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1:46]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가로되 와 보라 하니라..."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 원문상 '나사렛'으로 끝난 빌립의 말은 나다나엘을 격분시켰다. 그는 율법을 연구하는 자였으므로 메시야가 유대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것을 알고 있었다. 또한 당시 나사렛은 갈릴리의 한 마을이므로 율법주의자의 입장에서 볼때 멸시당해 마땅한 지역이었다. 그러므로 본문은 당시 율법주의자들이 갈릴리 지방을 조롱할 때 쓰던 관용어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와 보라 - 나다나엘의 빈정거리는 말투와 그 말투에 내포된 논리적 타당성은 빌립의 말문을 막았을 뿐만 아니라 심한 모멸감까지 주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립은 나다나엘을 강권한다. 여기에서 '와 보라'의 헬라어는 '에르쿠카이 이데'이다. '에르쿠'는 '오다'라는 뜻을 지닌 '에르코마이'의 2인칭 단수 현재 명령형이며, '이데'는 '호라오'의 부정 과거 명령형으로서
'보라', '볼지어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빌립이 말한 '와 보라'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와 보라'와는 다른 어감을 가진다. 즉 빌립의 강권은 당시 랍비가 제자들을 초청하는 형식이 아니라 제자가 다른 한 제자를 랍비에게 소개하는 형식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 말은 율법적인 논리보다는 역사적으로 성육신하신 메시야라는 실체를 목도하여 보라는 말이다.
[요 1:47]"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보라 이는...간사한 것이 없도다 - 나다나엘을 처음 대면하기 직전에 그의 인격을 통찰하는 그리스도의 신성이 잘 나타난 구절이다. 특히 본문은 '참'과 '간사한'이라는 두 반의적 수식어를 통해서 나다나엘의 성품을 잘 반영한다.
여기서 '알레도스'는 '겉과 속의 일체'혹은 '진지성'을 뜻하는 말이며 반면 '돌로스'는 고기를 낚기 위한 '미끼', 트로이 전쟁시의 목마등과 같이 '속임수'나 '간계'를 뜻하는 말로 쓰였다. 특히 이 표현은 야곱의 '간교한' 성격을 상기시키는 말로서), 나다나엘이 야곱처럼 간교한 자가 아니라 메시야 대망을 충실히 기다리며 율법을 연구하는 자였음을 시사한다. 시편 기자는 '마음에 간사가 없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다.
[요 1:48]"나다나엘이 가로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너를 부르기 전에...보았노라 - '...전에'라는 말이 시간적 의미의 답변이라면 '무화과나무 아래'라는 표현은 공간적 의미로서의 답변이다. 무화과나무는 유대 민족의 번영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사용될 정도로 팔레스틴에서 번식하였다. 특히 무화과나무는 무성한 커다란 잎으로
그늘을 드리웠으므로 당시의 랍비들은 이를 율법을 교육하거나 묵상하는 장소로 사용하였다. 따라서 '무화과나무 아래'라는 표현은 나다나엘이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율법을 묵상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또한 여기서 '보았노라'는 말은 단순히 '알았다'라는 예지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주목하고 있었다는 의지적인 측면까지도 내포하는 용어이다. 이는 예수께서 이미 나다나엘을 당신의 제자로 지목하였다는 뜻이다.
[요 1:49]"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대답하되 - 이것의 헬라어 '아페크리데'는 '자력으로 판단하여 결정적으로 대답하다'라는 뜻으로서 나다나엘이 예수의 답변에 대해 항거할 수 없는힘에 이끌리어 그분이 바로 메시야라는 사실을 결정적으로 고백했다는 뜻이다. 바클레이 말을 빌면 나다나엘은 자신의 마음을 샅샅이 꿰뚫어 보고 만족시켜 주신 예수의 권위에 완전히 압도당하고 말았다.
랍비여 - 당신은 하나님의...임금이로소이다 - 비록 나다나엘은 이 고백 속에 담긴 진의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을 터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 고백이 결코 겉치레인 것은 아니었다. 이 두존칭은 메시야의 도래를 예언한 근거를 둔 것으로 짐작되며, 베드로의 신앙 고백과도 직결된다. 이 중 '이스라엘의 임금'이란 표현은 신약성경에서 세 곳에 등장한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조롱하는 야유로 언급되며, '그리스도'와 동의어로서 나온다.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당시 군중들의 찬양 가운데 언급된다. 한편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왕으로 인식되었으며 신약 중간사 시대부터는 하나님의 통치를 대리하실 왕적 메시야에 대한 기대가 두루 퍼져있었다. [요 1:5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 '이보다'라는 표현에서 '이'가 지적하는 바는 나다나엘이 체험한 그리스도의 초자연적인 지식을 가리킨다. 나다나엘로 하여금 예수를 메시야로 믿게 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중에서 가장 작은 한 면에 지나지 않았다. 실제로 예수는 공생애 기간 동안 수많은 이적과 권능들을 나타내사 많은 사람들의 곤경을 타개해 주셨고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메시야되심을 입증하셨다.
[요 1:51]"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진실로 진실로 - '더 큰 일'에 대한 예수의 말씀의 서두이다. 주로 공관복음서에서는 '진실로'라고만 쓰여진데 반하여, 본서에서는 '진실로 진실로'라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이는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을 강조하려는 요한의 의도를 반영한다.
하늘이 열리고 - '열리고'의 헬라어는 현재 완료 능동태 분사로서 '한 순간이라도 닫힘이 없이 항상 열려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와 같이 하늘이 열린다는 표현은 야곱이 벧엘에서 꾼 굼과 연관되며,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재확립되는 징조를 상징한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하늘이 열리고 그동안 죄로 인해 막혔던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하늘이 열리고'라는 말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 곧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보며 또한 그 나라를 소유하게되는 축복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고 이해할 수있다. 하나님의 사자들이...보리라 - '하나님의 사자'란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천사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하나님에 의해 피조된 영적 존재로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매개자로 활동한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란 '열려진 하늘'이 상징하듯, 예수 그리스도가 야곱이 보았던 '사닥다리. 즉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보자가 되신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