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생수습위원회 부위원장 겸 내무위원장
증 언 자 : 황금선(남)
생년월일 : 1952. (당시 나이 28세)
직 업 : 무직 (현재 사업)
조사일시 : 1989.11
21일 도청 앞 발포를 목격
5월 18일에는 실내체육관에서 황씨 종친회가 있었다. 종친회가 끝나고 산수동에 사는 친구집에 들렀다가 오는데 시내가 어수선했다. 계림동파출소 앞에서는 투석전이 벌어졌는지 주위가 지저분했지만 별 관심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19일과 20일은 시위에는 참여하지 않고 이곳저곳 돌아다녔다.
21일 10시경 걸어서 충장로 입구까지 나가보았다. 계엄군들이 도청 앞의 '신성 사무기' 앞 의자에 앉아 있고 금남로 거리는 시민들로 꽉 들어차 있었다. 헬기에서는 뭐라고 선무방송이 나왔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시민과 계엄군이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앞에 있는 시민들은 도로에 앉아있고 뒤에는 서 있었다. 그때 시민 대표들이 협상을 하고 있다고 했는데, 지금 보니 '전옥주'가 협상하는 시간이었던가보다. 그때까지도 나는 나서지 않고 가만히 보고만 있었는데 시민들이 계엄군을 밀어붙이려는 기세였다. 양쪽의 간격이 너무 떨어져 있어 저런 상태에서 충돌이 일어나면 군인들이 총을 쏠 확률이 높아 보였다. 다급한 생각이 들어 사람들을 앞으로 당기고 노래도 함께 부르고 있었다. 시민들 뒤쪽에 군용 트럭이 보이길래 사람들을 비키게 하고 금남로에 군용 트럭 다섯 대를 세웠다. 시민들의 주장은 평화시위를 할 수 있도록 도청 앞 광장을 비켜달라는 것이었다. 내가 계엄군 중령에게 다가갔다.
"사람들이 저렇게 많은데 여기서 버티고 있으면 어떻게 하란 말이오? 피해가 많을 텐데 좀 비켜주시오."
"잠깐만 기다리시오. 그러잖아도 지금 상관이 철수를 건의하고 있소. 못 믿겠거든 당신이 직접 통화해 보시오."
중령도 당황해 어쩔 줄 모르며 말했다.
그때였다. 시민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갑자기 총소리가 울렸다. 처음에는 공포탄이겠거니 생각했는데 도로의 시민들이 여기저기에서 쓰러졌다. 나는 YMCA 건물 체육관 쪽으로 해서 충장로로 빠져나왔다. '나라사진관'의 친구에게 갔다. 그곳에서 라면을 끓여먹고 있는데 시민들의 손에도 총이 들려 있었다. 큰일이다 싶어 광주백화점 앞으로 나가보았다.
군인들은 도청 앞 분수대에서 '무릎 쏴' 자세로 시민들을 겨냥하고 있었다. 정확히 조준하고 있다가 얼굴이나 손만 내밀어도 쏴버렸다. 사상자가 많이 나겠다 싶어 병원으로 가보았다. 적십자병원 앞에서는 시민들에게 헌혈을 호소했고, 배에 총을 맞은 여자가 실려오기도 했다. 전대병원 옥상에서는 기관총을 설치하고 있었다. 응급실까지 들어가긴 했지만 환자를 확인해 보지는 못하고 다시 시내로 가기 위해 지프차에 올라탔다. 처음엔 서너 명이 함께 타고 있었는데, 중간에서 내리기도 하고 운전수는 그의 아내를 만나 가버리는 바람에 나 혼자 남게 되었다. 시내정찰이나 돌아야겠다고 생각하고 광주공원, 유동, 산수동 등지를 돌아다녔다. 시내에는 이미 군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밤 8, 9시쯤 되어 조대병원 환자대기소 옆 골목에 차를 세워놓고 총은 두고 수류탄과 탄창 몇 개만 갖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곳에도 군인들은 없고 시민들이 총을 들고 경계를 서고 있었다.
무기를 반납하라는 방송을 하고 돌아다녀
다음날(22일) 아침식사 후 학동 배고픈다리로 나와보니 민간인이 총을 들고 보초를 서고 있었다. 시민들이 탄 차도 왔다갔다했다. 그들에게 전날 가져온 수류탄과 탄창을 모두 줘버렸다. 아침 9시에서 10시 사이에 도청에 도착했다. 정문에는 보초가 서 있었고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가톨릭센터까지 혼자 터벅터벅 걸어가 그 건물 계단에 앉아 도청에 다시 가볼까말까 고민했다. 그러나 사람이 이렇게 많이 죽어가는데 일을 하더라도 큰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도청으로 갔다. 보초 서는 젊은이에게 얘기해서 쉽게 도청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1층 서무과에서는 김원갑 등이 방송을 하고 있었고, 또 한쪽에서는 장휴동, 문재석, 김재일, 장세일, 이종기 변호사 등이 모여 있었다. 그분들은 사태를 어떻게 수습할 것인지에 대해 주로 의논했다. 그 장면을 보면서 나는 '일단 수습을 하든 싸움을 계속하든 무기통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 내용을 방송으로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수습위원회에서 무기 회수를 방송을 하고 다니도록 시키지 않았지만 내 생각에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아서 자발적으로 한 것이다.
마침 금남로에 경찰 페퍼포그차가 한 대 있었다. 그 차를 세웠다.
"도청에서 나왔소. 방송을 해야 하니 좀 태워주시오."
"무슨 내용을 방송하려고 그러요?"
"무기를 회수한다는 것 하고 질서를 지키자는 것이오."
나는 그 차를 타고 시내 곳곳을 돌며 방송을 했다. 그때 시간이 11시쯤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 차가 경찰이나 군인차였던 것 같다. 젊은 사람들이 대여섯 명 타고 있었는데 차 안의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무겁고 살벌했으며 지나치게 질서정연했던 것 같다. 그때는 생각지 못한 일인데 군인이나 경찰이 정찰하러 돌아다닌 차일 수도 있다는 의심이 간다. 방송을 하며 시내를 한바퀴 돌아 학동 삼거리에 이르렀을 때 그들이 나에게 차에서 내리라고 했다.
그 차에서 내려 걸어가고 있는데 옆집에 사는 친구가 다 찌그러진 트럭을 타고 지나가며 어쩐 일이냐고 했다.
"방송하러 다니는데 차가 없어서 이렇게 있다."
"그럼 이 차를 타시오."
그 차를 타고 노동청 부근에 왔더니 아침에 집을 나간 형님이 그곳에서 데모를 하는지 교통정리를 하는지 도로에 서 있었다.
나는 육성으로만 방송을 하기가 힘들어서 스피커를 구하려고 대인동 쪽으로 갔다. 그곳에 있는 전파사들을 뒤져 스피커를 구하려는 사람이 여럿이었다. 그 자리에서 어떻게 돈을 마련해 스피커를 빌려 차를 타고 다니면서 방송을 계속했다.
"무기를 도청으로 가져오시오. 지금 도청에서는 수습위원회가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저희들의 통제에 따라주십시오. 무기관리에 주의합시다."
그러나 실제로는 방송을 하는 것과 무관하게 벌써 시민들이 무기를 도청으로 반납하고 있었다. 계엄군이 물러난 상황에서 무기를 갖고 있다는 것이 겁나는 일이기도 했고 또 오발사고의 위험률도 높았기 때문에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무기를 반납한 것이다.
나는 가두방송을 계속하다가 오후 5시쯤 도청으로 들어갔다. 그때는 이미 수습위원회가 구성되어 있었다. 수습위원 중 이종기 변호사와 장휴동씨가 계엄사에 간다기에 김원갑과 함께 따라나섰다. 어둑어둑해질 무렵 계엄사에 도착해 두 분이 손수건을 흔들고 계엄사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공단 사거리 쪽으로 나왔다.
공단사거리가 계엄군과 시민군의 대치장소였는데, 양쪽에서 함부로 총을 쏴 부상 자가 많이 나왔다.
학생수습위원들과 함께 활동
다시 도청으로 돌아왔다. 김창길을 위원장으로 하는 학생수습위원회가 구성되어 있었다. 나는 처음에는 뒤에서 지켜보고만 있었다. 전남대의 송기숙, 명노근 교수도 잠시 후 오셨다. 그런데 회의내용이 비현실적이고 집약이 안돼 중구난방이었다.
지금 단계에서는 무기를 회수하고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문제인 것 같다고 말했더니 학생들이 나에게도 참여하라고 제의했지만, 나는 학생이 아니니 그냥 보고 있다가 잘못된 것이 있으면 얘기하겠다고 했다. 차량통제, 무기 회수, 유인물 작성 등에 대해 구체적으로 얘기했다.
서울 숭전대에 다닌다는 학생이 초안을 잡은 성명서를 인쇄해서 24일 궐기대회 때 시민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했으며, 도청 서무과 뒤 공터에서 사람들을 모아 조를 편성해 신역과 외곽지역의 대체장소로 보내기도 했다. 지역방위를 맡은 청년들이 식사도 하고 쉴 수 있도록 교대근무조를 파견한 것이다.
학생수습위원장 김창길은 주로 계엄사와 협상하는 일을 했고 부위원장 겸 장례위원장 김종배는 장례식 관계 일을 보러 다녔으므로 사실상 도청 안에서 질서와 체계를 잡는 일은 내가 맡아 했다. 간부들이 각자 일을 맡아 하기는 했지만 날이 어두워지면 집에 갔다가 아침에 늦게 나오기 때문에 갑자기 무슨 일이 생기면 도청에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임무를 부여해야 했다. 병원에 산소가 없다거나 쌀이 없다고 하면 보급하는 일들을 그때그때 했다.
23일 계엄사에 갔던 수습위원들의 보고대회가 진행될 때 무기회수를 하다 윤상원씨를 만났다. 그날 오후 수습위원회와 계엄사의 협상내용을 담은 유인물을 계림동에 있는 인쇄소에 맡기러 갔다. 주인이 종이가 없다고 거절해 도청 뒤에 있는 신성지업사에서 종이를 얻어다줬다. 그 인쇄물이 24일 완성돼 도청 앞에서 시민들에게 배포되었다.
도청 안에 조사과는 23일에, 상황실은 24일에 생겼다. 시민들이 사소한 일이 생겨도 도청으로 전화해 물어왔으므로 답변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조사과가 생긴 것이다. 그런데 조사반장으로 있던 사람이 기관원이 아니었나 싶다. 조사과에서 주로 하는 일이 간첩이라고 잡혀온 사람을 문책하고 수상한 사람을 조사하는 일이라 그때에도 현직 경찰을 데려오자는 말이 있었는데, 그 조사반장은 25일 아침 군인이 들어온다는 소문이 나돌자 도청을 빠져나갔다.
나는 도청 안에서 체계 잡는 일을 하다 오합지졸인 시민군보다는 예비군을 동원하는 것이 나을 성싶어 24일 재향군인회를 찾아갔으나 책임자가 없어 만나지 못 했다.
24일부터는 도청에 사람들이 훨씬 많아졌다. 계엄군이 언제 재진입할지 몰라 불안해 하던 사람들이 며칠 지나도 별일이 없자 몰려든 것이다. 그날 정상용, 윤상원 씨도 도청에 나왔다.
학생수습위원회 부위원장 겸 내무위원장을 맡아
그때 김종배와 김창길은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 자주 대립했다. 김종배는 "계엄사와 무조건 협상하면 안된다. 협상이란 동등한 입장에서 하는 것인데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무기를 반납하면 우리에게는 힘이 없어진다. 무기를 반납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고, 김창길은 "더이상 피를 흘리지 않기 위해서 무기를 회수해 반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보기엔 김종배의 의견이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것 같아 나는 김창길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다.
24일에도 무기반납을 둘러싸고 의견대립을 하다 김종배와 양원식이 못해 먹겠다고 일을 안 한다고 했다. 2명이 안 하겠다고 하자 도청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회의를 했다. 조직개편을 한 것이다. 지금까지는 학생수습위원회에 속하지 않았지만 내가 나서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부위원장 겸 내무위원장과 총무를 겸하게 되었다. 그때가 25일 새벽 1-3시 사이였다. 이날 회의에서는 무조건 타협해서 무기를 반납하면 안 되겠지만 현실적으로 여러가지 어려움이 있으니 일단 피해를 줄이는 방향으로 수습을 하자는 것으로 의견일치를 보았다.
25일 아침 총소리가 들려 분위기가 살벌하자 곧바로 방송을 했다.
"누구도 총 쏘지 말라. 총 쏜 놈은 우리를 교란시키기 위한 간첩이다."
나는 김종배한테 "빨리 무기를 회수하자. 무기를 반납하지 않으면 우리가 계엄군에게 이용당할 처지다"고 설득하고 경비원들에게 실탄을 회수하러 다녔다.
그날 목사, 신부, 김창길이 외곽지역을 돌며 경비원들을 설득, 무기를 회수하고 그들을 도청으로 데려왔다. 그날은 도청 안이 상당히 조직적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YWCA에서 일하던 운동권 학생들이 도청으로 많이 들어왔다.
그날 아침 독침사건이 발생했다. 관련자를 잡아다 아무리 족쳐도 대답하지 않았다. "이러다간 안 되겠다. 무기를 반납하고 평화적으로 해결하자. 민간인이 군인한테 총 들고 대항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니 총을 반납하고 대신 성명서를 작성하자"고 해서 광주일보 사회부기자를 불러다 기자회견을 하려고 했으나 오지 않았다.
지하식당에 TNT가 있었다. 그곳은 평소에는 폐쇄되어 있었다. 25일 밤 11시경 김창길이 군대에서 폭약을 다루던 사람이 레버를 제거하고 있으니 함께 가보자고 했다. 우리가 가도 그 사람은 모른 채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제거는 하되 곧바로 써먹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하고 밖으로 나왔다.
나중에 알고 보니 계엄사에서 보낸 사람이었다. 항간에는 창길이 데려왔다고 하는 말이 많은데 계엄사에서 자체적으로 한 일이다. 그때는 워낙 드나든 사람이 많았고 서로 얼굴도 모르기 때문에 기관원의 침투가 충분히 가능했다. 도청 2층에 순천에서 왔다는 사람이 있었는데 나중에 상무대에 잡혀가서 보니 합수단 대령이었다. 우리가 도청에서 무슨 얘기를 하면 5분 후엔 계엄사에서 알고 있을 정도였으니 더 말할 것도 없지 않은가.
25일 오후부터 김종배와 정상용이 보이지 않더니 그날밤 새로 수습위원회를 구성했다. 김종배가 위원장이고 정상용, 윤상원 등이 포함된 것이다. YWCA에서 본 사람들과 이름있는 학생으로 구성된 조직이었다. 그 조직이 확산되어 상황실과 기동타격대도 그들의 조직을 따르고 있었다. 새로 생긴 조직과 기존의 수습위원회 두 조직이 26일까지 공존한 상태였다.
26일 새벽 도청에 있는데 계엄군이 쳐들어온다는 연락이 와 농촌진흥원 앞으로 갔다. 일반수습위원과 김창길이 대표로 계엄사로 가고 나는 도청으로 왔다. 그날 오후 2층 부지사실에서 김종배와 정상용을 대표로 하는 새 조직과 25일 새벽에 개편된 조직이 만나 마지막 회의를 했다. 또다시 무기반납을 둘러싸고 격론을 벌였으나 실마리를 풀지 못했다. 나는 학생들에게 "꼭 너희들 의견이 맞다고 생각하면 남아서 너희들 마음대로 해라. 나는 더 이상 있을 필요를 못 느끼겠으니 나가겠다"고 하고 나갈 준비를 서둘렀다. 26일 밤에 우리 쪽 입장에 동조하던 사람들과 함께 도청을 나와 집으로 갔다.
도청이 진압된 후 28일 집에서 상무대로 연행되었다. 나는 조사받는 과정에서도 내가 한 일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말했으므로 많이 맞지는 않았다. 7년 구형에 3년형을 받고 복역중 12월 30일 석방되었다.
그후 형님과 함께 사업을 했으나 잘되지 않아 1986년까지 직장생활을 하다 지금은 조그만 사업을 하고 있다.
광주항쟁이 끝난 뒤부터 지금까지 많은 생각을 했다. 무슨 일이든 일정한 시간이 지나야 올바른 평가를 받는 것이지만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보고 이러쿵저러쿵 말들을 하는 것을 보면 가슴 아프다. 보는 관점에 따라 한 가지 사건도 입장을 달리할 수 있는 것인데 무기를 반납하기로 했다고 온건파고 무기반납에 반대했다고 강경파로 평가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 사실상 그때 당시에는 강경이니 온건이니 하는 것도 없었다. 나는 오히려 순수한 입장에서 밥도 못 먹고 잠도 자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열심히 활동했는데 온건파로 몰면서 광주시민의 피를 팔아먹은 사람 취급하는 데는 정말 불쾌하다. 그리고 마지막 날 도청에 남아 있었느냐, 남아 있지 않았느냐로 모든 걸 평가하려고 해도 안 된다. 일이란 지속성과 계획성이 있어야 한다. 그때 당시의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고 열심히 활동한 사람들에 대한 평가를 해야 옳을 것이다. (조사.정리 양난희)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