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사키 다쿠(山崎拓) 일본 총리 보좌관은 지난 5월 말 일본을 방문한 정동영 통일부 장관에게 “핵과 납치문제를 해결해 북일 국교정상화를 이룩하겠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는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의 뜻을 김정일 북한 국방 위원장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자민당 부총재를 역임한 야마시키는 고이즈미 총리와는 정치적 동지이다. 고이즈미 총리는 지난해 야마사키를 총리 보좌관으로 임명, 총리실이 외교 안보 정책의 사령탑 역할을 하도록 책임을 맡겼다. 야마사키는 지난해 5월 2차 북-일 정상회담을 성사시킨 숨은 주역이다. 9.11 총선으로 대승을 거둔 고이즈미 총리는 지난 9월 12일 북한과 국교를 정상화하기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많지만 임기 중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고이즈미 총리는 “국교 정상화 협상은 평양선언에 따른 것이고 북한도 평양선언을 존중하는 입장인 만큼 협상을 추진해야 한다”고 밝혔다. 야마사키 보좌관도 고이즈미 정권의 향후 외교 과제와 관련,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내년 9월까지 한번 더 회담해야 한다고 본다”고 말했다.
▲ 고이즈미 일본 총리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악수하고 있다
북핵 6자 회담 타결로 북-일 국교정상화가 가장 유력한 외교과제로 떠올랐다. 이와 관련, 마치무라 노부타카(町村信孝)일본 외상은 20일 지난해 말 이후 중단된 정부간 협의를 빠른 시일 내에 재개하기로 북한과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양국 합의는 6자 회담 공동성명 내용을 실천하기 위한 첫 구체적 조치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공동성명은 2항에서 “북한과 일본은 평양선언에 따라 불미스러운 과거와 현안사항의 해결을 기초로 하여 관계 정상화를 위한 조치를 취할 것을 약속했다”고 명시했다. 마치무라 외상은 이번 정부간 협의는 국교 정상화 협상은 아니지만 국교 정상화를 위해 필요한 단계라며 핵, 미사일, 납치문제 등 모든 현안이 협의 대상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과 일본은 지난해 11월 평양에서 납치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심의관급 실무회의를 열었으나 이후 일본이 북한이 보낸 납치 피해자 요코다 메구미(실종 당시 13세)의 유골이 가짜라는 DNA 감정 결과를 발표한 후 정부간 접촉이 일절 중단된 바 있다. 북한 수석대표인 김계관 외무성 부상과 일본 수석 대표인 사사에 겐이치로(佐佐江賢一郞) 외무성 아시아-대양주 국장은 이번 6자 회담 2단계 회의 중 3차례나 공식 접촉을 하는 등 전과는 우호적 제스처를 보였다.
고이즈미 총리는 과거부터 북한과의 국교정상화에 의욕을 보여왔다. 그는 2002년 9월 북한을 전격 방문, 김정일 위원장과 회담한 후 이번 공동성명에 언급된 ‘북-일 평양선언’에 서명한 바 있다. 이후 북한과 일본은 피랍생존자 일시 귀국과 2년만의 수교회담 본 회담 재개로 상당히 관계가 좋아지는 듯 했다. 하지만 북핵 문제가 불거지고 일본에서 납치문제에 대한 강경 여론 고조 등으로 다시 냉랭한 관계로 빠져들었다. 고이즈미 총리는 지난해 5월 두 번째로 방북, 평양선언을 재확인했지만 이후 가짜 유골 파문으로 양측은 감정의 골만 깊어졌다.
북한은 내심 일본과의 수교를 바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북한이 9.11 총선에서 대승을 거둔 고이즈미 총리가 정권을 잡고 있을 때 관계 정상화를 추진하는 것이 낫다는 판단을 한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물론 북한이 가장 원하는 것은 수교를 함으로써 일본으로부터 얻어낼 수 과거 식민지 시대에 대한 배상금이다. 일본은 6자 회담을 통한 북한과의 접촉에서 국교가 정상화되면 상당한 규모의 경제협력을 제공할 것이라고 밝힌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 정부의 한 당국자는 수교할 경우, 일본국제협력은행을 통해 100억 달러 상당을 북한에 제공하는 방안을 마련해놓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오코노기 마사오 (小此木政夫) 게이오(慶應)대 교수도 100억 달러가 하나의 협상안이 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일본이 한일협정으로 한국에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를 제공하고 추후 전두환 정권시절에 40억 달러의 경협자금을 지원한 것을 현재가치로 환산할 경우 대충 100억 달러 수준이다. 북한은 수교의 대가로 300억 달러의 배상금을 희망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은 또 일본과의 국교정상화를 통해 경제봉쇄 해제와 대규모 투자 등을 기대하고 있다.
고이즈미 총리는 집권 이후 미국과의 관계 강화를 제외하면 외교적으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특히 야심적으로 추진해왔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도 사실상 무산됐으며 중국과 한국과의 관계도 야스쿠니 신사참배와 과거사 문제로 갈등이 증폭되어 왔다. 결국 고이즈미 총리가 대통령과 맞먹는 권력을 거머쥐게 된 이상, 외교적으로 가시적인 성과를 올릴 수 있는 방법은 북한과의 국교 정상화라고 볼 수 있다. 특히 그의 첫 평양방문이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뤄졌다는 점에서 북일 관계 정상화에 대한 그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고이즈미 총리는 일본 최고 정치지도자로서는 사상 최초로 평양 방문을 통해 본격적인 북일 수교 교섭의 물꼬를 튼 만큼 결실도 거두겠다는 개인적 야망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고이즈미 총리가 대북 관계 개선을 자신의 외교 이니셔티브로 삼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일본의 한 외교평론가는 “2002년 9월 17일 평양방문은 고이즈미 외교의 빛나는 금자탑”이라면서 “고이즈미 총리는 북일 수교를 통해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싶다는 미련을 여전히 버리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고이즈미 총리가 내년 중 북한을 다시 방문할 가능성도 있다. 이번 선거를 통해 드러났듯이 납치 문제에 대한 일본 국내 여론도 잠잠해 지고 있다. 만약 자신의 임기 중 북일 수교가 성사되거나 또는 그에 버금가는 관계 개선이 이루어진다면 고이즈미 총리로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수 있다.
윌리엄 브리어 미국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 연구원도 이번 총선의 압승으로 앞으로 북한과 일본의 관계개선이나 수교는 6자 회담의 진전과 긴밀히 맞물려 있는 사안이라고 지적했다. 때문에 고이즈미 총리는 6자 회담과 이번 합의한 공동성명의 이행과정 등을 세심하게 주목하면서 미국과의 적절한 조정을 통해 북한과의 관계 개선에 나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일본으로서는 북한과의 관계 정상화가 동북아의 국제질서 변화라는 거대한 틀에서 하나의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 동시에 그 틀에서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는 고리가 된다는 점도 간과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고이즈미 총리가 구상하고 있는 새로운 외교 정책이 과연 어느 쪽으로 향할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