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21일 평화목교회 주일예배 설교
사순절 5째 주일 * 홍지훈 목사
요한복음 17:20-26
사랑을 갈망하는 기도
이사야 56장 7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내가 그들을 나의 거룩한 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기쁨을 누리게 하겠다. 또한 그들이 내 제단 위에 바친 번제물과 희생제물들을 내가 기꺼이 받을 것이니, 나의 집은 만민이 모여 기도하는 집이라고 불릴 것이다.”(사56:7)
이 구약 성경의 말씀은 신약성경에 인용됩니다. 마태복음 21장, 마가복음 11장, 누가복음 19장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는 사건을 일으킬 때 이사야 56장 7절의 말씀을 가져다가 사용합니다. 만민이 기도하는 하나님의 집을 장사꾼의 소굴로 만들지 말라는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요지는 거룩한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곳은 “모든 사람이 기도하는 집”입니다.
이사야서에서 하나님은 기도하러 거룩한 성전으로 오는 사람들이 바치는 제물들을 기꺼이 받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11장 37절 이하의 말씀 속에서 예수는 바리새파 사람들의 이중성을 꾸짖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박하와 운향과 온갖 채소의 십일조는 바치면서, 정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소홀히 한다! 그런 것들도 반드시 행해야 하지만, 이런 것들도 소홀히 하지 않았어야 한다.”(11:42)
그러므로 만민이 기도하는 집에 나와 앉아 기도하는 사람들은, 외적인 경배예식과 더불어 하나님을 향한 우리 삶의 올바름과 사랑표현이 내적으로도 확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신앙이라면 누구든지 하나님을 향한 예배도 중요하게 드려야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고 또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기도의 내용이 바로 이런 문제를 함축적으로 잘 알려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예수의 기도문은 로마병정과 제사장의 무리에게 붙잡히기 직전에 하신 기도입니다. 그래서 이 기도 속에는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려고 결심한 예수의 결심과 고통이 모두 담겨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예수께서 목숨 걸고 애쓴 모든 일의 근본적인 의미가 담겨있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기도는 어쩌면 기도가 아니라 설교입니다. 기도란 하나님을 향한 간구인데, 예수의 기도를 읽어보면 자기 자신을 위하여 비는 간구는 단 한 가지도 없습니다. 모든 내용이 하나님의 뜻을 전해 받은 제자들이 이 세상에서 어떤 존재로 살아야하는지를 알려주고 그렇게 되게 해달라는 간곡한 중보의 기도입니다. 이것을 우리도 알고 있습니다. 기도는 언제나 우리 모두를 위한 기도여야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 중에 대표기도를 드릴 때에 우리는 언제나 이 기도가 공적인 기도가 되도록 노력합니다. 즉, 우리 모두를 위한 기도여야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합당한 것을 구하는 기도가 되도록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 모두”란 우리교회 교인만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예수 믿는 사람만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피조세계를 다 포함하는 것이 “우리 모두”입니다.
요한복음 17장 20절 이하에 나오는 예수의 기도문을 다시 보십시오. 세상 속에 선과 악이 공존하고, 하나님이 보낸 아들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이 공존하지만, 주님의 기도는 믿지 않는 세상, 악한 세상을 향한 저주의 기도는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세상 때문에 믿는 사람이 필요하고, 그 믿는 사람들에게 해야 할 일이 주어졌다고 기도합니다. 믿는 사람들을 미워하는 세상 속에 살면서 예수의 제자로 살아가는 일을 해야 하는 이유는, 세상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알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의 예수기도를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기도는 누구더러 들으라는 기도였을까?”라고 말입니다. 앞의 문맥을 보면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느닷없이 하늘을 우러러 보며 말씀하셨다고 하니, 그 곁에 제자들이 함께 있어서 이 기도를 다 들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니 이 기도는 공적인 기도였고, 내용을 생각해 보면, 당신의 의지를 다시 한 번 표현하는 가르침의 말씀이 분명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오늘날 우리의 기도도, 공적인 기도일 경우에는 그 기도의 내용이 우리 모두에게 깨달음을 던지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어린 시절이나 젊은 시절 예배 중의 기도를 기억해보면, 기도의 말미에 언제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예배당에 빈자리가 많은데, 차고 넘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어떤 교회에 갔더니, 예배당을 새로 크게 지어 놓고는 빈자리를 채워달라는 기도를 너무 열심히 하는 것을 보고 어이가 없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내 삶의 올바름과 하나님을 향한 나의 사랑이 실천되도록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기도는 그 올바름과 사랑의 내용이 어떤 것인지 드러내고, 그 일이 이루어지기를 간구하는 것이 되어야합니다. 오늘 예수의 마지막 기도가 바로 그런 내용입니다.
제가 설교의 제목을 <사랑을 갈망하는 기도>라고 한 것은 26절 말씀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게 하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의 역할은 하나님 사랑의 메신저입니다. 말로만 전달한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는 자신의 몸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전달하셨습니다. 주님의 기도 안에 나오는 말 가운데,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서 우리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그래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여 주십시오.”(요17:21)라는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가 하나이듯이, 우리 모두도 그 안에 포함되는 것을 이 세상이 보고 믿게 되는 것을 간절히 바라는 기도입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우리 모두를 하나로 묶어주는 끈이 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신 그 사랑이 우리 모두에게서 드러날 그 때에 예수는 우리와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이해가 쉬울까요? 구제헌금을 많이 만들어서 필요한 곳에 후원을 많이 하라고 할까요? 또는 교회가 직접 복지시설을 만들고 맡아서 잘 운영하면 될까요?
1990년 이탈리아에서 한국으로 건너와 살며 노숙인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안나의 집>을 성남시에서 운영하는 김하종(빈첸시오 보르도) 신부는 20년 이상이나 이 일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운영하는 고아원이나 노인복지 시설도 많고, 재활시절도 많습니다.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전달한 결과물들입니다.
이렇게 눈에 보이는 사랑의 표현들 뒤에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득 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이 있습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는 것은 그리스도인 누구에게나 필요합니다. 이 사랑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된 것이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따듯한 것인지 이미 경험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이렇게 설명하면 좋겠습니다. 하늘 저 멀리에는 태양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곳을 태양계라고 부릅니다. 여기에 있는 행성들은 태양이 있어서 존재하는 행성들이고, 그중에 지구는 생명체로 가득한 살기 좋은 곳입니다. 그 뜨거운 태양열이 지구까지 빛으로 전달되는 동안 생명체가 살기 꼭 알맞은 온도로 바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빛은 온 세상을 공평하게 비춥니다. 잘사는 나라 못사는 나라 구분도 없고, 착한 사람 덜 착한 사람의 구분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같은 태양 빛을 똑같이 나누어 받고 살면서도 내가 받고 사는 빛이 더 따듯하다고 느끼는 것은 바로 신앙 때문이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은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기도와 손길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내 힘으로 내 능력만으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의 힘이 나의 삶에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믿고 감사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리스도인들을 “사랑의 돋보기”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오지에서 생존하는 프로그램을 보면, 가장 힘든 일이 불을 만드는 일입니다. 그래야 추위를 피하고 음식도 만들 수 있으니까요. 그 때 돋보기 하나만 있다면 얼른 불을 피울 수 있습니다. 태양이 비칠 때에 마른 잎을 모아다가 돋보기로 초점을 맞추면 곧 불길이 일어나게 됩니다. 태양 빛은 낮 시간에 비추는 따듯함이지만, 그 태양 빛을 모아서 만든 불은 밤 시간의 추위를 막아주는 고마운 불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래서 세상이 느끼지 못하는 하나님의 사랑인 태양빛을 모아서 따듯한 불로 만들어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돋보기와 같다는 말씀입니다.
태양의 열기는 빛으로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우리 인간은 그 빛을 받아 삽니다. 그 인간 중에 “돋보기 인간”이 있는데, 그들 덕분에 아주 추운 곳에도 따듯함이 전달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사는 동안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의 불씨를 돋보기로 살려서 어두운 곳에는 빛으로, 추운 곳에는 불로, 고통당하는 것에는 위로로, 절망한 곳에는 작은 소망으로, 불의가 가득한 곳에는 정의로움으로, 분쟁이 있는 곳에 평화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경쟁과 교만으로 얼룩진 세상 속에 겸손한 사랑으로 다시 작은 불꽃을 일으킬 수 있다면, 그곳에 하나님도 계시고, 예수 그리스도도 함께 하신다는 것을 온 세상이 알게 될 것입니다.
평화목교회 여러분,
우리의 기도는 사랑을 갈망하는 기도여야 합니다. 그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받은 사랑입니다. 그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이 우리의 기도를 사랑의 기도로 만들고, 그 사랑을 세상이 볼 수 있도록 드러내는 것입니다.
사순절 5째 주일을 보내는 교우 여러분, 그리스도의 사랑은 예수의 고난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된 것입니다. 사순절을 보내시는 동안에 나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그 사랑의 마음을 이웃에게 전달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그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더 크신 사랑과 축복을 경험하게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