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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th Monday January AM 11: 00 노회 신년하례회
목자 앞에 양인가 염소인가?
시23:1~6
지난 한 해에 어려운 일들로 인해 우리 노회원들의 마음에 상처를 받기도 했으나 하나님께서 은혜 가운데 인도하여 주신 것이 감사합니다. 그리고 금년 한해도 하나님께서 각자의 목자가 되시고 노회에 목자가 되신다면 우리 노회가 형통하리라 믿어 이 말씀을 여러분에게 드리게 되었습니다.
제가 주일학교를 다닐 때 찬송을 통해 시편 23편을 외웠습니다. 여러분들도 시편 23편이 익숙할 것입니다.
후에 신학교에서 시편 23편을 신학적으로 배우게 되었습니다. 엘로힘의 하나님 아도나이 하나님, 여호와 = 신성하고 가장 탁월한 하나님이 목자라는 말에 시편을 더 깊이 안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목회 35년이 되어가는 지금 이 시간에 시편 23편을 다시 배우고 있습니다. 제 인생을 돌이켜 볼 때 저는 시편 23편을 알고 외웠다고 하지만 하나님 앞에 양이었는지 생각한 것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다윗은 아버지의 양을 치면서 목자의 생활을 하며 시편 23편을 기록한 것을 보아 저는 목자와 양을 두고 간접경험을 하기 위해 목자가 본 시편 23편이라는 책이 참고가 되었습니다.
동 아프리카 출신 필립 켈러목사님은 어릴 적에 양을 치던 경험을 되살려 '목자가 본 시편 23편'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은 78년도에 한국어로는 번역되었습니다. 그 책이 출판되기가 무섭게 35만부가 팔렸다고 합니다.
다윗의 목자라 하니 그 책으로 다윗과 같은 목자의 배경을 간접 경험을 할 때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함으로 시편 23편을 기록했으리라 믿습니다. 다윗이 묵상한 그 율법과 예언하는 복음으로 본 시편을 생각하고자
목자 앞에 양인가 염소인가 라는 말씀으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첫째 : 다윗의 목자이신 여호와
다윗은 양을 치는데 생명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곰이나 사자가 양을 해치거나 물어 가면 뒤 쫓아 가서 그 사자나 곰을 때려죽이고 양의 생명을 구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보호가 없으면 마귀에게서 절대로 보호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다윗의 목자이신 여호와께서 우리 모두의 목자요 우리의 각자의 목자로 믿습니다.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을 양의 생사를 잘 보살피는 목자로 비유한 것을 믿습니다.
이 말씀을 따라 적절한 수수께끼로 비유하고자 합니다.
나이든 사람이 무거운 짐을 실은 손수레를 앞에서 끌었습니다. 젊은 사람은 그 손수레의 뒤에서 밀고 가고 있었습니다. 뒤에서 수레를 밀고 가는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앞에 수레를 끌고 가는 사람이 누구십니까? “예” 우리 아버지입니다. 그리고 난 후 앞으로 가서 수레를 끄는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뒤에 미는 사람이 아들입니까? 아니오, 우리 아들이 아닙니다. 그러면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어떤 관계일까요? 예 맞습니다. 딸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에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목자라고 하는 사람들을 두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양으로 인정하실까요? 그 중에는 양도 있고 양과 비슷한 염소도 있을 것이며, 양의 가죽을 둘러 쓴 이리도 있을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하는 자들 중에 바리새인들은 입으로 '여호와는 나의 목자' 라고 고백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양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요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나는 하나님의 양이라고 고백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고백을 받아 주실지 대해 생각해 보셨습니까? 유대인들은 지금도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는 너희 목자가 아니고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지 않으면 여호와께서 그들의 목자가 되어주실 수 없습니다.
수많은 성도들이 이 말씀을 읽으며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고 할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향하여 '그래 내가 너희들의 목자이고 너희들은 나의 양이라'고 응답하시는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떠한 사람을 두고 '나는 너희의 목자이고 너는 나의 양이라' 하시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양인 다윗
하나. 하나님께 양이였던 다윗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가 되시고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양이 되기 위한 기준이 있습니다. 그 기준을 알려면 하나님의 어린양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그리스도와 같은 형상을 가졌다면 우리는 분명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양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옛날 신학자 박형용 박사는 믿음은 바라는 것이고, 주리고 목마른 심정이라고 했습니다. 이 시편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이기를,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양이 되고 싶어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23편에 나오는 목자는 하나님이시고 양은 유월절 어린양,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요한복음에는 우리 주님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양이라 할 수 있는지는 예수님과 우리를 비교함으로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한다는 의미에서 양으로 상징됩니다. 그래서 주님의 별명은 '아멘이고 충성된 증인이시고 창조의 근본'이십니다.
(계 3: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주님은 세상 죄를 담당하시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어린양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양일까요? 칼뱅은 구약예언서가 율법을 설명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율법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사야는 자신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로 가는 것이 아니고 거역하여 다른 길로 갔다고 하면서 이사야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양이라고 하지 않고 세상을 따라가는 양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도 이사야처럼 하나님께서 순종하는 양이 아니고 세상을 따라가는 양인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육신의 생각을 따라 사는데 익숙하여 습관과 굳어진 성품에 따라 세상을 향해 나가곤 합니다. 범죄를 달콤히 여기며, 눈으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마음으로는 멀어져갑니다. 솔로몬은 우리의 본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잠 9:17) 도둑질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맛이 있다 하는도다
우리는 육신의 생각으로 하나님을 등지고 세상을 향해 어리석게 따라가는 양입니다. 세상에 대해 순한 양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향해 따라가고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지기 때문에 하나님의 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어린양은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상징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양이 되기 위해서는 주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고 죽어야 합니다. 우리 속에서 그리스도만이 살아 역사하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양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본성을 십자가에 못 박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게 될 때 하나님의 양이 된 것입니다.
사무엘이 이새의 집에 이스라엘의 왕이 될 자를 찾아 기름을 붓고 축복하고자 할 때 형들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홀로 양을 쳤습니다. 그는 양처럼 자기의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순종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생각대로 산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여호와께 맡겼습니다.
다윗은 스스로 왕으로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헤브론에서 7년 동안 지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을 다스리는 왕으로 세울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양으로 순종하였습니다. 때가 되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을 것을 믿었습니다.
(삼하 5:5) 헤브론에서 칠 년 육 개월 동안 유다를 다스렸고 예루살렘에서 삼십삼 년 동안 온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렸더라
다윗은 전쟁을 나갈 때도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성전을 건축할 때도 여호와께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게 하시자 양으로서 하나님 앞에 순종하였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모든 생각을 모두 버리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양 이었습니다.
우리의 본성의 흔적이 있어 세상을 따라가는 양이지만, 다윗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양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죽고 오직 주님이 내 안에 살아 역사하셔야 하나님의 양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우리 모두 성령으로 감동하여 시편 23편을 노래할 때 육신의 생각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시길 원합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하나님의 양이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고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가 살아 역사하셔야 합니다. 그러할 때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고 나는 그의 사랑받은 양이 되심을 믿습니다.
둘. 세상에 염소였던 다윗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양이 되기 위해서는 세상을 향해 염소가 되어야 합니다. 염소의 특성은 고집이 세고 저항하려 하는 것입니다. 비록 양과 생김새가 비슷하지만 순종하는 양과 달리 염소는 주인의 명령에 어긋나려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는 양과 같이 순종하여야 하지만, 세상을 향하여서는 지독한 염소처럼 살아야 하나님 앞에 양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가시는 주님을 따라 세상을 향해 염소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면에서 양이라고 하면 세상의 유혹에 대해서는 절대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저항하신 우리 주님입니다. 세상 넓은 길을 가지 않고 제자들이 반대하고 아무도 환영하지 않는 좁은 길,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면에서 세상을 향한 면에서는 염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대달력 7월 10일에 염소 두 마리를 준비하였다가 제비를 뽑아 대 속죄일에 제사를 드리고 한 마리는 산체로 광야에 버렸습니다. 이는 세상에서 버림받은 주님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아사셀 염소라고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아사셀 양이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 양이라는 말입니다.
아사셀은 버리다. 제거하다는 뜻을 가졌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주님을 귀신의 왕이라 부르며 십자가에 버렸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속죄하시기 위해 조금도 굴하지 않는 염소처럼 세상에 굴복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 주장하셨습니다.
(레 16:10) 아사셀을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는 산 채로 여호와 앞에 두었다가 그것으로 속죄하고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낼지니라
주님은 세상과 조금도 타협하지 않습니다. 바리새인들과 협상하지 않고 호리(毫釐)라도 용납치 않았습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할 때 주님은 베드로를 칭찬하고 ‘네가 반석위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리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칭찬을 들었던 베드로라 하더라도 주님께서 십자가 지실 수 없다고 말하자, 단호하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라’고 하시면서 물리치셨습니다.
다윗은 이 같은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종이고 양으로서 순종하였지만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를 향해서는 끝까지 싸워 하나님 앞에 굴복하게 했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이 자기를 죽이려 쫓아 올 때에도 하나님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이유로 사울 왕을 향해 대적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숨은 동굴에 사울 왕이 볼일을 보러 들어왔을 때에도 다윗은 기름 부음 받은 하나님의 종, 사울 왕을 해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순한 양이지만 죄에 대하여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아사셀과 같은 염소의 고집으로 세상과 타협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블레셋 아기스 왕에게는 침을 흘리고 미친체 하며 생명을 보전하고자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그런 다윗의 행위를 보고 조롱하였습니다.
아말렉 사람이 다윗에게 사울 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자 다윗은 탄식하였습니다. 사울 왕의 사망소식을 듣고 저녁때까지 슬퍼하고 금식하였습니다. 다윗이 슬픔으로 탄식하면서 애가를 지어 부른 것이 사무엘하 1장에 나옵니다.
사울 왕의 사망 소식을 전한 아말렉 사람은 다윗을 향해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아말렉 사람은 자신의 사울 왕을 죽이고 왔다고 했습니다. 자신이 사울 왕을 죽이고 그의 머리에 있는 왕관과 팔에 있는 고리를 벗겨서 다윗에게 가져왔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다윗은 진노하여 아말렉 사람을 죽였습니다.
이 얼마나 염소처럼 꽉 막힌 사람이 아닙니까? 이것은 다윗이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종을 비웃거나 조롱하거나 죽인 일을 용납치 못하는 세상을 향한 염소였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는 양처럼 순종하였지만 세상에 죄악에 대하여서는 끝없이 저항을 하고 그 죄를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하나님 앞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나는 그의 양이라고 노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양이 아니라 염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나의 목자라고 고백하는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양이어야 하는데 도리어 하나님 앞에 염소입니다. 염소는 주인을 향하여도 거역하여 받거나 고집을 부립니다. 우리는 육신의 생각으로 하나님을 거역합니다. 우리가 가진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고 그 법에 굴복하지 않게 합니다. 우리는 육신의 생각으로서 하나님을 거역하는 완벽한 염소인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익숙해져서 믿음을 말하면서 마음으로는 세상을 따르고 있습니다.
(롬 8:6-7)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하셨는데도 우리는 주님을 거역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어주셨는데도 우리는 주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고가기를 원치 않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원수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지적한대로 하나님 앞에 원수 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양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육신의 생각으로 가득 차 하나님과 원수 되고 또한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할 수도 없는 염소입니다. 우리는 전적으로 부패한 염소와 같은 죄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고백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양이 되고 세상에서는 염소가 되는 예언의 비밀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양입니다. 양이라도 보통 양이 아니라 선두양입니다. 그 선두 양이신 주님의 뒤를 따를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양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길로 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 없이 양일 수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를 따를 때, 믿음으로 순종할 때 하나님의 양이 되는 것입니다.
(요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모세는 이 세상에 아주 어려운 시기에 태어났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사내아이는 죽이라는 왕의 명령이 있었습니다. 모세는 태어나자마자 죽을 운명이었습니다. 그의 부모는 모세를 믿음으로 석 달 동안 길렀습니다. 그 믿음은 오직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히 11:23)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
믿음이란 자신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 하나님이여 우리를 도와주시고 지켜주시옵소서 주께서 나를 돌아보시지 않으면 음부로 내려가겠나이다.’ 믿음은 이처럼 바라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은 목자로서 모세의 생명을 지켜주신 것을 믿습니다.
선하시고 사랑과 인자함이 풍성한 목자이신 하나님은 모세를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셨습니다. 모세를 광주리에 담아 나일강에 띄워도 하나님은 모세의 목자가 되어서 지켜주신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호화선이었던 타이타닉 호도 인간의 자만을 비웃듯 빙하와 충돌하여 침몰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세를 담은 손바닥만 한 광주리는 하나님께서 보호하시어 가장 안전한 곳, 공주의 손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다윗은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보며 자신이 양을 치던 것과 비교하여 율법을 설명한 시를 지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목자시구나! 그 분께서 나를 지켜주시고 보호하시는구나! 라고 성령의 감동으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라고 한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매듭짓는 말씀
우리 하나님은 우리 목자 되시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의 양이 될 수 없습니다. 선두 양이신 독생자를 믿고 십자가를 지어야 합니다.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이기게 된 것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여호와 하나님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하나님 앞에 순종할 때 주님께서 부족함 없이 우리 한성노회를 인도해 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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