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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로마서 13:1-7
제목: 기독교인의 삶
신명기 8장
명령을 지켜라. 그렇지 않으면 멸망한다.
로마서 13장
권세에 복종하라 (종말이 금방 다가온다)
마태복음 22장 15-20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안녕하세요. 이번 달 부로 새로 온 윤경민 목사입니다. 비록 비대면이라 성도 여러분들을 직접 만나 뵙지는 못하지만 이렇게나마 인사드립니다. 설교 기회를 주신 하늘샘 교회와 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바람직한 기독교인의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함께 은혜를 나누려 합니다.
제가 목사로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어떻게 하면 교회 바깥의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잘 전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교회에서 나고 자라다시피 생활하다보니 비 기독교인들과 교류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꼈습니다. 신학생이 되고, 전도사가 되고, 목사가 될 수록 이런 문제가 더 무겁게 다가왔습니다. 교회 외부의 사람들과 만날 기회가 점점 더 줄어들었습니다. 성도들만 만나고 교회 안의 문제들만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 스스로는 성도들에게 나가서 전도하라고 말하지만, 정작 나는 외부 사람들과의 접점도 없을뿐더러, 그들과 어떻게 대화해야 할지도 모르며, 전도를 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굉장히 어려울 것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교회 공동체의 지도적 역할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일반 성도들보다 이 문제에 대해서 성찰이 부족했다고 느꼈습니다. 학생들이 질문을 던집니다. 목사님, 학교에서는 진화론을 가르쳐주는데 주일학교 선생님은 창조론이 맞다고 합니다. 무엇이 옳은가요? 청년들이 질문을 합니다. 목사님, 술을 먹지 않으면 사회생활을 하지 못할 상황에 처해있습니다. 교회냐 세상이냐, 선이냐 악이냐 양자택일의 상황속에서 성도들은 고민하며 치열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목사인 저는 교회 안에서, 그들의 어려움도 모른채 너무나 쉽게 조언하는 것은 틀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청년 시절에 그런 뻔하고 손쉬운 답변만을 제공해주는 선배나 목사님들의 말이 공허하고 힘이 없다고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이런 어지럽고 힘든 세상을 살아가면서 계속해서 죄를 짓고 유혹에 흔들리는 것 보다, 산 속에 들어가서 수도사로 사는 것이 차라리 낫겠다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개신교 목사로 사는 것이 천주교 신부님들보다 어떤 면에서는 더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 한 몸 건사하기도 바쁜데, 처자식까지 먹여 살리면서 이 혼잡한 세상 속에서 고고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게 느껴졌습니다. 고민하던 끝에 예수님께서는 산속으로 올라가시기만 한 것이 아니라, 다시 세상 속으로 내려오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런 고민 속에서 오늘 본문인 로마서를 함께 살펴보고 싶습니다. 말씀에서 바울도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순응하면서 살아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사회적으로 환영받지 못할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위험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영화나 책을 읽어 보더라도 초기 기독교인들에 대해서 우리는 목숨을 걸고 끝까지 저항하며 순교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미지를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기독교인들이 로마 황제의 통치를 부정하고, 군에 입대를 거부하거나 로마 법률을 따르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만 해도 마태복음 22장에서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질문을 받았던 바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또 마찬가지로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법과 통치가 아니라 로마의 법을 따르며 세금을 바치는 일은 용납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만을 인정하겠다는 유대인들에게 로마에 세금을 바치라는 말은 매국노나 다름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세금 징수원인 세리가 당시 아주 천한 취급을 받는 악독한 죄인의 직업이었다고 묘사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다시피 예수님께서는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고 대답하십니다. 세금을 내지 말고 로마에 저항하라는 것이 아니라, 로마제국과 황제의 질서에 어느정도 순응하고 살아가는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 사도의 생각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세상 권세도 하나님께서 질서를 위해 허락하신 것이니 순종하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물론 이 성경구절이, 부당한 탄압과 권력을 옹호하기 위해 이용당할 수 있는 위험성이 있고 실제로도 그러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권력구조가 아니라 세상을 악한 것으로 규정하고 배척하려는 성도의 태도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이야기하려 합니다.
우리 한국 기독교 역사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가 바로 그것입니다. 어떤 기독교인들은 신사 참배를 거부했고, 그에 반해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은 신사참배를 받아들였습니다. 광복 이후 한국 기독교인들 사이에 이에 대해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우리 기장 교단 역시 신사참배를 거부하지 못했습니다. 당연히 이 문제에 대해서 회개하고 반성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교단의 어르신께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나 한 사람의 결정으로 많은 성도들과 교회가 박해를 받아야 한다면, 그것은 내 위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분명 비겁한 선택일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는 말이기도 합니다. 모든 기독교인들이 다 순교당했다면 우리에게 어떻게 복음이 전파될 수 없었을 겁니다. 바울이나 베드로같은 사람들은 처형당했지만, 그들 주변에는 항상 도우며 기도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성경에 적혀있지 않지만, 이들의 가르침을 전하고 교회를 지켜온 것은 이름없이 숨어다닌 성도들이었으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잡혀가시던 그 순간에, 제자들은 모두 도망갔지만, 반대로 그들이 도망갔기 때문에 그들은 살아남아서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비겁하고 나약한 제자들도 나름의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모든 사람이 다 똑똑하고 용감하고 확신으로 가득한 삶을 살아갈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아무리 고민하고 노력해봐도 예수님이나 바울과 같은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따금 괴로움과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목사를 할 자격이 있는지도 모르겠고, 내가 다른 누군가를 신앙적으로 지도한다는 것도 참 힘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며 공부해왔다고 생각하지만, 아직도 하나님에 대해 잘 모르고 성경에 대해서도 이해가 부족하다고 느낍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이러한 연약함과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이 차라리 다행이라고 여깁니다. 확신과 자신감에 가득 차서, 하나님을 잘 알고 성경을 다 이해했다고 말하는 것 보다는, 부끄럽고 부족한 모습을 인정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결정하실 문제를 두고 사람이 판단하고 결정하는 교만함, 이것이야말로 위험한 것입니다.
이단과 사이비의 특징 중 하나는 바로 이런 점입니다. 자기들만 옳고 자기들만 구원받는다고 생각합니다. 부끄러움과 반성이 없습니다. 이들은 하나님만이 결정할 문제를 자기 스스로 결정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의 특징은 교만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성경에서 세상의 법과 규칙을 지키라고 말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세상의 법과 규칙, 윤리와 질서를 우습게 여깁니다.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입니다.
저는 대학생 시절에 강남에 있는 크고 유명한 교회에 다녔습니다. 교회는 오래되었는데 성도 숫자는 계속 늘어나서 예배실이 모자라 사람들이 시간마다 번호표 뽑듯이 줄을 서야 했고, 주변 건물들을 비싼 값에 빌려서 사용하는 등 불편이 컸습니다. 교회 신축의 필요성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건축 과정에서 이런저런 잡음이 들려왔습니다. 청년들 중 일부가 의문을 제기했더니, 교회 장로님과 목사님들은 그들의 입을 막고 교회에서 내쫓아버렸습니다. 법적인 분쟁과 시비가 이어졌고 언론을 타기 시작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완공이 되었지만, 결국 여러 의혹과 특혜는 깨끗하게 해명되지 못했습니다. 참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럼에도 교회를 져버리고 싶지는 않았습니다만, 교인들에게 단체로 보낸 메일은 저를 놀라게 했습니다. 그 모든 논란을 부끄러워 하거나 사과하지 않고, 오히려 뻔뻔하게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했습니다’라고 적혀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알 수 없었고, 결국 교회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몇 해 전, 결혼식 문제로 다시 그 교회를 찾아갈 일이 있었습니다. 새롭게 지어진 건물은 멋지고 아름다웠습니다. 같이 갔던 교회 청년들은 역시 유명한 교회라 다르다며 감탄하고, 또 배울 점이 없는지 여기저기 들여다보느라 바빴습니다. 교회 1층 로비에는 담임 목사님의 훤칠한 등신대 입간판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뉴스에서는 목사님이 횡령으로 장로에게 고발당했다는 소식이 돌고 있었지만 그 교회 교인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보란 듯이 행복한 교회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활짝 웃고 있는 목사님의 입간판과 그 주위를 활발하게 오가는 교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 교회는 예수가 아니라 담임 목사님이 주인이고 연예인 같았습니다. 불법 공사를 지적하는 법원의 판결을 보면서 저는 교회의 법이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 제목을 기독교인의 삶이라고 정했습니다. 바람직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무엇일까 함께 고민하고 싶었습니다. 많은 목사님들이 세상의 법과 질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법과 질서를 따르라고 합니다. 인본주의가 아니라 신본주의를 선택하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악한 세상과 하나님 나라 사이에서 하나만을 골라야 할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성경말씀을 자세히 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둘 중 하나를 택하는 것은 어리석고도 쉬운 선택입니다. 오히려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양쪽 모두를 지키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질서는 기본으로 충족시키고,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질서까지를 지키라는 것입니다. 도둑질 하지 말라는 것은 지키기 쉽습니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에게 내 것 내어주는 것은 어렵습니다. 약한 자에게 폭력을 휘두르지 말라는 것은 쉽습니다. 하지만 다른 편 뺨까지 내어주는 것은 어렵습니다.
초창기의 기독교인들도 오해로 인한 박해를 많이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신성모독의 죄를 저지른 사람들이라고 생각했고, 로마인들은 사회통합에 저해가 되는 종교라고 여겼습니다. 조선에서는 조상에 대한 제사를 거부한다는 종교라고 탄압을 받았습니다. 생각해보면 기독교의 부흥은 바로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했을 때 일어났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사람들은 과부들을 위해 재산을 나누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함으로써 오해를 풀고 사람들의 칭찬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로마의 기독교인들은 성찬식이 진짜 사람의 피와 살을 먹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죽음을 기념하는 것이며, 노예제도를 철폐하고 사회를 뒤엎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은 동등하게 구원받는다는 것을 인정받고 공식종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일본에 국권을 빼앗기고 망해버린 조선 땅에서도 기독교가 구원과 희망의 종교라는 것을 알게 되어 자발적으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또 대한민국 건국 과정에서도 상당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었습니다. 거센 바람이 나그네의 옷을 벗기지 못하지만, 따스한 햇볕이 그 옷을 벗기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이것만이 전부는 아닐 것입니다. 때로는 과감한 결단과 어려운 투쟁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필요하다 생각합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와 보라’고 했을 때, 과연 어떻게 해야 그 말이 힘을 가질 수 있을까를 고민해 봅니다. 오늘날 교회 다니는 것이 자랑스럽기 보다 부끄럽고, 기독교인임을 밝히는 것이 탐탁지 않게 여겨지는 현실 속에서 진정한 그리스도인 다운 삶인가를 고민합니다. 그것은 교회에 대한 부정적이고 독선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선한 사람들의 아름다운 공동체가 되었을 때에야말로 그 말이 효력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함께 그런 고민을 나누고 또 그 방향을 제시해주는 것이 저와 여러분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청년들이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는 세상입니다. 수고한 중년들의 삶이 정당하게 보상을 받지 못하고, 존경받아야 할 노년이 부끄러움이 되어버리는 세상입니다. 돈이 전부인 세상,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판단할 수 없고, 무엇이 아름답고 추한가를 구별할 수 없는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좁은 길, 곧은 길, 어려운 길을 걸어가는 우리 하늘샘 교회 성도 여러분들에게, 저에게, 우리 목사님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