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행 7 - 남산골 한옥마을
2018년2월18일 설날연휴에 남산골 한옥마을을 유종완과 김진섭이랑 같이 찾았습니다.
충무로역에 내리니 우리나라 역대 배우들의 캐릭터가 그려져 있습니다. 신성일입니다.
한국의 알랭들롱이라고 할정도로 최고의 인기배우로 16대 국회의원도 역임한바 있습니다.
1937년 5월 8일 대구에서 아버지 강병오와 어머니 김연주 사이에서 2남 1녀 중 차남
경북중학교, 경북고등학교, 건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본명은 강신영이었으나, 데뷔할 때
신상옥 감독이 지어준 '신성일'이라는 예명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하면서 본명 자체를 강신성일로 고쳤습니다. 선거에서 본명을 써야 하는데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국국민당 후보로 본명 강신영으로 나섰다가 유권자들이
신성일인줄 몰라서 표 손해를 많이 봤다고 합니다.
엄앵란은 연예인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아버지 엄재근(嚴在槿)은 색소폰 연주자, 어머니
노재신(盧載信)은 배우이며 삼촌 엄토미는 재즈연주가로 유명합니다
부잣집 막내딸 같은 이미지와는 다르게 의외로 어려운 성장기를 보냈습니다. 중학생이던 시절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이에 대구로 피난을 떠나 시장에서 떡장사를 하는 등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서울여자상업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대학에 진학하고자 했지만 여유가
없었던 형편 때문에 대학진학을 반대했고 차라리 딸이 대학에 낙방하기를 빌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기대와는 다르게 숙명여자대학교 가정학과에고대하던 여대생이
되었습니다. 어렵사리 진학은 했으나 다음 학기 등록금이 걱정이던 엄앵란은 마침
아르바이트 생을 구하던 영화사 사무실에 방문하게 됩니다. 이 때 그녀를 눈여겨본
영화감독으로부터 카메라 테스트 제의를 받고 마침내 1956년, 영화 '단종애사'로 데뷔하게
됩니다.
박근형
최불암은 1940년 6월 15일 경기도 인천부 금곡정(현 인천광역시 동구 금곡동) 1번지에서
사업가인 최철(崔鐵)과 대한제국 때 궁내 악사를 지낸 집안의 딸 이명숙(李明淑)의 무녀
독남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최불암의 가족 중에는 독립운동가가 많았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최불암을 임신한 모친을
국내에 두고 독립운동을 하는 형제들을 따라 중국으로 들어갔고, 해방이 될 때까지 중국에서
사업을 해 큰돈을 벌었습니다. 그 후 해방이 되고 나서 만주에서부터 인천까지 말을 타고
귀향했습니다. 말안장에는 돈과 보석이 잔뜩 실려 있었다고 합니다. 최불암 부친은 만주에서
가져온 돈으로 해방직후 인천에 영화사(건설영화사)와 신문사(인천일보)를 차렸으나 직접
제작한 영화의 개봉을 앞두고 부친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당시 6살에 불과했던 최불암은
부친의 영정을 들고 영화 시사회에 참석해야 했다고 합니다.
모친 이명숙 여사는 서울 명동에서 '은성'이라는 대폿집을 열었습니다. 그곳은 금방 당대
문화인들의 사랑방이 됐었고 그 곳을 드나들던 문인 중 소설가 이봉구는 특히 명동백작이라
불렸는데, 부잣집 아들인 그가 자리를 마련하면 서점을 운영하던 박인환(시인)과 가난했지만
멋진 시들로 인기가 많았던 김수영(시인)등이 모여 많은 일화를 만들어낸 곳입니다.
봉구주점이란 별명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은성주점 터는 현재 표지석이 설치돼있습니다.
최불암의 개인사적 다큐멘터리마다 어머니를 추억하며 은성주점 터를 찾는 모습이 가끔 텔레비전에 비친다.1967년 28살의 나이에 KBS 2기 탤런트로 데뷔하여 처음 맡은 역할이 김종서
장군, 그것도 계유정난 당시의 노년 역할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의 배우. 전형적인 미인은 아니었지만, '귀여움'이라는 매력으로 대중의 마음을
오랫동안 사로잡았던 최진실. 더불어 훌륭한 연기력으로 전 연령층으로부터 사랑을 받아
'만인의 연인' 또는 '국민배우'라는 별칭으로 불리었습니다.1988년 광고 모델로 연예계에
데뷔한 이래 20년 동안 지속적인 인기를 누렸습니다. 1968년12월24일에 태어나 고등학교
시절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 최국현이 가출하면서 어머니 정옥순과 남동생 최진영과 생활
합니다. 아버지 최국현은 고등학교시절 연극하였고 KBS공채탈랜트1기 였으며 배우 최재성은
6촌오빠였다고 합니다.
1980년대~1990년대 초반 충무로의 황제 대한민국 배우 중 주연상 최다수상자 안성기
한국의 배우 중에서 가장 오랜 기간 원톱의 인기와 영향력을 누렸으며 연기로도 고평가를
받은 배우입니다. 안성기는 5살 때 처음으로 연기자가 되었으며 "저하늘에도 슬픔이"라는
영화에도 출연하여 많은 사랑을 받았던 연기자입니다.
한국영화 포스터가 있습니다.
1944년 7월 1일 생 영화배우 이대근
1967년 KBS 공채 탤런트 김효천의 실록 김두한이라는 작품에서 처음으로 주연을 맡아 흥행에
대성공, 박노식, 장동휘의 계보를 잇는 70년대 한국 영화계의 대표적인 액션 배우가 되었습니다.
朴魯植 1930년 2월 4일 ~ 1995년 4월 3일 종교는 가톨릭이며, 세례명 이나시오,전라남도
여수시 봉강동에서 태어났으며 여수 수산중학교를 거쳐 순천사범학교 체육과를 졸업합니다.
그후 대전의 악극단에서 활동하게 되면서 '나그네 설음' 등을 시작으로 주연을 맡게 되었고[3], 1956년에 비로소 영화 격퇴에 데뷔합니다. 1960년대 영화계를 주름잡았던 배우 1995년
향년 65세를 일기로 사망했습니다. 그의 별명이 마도로스 박입니다.
윤정희(尹靜姬, 본명: 손미자(孫美子), 1944년 7월 30일 ~ )는 남정임, 문희 트로이카로
유명합니다. 후배 연기자 금보라(본명 손미자)와는 본명이 동명이인인 그녀는 대한민국
여자 석사 배우 1호라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남편 백건우와 프랑스 파리에
지하철역에 많은 영화배우 캐럭터와 영화에 대한 포스타도 있습니다.
옛날 생각을 나게 하는 포스터입니다.
충무로의 대로변에서 100미터 남짓 지나면 예스런 한옥마을과 자연 공원이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한옥 다섯 채를 이전해 조성한 남산골 한옥마을입니다.
남산골 한옥마을은 골짜기를 만들어 물이 흐르게 하고 전통 조경을 되살렸습니다.
그 너머로 남산이 병풍처럼 마을을 둘러 한층 운치 있습니다.
문에는 건양다건(建陽多慶)이라고 붙여져 있습니다. 봄의 따스한 기운이 감도니
경사로운 일이 많으리라는 기원문입니다.
입춘대길 건양다경’이라는 말은 ‘봄이 시작되니 크게 길하고 경사스러운 일이 많이
일어나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이런 기원문들은 입춘시(立春時)에 맞춰 대문에
붙여야만 효험이 있다고 전해집니다.
남산골 한옥마을의 한옥들은 원래 남촌에 있던 것들은 아니다. 1998년 한옥마을을 조성하면서 제각기 흩어져 있던 5채의 전통 가옥을 이전했다. 명성황후의 친척 민영휘의 가옥, 경북궁 중건 당시 도편수였던 이승업 가옥, 조선말 오위장을 지낸 김춘영의 가옥 등이다
남산골 한옥마을(南山골 韓屋마을)은 서울특별시 중구 필동의 남산골공원에 있는
한옥1989년 남산골의 제모습 찾기사업으로 각지의 한옥을 모아 마을을 조성하였습니다.
무엇보다 북촌과 비교하면 집 안의 내부를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있다는 점이 매력입니다.
다양한 행사와 체험 프로그램도 남산골 한옥마을만의 장점입니다.
본래 수도방위사령부(수방사) 부지로 군사보호구역이었던 곳이었으나 1989년 남산 제모습
찾기사업에 따라 서울시가 수방사와 합의하에 이 부지를 인수하고 군사보호구역에서 해제
되면서 서울시가 민속자료와 한옥5개등을 복원하였습니다.
이희승(李熙昇, 1896년 6월 9일(음력 4월 29일) ~ 1989년 11월 27일)는 대한민국의
국어학자, 시인, 수필가의 추모비가 있습니다.
조선 경기도 광주군 의곡면 포일리(지금의 대한민국 의왕시 포일동)에서 출생하였고 한때 대한제국 경기도 개풍군(지금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개성특급시 개풍군)과 대한제국 경기도 시흥군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조선어학회에서 연구 활동을 하다가 1942년 왜정이 조선어 학회원들을 고문과 학정을 당한것을 술회합니다. 그는 서울대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국어학 활동을 하여 국어사전을 편찬합니다.
한옥마을이 들어선 필동 지역은 조선시대 흐르는 계곡과 천우각이 있어 여름철 피서를
위한 놀이터로 이름있는 곳입니다.
서울 천년 타입 캡술 광장
바로옆에는 남산 중앙정보부 자리가 보입니다.
망북루
우리 민족은 북에서 남으로 이동해 왔습니다.
그래서 앞은 남(南)이고 뒤는 북(北)입니다.
마을이나 도시의 집들이 남향을 하는 원인도 있습니다.
그래서 앞산은 곧 남산입니다.
남산의 북쪽 기슬에 정자를 세웠으니 사람들이 사는 곳은 북쪽에 있습니다.
그래서 북쪽을 바라보는 누각이니 '북망루'입니다.
타임캡술을 1994년11월29일에 묻었네요. 천년후 서울시민이 캡술을 꺼내봤을때
지난 서울의 풍물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할까?
타임캡술을 묻은곳으로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보신각종을 형상화해서 만들어진 타임캡슐의 원형판석입니다. 이곳은 세계 각국의 서
울시와 자매결연 맺은 시장의 축사가 새겨져 있습니다.
옛날 조선시대때 양반들이 놀았던 투기
옛날 청학이 놀았다고 해서 청학동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청학동은 신선이 사는 곳으로 불릴 만큼 경관이 아름다워 한양에서 가장 경치 좋은
청동, 인왕동, 쌍계동, 백운동과 더불어 한양 5동으로 손꼽히던 곳입니다
이곳의 옛 정취를 되살려 시민들에게 제공하기 위하여 골짜기를 만들고 물을 흐르게
하였으며, 정자를 짓고, 나무를 심어 전통정원을 조성하였습니다
여기 건물에는 순정효황후 윤씨의 친가가 있습니다. 안채, 사랑채, 대문간채가 연결된
'ㅁ"자 평면으로 건평이 224.79m2(68평) 있습니다.
5채의 가옥들은 윤씨 친가, 해풍부원군 윤택영댁 재실, 관훈동 민씨가옥, 오위장 김춘영 가옥,
도편수 이승업가옥 모두 5채입니다.
옛날 어렸을때 이불을 올려놓은 장이 생각이 납니다.
이곳은 김장독을 묻는 곳입니다.
장독대
창고에 가마가 있습니다. 가마의 크기를 보면 여인네들이 타고 다니는 가마인것 같습니다.
사당패의 조형물입니다.
외국인들이 한복을 입고 관람을 하고 있습니다.
기원문을 작성해서 여기에다 꼿습니다.
이승업가옥에 대한 설명입니다.
외국인들이 많이 찾는 이곳은 좀더 민속적으로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게를 지어봅니다.ㅎㅎㅎ 약초를 케러 다니는 생각을 잠시...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