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시’ (윤동주문학사상선양회)의 박영우 대표님 이하 모든 관계자들이 올해로 제14회 윤동주문학국제페스티벌을 5월 7일에 개최했습니다.
작년의 행사(윤동주 시비제막, 국제심포지엄, 오페라윤동주공연, 제4회 윤동주상 시상식, 대한민국30대1급문예지 전시회, 윤동주 평화정신을 기리는 십만 명 얼굴전시회, 초 중 고 백일장, 어린이그림전시회)에 이어 올해는 인사동에서 대한민국 대표시인 1,000인 시집 전시회 및 시민 시 읽기 캠페인과 윤동주 동산까지 걷기대회도 함께 열어서 어느 해보다 풍성하였습니다. 박영우 대표님과 민족문학지 ‘서시’는 윤동주 시인과 대한민국을 알리는 커다란 뜻을 품고 미국샌프란시스코의 유타지부와 서부 캘리포니아지부, 한, 미, 일 윤동주문학제도 개최하고 있으며 매년 연변대에서 한, 중, 일 윤동주 문학제를 열고 윤동주 생가에서는 윤동주배 조선족 장사씨름대회 겸 윤동주 고향사람들과 함께 하는 문학의 밤을 엽니다. 한 고결한 시인의 정신을 사랑하고 나아가서 그러한 시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우리 민족의 아름다운 정서와 힘을 알리기 위해 박영우 대표님과 ‘서시’의 모든 관계자 분들은 끊임없는 노력을 앞으로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오 늘(서시작가회 회장) -
윤동주의 생애와 詩 윤동주가 시를 썼던 시대인 1936~43년은 온 인류가 시를 외면한 시대였다. 그가 릴케와 프랑시스 잠을 노래했을 때는 포연이 장미의 향기를 쫓고 나귀등에다 탄환을 운반하던 때였다. 그가 즐겨 바라보던 하늘과 바람과 별의 허공엔 공습 경보가 요란하게 울리던 시절이었다. 한국 문학사는 이 시대를 '암흑기'로 말한다. 시와 소설의 발행고가 가장 낮은 시대였을 뿐만 아니라 그 질적인 면에서도 예술적 여과를 거치지 못했으며,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나마도 식민 종주국의 이익에 보탬을 준 것이 많아서, 암흑기란 시대적 명칭은 자연스럽게 사용되어 왔다. 시인 윤동주는 바로 이런 암흑기의 몇몇 유성 중 뛰어난 시인의 하나이다. 고문, 영양실조, 동상 그리고 정신적 고뇌 등으로 일관된 하루하루의 옥중생활을 윤동주도 1943년7월, 체포이후 1945년 2월16일, 죽는 날까지 반복했을 것이다. 흔히들 시인 윤동주를 저항의 시인이라 부른다. 원래 저항이란 순수 예술의 한 속성이 된다. 일반적으로 저항의 예술과 순수예술을 이원론 적으로 분리시키는 경향이 최근 우리 문단을 지배하고 있는데, 예술이란 그 순수성 자체가 가장 강력한 저항을 나타낸 것임을 수긍해야 될 것이다. 예술적 창조란 말할 필요도 없이 개성의 표현이다. 이 '개성'이란 곧 타아와의 조화와 갈등을 동시에 지닌 것으로 이는 바로 모든 '자기 개성'의 반대자에 대한 조화를 위한 저항이 되는 것이며, 이것이 순수 예술의 본질이 된다. 따라서 저항은 고대 원시예술의 시발점부터 순수예술이 지닌 한 속성이 되어 왔다. 직접운동권에 가담하거나 지원하지는 않으면서도 순수한 문학작품으로 정서적인 저항을 시도하는 예가 있다. 윤동주 같은 시인에 대한 저항의지를 묵과해 버릴 수도 있을 만큼 그 작품은 깊은 서정과 민족 정서에 뿌리를 박고 있다. 그래서 오늘의 우리는 그의 시가 지닌 진정한 가치를 재음미, 평가하는 겸허한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예술에서의 저항이란 가장 전염력이 강하려면 서정성을 지녀야 되는 것이다. 흔히들 전투적 선동성을 저항문학의 제일로 삼는 예가 있으나, 대중적 내지 민중적 저항의 유발엔 짙은 서정이 더 강력한 호소력을 지닌다. 코자크 부대가 폴란드를 침략했을 때 쇼팽의 피아노를 박살내어 땔감으로 쓴 것은 가냘픈 그의 음악이, 그 환상적이고 아름다우며, 서정적인 선율이 어느 독립군가보다도, 폴란드 인에게 애국심을 강력히 호소했기 때문이다. 윤동주가 오늘의 독자에게 깊은 감동과 호소력을 줄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그의 서정성에 있다는 사실은 오늘의 민중시가 나아가야 할 방향 설정에 많은 암시를 준다고 하겠다. 발췌 : 임헌영(윤동주사상선양회 고문) 문학평론가님의 글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