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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12 - 푹아인이 프랑스 도움으로 응우옌 왕조를 수립하니 월남 왕국!
원나라 30만 대군의 3차례 침략을 모두 물리친 베트남 (大越) 에 1406년 명나라가 20만 대군
으로 침공해 점령 통치하니, 1418년에 레 러이가 궐기해 10년간의 전쟁 끝에
승리해 명군을 몰아내고 독립을 회복해 1428년에 후 레 왕조를 세웠는데 1527년에 망합니다.
후 레 왕조가 망하고 베트남은 두 나라로 분열되니 북쪽은 쩐씨가 그리고 남쪽은 응우옌씨 정권이
들어서 260년간 남북조로, 1771년에 응우옌 반냑, 반르(阮文呂), 반후에 3형제가 농민 봉기를
일으켰으니 반낙 3형제는 남부 응우옌씨 정권의 왕족들은 도륙했고 북진해 쩐씨 정권을 공격합니다.
1780년 청나라 건륭제가 보낸 20만 대군도 물리치고 후레 왕조의 찐씨 정권을 멸망시켜 베트남
을 통일하니 떠이선 왕조 인데..... 도망쳤던 응우옌 왕조의 푹아인은 프랑스 주교의 지원을
받아 1802년에 베트남을 차지하고는, 나라 이름을 대월 (大越) 에서 월남 (越南) 으로 바꿉니다.
1802년 건국된 응우옌 왕조는 베트남 최후 왕조이자 최대 통일 왕조로, 응우옌 왕조를 세운 응우옌
푹아인은 연호를 가륭 (嘉隆) 으로 선포했는데.... 떠이선 왕조를 공격하면서 프랑스와
포르투갈 등 서양의 후원을 크게 받았기 때문에, 후에의 궁정에 서양인 300여명을 거주케 했습니다.
또한 3백년간 남북으로 갈라졌던 베트남을 통합하기 위해 온 노력을 기울였는데.... 운하와
도로를 만들어 교통을 원활히 만들었고 가륭률 (嘉隆律) 을 반포해 법률을 정비
했으며 군사적으로도 태국과 손을 잡고 "캄보디아를 갈라먹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역사에서 강대국이 약소국을 갈라먹는 일은 비일비재하니..... 나폴레옹의 프랑스는 이탈리아 북부를
차지하는 대신에 오스트리아에는 베네치아를 주었고, 프로이센(독일) 과 오스트리아 및
러시아는 3차례에 걸쳐 폴란드를 갈라먹으니.... 결국 "폴란드는 세계지도" 에서 사라지기도 했습니다.
한반도도 강대국들이 갈라먹으려는 시도는 많았으니 신라 김춘추는 당나라 태종을 만나 고구려는 당나라
가 백제는 신라가 차지하기로 했으며..... 임진왜란에서 고니시 유키나가는 심유경과 만나 조선
북부 4개 도는 명나라가 남부 4개도는 일본이 나누기로 논의를 하다가 틀어지니 정유재란이 발발했습니다.
청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이 조선을 차지하니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주해 친일정권이 무느지고 친러정권이
서자, 다급해진 일본은 39도선에서 조선을 나누자 제의하니 러시아가 거절했는데 이후 일본이 영국과 동맹
을 맺고 미국을 끌어들이니 노동자 봉기에 시달리던 러시아가 저 제안을 꺼내자 일본이 거절하니 러일전쟁 입니다.
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은 소련에 군사원조를 하며 끌어들여 독일과 소련이 싸우게 해 두나라가 수천만명이 죽은
반면에 자기들은 수십만명 피해에 그치는 재미를 보았는데, 미국은 일본과 싸우면서 미군 피해를 줄이기 위해
소련을 끌어들이니 그 보상으로 사할린섬과 북방 4개 섬에 한반도 북부를 넘겨주니 한반도는 38선에서 분단 됩니다.
월남에서는 태조 응우옌 푹아인이 죽자 1819년에 민망 황제가 제위를 계승했는데, 민망 황제는
중앙집권화 정책을 펼치며 황제의 권력을 강화했고 또한 세금 감면, 군비
축소를 통해 재정 건전화에 온 힘을 쏟기도 했으며 외적으로는 대단히 강경한 정책을 펴 나갑니다.
자배중인 캄보디아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대군을 보내 진압하고 아예 베트남에 편입시켜버렸으며, 태국,
라오스와도 전쟁을 벌이며 베트남 역사상 최대의 강역을 넓히는 성과를 올렸으니, 특히
서구에게도 강경하게 나가니 극도의 쇄국 정책을 펴서 가톨릭 신자를 박해하고 선교사들을 몰아냅니다.
프랑스는 인도 식민지 각축 전투에서 영국에게 패한 뒤에 베트남으로 눈을 돌리고 있었는데
응우옌 왕조는 2대 황제였던 민망이 가톨릭 선교를 금지하고 프랑스 선교사를
처형하였으니, 프랑스는 이를 빌미로 삼아 인도차이나 반도를 식민지로 만들기 시작합니다.
민망 황제가 1841년 사망하면서 응우옌 왕조는 내리막길을 걷게 되는데.... 티에우찌 황제, 뜨득
황제등 유약한 황제들이 연달아 왕위에 오르며 나라는 흔들렸고 기아와 가뭄, 자연재해가
겹치니 반란이 일어나며 민심이 흉흉해졌으며 서양의 간섭이 심해지니, 프랑스,
미국등 서구 열강들이 문호 개방과 가톨릭 탄압 중단을 요구하며 베트남 앞바다를 휘젓고 다닙니다.
제 2대 민망 황제가 민족주의 견지에서 프랑스 세력과 종교를 몰아내자 분노한 프랑스 외무장관 프랑수아
기조가 1차 아편전쟁 끝인 1843년에 베트남에 함대를 파견하기 시작해 1861년에 장바티스트
세실 제독과 레오나르 샤르네르 대령의 지휘하에 70척의 군함을 파견하니..... 베트남 남부로 진군합니다.
그러자 도저히 프랑스군을 당할수 없었던 베트남은 항복해 제1차 사이공 조약을 맺고
다낭 등 3개 항구가 개항됐고..... 남부 6성이 사실상 프랑스의 손아귀로 넘어갑니다.
프랑스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1872년에 베트남의 기독교도들을 보호한다는 핑계로 홍강 삼각주인 하노이를
침공했으니 홍강 수로를 이용해 중국 윈난성 방향 교역로를 장악하려고 했는데, 베트남의 수도는 중부
후에였지만 하노이도 옛 수도에다가 베트남의 핵심 곡창지대이므로 절대로 빼앗겨서는 안되는 상황이었습니다.
다급해진 베트남 응우옌 왕조는 태평천국을 이끌던 유영복 (劉永福) 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이른바
흑기군 (黑旗軍) 이니.... 1873년 12월 600명 병력으로 하노이에서 18명의 프랑스군을 격파합니다.
그러자 프랑스는 550명 해군과 해병대를 파견했고 이듬해 5월 하노이 외곽에서 3,000명 베트남-흑기군
연합군과 전투를 치렀는데... 이 전투에서 프랑스는 수에 밀려 패배했고 (프랑스군 35명
전사 52명 부상, 흑기군 50명 전사 56명 부상) 당시 프랑스군 사령관이었던 리비에르는 전사 했습니다.
1874년 12월 프랑스 의회는 군비 추가와 함께 15,000명의 증원군 파병을 승인하니 원정군
의 총사령관 아메디 쿠르베는 우수한 무기와 병력의 우위를 앞세워 손타이,
바쿠닌, 타이구엔, 훈호아 등 여러 도시를 함락하고, 손코이강 삼각주를
제압하니 베트남쪽에서도 별수없이 청나라에 손을 내밀었고, 청나라는 군대를 파견했습니다.
명나라가 임진왜란 때 조선에 파병한 이유와 같은데 바로 조공하는 제후국을 보호한다는 것이었지만
이홍장은 베트남에 힘을 쏟을 생각은 없었으니 빨리 전쟁을 종결시킬려고
1884년 4월 프랑스 대표 푸르니에와 간명(簡明) 조약을 체결해 프랑스의 베트남 보호권을 승인합니다.
청나라는 신강에서의 전쟁이 막 끝난지라 새로운 전쟁을 하고 싶지 않았으니간명 (簡明) 조약을
체결한 건인데..... 청은 프랑스의 베트남 보호권을 승인하고 베트남에 주둔하고 있던
청군을 변경으로 철수시키기로 하는 대신 프랑스는 중국 변경을 침범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프랑스는 간명조약에 조인하고 난뒤, 바로 청군을 공격했으니 청군이 국경선까지 철수한다는
약속을 어겼다는 것이 명분이었는데.... 간명 조약에는 맹점이 있었으니 조약에서는 분명히
청군의 철수를 약속했지만 언제까지 철수할 것이라는 내용이 없었고 만일 조약 내용에
청군이 특정 시한내에 철수하겠다는 내용이 있었다면 그 전까지는 프랑스가 공격할 명분은 없었습니다.
간명 조약에는 철수기한이 명시되어있지 않았으니 프랑스가 청군을 공격해놓고 '왜 먼저 청군이 물러나지
않았느냐.' 라고 논리를 펼 수 있는 셈이었으니, 베이징 주재 프랑스 공사는 전쟁 비용 2억 5,000만
프랑의 배상과 청군의 즉시 철수를 요구했는데 청나라 조정에서는 '1개월 이내에 다 철수시킬 것'
이라고 공언했지만, 프랑스는 이미 푸저우 (福州) 마미 군항 (馬尾 軍港) 을 공격했으니 마미해전 입니다.
선정대신을 맡으며 복주에 체류 중이던 하여장 (何如璋) 은, 나름대로 사태를 더 크게 만들지 않기
위해 청군에게 발포 금지 명령을 내렸지만 덕분에 프랑스 함대는 아무런 저항도
받지않고 복건 함대를 전멸시켰으니..... 무엇보다 마미 조선소는 은 2,000만냥을 들여
만든 양무파의 기대 자체였지만 어이없는 명령으로 저항하지도 않으니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이에 분노한 청나라 조정은 복건함대가 전멸한지 3일후,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했지만 해전은 함대가 이미 없어졌으니 프랑스군의 압도적인 승리였습니다.
반면에 육전인 박닌 전투에서는 의외로 청군이 분전했지만 유리하지 못한 건 마찬가지였으니 통킹을
둘러싼 크고 작은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교환비는 1 : 10을 넘겼는데.... 압도적인 인명피해에도
어떻게든 프랑스군의 진격을 막아 교착상태를 만든 점에선 청군의 전술적 성공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프랑스군은 베트남 전선에서 청군을 얕보고 지나치게 북상했는데 원군으로 온 풍자재는 청군에 몇
없는 용장이었으니 풍자재 지휘하에 청군은 물러서지 않고 치열하게 돌격했고, 그 결과
프랑스군은 진남관 (鎭南關) 전투에서 패배했는데 이후 키루아 (Ky Lua) 전투에선 일단
량선 (Lang-Son) 지역 탈환을 목표로 한 청군의 공격을 방어할 수가 있었고 피해도 크지 않았습니다.
프랑스군은 보급이 차단될까 아노미 상태에 빠져 물자도 버리고 남쪽으로 도주했고 본토에 패전
가능성이 있다는 전보를 보내, 이 여파로 쥘 페리 총리는 불신임안을 받고 내각까지 총사퇴를
하게 되는데.... 청군은 교환비에서 피해를 많이 봤고 전황에서 유리하다고는 볼수 없던 상황
이었지만 지금까지의 전투 경과로는 협정에서 프랑스가 더 많은 양보를 해야 할 수도 있었습니다.
청 조정은 프랑스에 타협해 화친을 구하고 1885년 4월 7일 정전하고 철병하라는 윤지를 하달해
화의가 시작되었는데, 이전에 맺은 간명조약 유효성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리한 쪽은
프랑스 였으니.... 간명 조약을 맺을 당시의 프랑스는 중국에 대해 우위에 있던 입장인데,
정작 청나라가 프랑스군에 여러차례 인상적인 활약을 펼치고도 조건은 이전과 달라진게 없었습니다.
청의 이홍장은, 군사력을 베트남에 끊임없이 투입해 오는 프랑스 보다는 근대화된지 얼마안된 일본이
더 약하고 쉬운 상대라 생각했으니 베트남을 버리고 조선을 보호국으로 유지하고자 했기에,
그리 나쁘지 않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에 베트남을 통째로 갖다 바쳤으니 베트남을
양보하고 대신에 조선을 장악하려고 한 이홍장의 이 잘못된 선택은 9년 후에 큰 후환으로 되돌아옵니다.
이 전쟁에서 청나라는 은 10억냥 이상을 지출했고 2억냥의 빚을 지게 되었으며 무엇보다 조공국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이 사라졌는데.... 프랑스의 경우에는 드디어 청나라의 세력을 완벽하게
일소하고는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을 확립해 본격적으로 인도차이나 식민지화에 착수하게 됩니다.
이처럼 중화제국~ 조공국의 관계에서 제국주의 열강이 끼어들어 중국을 압도하고 조공국을 자기 식민지
로 빼앗는 구도는 후일 청일전쟁에서도 그대로 재현되니..... 쑨원 같은 경우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질서에 금이 간 이 어처구니없는 사태를 보고 자신이 청나라 정부 전복에
뜻을 세웠다고 말했는데...... 이 사태는 근본적으로 청나라 후진적 체제 때문이라고 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전쟁으로 인해 다시 한번 청나라의 취약함이 드러나자 영국, 러시아, 프랑스, 미국, 일본 등이 중국과
주변 나라에 대하여 야심을 품기 시작하였으며 특히 조선과 만주가 전략적 요충지로 청불전쟁 이후 10년간
열강의 쟁탈목표가 되었는데, 이후 청나라는 청불전쟁과 비슷한 전쟁에서 조선을 둘러싸고 일본과 복귀전을
치르게 되며 기껏 세운 조선소 등 공장 지대가 프랑스 함대의 포격으로 파괴되며 산업화에 큰 지장을 겪었습니다.
제2차 사이공 조약으로 응우옌 왕조는 남부 6성 코친차이나에 대한 프랑스의 소유권을 인정했고 프랑스는 하노이,
후에 등에 영사관을 개설할 권리를 얻어내니 청나라가 개입해 프랑스를 쫓아내려고 시도했지만, 청불전쟁
에서 처참하게 패배하면서 프랑스의 응우옌 왕조 지배는 사실상 확실해졌으니, 응우옌 왕조 조정 내부
에서도 분란이 끊일 날이 없었고, 1883년에는 제1차 후에 조약을 맺어 응우옌 왕조가 프랑스의 보호령이 됩니다.
결국 2년 후 1885년에 제2차 후에 조약에서 1905년 조선의 을사조약처럼 응우옌 왕조의 외교권이 프랑스에
넘어가고 보호국으로 전락하니 응우옌 왕조는 완벽하게 프랑스의 지배를 받게 되는데..... 다만
보호국이었기에 대한제국과는 달리 응우옌 왕조 나라 자체는 멸망하지 않고 명목상 계속 존속하기는 했습니다.
외부적으로는 마치 베트남이 독립국가인 것처럼 보이는데다가 황제 세습이 가능했으니 조선 보다는 나은데,
그해 7월 보정대신들이 함응이 황제를 데리고 도망쳐 프랑스에 대항하는 '껀브엉 운동' 을 벌였으니
프랑스는 무려 11년이 지나서야 겨우 껀브엉 운동을 진압할 수 있었고 1887년 베트남과 캄보디아,
라오스를 병합한 식민지인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설립하니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까지 계속됩니다.
청불전쟁은 조선의 역사에도 영향을 끼쳤는데, 갑신정변은 조선 주재 3천 청군 병력의 절반 1,500명이
청불 전쟁에 투입된 것을 기회로 발생했으니.... 그러나 정변 세력의 보유 병력은 그 절반만 남은
청군과 싸우기에도 너무 적은 50명에 불과했고, 다케조에 공사가 직접 데려온 휘하의 일본군 수비
병력 200명도 조선군이 도주하자 약속을 어기고 인천으로 철수하는 바람에 청군의 반격이 가능했습니다.
갑신정변에서 나라를 뒤엎는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김옥균등 급진 개혁파가 동원한 "병력이 50명" 에
불과했다는 사실에 놀라는데.... 이는 일본군의 무력에 크게 의존했다는 뜻이며 그외 함경도
병마사 윤웅렬은 500명을 약속하고도 수십명에 그쳤으며 관군 1,000명을 동원하긴 했는데
1선에서 청군의 공격으로 수십명의 사상자가 나자 데려온 군대인지라 그냥 도주해 버린 것입니다?
나무위키등 우리나라 기록은 일본군이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하고도 철수한 바람에 갑신정변이 실패했다고
일본에 책임을 돌리며 비난하는데.... 일본군은 대포도 없이 경무장 200명에 불과했으니 저 조선군
1,000 명이 일선에서 청군과 열심히 싸워 청군에 5백명 사상자가 나서 힘이 빠진 상태가 되면 수비하려
했지만... 청군이 단 한명의 인명손실 없이 1,500명 전원이 공격해오니 200명으로 어찌 상대한다는 말인지?
급진 개화파는 백성들은 원래 통치를 받는 상대로 무식하다고 보아 고매한 이상을 설득한다든지
또는 저 관군에 세포를 심어 공작해 정변에 끌어들이려는 노력은 전혀 하지 않았으니.....
지시대로 불려온 군대라 수십명 사상자가 나자 청군에 대응사격을 하는게 아니라 도주한 것입니다.
1875년 대포 2문을 장착하고 60여명이 탄 일본 운양호가 영종진에 이르러 포격후 보트 2척에 육전대
22명을 상륙시키니.... 험준한 성에서 대포 36문과 화승총으로 무장한 400명 조선군은 수십명
사상자가 나자 대포와 총을 버리고 모두 달아나니 일본군은 "경상자 한명 없이" 성을 점령했는데
대포를 가진 400명이 일본군 단 한명도 죽이거나 부상을 입히지 못했는지.... 당시 조선군 실력입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이홍장이 판단을 잘못한 것인데.... 프랑스군이 일본군 보다 강한건 맞지만 문제는 멀리
유럽에서 와야 하니 대군을 동원하기 어렵다는 것이라, 차라리 동쪽 속국인 조선을 일본에
넘겨주고 남쪽 베트남을 속국으로 유지했다면 인도차이나가 프랑스령이 되는 일은 없었을 것으로 봅니다.
청국은 일본으로 부터 조선을 지키는게 더 낮다는 판단에서 전황이 불리하지 않은 상태에서 너무나 쉽게
속국 베트남을 포기한 것인데.... 청불전쟁을 계기로 사실상 프랑스의 속국이 된 대남 (하노이) 과
프랑스령 코친차이나 (남베트남) 에 라오스, 캄보디아를 합쳐 인도차이나는 프랑스령 식민지가 됩니다.
조선 총독과 달리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총독은 문관도 부임했고, 무관도 일본 육군장군(대장) 이 대세인
조선 총독에 비해 해군 제독들이 취임한 것이 특징인데, 베트남은 유교가 국교이고 백성들은
불교를 믿으며 공자를 받들어 석전제 제사를 지내며 유학자 선비들이 중국의 4서 3경을
공부해 과거시험으로 관리로 선출되고 중국에 조공하는 제후국인등 모든면에 조선과 판박이 입니다.
응우옌 왕조가 무너진뒤 베트남에서 지속적인 독립운동이 있었으니 1885년 관군이 프랑스군에 패하자
응우옌 왕조의 관원이었던 쯔엉딘은 의병을 일으켜 싸웠는데... 그는 수차례 프랑스군에게 승리를
거두기도 했지만 결국 수세에 몰려 자결했고 무장투쟁이 실패로 돌아간후 문신들에 의한 근왕운동
이 있었으며, 근왕운동이 실패한 뒤에도 판보이쩌우와 같은 민족주의자들이 항불 독립운동을 지속합니다.
초대 베트남 총독 사르네 제독은 정치를 전혀 모르는 인물이었으니....... 코친차이나는
후에 조정이 임명했던 관리나, 조세 명부, 관청문서 등이 전혀 남아있지 않은
최악의 상황이라 실질적인 통치가 시작된 것은 1863년 그랑디에 제독이 부임한 후 입니다.
베트남 2대 총독 그랑디에는 5년간 지배하면서 조세제도를 개혁하고, 공공사업을 벌이며
통역학교를 설립하는 등 통치기초를 다졌는데.... 인도차이나의 총독들
가운데 가장 유명하며 베트남인들을 악랄하게 착취한건 1897년에 부임한 폴 두메르 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