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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현(集賢)이란 현명한 지식과 생각을 모은다는 뜻이고,광제(廣濟)는 넓게 백성을 구제한다는 의미이다.
<우리나라의 역사에는 최고의 창조적 지식의 시대가 있었는데,바로 조선조 세종대왕 무렵이 아닌가 한다.
세종은 개인의 창조적 지식을 총 집결시켜 국력을 향상시킬 필요를 느꼈다.
각 분야의 인재를 한 데 모아 다양한 지식을 융합하기 위해 집현전을 설립 용광로의 역활을 담당케 하였다.
세종은 이미 개인이 아닌 집단의 창조적 능력을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
그러한 현자(賢者)들의 산인 집현산과 광제산을 이리저리 세 번째 오른다.
<홍지마을~광제산 ☞ http://blog.daum.net/bok-hyun/391> , <생비랑면 집현산 7봉 ☞ http://blog.daum.net/bok-hyun/374>
남덕유에서 분기된 진양기맥은 숨가쁘게 달려와 산청과 진주의 경계를 그으며 남강댐에서 지친 몸을 푼다.
산의 고장인 산청군에서는 집현산쯤 그리 대수롭지 않아 슬며시 밀어 놓았지만 진주시에선 여러 경로의 산길을 의욕적으로 뚫어 놓았다.
봉우리가 일곱 개나 되어 집현칠봉이라 부르기도 하는 이 산은 이 고장 출신 전(前)명석면장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다고 한다.
진주쪽 대표적인 코스는 광제산(廣濟山)과 집현산을 잇는 원점회귀 코스이다.
나는 몇 해 전 알바의 추억도 있고 또 광제서원도 둘러볼 요량으로 따라 나섰다.
오늘 아침까지 내린 봄비는 산행내내 이어지는 솔가리 푹신한 솔숲길을 한층 더 상쾌하게 하여준다.
<소나무는 우리 민족에게 유달리 친근한 나무.
금줄에 솔가지를 매달고 태어나서 송화가루로 허기를 채우고 송기를 벗겨 먹으며 자랐다.
솔가리를 긁고 소나무 장작으로 밥을 해 먹었으며 송림에서 머리를 식히고 솔밭에서 뒹굴었다.
죽어서는 소나무 관에 들어누워 소나무가 지켜주는 산에 묻히는 것이 우리들의 이상적인 삶이 아니겠는가?>
. 산청군 생비랑면의 원점회귀 '산&산' 개념도
진양기맥의 끝자락인 광제산까지 장장 160여km의 개요도.
주차장에서 보면 좌측의 홍지소류지 위로 낮은 산자락이 내려앉아 있다. 진입로인 낮은 고개마루 아래에 2층 황토맛집이 보인다.
주차장 한 켠의 광제산 봉수대 안내판을 따라 진입.
대형주차장 입구의 광제산 표석.
등산로 안내도와...
명석 산길마라톤코스 안내도를 일별하고...
들어간다.
황토맛집을 우로 쳐다보며...
도로에서 바로 들어오는 길을 만나...
본격 입산을 한다.
솔숲길이다.
나는 온통 광제서원 진입로에 안테나를 곧추 세우고 있는데...
이 지점(내려갔다 오는데 5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아무런 안내판이 없이 좌로 비스듬히 내려가는 오솔길만 보이지만 바로 10미터 위에 광제서원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진주 광제서원(晉州 廣濟書院)
처음에 홍복사(洪福寺)이던 것이 홍지암(洪池庵)으로 개칭(1747년) 되었으며 홍지암 상량문에 1891년 중수한 기록과 함께 모원재(慕遠齋)로 개칭되었다.
지금은 남양 홍씨 문중에서 재실로 사용하고 있으며 1976년 영남유림에서 광제서원으로 격상시켜 매년 음력 3월10일 고려 은청광록대부상서 홍의(洪毅)와
고려 금자광록대부 수사공상서보문각태학사 홍관(洪灌) 양위(兩位)에게 춘향(春享)을 올리고 있다.
건물 6동 모두가 각각 특색 있는 건축물로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고 고려 초기 건축양식을 대표할 수 있는 건축물로 보여 보존 가치가 높다.
광제서원은 정면 5칸의 맞배지붕이고, 경충사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아름다운 형태를 간직하고 있다.
진입로의 입구에는 남양 홍씨 인물들 중 이 지역에 임관되었던 인물들의 비가 세워져 있어 광제서원의 연원이 오래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의 홍준표 경남지사도 지난 자치단체장 선거를 앞두고 이 곳에서 제례를 한 바가 있다. -진주시 광제산로 685번길 116(명석면 계원리 543)-
화남문(華南門)은 굳게 잠겼다.
잠긴 문을 에둘러 보며...
까치발을 하고...
내부를 기웃거려 보니 광제서원 현판이 보이고 그 좌측으론 존성재(存誠齋)가 비스듬히 보인다.
성(誠)자인가? 식(識)자인가?
더 당겨보니 정성을 다한다는 '성(誠)'자가 확실하다.
서원 안을 대강 둘러보고 돌아서는데,마치 새소리 같기도한 개구리 울음이 요란하기 짝이 없다.
바로 서원 앞의 작은 웅덩이에서 울어대는 개구리들의 아우성이다. 아직 경칩(驚蟄,3월 6일)도 지나지 않았는데...
완죤 개(개구리)판이다. 발정기를 맞은 개구리들의 한바탕 성유희(?)가 벌어지고 있었다.
금방 다시 능선으로 되돌아와 광제서원 50m 안내판을 돌아본다. (아까는 저 10m 아래에서 들어갔지만...)
친절한 안내판.
푹신한 육산의 솔숲길에서 암문(岩門)을 만난다.
트인 산길에서 우측으로 집현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윽고 올라선 광제산 봉수대.
광제산봉수대(廣濟山烽燧臺)
봉수대는 횃불과 연기를 이용하여 급한 소식을 전하던 옛날의 통신수단을 말한다.
높은 산에 올라가서 불을 피워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광제산 봉수대는 조선 세종(재위 1418∼1450) 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동래에서 서울 목멱산(지금의 남산) 중앙봉수에 이르는 봉화선로를 연결하고 있다. 이곳 봉수대는 남쪽으로는 망진산 봉수대와 북쪽으로는 단성의 입암산 봉수와 연결되어 있었으며 일부 흔적만 남아 있는 것을 2004년 진주시가 2억여 원을 들여 원형 그대로 복원해 놓았다.
백성을 구제하는 데(광제 廣濟)는 덕(德)만한 것이 없을 터이니 소재한 덕곡리(德谷)라는 지명이 예사롭지 않다....
조망을 돕는 '전망도'가 세 개나 세워져 있다.
위의 전망도와 비교를 하면 쉽겠다.
지리산 방향.
지금 극성을 부리는 극심한 미세먼지 탓인가,시계가 사진만큼 맑지가 못하다.
그래서 살짝 당겨보았더니 오른쪽 멀리 천왕봉이 희미하게 가늠된다.
세 방향으로 조망도가 세워져 있다. (아래 사진과 비교하면...)
좌측 우리가 진행할 집현산과 나뭇가지에 가려진 의령 자굴산의 희미한 실루엣.
봉수대의 이정표.
다시 지리산 천왕봉과 웅석봉 그리고 둔철산과 황매산까지 짐작으로 짚어본다.
봉수대를 나와 돌담을 에두르면 만나는 두 개의 낡은 이정표.
(좌측에 보이는 이정표는 진양기맥이고 집현산은 저 뒤에 보이는 이정표가 가리키는 데로 가야한다.)
위 사진의 뒷쪽에 있는 이정표.
약샘 갈림길이다.(우리는 처음에 이리로 올라올 계획이였다.)
약샘과 홍지주차장 방향의 이정표와...
같은 지점의 또 다른 이정표.
200여 미터 더 진행하다 만나는 이정표.
산행내내 솔숲으로 이루어진 육산의 푹신한 산길을 걷는다.
일행들을 만나 함께 식사를 하고 반주도 한 잔 곁들인 후 내율고개 임도를 만난다.
우리 뒷쪽(100여 미터) 고개마루가 주차장이 있는 내율고개이고,우리는 조금 아래쪽으로 임도에 내려섰다.
(내려선 임도에서 우측으로 100여 미터 내려가서 임도를 버리고 좌측으로 산길을 갈아탄다.)
산길을 갈아타자마자 만나는 오래된 무덤군.(석축을 보니 마치 고분을 보는 듯하다.)
등로 우측으로 임도를 수차례 만나며...
트이는 곳에선 집현산이 바라보인다.
우측 아래론 신기저수지가...
저수지 위의 절개지 뒤로 '근교산'개념도상의 하산능선이 우로 뻗어 내린다.
삼각점이 있는 봉우리는 보현봉이라는 이름이...
그리고 계속 이어지는 솔숲길.
이윽고 다다른 청현고개(청현재).
청현재의 이정표.
또 다른 이정표.
또 다른 이정표.
정욱씨는 그만 내려갈 생각인 듯 뒤에서 뱅뱅 맴돌더니...
깔딱고개를 힘들게 오르자 정욱씨가 다시 올라온다고 한다.
이정표
'가선대부호조참의김해김공지묘'를 지나서...
능선에 올라 붙으니 왼쪽 눈가는 곳에 집현산 정상이 보인다.
조금 더 진행하면 삼면봉 못가서 왼쪽으로 산사면길이 집현산쪽으로 희미하게 나있다. 우리는 그 길을 선택하여 삼면봉을 오르지 않고 집현산으로 질러간다.
그래서 만나는 일명 상여바위인 집현산 정상엔 데크가 설치되어 있다.('산&산'은여기부터 1봉이라 하고,어떤 이는 여기를 맨 마지막 7봉이라고 하고...)
집현산의 이정표.
이 곳은 행정구역상 산청군이다.
전설에는 천지개벽때 홍수가 나 집현산에 물이 차올라 집채만큼만 남아 있었다고 집현산이라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이다.
그런 전설은 광제산도 예외가 아니다. (광주리민큼 남았다고 광제산이라 한다나,우짠다나?)
꽉 막힌 정상에서 한동안 머물다...
2봉인 삼면봉(562m,명석면,신안면,생비랑면)으로 돌아온다.
삼면봉의 이정표.
무너미재다.
또 다른 '믿거나 말거나'에 의하면 천지개벽때 물이 넘었다고 '물넘이재'였단다.
무너미재의 이정표 #1
이정표 #2
이정표 #3
그리고는 3봉(526m)인 삼거리를 오르지만 따라오는 일행들은 도마뱀 고리 잘리듯 잘려 나갔다.
3봉 삼거리의 이정표.
그리고는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4봉(548m)을 다녀온다.
4봉엔 정상석이 두 개가 있다.
집현산 최고의 전망대다.
제단이 설치되어 있고 조망이 좋아 산불감시가 용이하다.
왼쪽 나뭇가지 사이로 한우산 자굴산이 보이고 우측 끝으로 월아산(?)
신기저수지 뒤의 능선자락이 동전마을 버스정류장으로 내려가는 능선이고, 그 뒤로 쭈욱 뻗어내려간 능선이 내가 내려갔던 능선이다.
뒤로는 역시 월아산인 듯.
북쪽으론 황매산도 보인다. 그리고는 다시 U턴하여 정자가 있는 3봉(삼거리봉)으로 되돌아와서 하산을 서두른다.
하산 중에 만나는 이정표 갈림길.
임도에 내려선다.
임도 삼거리의 새로 난 비포장 임도 우측 산아래로 내리막 산길이 나 있었지만 나는 비포장임도를 300여 미터 걷다가 우측 산길로 접근을 하였지만 여의치가 않았고...
임도는 자꾸만 좌로 휘어는가싶더니 결국엔 이렇게 우측 낮은 산자락의 능선으로 올라선다.
우측 능선으로 올라서는 길.
능선에 올라서면 반듯한 산길을 만나게 되고 이내 만나는 갈림길에선 우측 사면길(좌측 능선길X)을 선택한다.
이 후 능선의 우측으로 산허리를 돌아 내려가다 다시 갈림길을 만나면 우측으로 갈아타야 한다.(특별한 이정표는 없지만 산길은 너무 좋다.)
한동안 우측으로 능선을 어깨에 짊어지고 산허리를 감아돌다 우측의 능선을 넘어선다.
그제서야 잡목사이로 홍지마을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내려서서 내가 내려온 능선을 올려다보니 비닐하우스의 뒤로 볼록한 작은 능선이 동전마을(구배골)버스정류장이고,그 뒤로 크게 그리는 능선이 내가 내려온 능선인 듯(?)
주차장엔 우리 버스가 보인다.
돌아본 내려온 길(비석이 있는 묘지)
작은 다리를 건너 다시 돌아본 날머리.
이제는 주차장에서 올려다 보는 날머리.
<주차장 화장실의 벽면에 붙은 액자사진>
보국충석(報國忠石)이란 명석각에 보존되어 있는 두 개의 돌을 일컫는 말이다.
보국충석은 자웅석(雌雄石) 또는 운돌이라고도 하는데 남자의 성기와 여자의 족두리를 닮은 두 개의 돌이다.
이 돌에 얽힌 사연은 이러하다.
온 백성이 동원된 진주성(고려 말) 정비때 집현산에 있던 이 두 돌도 진주성의 돌이 되고자 명석면쯤 왔을 때 한 스님이 이미 공사가 끝났다고 하자 이 두 돌은 진주성의
돌이 되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며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며 크게 울었다.
이에 감복한 승려가 이 돌을 '보국충석'이라 명명하고 아홉 번 합장배례했다고 한다.
그래서 생긴 마을 이름이 돌이 울었다고 명석(울 鳴,돌 石)면이 되었다.
<자료 사진> 명석각을 답사치 못하여 이렇게 자료사진으로 대신한다.
- 상 략 -
인고의 세월 속에 ~
그 겨울의 찬바람을 버텨내고
목 타오르는 작열 속 기근에도 살아온 질긴 생명~
뒤틀린 너의 몸동작에서
쓰라린 고통의 솔잎 향기가 나고 ~
수백년 내려온 묘지기 너는~
증조의 증조가 묻히는 걸 지켜본 목격자~
바람이 불때마다 너의 울음소리는
우~ 우~ 태고의 소리를 내고
조상의 뼈마디 삭는 소리가 들리는구나 ~
- 중 략 -
낙엽되어 떨어지는 솔잎 밑에
가난한 소년이 갈쿠리 긁어대던 소리가 들려오고
정겨운 흙 부삽 속에서
가난한자의 군불로 온기를 피우는
어린아이들의 즐거운 웃음소리가
귓전을 때리는
솔향기 그윽한 날에 ~
<sungodcross>
첫댓글 지난 2/27에 광제산 집현산을 갈까하다가 못간 아쉬움을 님의 글로 대신합니다. 감사드리며 다음 기회를 도모하려 합니다.
녜,그랬었군요. 담 기회를 기다려봅니다.^^
@산마루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