목마른 자는 내게로 와서 마셔라”
이렇게 말씀 하시는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이야기를 하셨느냐?
오늘 본문 시작은 이렇게 말합니다.
“명절 끝날에” 여기서 말하는 명절은
대체 어느 명절을 말하는 것이냐?
초막절을 이야기 합니다.
초막절은 무엇을 하는 날이냐?
일주일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먹이시고 입히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장막을 치고 머무르는 기간입니다.
그렇다면 이 초막절의 시기는 언제이냐?
우리나라로 치면 추석 무렵입니다.
9월이나 10월쯤 이스라엘은
초막절로 일주일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이러한 절기를
어기지 않고 잘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죠.
이스라엘의 집을 혹시 가보셨습니까?
이스라엘의 집을 가보면 특징이 있습니다.
예를 든다면 집평수가 30평이라고 한다면
베란다의 공간을 15평으로 뺀다는 것이죠.
왜 그러느냐? 지금은 시대가 변화과
살아가는 환경이 변하여서
광야에서 초막절을 보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란다에 초막을 설치하고
그곳에서 초막절 절기를 지키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초막절 절기를 지키기 위한
하나의 의식이 있었는데, 매일 아침
대제사장은 커다란 금대접을 가지고
실로암 연못으로 갑니다.
그리고 물을 잔뜩 길어 옵니다.
그리고 그 물을 번제단에 붓는 행위를 합니다.
그런데 이때 제사장이 실로암에 물을 길러 갈 때,
수많은 사람들이 대 제사장의 뒤를 따릅니다.
그리고 물을 길러올 때, 일반 제사장 수백명이
은나팔을 불게 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엇을 하느냐?
제단에 물을 쏟아 부을 때,
번제다 네 귀퉁이에 버드나무를 매달아 둡니다.
그리고 번제단 주위를 뱅~뱅~돕니다.
그때 뭐라고 하면서 도느냐?
“호산나! 호산나! 호산나”
이렇게 말하면서 그 주위를 돕니다.
여기서 호산나라는 뜻은
“주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행위를 일주일 동안
계속해서 한다는 것이죠.
이게 바로 초막절입니다.
그러데 이때 예수님께서
이 광경을 보시고 하시는 말이
“누구든지 목마른 자는 내게로 와서 마셔라”
이렇게 말씀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초막절에 드리는 제사를 관제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의식을 왜 하는 것이냐?
이스라엘은 일년에 두 번을 추수합니다.
4월경에 한번하고, 가을쯤에 또 한번 합니다.
봄에는 보리와 밀을 추수합니다.
가을에는 포도나무, 무화과, 올리브를 추수합니다.
그런데 가을에 봄에 수확할 보리와 밀을
파종, 즉 심어야 합니다.
그래야 봄에 수확을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어떠한 문제가 있느냐?
이스라엘은 건기와 우기로 나뉘어져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거라 믿습니다.
이스라엘은 4월부터 10월까지는 건기입니다.
비가 한 방울도 내리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보리와 밀을 파종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비가 내려야 한다는 것이죠.
비가 내리지 않으면
땅이 너무나 말라 있기 때문에
씨를 뿌려도 말라 죽어 버린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무렵에 비가 내려줘야 합니다.
그리고 이때 내리는 비를 성경에서
이른비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쩔 때는 이 건기가 길어져서
좀처럼 비가 내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때 마실 수 있는 물이 없습니다.
그러면 이때 수확하는 것이 무엇이냐? 포도입니다.
그래서 수확한 포도를 가지고 포도즙을 만들어
물대신 목마름을 해결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 이러한 의식이 변질이 되었습니다.
규약에 율법을 보면 이렇게 드리는 제사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금대접을 가지고 실로암에 가서
물을 떠온 후 제단에 쏟아 부었다는 것이죠.
그리고 수많은 제사장들이 은나팔을 붑니다.
그 뒤로 백성들은 번제단을 돌면서
“호산나, 주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이렇게 말하며 돈다는 것이죠.
그런데 구약의 율법을 보면
관제에는 물을 붓는 것이 아니라
포도주를 부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왜 이렇게 변질되었느냐?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거룩한 제사가
그저 하나님께 드리기만 해야 하는 제사가
바알 신을 섬겼던 이방 신들의
기우제가 그들의 신앙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물을 붓는게 아니예요.
포도주를 붓는 거였어요.
엄청난 포도주를 부어야 하는 거예요.
제단이 넘칠만큼 흠뻑 젖을만큼 부어야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겉모습으로만 보면 화려합니다.
금대접에 제사장이 물을 길러 가고,
수많은 제사장들이 은나팔을 불고
수많은 백성들이 “호산나”를 외치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들은 포도주 붓지 않고
번제단에 물을 길러와서 부었을까요?
아까도 말씀을 드렸잖아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금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해준 것이 포도주예요.
그렇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포도주는 자기 생명과도 같다는 것이죠.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간 광야생활을 할 때,
그들의 삶을 돌보시고 지켜주셨잖아요.
그러면 초막절날 가장 중심은 무엇이냐?
바로 이 은혜를 기억해야 하는 거예요.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하나님 앞에 관제를 드려야 한다는 것이죠.
관제는요. 희생과 헌신의 제사였어요.
그러면 이 희생과 헌신의 제사를 받으신
하나님께서 이른비를 내리시는 거예요.
우리가 구약을 보면 이른비가 내리지 않아
가뭄과 기근을 맞이할 때가 있어죠?
그렇다면 왜 그때는 이른비가 내리지 않았느냐?
관제의 희생과 헌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포도주를 부어야 하는데
물대신 마실 수 있는 생수가
바로 포도주였기 때문에
이 포도주를 다 제단에 부어버리며
자신들이 살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 물을 가져다 부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제 밤에도 이야기 했잖아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을 점령하기 전
그들에게 요구하신 하나님의 마음은
할례를 받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영적인 것부터 무장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로인해 여호와 군대대장을 만나게 하시고
드디어 영적인 준비를 끝나고 나서야
어떤 말이든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잖아요.
말씀에 순종하였더니.
그 견고하고, 높은 여리고 성이
무너져 버렸잖아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엇이 문제냐면요?
어지간히 이른비를 원한다는 것이죠.
어지간히 응답을 원합니다.
어지간의 기도 제목을 들어주기 원해요.
물론 이게 나쁜 것은 아닙니다.
자신들이 하나님께 요구하는 것에 비하면.
자신들의 희생과 헌신은 없다는 것이죠.
내가 응답받고 싶은 만큼
하나님 앞에 헌신과 희생도 요구된다는 것이죠.
그냥 이해하고 들으세요.
제가 그런 목사가 아닌거 아시잖아요.
어느 기도원에 갔는데 어떤 분이
저에게 안수를 해달라는 거예요.
그리고나서 얼마 뒤에 또 해달라는 거예요.
그래서 해달라는대로 해줬죠.
그러면서 어떤 생각이 마음에 들어오느냐?
안수를 해달라는 것은 그만큼
자기 기도 응답에 대한 갈급함이 있는 것이잖아요.
그러면 이 기도 응답에 대한 갈급함만큼
하나님 앞에 헌신과 희생도 갈급했으면
이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헌금 하는 시간에 그분의 표정을 보니까
인상이 너무나 좋지 않더라구요.
안수해달라고 할 때는 목숨 걸고 매달리더니
헌금하라니까 핸드백을 열지 않는 거예요.
무슨 이야기 인줄 알아요?
초막절의 중심이 뭐예요?
은혜예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 이게 은혜예요.
여러분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면요.
뭔가 하나님을 위해서 헌신하고 싶은
간절함이 그 가운데 들어와요.
찬양하고 싶어지고요.
예배하고 싶어지고요.
기도하고 싶어져요.
헌금도 하고 싶어져요.
이게 증장이 이상해요.
저는 여러분에게 부탁하고 싶은 말이
교회를 섬기고 주님을 섬기는 일이
은혜 때문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목사님의 관계 때문에,
그리고 내 직분 때문에
섬기는 것이 아니면 좋겠습니다.
물론 나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게 헌신하고 섬기는 것은
늘 한계가 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뒤끝도 안좋아요.
여러분 이상하게요.
저도 해보니까 그렇더라구요.
내 안에 은혜가 충만하면요.
내가 하나님께 드린 것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구요.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만
기억이 나더라구요.
하지만 은혜가 떨어지면요.
내가 주님께 드린 것이 왜 그렇게 많아요?
나 때문에 주님이 사시는 것 같아.
내 돈 받아서 말이예요.
그리고 어떤 말을 가장 많이 합니까?
“나도요. 교회를 위해서 할만큼 했어요.”
여러분 이런 사람은요.
제가 늘 마음으로 입을 때립니다.
초막절은 바로 이것을 회복시키는 거예요.
40년 동안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던 것
바로 이러한 은혜를 떠올리고
다시 희생과 헌신으로
영적인 재무장을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초막절에 담긴 의미입니다.
나는 주님을 떠난 적이 있지만
주님은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나를 한번도 떠난 적이 업으시고,
나는 주님을 외면한 적이 있지만
주님은 한번도 거르지 않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여주시고,
이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가 기억하고
이 은혜로 우리의 삶을 무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물을 길어다 붓냐고요.
그러니 이거예요. 헌신은 하고 싶지 않고,
아무런 희생도 하고 싶지 않고,
그저 비만 내려 달라는 거예요.
실로암에 있는 물 내 물도 아니잖아요.
그 물을 하나님 앞에 드리고 있다는 것이죠.
구약에 관제를 드릴 때에는 지파별로 드렸어요.
그래서 지파별로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는데,
이게 은혜가 넘칠 때는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낸 포도즙이 넘쳐서
더 이상 보관할 장소가 없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영적으로 무너지니까
집에 있는 포도주 가지고 오라고 할까봐
다 몰래 숨겨 버린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러나봐 성도들 나만 보면 돈 없다는게
그냥 웃으라고 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농담을 진담으로 받고
얼굴 좀 진지하게 하지 마세요.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안낸다는 것이죠.
나만 내고 옆집에 갑돌이는 안내는 거예요.
그래서 나만 골탕 먹는거 같으니까
나도 하나님께 드리지 않는다는 것이죠.
나는 포도주를 다 내고
포도주 담긴 항아리를 핥아 먹고 있는데
옆집에 갑돌이는 벌컥벌컥 마시고 있으니
이게 얼마나 속이 상하냐는 것이죠.
그러니 어떠한 마음이 들겠어요?
“나도 다음에 내나 봐라”
이러한 마음이 이스라엘 전역에 번진거예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주인 없는
실로암에 가서 물을 길러다가
기우제를 지내고 있다는 것이죠.
하나님 앞에 아무런 희생도 헌신도 하지 않으면서
주인 없는 물을 가져다 바치고 생색내며
비내려달라고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고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런다는 것이죠.
주님 앞에 희생은 안해요.
그리고 주님 앞에 헌신은 안해요.
지금 내가 누리는 것, 이렇게 먹고 사는 것
내 건강, 가정, 돈, 자녀, 사업장 다 은혜잖아요.
우리가 이것만 기억한다면 못할 일이 없어요.
여러분 우리의 삶은요.
주님 앞에 희생과 헌신이 있어야 해요.
영적인 무장은요.
이러한 희생과 헌신으로 무장하는 것
이게 바로 영적인 무장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영적인 재무장을 했을 때,
어떠한 일이 벌어지느냐? 이른비가 내립니다.
이상한게 포도즙은 포도즙에 이유가 있는게 아니예요.
성경을 보면 작은 여우가
포도원을 헐지 못하게 지키라 말합니다.
포도원의 담장이 무너지면, 사나운 짐승이나
여우가 포도원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리고 땅을 밟고 다니게 된다는 것이죠.
그러면 땅이 굳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나마 내리던 이슬을
땅이 머금지 못하게 됩니다.
포도가 얼마나 생명력이 강하냐면요.
비가 오지 않는 건기때,
새벽에 내린 이슬을 땅이 머금고,
그 이슬이 포도나무에 영양을 줘서
열매를 맺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짐승들이 포도원에 들어와서
포도를 따먹는 것보다 땅을 밟고 다니면
이 땅이 이슬을 머금지 못해
한해 농사가 엉망진창이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포도원을 헐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포도원을 지켜야 생명수를 거둘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비가 오면 생수의 문제가
해결이 돼요? 안돼요? 된다는 것이죠.
그러면 물이 많은데 포도주가 필요합니까?
아니면 필요하지 않습니까? 필요 없어졌어요.
어리석은 인생이 바로 이거예요.
하나님 앞에 관제를 드리면요.
하나님이 비를 주신다는 거예요.
목마름 때문에 포도주를 집에
숨겨 놓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른 비로 인하여
보리와 밀도 심을 수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내년에 수확도 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얼마나 어리석으면 이것을
하나님 앞에 감쳐두다가
이른비가 내리지 않아 고생을 하냐고요.
왜 가뭄과 기근을 경험하는 인생으로 바뀌냐고요.
영적인 준비는요.
하나님 앞에 희생하고
헌신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희생과 헌신을 원하시느냐?
‘감사는 표현 하는 데까지 감사다.’
‘믿음은 움직이는 데까지 믿음이다.’
하나님은 쩨쩨하게
포도주 몇 잔 얻어 잡수려고
여러분에게 그러는거 아니예요.
하나님은 우리의 감사를 받고 싶은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삶에 품고 살아가는지
그것을 보고 싶으신 거예요.
그리고 그 표현을 받으신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 이른비를 쏟아 주시는 거예요.
그런데 이른 비는 너무 많이 내리면
파종이 되지가 않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을 보면요.
‘이른 비를 적당히 내려주사’
딱 보리와 밀을 심기에
가장 알맞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적당히 부어주세요.
너무 많이 주면 주체도 못해가지고
노란 바지 입고 수유리 가서 다리 흔들고 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만큼
덜 주신다는 것이죠.
적당히 가져야지만
간당간당 살아감으로
내년 봄에 수확해서
또 먹게 하신다는 것이죠.
여러분 희생과 헌신이예요.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기우제로 변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희생과 헌신 없이 응답만 갈급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오늘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희생과 헌신을 드릴 때, 하나님은요.
반드시 우리의 기도에 응답 하실 줄 믿습니다.
그래서 희생과 헌신으로 영적 재무장을 하셔서
저와 여러분의 삶에 이른비를 내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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