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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호로고루성 (瓠蘆古壘城, 경기 연천)
위치 :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원당리
지정 : 경기도 기념물 제174호
지정일 : 2000. 6.12
국가사적 467호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임진강 북쪽의 현무암 수직단애 위에는 삼각형 모양의 평지성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유명한 ‘고구려 호로고루성’이지요. 이 호로고루성은 임진강 북안의 넓은 벌판 위에 우뚝 솟아 있어 마을 주민들은
'재미산' 또는 '재미성'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호로고루는 오래된 마을을 뜻하는 호로(瓠蘆)와 성을 뜻하는 고루(古壘)가 결합된 말로 고구려 말로 성(城)이나 골(谷)을 뜻하는
忽(홀)과 같은 의미로 추정된다. 지금은 성으로 들어가는 입구 부분의 성벽이 훼손되어 있지만, 고구려의 축성술을 잘 보여주는
거대한 성벽입니다.
▲ 일부 복원된 북안 호로고루성 성벽.
높이 10m, 길이 80m에 이르는 성은 잘 다듬어진 컴퓨터 본체 정도 크기의 돌 을 정교하게 쌓아 올려 만들었다.
평지에 쌓은 성은 높이가 10m이지만 삼각형 성의 나머지 2변에 해당하는 임진 강 단애는 20∼30m의 절벽으로
천혜의 요새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삼각형 성의 남벽이 162m, 북벽 146m, 성이 쌓여진 동벽은 93m로 호로고루 둘레는 400m 정도이고
성 내부 면적은 1천600평 정도에 이른다. 삼국시대 축성기법은 일반적으로 흙성(土城), 혹은 돌성(石城),
아니면 내부에 돌로써 쌓아올리고 외부에 흙을 덮어 쌓은 석심토축성(石心土築城)인데….
호로고루는 석·토성의 장점을 적절히 결합하여 축성이 용이하면서도 견고하게 쌓은 것이다.
이 호로고루성이 자리잡고 있는 지역은 삼국시대부터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습니다.
왜냐면 이곳은 장마철을 제외하고는 물의 깊이가 무릎 정도밖에 되지 않아 말을 타거나 걸어서 건널 수 있는 여울목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평양∼개성∼한양을 잇는 최단거리에 위치한 이 성은 말을 타고 임진강을 건널 수 있는 여울목에 자리잡고
있어 남한 지역에 있는 40여개의 고구려성에 비해 중요한 기능을 수행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다.
또 이 성을 발굴하는 과정에 성 안에서 가로,세로 각 4㎝ 정도의 금동불상이 발견됐습니다.
조선시대에도 이 지역은 '호로탄' 이라 하여 장단을 통해 개성으로 들어가는 주요 길목이었습니다.
아마도 호로고루성은 고구려가 남진하면서 구축한 전략적 거점이었던 듯합니다.
특히 이 곳에서는 수많은 고구려 기와편들이 발견되었는데, 이 역시 그동안 우리 남한에서는 그동안 매우 귀했던 유물들이라서
그 의미가 더욱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관련기사] [한국사 미스터리]고구려는 天子國 자처
고구려는 과연 천자국을 지향했을까. 그렇다면 백제·신라는 고구려의 제후국이었나.
호로고루를 비롯한 임진강·한강 유역의 고구려 유적들을 살펴보면 이상한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고구려 유적들이 한결같이 선(線)의 개념으로 분포돼 있다는 점이다. 고구려가 백제·신라를 치고는 점령지역을 정치적·행정적
으로 다스리지 않고 오로지 군사 루트만을 개척한 뒤 보루 위주의 성을 쌓았다는 걸 말해준다.
최종택 고려대 교수는 “미군의 이라크 공격때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영역확보 대신 보급선만 확보하고 진격한 것과 마찬가지”
라고 비유했다. 심광주 토지박물관 학예실장이 추정하는 고구려군 남하 루트는 이렇다.
475년 장수왕이 이끄는 고구려군은 개성을 거쳐 호로고루로 우회한다. 개성~장단~파주~고양 루트를 선택하지 않은 것은 1,500년 뒤의 북한군 남침때와 마찬가지 이유. 기마병 부대가 건널 수 있는 곳은 호로고루뿐.
그 뒤의 남하 루트는 두 가지. 감악산 남서쪽 323번 도로 루트이거나, 혹은 37번 국도를 따라 적암리쪽으로 우회한다.
368번 국도를 따라 의정부~상계동~아차산에 이른 뒤 한성백제의 도성인 풍납토성을 공격, 개로왕을 죽인다.
눈에 띄는 것은 한강유역 40여개 고구려 유적들이 대부분 둘레 400m 안팎의 소규모 보루들뿐이라는 점이다.
아차산 일대 보루의 경우 군사 루트를 따라 500~1,000m 거리에 하나씩 모두 20여개가 배치돼 있다. 반면 지안이나 평양,
황해도의 고구려 산성들은 수㎞~10㎞가 넘을 만큼 그 규모가 엄청나다. 신라가 삼국통일 뒤 한강유역에 이성산성과 아차산성,
대모산성 등 큰 성을 쌓고 주변지역을 행정적·정치적으로 지배한 것과도 크게 구별된다.
점령지역에 대한 고구려의 통치방법을 알려주는 단서.
광개토대왕 비문은 “(396년) 왕이~백제의 성을 포위하니 백잔왕이~무릎을 꿇고~영원히 고구려왕의 노객(奴客)이 되겠다고
하였다. 58성, 700촌을 획득하고 백잔왕의 아우와 대신 10인을 데리고 수도로 개선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중원고구려 비문
에도 “신라 매금과 세세토록 형제와 같이(如兄如… 弟) 상하가 화합하여~”라는 구절이 있다.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를 ‘노객’ 혹은 ‘형제국’으로 삼았다는 것. 또 점령지역을 지배하지 않고 인질과 노획물만 지니고 귀국했다
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심광주씨는 “만주일대를 정복한 대제국 고구려가 혹 황제의 나라를 칭하여 백제·신라를 조공국가
로 삼았을 가능성도 있다”고 추정했다. (경향신문 2004-3-9)
[한국사 미스터리](36)경기 연천 호로고루일대
“낚시터 바위 위에 비치는 깊은 밤 고운 달빛(釣臺暮月), 자지포 여울에서 고기잡는 어선의 등불(芝灘漁火), 자미성(호로고루) 위로 떠오르는 초승달(嵋城初月)….” 경기 연천 고랑포를 중심으로 한 임진강 절경을 흔히 고호팔경(皐湖八景)이라 한다.
현무암 대지가 오랜 강물의 침식작용으로 깎아지른 수직절벽(垂直絶壁)으로 변해 병풍처럼 펼쳐진 천혜의 절경.
이 서정적이고 평화로운 분위기를 잠시 잊어버리자. 1,500년 전 고구려·백제·신라의 국경지역이었고, 이제는 남북이 으르렁대며
싸웠던 6·25전쟁의 격전지였음을 떠올리자.
◇1,500년 전 국경, 지금은 분단의 상징이 되어=돌이켜보면 3국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4~7세기까지 고구려-신라는 16차례, 고구려-백제는 31차례(혹은 33차례), 백제-신라는 29차례에 걸쳐 피말리는 전투를
벌였다.
한성백제의 영역이었던 임진강 유역은 광개토대왕(재위 391~412년)·장수왕(재위 413~491년)대부터 고구려 영역으로 바뀐다.
고구려는 남하루트에 호로고루(瓠蘆古壘)를 비롯해 당포성, 은대리성 등 크고 작은 성과 보루를 축조하기 시작한다.
나당연합군이 고구려를 치던 662년(문무왕 11년)의 삼국사기 기록. “굶주림과 추위에 떨어 죽은 병사들이 헤아릴 수 없었다.
행렬이 호로하(瓠瀘河·호로고루)에 이르렀을 때 고구려 군사가 쫓아와서 강 언덕에 나란히 진을 쳤다. 신라 군사들은 적
(고구려군)이 미처 강을 건너기 전에 먼저 강을 건너 접전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백제·고구려를 제압한 통일신라는 당나라와 맞선다.
“673년, 당군이 북쪽 변경을 침범했는데 아홉 번 싸워 이겨 2,000여명을 목베었고, 호로(瓠瀘·호로고루)강에 빠져 죽은 당나라
군사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호로고루는 이렇게 삼국의 국경하천이었으며, 훗날에는 신라와 당나라가 양보할 수 없는
한판 승부를 벌인 곳이기도 하다.
왜 하필 호로고루냐. 무릎 정도밖에 차지 않은 이곳은 임진강 하류에서 배를 타지 않고도 건널 수 있는 최초의 여울목이다.
1950년 6·25전쟁 발발 당시 북한군 전차부대도 개성에서 문산쪽으로 직진하지 않고 20㎞나 우회, 호로고루 여울목을 도하했다.
◇고구려군의 군량미 창고=전쟁 이후에도 호로고루 일대는 오랫동안 민간인 통제선 북쪽 군사지역에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이 지역이 군사보호구역에서 해제됐다. 호로고루도 훼손되기 시작했다.
도로가 생기고 축사가 마련됐으며 버섯재배를 위해 포클레인이 동원되었다.
토지박물관 심광주 학예실장의 말. “인민군이 6·25때 정상에 쌓은 포대(砲臺)와 길다란 참호 때문에 일부 무너졌어요.
성벽도 10여년 전 마을 주민들이 뱀을 잡기 위해 중장비를 동원해서 무너뜨렸다는 겁니다.”
이 와중에서 다량의 고구려 기와편들이 쏟아졌다. 토지박물관이 98년부터 정밀지표조사에 나섰다.
뱀은 조사 내내 조사단을 괴롭혔다. 돌로 쌓은 산성에는 원래 온갖 뱀들이 우글거리게 마련이다.
돌 틈바구니는 뱀이 서식하기 좋은 환경이다.
“제가 본 뱀의 종류만 해도 한 50종류는 됐어요. 맹독성 뱀들도 눈에 띄었는데 조사 도중에 한 20여마리는 잡았습니다.”
그러던 98년 8월17일. 호로고루에서 동쪽으로 20㎞쯤 떨어진 무등리 2보루에 오른 조사단은 아주 획기적인 발견을 하게 된다. 임진강에 접한 깎아지른 단애의 단면토층에서 엄청난 양의 탄화곡물을 발견한 것이다.
“어마어마했어요. 가마니로 치면 수백가마니 될까. 탄화곡물과 함께 발견된 고구려 토기편이나 소토덩어리 등으로 미루어
이곳은 고구려 군량미 창고임이 분명했어요.”
그랬다. 고구려의 군량미 창고였던 것이다.
발굴단은 허문회 서울대 명예교수에게 탄화미 분석을 의뢰하는 한편 국립문화재연구소 등 3곳에 탄소연대측정을 의뢰했다.
그 결과 고구려 군사들은 쌀과 조를 섞어 먹었으며 쌀의 품종은 자포니카(Japonica)임을 입증했다. 또 쌀도 현미와 잘 도정된
백미를 적절히 섞어 먹었음을 알 수 있었다. 현미는 벼껍질만 벗긴 것이고 백미는 한번 더 잘 다듬은 쌀이다.
현미는 소화에 문제가 있고, 백미는 영양분이 파괴되며 보관상 문제를 안고 있다.
연대측정 결과도 흥미로웠다. AD 440~690년 사이, 즉 모두 5세기~7세기 중후반이라는 것.
고구려가 이곳을 장악하고 있던 시기와 겹치고 있다. 또 추론할 수 있는 것은 고구려가 당시로서는 고급 곡물인 쌀을 최전방
군사들에게까지 먹였을 정도로 부강했다는 점.
“당시에도 한반도 북쪽에는 논보다는 밭이 많았을 것이고 조밥을 많이 먹었을 겁니다. 그런데 고구려 군사들까지 조와, 당시로
서는 고급 곡물인 쌀을 섞어 먹었다는 건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는 쌀을 대량으로 수확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지요.”
허교수는 다른 가능성을 제시한다. “고구려 대제국의 땅인 요동반도 요하유역에는 대평야가 있었을 겁니다. 그 곡창지대에서
쌀을 대량으로 수확하지 않았을까요.” 이렇게 무등리에서 발견된 군량미 창고는 만주와 요동반도를 석권한 고구려 대제국의
욱일승천한 국력을 보여주는 상징이라는 얘기다.
토지박물관이 호로고루에 대한 조사를 계속 벌인 끝에 중요한 성과가 이어졌다.
◇호로고루엔 언제나 평화가 깃들까=우선 임진강·한강 유역의 40개 고구려 유적 가운데 가장 많은 고구려 기와가 발견됐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독특한 성벽의 축조기법이다. 바닥을 점토로 쌓아 올리고 중간부분에는 사질토로 판축을 한 뒤 그 양쪽을
거의 대칭으로 돌성을 쌓았다는 점. “삼국시대 축성기법은 일반적으로 흙성(土城), 혹은 돌성(石城), 아니면 내부에 돌로써 쌓아
올리고 외부에 흙을 덮어 쌓은 석심토축성(石心土築城)인데…. 호로고루는 석·토성의 장점을 적절히 결합하여 축성이 용이하면
서도 견고하게 쌓은 것입니다.” 성벽 동벽의 높이는 6~10m였다. 북쪽 말단부는 임진강의 단애면부에 연결되어 무려 30m의
급경사를 이루고 있었다. 임진강을 통해 적의 접근을 불허한 요새였다는 얘기다. 전체 성벽의 둘레는 길이 401m에 달했다.
호로고루는 지금도 전쟁의 기운을 머금은 채 1,500년의 고단한 몸을 지탱하고 있다.
숨막힐 듯한 긴장감과 적막감은 여전하고….
1㎞만 올라가도 온통 지뢰밭이고, 8㎞ 올라가면 북한군이 파놓은 고랑포 땅굴(1호 땅굴)이 있다.
호로고루엔 언제나 평화가 깃들 것인가. 〈조유전/고고학자〉[경향신문 2004-03-08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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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로고루 성지(瓠蘆古壘 城址)
원당리 지역에 드넓게 펼쳐져 있는 충적평야인 ‘한들벌’의 서쪽 끝, 임진강과 바로
인접한 현무암 천연절벽의 단애상에 위치한 강안평지성(江岸平地城)이다.
성의 동쪽 두지나루에서 임진강이 크게 곡류(曲流)하는 서쪽의 고랑포 나루터까지는
70리 장단석벽 중 일부가 병풍처럼 펼쳐져 있고, 이 성의 대안(對岸)인 파주시 적성면
장좌리에는 이잔미성(二殘眉城)이 위치하고 있다.
이 곳은 ≪三國史記≫와 조선 후기의 여러 지리지, ≪長湍誌≫ 등에 ‘䕯河’ ․
‘瓠瀘河 ’ ․ ‘瓠蘆灘’ ․ ‘瓢川’ ․ ‘瓢蘆河’ ․ ‘匏蘆古壘’ 등의 임진강과 관련된 다양한 명칭으로
표기되어 있어 호로고루의 어원을 ‘임진강 호로탄(瓠蘆灘)의 위에 있다 하여 ......’
또는 ‘이 부근의 지형이 표주박․조롱박과 같이 생겼다 하여 ......’라는 한자 풀이식의
유래로 인식되고 있으나, 원래 호로고루의 뜻은 ‘강 유역의 성(城)’이라는 의미로 쓰인
북방계 여진족어(女眞族語)인 ‘홀고루’가 연철된 ‘호로고루’가 세월이 흐르면서
엉뚱하게도 여러 가지의 한자 지명으로 음차(音借)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성은 현재 임진강 유역에 분포하고 있는 마전리 당성(미산면 마전리)
은대리 토성(전곡읍 은대3리) ․ 금파리 성지(파주시 파평면 눌로리) 등의
강안성들과 자연적 입지조건과 축조방식이 동일한 원추형 평면의 성으로
성벽이 쌓여 있는 동쪽을 제외한 나머지 3면은 20m에 가까운 수적절벽으로 둘러 있는
천혜의 요새이다.
토석혼축(土石混築)으로 축조된 일자형(一字形) 성벽의 장축은 북동 ↔ 서남향이며
길이 약 80m, 너비 29m, 높이 약 10m 규모에 오랜 세월동안 붕괴가 계속 진행된 이유로
인하여 전체 외형은 큰 동산과 같은 형태로 남아 있다. 문지(門址)는 도로가 개설되어
있는 성벽의 남단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 곳에 성벽의 축조기법을 알 수 있는
단면이 노출되어 있다.
가장 이른 시기에 축조된 성벽의 중심부는 460cm의 두께로 흙을 이용하여
판축(板築)하였고(백제 초기 기법), 그 다음은 판축부 내 ․ 외 양면을 협축법(夾築法)으로
다시 돌로 쌓고 자갈을 다진 380cm 두께의 고구려 기법이, 그 후 세 번째(180cm)와
네 번째(150 ~ 250cm)의 보축은 신라에 의해 축조되었는데 기저부에는 외벽기단보축
구조물이 삼각형으로 축조되어 외벽을 보강하고 있다.
석재는 방형으로 다듬은 현무암과 강돌, 사암을 이용하였다.
성의 내부는 넓은 평지를 이루고 있으며 중간 지점에 있는 1.2m 높이의 단애를 기준으로
2단으로 나뉘어 진다. 성벽과 성의 서쪽 꼭짓점까지는 150m거리이다.
이 성은 삼국 초기부터 지정학적인 이유로 성의 주인이 여러 번 바뀌는 격전장이었던
때문인지 성의 내부와 성벽에서는 삼국 ~ 조선시대에 이르는 무수히 많은 유물과 석재가
산재해 있는데, 와편은 굵은 격자문과 승석문이 시문된 전형적인 고구려 적색기와가
대부분을 차지하며 백제․신라계의 와편과 어골문(魚骨文) ․ 집선문(集線文) 등이 시문된
후대의 와편들도 일부 보인다.
토기는 시대가 앞선 연질, 경질편들과 고려 옹기, 조선 백자편들도 소량 수습되고 있으며
삼국시대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휴대용 숫돌도 수습되었다.
호로고루 성지는 ≪三國史記≫․≪大東地志≫ 등에 언급되고 있는 고구려, 신라, 당
거란, 말갈과의 전투기록과 일제 강점기 때인 1916년 조선총독부의 조사, 최근
1991년에 실시된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의 ‘군사보호구역 내 문화유적 지표조사’등의
학술조사를 통하여 삼국의 세력판도와 신라의 삼국통일 과정에 중심무대였던 이 성의
역사 지리적 중요성과 함께 성곽축조양식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는
관방유적임이 재 증명되었다.
또한 삼국 ~ 조선조 광해군 때까지 옛 장단현(長湍縣) 이 위치했던 1km 북방의
장남면 자작리 고읍동과 인접해 있는 것으로 보아 예부터 전란 시에는 장단현의
읍성(邑城) 역할을 해왔을 것으로도 추정되는 성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