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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1 스카이레이더(SKYRAIDER) / 남 베트남 공군 A-1 스카이레이더
남베트남 공군 창설에서 몰락까지 간략히...
1956년 6월 1일, 비엔 호아 기지에서 F8F 베어 캣 25대를 장비한 제1전투 비행대가 탄생하였다.
이로써 남 베트남 공군 VNAF(Vietnamese Air Force)이 공식 창설된 것이다.
미 군사 고문단(MAAG)이 남베트남 공군의 작전, 인사, 병참, 유지등의 전반 지원을 본격화한 것은 1956년이었다. 500명이상의 미군 장교와 조종사들이 남베트남 공군 군사 고문으로 일했다.
1959년들어 공산주의 게릴라들의 활동이 대폭 증가했지만 남베트남군의 전력은 형편없었다.
1959년 F8F 베어 캣 추락 사고가 발생하자 고딘 디엠 대통령은 비행금지 조치를 취한 다음 최신 전투기로 대체해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러자 미국은 6대의 록히드 T-34 슈팅 스타를 제공하기로 약속했으나 제네바 협정에 위배되어 제공하지 않았다.
미 대통령 아이젠하워는 보좌관들과 가진 회의에서 AD-6 스카이레이더를 공급해주기로 결정하였다.
미군사고문단은 1960년 4월에 스카이레이더 정밀 검사를 마친다음 남베트남 공군에 공급하기로 결정하였다.
1960년 9월 23일, 6대의 A-1 스카이레이더를 탑재한 항모 코어가 사이공항에 도착하였다. 다른 수송선이 싣고온 여분의 엔진과 부품, 그리고 지상 지원 장비가 비엔 호아 기지로 수송되었다.
1961년 5월에는 19대의 A-1이 추가 공급 되었다.
F8F 베어 캣을 장비하고 있었던 남베트남 공군 제1 전투 비행대는 A-1 스카이레이더로 기종을 전환하였다.
대외 군사 원조 프로그램에 의거하여 6명의 남베트남 조종사가 미 본토 교육생으로 선발되었다. 6명은 텍사스주 코퍼스 해군비행기지의 301 해군비행훈련부대에서 교육을 시작하였다.
미 해군 비행 교관들은 항모 이착함 교육을 시킬 필요가 없었고, 남베트남 교육생들은 이미 수백시간의 F8F 비행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비록 교육 기간은 짧지만 더욱 진보된 비행 훈련을 할 수 있었다.
부족한 경험은 교육생들의 열의로 극복되었고, 교육 기간 중 단 1대의 항공기 파손도 없었다. 어느날, 편대 숙달 비행 훈련에서 한바탕 소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선도 비행교관과 추적 비행교관은 남베트남 교육생 3명과 미리 지정된 장소에서 만나기로 하였지만
그들은 이륙하자마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무전 교신도 불통이었다.
하는 수 없이 비행 교관들은 기지로 돌아와야만 했다.
온갖 불안과 의심 스러운 생각들로 전전긍긍하던 교관들은 약 4시간 후 기지 상공에 나타난 A-1J 스카이레이더를 보았다.
남베트남 교육생들은 연료가 거의 소진되었을 무렵에야 기지로 돌아와 착륙 허가를 요청하였다. 착륙한 교육생들은 곧 조사를 받았다.
그들은 교육 규정을 위반, 텍사스 상공 광범위한 지역을 돌아다니며 관광 비행을하였던 것이다. 아무튼 텍사스에서 교육을 완료한 조종사들은 전술 훈련을 받기위하여 캘리포니아 르무어 해군 비행기지의 VA-122 비행대로 전개되었다.
미 공군 제4400전투훈련 비행대의 분견대 "정글짐"이 1961년 베트남에 들어와 코드네임 "팜 게이트"를 개시하였고,
해군 VA-152 "줄루 분견대" 비행 교관과 지상 요원들도 남베트남군 훈련을 실시하고 있었다. 남베트남 조종사와 미군 조종사는 타격 및 호위 임무를 수행하였다.
[남베트남 공군 제1 전투 비행대(제514 전투 비행대로 재편됨) A-1H 스카이레이더 / 1962년]
베트콩과의 전투가 빈번해지면서 공중 지원 요청이 점점 증가하자
남베트남 제2 전투비행대 분견대의 T-28이 다낭 기지에 전개되어 북부와 중부 지역에서 활동을 개시하고, 팜 게이트 분견대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베트콩의 공격를 물리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미군은 남베트남 조종사 교육을 미 본토에서 확대 실시키로 결정하였다.
먼저, 나 트랑 비행기지 또는 다른 비행 코스를 거친 사관 후보생을 차출하였고,
이들은 비행 교육에 앞서 텍사스 랙크랜드 공군기지에서 15주 코스의 영어 교육을 받았다. 언어 교육 이수자들은 텍사스 랜돌프 공군기지 또는 미시시피 키즈러 공군기지에서 42주간의 기본 비행 코스를 밟게된다.
그후 학생들은 에그린의 헐버트 비행장에서 90시간의 A-1E 스카이레이더 비행 교육을 받게되어 있었다.
이러한 코스를 모두 밟은 사관 후보생도들은 공군 소위 임관을 보증받았다.
교육 기간 중 교육생들은 미군 교관이 하는 말의 70% 정도는 이해하였으나 반대로 언어 구사 능력은 겨우 30% 정도였을 뿐이었다. 또한 많은 알력과 고함과 욕이 난무하고 매우굴욕적인 말들을 들었으나
학생들은 애국심과 조종사라는 자부심으로 그것들을 견뎌내었다.
미 공군의 교육을 마치고 해군 VA-122에서 전술 교육을 받게된 남베트남 교육생들은
해군비행 교관으로부터 "여태까지 공군에게서 배운 것은 이제부터 모두 잊어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이들 교육생들은 귀국후 공군과 더 긴밀히 작전하였기 때문에 결국 실전에서는 해군에게서 배운 것을 잊어야할 판이었다.
남베트남 공군의 심각한문제는 지상과 공중의 소통 부족이었다.
조종사와 관측자의 부족으로 L-19 관측기는 제대로된 전방 항공 통제(FAC)를 할 수가 없었다. 우수한 조종사들은 모두 전투 비행대나 수송 비행대에 배치되었기 때문에
미 군사 고문관들은 남베트남 관측기 승무원들의 자질을 최악으로 평가할 정도였다. 엄격한 작전 규정 또한 남베트남 FAC 자질 향상의 장애물이었다.
관측기가 대공화기에 손상당하면 진급 누락 등의 각종 불이익을 받았고, 만약 지상 표적 선정을 잘못하여 아군에게 피해를 입혔다면심할 경우 투옥될 수 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관측기는 항상 높은 고도로 비행하며 지상의 표적에 연막 로켓을 발사하곤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트콩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물리친 경우가 매우 많았다.
[1966년 6월 베트콩 박격포 공격으로 파괴된 플레이쿠 기지 제524 전투 비행대 A-1E 스카이레이더]
1963년의 경우, 대부분의 남베트남 조종사들은 미국 랜돌프 공군기지에서 T-28 기본 비행 교육을 이수한 자들이었다.
이들은 교육 이수 후 비엔 호아 기지로 돌아와 제1 특공 비행대 또는 제602 특공 비행대 A-1E에 탑승하여
3주간 관측과 전투 임무 숙달에 들어갔다.
그 다음에는 해군 VA-152 줄루 분견대에서 A-1H 전투 교육을 받았다.
교육생들은 소형 T-28 또는 T-34에 익숙하였기 때문에 엄청난 토크를가진 A-1의 보조익 제어에 숙달되기란 힘든 일이었다.
때문에 착륙시에 기수를 땅에 처박는 경우가 빈발하여 기체 내부에 군수품을 가득 적재하여 비행하기도 하였다.
이 3단계 훈련을 마친 자들은 제1 특공 비행대에서 전투 출격 임무를 받을 수 있었지만 여전히 미군 조종사의 통제를 받아야했다.
1962년 12월, 남베트남 정보부는 압 박 마을 주변에 포진한 베트콩에 대하여 기갑 및 공중 강습으로 쉽게 격파할 것으로 판단하였다.
정보부는 압 박의 베트콩이 중대급으로 판단, 과소 평가하였으나 사실은 대대였다.
1963년 1월 2일, 남베트남군이 공중 강습을 개시하자 베트콩은 중화기로 헬리콥터 착륙지를 쓸어버렸다.
강력한 저항을 받게되자 지상군 지휘관은 남베트남 공군에게 공중 지원을 요청하였다.
남베트남 공군의 거듭된 공중 공격에도 불구하고 베트콩의 화력을 침묵 시키는데 실패하자
탄손 누트 기지에서 발진한 팜 게이트 분견대의 B-26 인베이더 경 폭격기가 폭격과 기총소사로 베트콩의 공격을 차단할 수 있었다.
참담한 패배로 끝난 전투였다.
이날 출격한 T-28의 전투 결과는 그야말로 형편없어 공군이 A-1 등 다른 항공기로 대체하는 계기가 되었다.
압 박 전투에서 베트콩은 소수의 전사자만 내고 사라졌다.
베트콩은 미 군사 고문과 남베트남군 70여명 사살, 헬기 5대 격추 및 다량의 항공기 손상이라는 피해를 입혔다.
압 박 전투 패배 이후 미국의 군수 지원은 대폭 증가되었다.
더 많은 A-1 스카이레이더 공급으로 남베트남 공군의 전술 지원 범위도 대폭 증가되었다. 나 트랑 기지 남베트남 공군 제2 전투비행대는 T-28을 A-1으로 대체하였다.
그리고 1963년 1월 1일자로 비행대를 재편, 제1 전투비행대는 제514로, 제2 전투비행대는 제516 전투비행대로 개편되었다.
[남베트남 공군 제1 전투비행대(제514 전투비행대로 개편) A-1H 스카이레이더.]
[남베트남 공군 제2 전투비행대(제516 전투비행대로 개편) A-1J 스카이레이더]
[미 공군 중령(군사 고문)과 남베트남 공군 최초의 A-1 비행대인 제514 전투 비행대원.1967년 9월 비엔 호아 기지]
[밝은 색 비행복에 퍼플 스카프를 착용한 구옌 카오 키 준장 1966년 5월 7일 빈 투이 비행기지]
1963년 베트콩은 대공화기를 도입하고 비행 기지 급습을 자주 실시하였다. 게릴라 활동이 급증하자 양 측의 사상자 수도 급증하였다.
남 베트남 지상군은 공군의 공중 엄호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경향이 있었다. 미군이 대거 지원해주어도 남 베트남 공군의 전투력은 향상되지 않았다.
고 딘 디엠 대통령 일가의 전제 정치도 남베트남군의 사기를 떨어뜨리는데 일조한 면이 있었다. 천주교도 디엠의 불교도 탄압은 전 국민적 저항을 일으켰고,
미국의 묵시적 지원하에 감행된군부 쿠데타로 디엠 정권이 무너졌다.
이 구데타에 4대의 A-1 스카이레이더와 2대의 T-28이 동원되어 대통령 궁을 폭격 하였다.
군부 쿠데타와 고 딘 디엠 처형 참조 :
http://blog.naver.com/rectek2/10018293191
군부 쿠데타는 남베트남 공군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쿠데타에 가담한 구옌 카오 키 대령이 남베트남 공군 사령관이 되었다.
환한 비행복에 스카프를 즐겨 매는 젊고 멋진 조종사 카오 키.
그는 타고난 용감성과 지휘력을 발휘하여 미군으로부터 큰 호감을 샀다.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카오 키는 베트콩 타격을 직접 지휘하여 공군의 사기를 북돋았다. 즉각 공군력 확대에 열중한 카오 키는 특히 제트 항공기 획득에 큰 욕심을 가지고 있었다.
항공기가 증가하자 1964년, 남베트남 공군은 부대를 재편, 각각의 기지에 비행단을 설치하고 휘하의 비행대를 지휘하도록 만들었다. 이것은 남베트남 전역에 즉각적인 공중 지원을 제공하기위한 조치였다.
재편된 비행단은 다음과 같다.
비엔 호아 / 제23 전술 비행단 다 낭 / 제41 전술 비행단 탄손 누트 / 제33 전술 비행단 칸 토 / 제74 전술 비행단 플레이쿠 / 제62 전술 비행단
초기 남 베트남 공군 창설 참조 : http://blog.naver.com/rectek2/10023734027
[1967년 비엔 호아 기지에서 전투 출격 택싱 중인 A-1H 스카이레이더.동체의 체크 무늬 밴드는 제23 전술 비행단 마킹이다]
[동체 측면에 탄퐁(바람의 신) 마킹이 새겨진 제83 특수전 비행전대(83 SOG) 휘하 제522 전투 비행대 A-1H 스카이레이더.]
기체는 퍼플 브라운, 다크 그린으로 위장 도색되었다.
1964년부터 미국은 A-1 스카이레이더를 남베트남에 확대 공급하였다. 비엔 호아 제518 전투 비행대도 T-28을 A-1으로 대체하였다.
그리고 제520 전투 비행대가 1964년 6월에 비엔 호아에서 창설되어 A-1 비행대가 되었다. 특수 임무 비행대인 제522 전투 비행대가 1965년 4월 1일 탄손 누트 기지에서 창설되었다.
미국이 항공기 공여를 증가하여 1965년 9월에는 나트랑 기지에서 제524 전투 비행대가 창설되었다.
1970년 12월에는 제350 전투 비행대가 플레이쿠 기지에서 창설된다.
구옌 카오 키는 각종 항공기를 보유한 제83 특수전 비행전대(탄퐁/바람의 신)를 조직하여 각종 비밀 작전을 수행토록 하였다.
제83 특수전 비행전대는 휘하의 제522 전투 비행대와 함께 북베트남 영공으로 침투하여 CIA가 관여된 각종 비밀 임무를 수행하였다(위장 보급 컨테이너 투하, 침투 요원 회수 초계정 엄호 등).
그러나 제83 특수전 비행전대는 1967년 구옌 반 티우가 대통령이되었을 때 쿠데타를 우려하여부통령인 카오 키에게 해체를 요구, 1968년 1월에 해산되었다.
모든 전투비행대는 대부분 단좌 A-1 스카이레이더를 보유했으며 24대를 기본 편제로 하였다.
1964년말까지 총 117명의 A-1 스카이레이더 조종사와 32명의 정비사가 양성되었다. 1964년 8월, 통킹만에서 미 구축함이 공격당하자 존슨 미대통령의 명령에따라 북베트남 어뢰정 기지와 저장시설 타격이 개시되었다. 북폭의 서막이 오르는 순간이었다.
사이공에서는 또 다시 쿠데타가 시도되는 등 정국의 혼란을 틈탄 베트콩의 기습 공격이 시작되었다. 11월 1일, 비엔 호아 기지가 박격포 공격을받았다. 1965년 2월 8일, 플레밍 다트 작전이 발동되자 카오 키는 다낭 기지에서 24대의 A-1 스카이레이더를 출격시켰다.
카오 키 자신이 직접 지휘한 북베트남 주요 시설 타격 작전이었다.
이날 실시된 북베트남 빈 린의 군부대와 보급 시설 타격에서 남베트남 공군은 1대의 A-1을 상실(조종사 구출)했지만 작전은 대 성공이었다.
북폭 작전의 성공으로 남베트남 공군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고,카오 키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효과를 얻었다.
1965년 말까지 남베트남 공군의 6개 전투 비행대는 총 146대의 A-1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최신 대공화기에의한 전투 손실 및 기타 손실도 급증하여 전력 유지에 어려움을 겪게된다.
1965년 5월 16일, 비엔 호아 기지에서는 B-57이 엔진 시동 중 폭발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결국 연쇄 폭발로 이어져 미 공군 20명과 남베트남군 8명이 사망하고 105명이 부상했다.
또한 남베트남 공군 A-1 스카이레이더 11대와 B-57 10대, 그리고 미 해군 F-8 크루세이더 1대가 파괴되었다.
[제83 특수전 비행전대(83 SOG) / 제522 전투 비행대 A-1H 스카이레이더.]
[1964년 비엔 호아에서 다낭 기지로 전진 배치된 제518 전투 비행대 온 방 타이 대위]
[남 베트남 공군 F-5B]
남 베트남 공군 현대화는 1967년부터 시작되었다.
제트 항공기 보유를 열망했던 남베트남 공군은 B-57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나 인명 사고로인하여 무산되었었다.
그러다 1965년, 미 국방부는 노드롭 F-5A 프리덤 파이터 전투기를 비엔 호아로 보내 전투 평가를 시작하였다.
1965년 10월 23일, 비엔 호아 제10 전투 특공 비행대는 F-5A를 출격시켰다.
제10 전투 특공 비행대는F-5A의 지상 지원, 수색, 호위, 그리고 공중 전투 초계/MiGCAP를 실전에서 테스트 평가하는 임무를 맡고있었다.
F-5A는 평가 기간 중 총 4천 시간 이상 비행하였고, 대공 화기에 2대가 격추당했으나 상당히 좋은 평가를 받았다.
전투 평가가 진행 되는 동안에 남베트남 공군 조종사와 정비사들이 미국 애리조나주 윌리엄 공군기지에서 F-5A 기종 전환 훈련을 받고 있었다.
1967년 4월 17일, 제522 전투 비행대는 제10 전투 특공 비행대로부터 2대의 F-5B를 인수하였다.
제522 전투 비행대는 F-5B에 고참 조종사들을 탑승시켜 베트남 남부 지역의 작전에 투입하였다. F-5B는 비록 중무장하지는 못했으나 뛰어난 기동성과 쉬운 유지 보수성 때문에 호평을 받았다. 남베트남 공군 최초의 제트 전투기 비행대인 제522 전투 비행대는 곧 엘리트 비행대로 이름을 날렸다.
이어 미 국방부는 대게릴라전기(COIN)로 활용하기 위하여 세스나 A-37 드래곤 플라이의 실전 평가를 시작하였다.
코드 네임 "컴뱃 드래곤"으로 명명된 25대의 A-37A 드래곤 플라이 실전 평가가 4개월간 실시되었다.
평가를 맡은 제604 전투 특공 비행대는 A-37의 몇가지 결점을 발견하였으나 전반적으로는 성공적으로 평가하였다.
평가를 마친 미군은 노후환된 A-1 스카이레이더를 A-37A 드래곤 플라이로 대체하기로 결정, 1968년 여름에 60대를 공여하였다.
남베트남 공군은 1965년 9월 나트랑 기지에서 창설되었던 제524 전투 비행대를 A-37A 드래곤 플라이 비행대로 개편하였다.
A-37 드래곤 플라이는 간편한 유지 보수성과 더불어 우수한 폭장 능력 등 대지상 지원에 매우 적합한무기였다.
이후 A-37은 대량으로 공급되어 제524 전투 비행대를 비롯, 제516, 520 전투 비행대에 보급되었다.
A-37 드래곤 플라이 참조 : http://blog.naver.com/rectek2/19626668
[제516 전투 비행대 A-37 드래곤플라이]
[1967년 5월 12일 베트콩의 로켓 공격으로 파괴된 비엔 호아 기지 A-1 스카이레이더]
1968년 구정 공세 이후부터 남베트남 공군의 책임은 더욱 무거워졌다. 그러나 ECM 전자 대항 장비의 부족으로 단단한 대공 방어망이 형성된 호치민 루트 타격은 엄두도 못냈다.
그런데도 남베트남은 캄보디아를 침공하고 1971년 2월 라오스도 공격(람손 719)하였다가 대 피해를 입었다.
람손 719 작전 참조 : http://blog.naver.com/rectek2/10021066902
람손 719 작전 동영상 참조 : http://blog.naver.com/rectek2/10021135687
람손 719 작전 종료이후 전투는 소강 상태에 있었으나
1972년 3월 30일 북베트남군의 부활절 대공세가 개시되었다.
북베트남군은 신형 지대공 미사일로 무장하여 ECM등 대전자 방어 능력이 전무하였던남베트남 공군기들을 위험에 빠뜨렸지만 조종사들은 용감하게 싸웠다.
그러나 쾅트리 지역에서 열 추적 SA-7 스텔라 지대공 미사일에 많은 수의 A-1. A-37, C-123, C-119를 상실해버렸다.
또한 안록과 콘툼에서 UH-1 휴이 헬리콥터 63대가 격추, 391대가 대파되는 피해를 입었다. 이 전투에서 남베트남군은 헬리콥터 전력의 70%를 상실한 것으로 평가될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다.
쾅트리 전투 참조 : http://blog.naver.com/rectek2/10007354832
1973년 1월, 파리 평화 협상을 앞둔 미국은 교전 금지에 동의 하도록 남베트남 정부를 설득하였다.
미국은 군 현대화 프로그램을 마련, 북베트남군의 그 어떠한 공격에도 견뎌낼 수 있도록 한다는 방침이었다.
공군 현대화 프로그램의 핵심은 5개의 F-5A 비행대, 2개의 A-37 비행대, 2개의 C-47 수송 비행대, AC-119K 건쉽 및 C-119 비행대 조직과 RC-47 12대, A-1 스카이레이더 28대, UH-1 헬리콥터 32대의 공급이었다.
미국은 한국, 대만, 이란의 F-5A를 임대하여 그 수를 충당한다는 계획도 마련하였다. 이 프로그램은 더욱 강화되어 UH-1 헬리콥터 전력 강화,
그리고 노드롭 F-5E 타이거II를 제공하여 F-5A를 대체하기로 계획되었다.
프로그램은 몇 번의 변화를 거쳐 남베트남에 총 700대이상의 항공기를 제공하는 것으로 계획되었다.
F-5A와 F-5B 118대, A-37B 90대, UH-l 휴이 286대, CH-47 헬기 23대, AC-119 건쉽 22대, A-1 스카이레이더 28대,
C-130 수송기 32대, EC-47 전자전기 23대, T-37 훈련기 24대, O-2 수퍼 스카이마스터 35대가 공여될 계획이었다.
유지 능력이 미비한 나라에 25개 이상의 이토록 서로 다른 종류의 항공기가 제공된다면 혼란은 가중될게 뻔했다.
아무튼 남베트남은 약 2천대의 항공기에 65개의 비행대, 61,147명의 병사를 보유한 세계 제4대 공군력을 보유할 운명이었다.
그러나 1973년 1월 27일, 파리 평화 조약이 발효되어 미국은 베트남에서 발을 빼는 근거를 마련하였다.
1973년 쿠퍼 처치 수정안을 발효하여 의회의 승인없는 군사 행동에 제동을 걸었던 의회는 남베트남 원조 마저도 대폭 삭감하고 말았다.
전쟁 권한을 의회에 빼앗긴 미 대통령 닉슨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궁지에 몰려있었다.
이러한 미국의 정치적 상황 급변은 오로지 미국이라는 나라 하나만 구세주인 마냥 바라보고있는 남베트남 정부에게는 매우 불행한 일이었다.
[1965년 9월 나 트랑 기지에서 창설된 제524 전투 비행대 A-1 스카이레이더]
그동안 전달된 항공기들은 유지 병력 부족과 운용 시설 부족으로 비행 대신 격납고에 놓이는 신세가되었지만 북베트남에 비해 엄청난 항공력 우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항공 전력이 부족한 북베트남군은 대공 레이더와 SA-2 샘 및 견착식 SA-7을 DMZ 부근에 집중 배치하였다.
북베트남군의 SA-7도입으로 남베트남 공군의 항공력 우세는무의미해졌다.
1973년 말까지 28대의 각종 항공기가 SA-7에 격추 당했다. 피해가 급증하자 남베트남 공군은 UH-1 헬기의 배기 가스 덮개를 개조하여 열추적 효과의 반감을 꾀했다.
SA-7은 저공을 비행하는 헬리콥터에게는 재앙적 무기였다.
남베트남 공군은 1974년 말까지 전투와 각종 사고로 약 300대의 항공기를 손실했다.
예산도 부족해서 220대 이상의 항공기들을 비행금지시키고 격납고에 보관했고, 여기에는 61대의 A-1 스카이레이더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 가운데 북베트남은 병력, 포, 전차, 대공화기들을 전진 배치하는 등 평화 조약을 위반하고 있었다. 1973년, 남 베트남 공군은 지상군 엄호에 정신이없었다.
안록 부근 통레촌의 남베트남군은 공중 지원에의해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400소티 이상의 전투, 보급 출격이 있었고, 헬리콥터 5대가 격추당했다.
북베트남군 제320 사단이 플레이쿠로 접근하자 C-130 수송기가 제22 사단을 공수하였다. F-5, A-37, A-1이 출격하였으나 SA-7의 위협 때문에 고고도에서 폭격할 수밖에 없었고, 이 때문에 폭격 명중률은 형편없었다.
북베트남 대공포수들은 남베트남 항공기들이 37mm 대공포 유효 사거리 이상을 비행한다며 불평을 늘어놓았다.
1974년에 들어와 남베트남군은 심각한 예산 부족으로 연료가 부족하고 수리 부품도 제대로 조달되지 않았다.
자연히 출격 횟수도 감소하여 지상군의 지원요청에 신속히 응답할 수가 없었다. 이것은 그동안 공중 엄호에 익숙해있었던 지상군의 심각한 사기 하락을 불러왔다.
대공 화기의 위협과 악천후 등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남베트남 공군은 혼신을 다해 지상군을 공중 엄호하였다.
1년을 버텨냈던 통레촌이 함락 당하는 등 중부 고원지대의 남베트남 주요 기지들이 허물어지고 있었다.
호치민 루트 상공에서 북베트남군의 유입을 감시하던 RF-5전술 수색기 4대가 격추 당했다. 이렇듯 남베트남 정보부는 북베트남군의 동태를 제대로 감시할 수 없었다.
남베트남의 운명이 마치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았으나 미국으로부터는 그 어떠한 지원은 없었다.
[비엔 호아 기지에 주기된 수 많은 A-1 스카이레이더]
1975년 1월, 캄보디아 국경의 푸옥 롱이 북베트남군의 타킷이되었다.
사이공으로부터 불과 80마일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 푸옥 롱의 남베트남군은 3주만에 3천이 넘는 사상자를 내고 굴복해버렸다.
북베트남은 중부 지대에서 미국의 의중을 떠 보기위한 일련의 작전들을 실시하였다.
미국이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대로 밀고들어가기로 결정, 중부 전략 요충 반 메 두옷을 공격하였다.
반 메 두옷은 콘 툼과 플레이쿠를 연결하는 핵심 공급선인 14번, 21번 고속도로를 통제할 수 있는 요충이었다.
북베트남군은 중부를 점령하여 남베트남을 남북으로 단절시킨다는 계획을 마련하였다.
1975년 3월 9일밤 , 북베트남군 3개 사단은 포와 로켓, 박격포를 총동원하여 반 메 두옷 시가지와 비행장을 강타하였다.
남베트남군은 처절하게 저항하였으나 다음날 오후까지 도시의 절반을 잃었다.
공군의 오폭으로 폭탄 1발이 남베트남군 본부에 떨어져 통신이 마비되는 바람에 지휘 체계가 일시 마비되기도 하였다.
남베트남 공군은 5대의 북베트남군 전차를 격파하였다.
북베트남군은 항공기 출격을 저지하기 위하여 비행장을 집중 공격하였다.
관제탑을 방어하던 남베트남군은 증원군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렸으나 너무 멀리 있었다. 비행장을 함락시킨 북베트남군은 UH-1 헬기 10대를 비롯, O-1과 CH-47을 파괴하였다. 가까스로 활주로를 이륙한 UH-1 헬기 3대가 플레이쿠로 도피하였다.
3월 11에는 플레이쿠 기지의 A-37 3대가 122mm 포격에 파괴되었다.
치열한 전투가 3일 동안 전개되었으나 더 이상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다음날, 반 메 두옷이 함락되고 말았다.
4일 동안의 전투에서 공군은 200 소티 이상의 전투 출격을 하였으나 큰 피해를 입히지 못하고 말았다.
반 메 두옷이 함락당하자 티우 대통령은 캄란만에서 긴급회의를 열었다.
그 다음 표적이 플레이쿠일 것으로 판단한 티우대통령은 콘툼과 플레이쿠에서 병력을 철수시킨 다음 전력을 재정비하여 역습을 가하려고 하였다.
역습을 기대하며 병력을 질서정연하게 철수시킨다는 티우의 계획은 어이없는 결과를 가져왔다. 대통령의 명령이 와전되어 지휘관이 두 도시 모두를 긴급히 버리라는 명령을 하달했던 것이다.
플레이쿠의 6비행사단장은 상부로부터 48시간 내에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게되었다. 공군은 C-123, UH-1, CH-47로 병력을 실어날랐다.
3월 16일, 북베트남군 320사단의 포화가 쏟아지는 가운데 남베트남군은 7B 고속도로를 따라 해안 쪽으로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온갖 피난 차량들이 도로를 가득 메웠고, 차량이 없는 민간인들은 걸어서 걸어서 해안을 향해 나아갔다.
남베트남군 사이에서 총격전이 일어나고, 군인이 민간인을 약탈하였으며
공군의 오폭으로 퇴각하던 레인저 병사들이 사망하는 등 그야말로 처참한 퇴각이었다.
플레이쿠 기지 철수 당시 미처 파기시키지 못한 다량의연료와 함께 64대의 항공기가 고스란히 북베트남군의 손에 넘어갔다.
3월 25일 투이 호아까지 간신히 퇴각한 병사들은 며칠 후 또 다시 집중 포화를 만나게된다.
[비엔 호아 기지에 착륙하는 A-1G 스카이레이더 / 1971년]
중부의 재난은 쾅 트리 다낭 등 북쪽 제1군단 지역 병사들과 민간인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1군단 병사들의 사기는 바닥에 떨어져 정예 부대라는 자부심은 어디에도 없었다.
민간인과 뒤엉킨 1군단의 퇴각은 그야말로 혼란의 극치를 이루었다.
북부 후에와 남부 추 라이의 민간인과 군인들이 1번 고속도로를타거나 배를 타고 다낭으로 도피해왔다.
3월 28일, 다낭 비행 기지에 포화가 쏟아지자 제1 비행사단장은 퇴각을 명령했다.
그러나 약 130대 정도만 탈출했을 뿐 180대 이상의 항공기와 연료 및 부대 시설은 노획당했다. 그 중 A-37 드래곤 플라이 33대가 온전한 상태로 북베트남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3월 29일자로 다낭이 무너진데이어 퀴논과 나 트랑도 빠르게 함락당했다.
콘 툼, 플레이쿠에 이어 다낭 함락은 남베트남군 전체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승리를 확신한 북베트남군은 병력과 장비를 총동원하여 해안을 따라 남하하였다. 북베트남군은 남베트남군이 방어선을 편성하지 못하도록 일관된 타격을 가했다. 북베트남군 병력과 전차, 트럭, 야포들이 광범위하게 전개되어
공습에 매우 취약한 상태였지만 남베트남 공군은 이를 무시하였다.
푸켓 과 판랑에서 발진한 A-37 드래곤 플라이 조종사들이 퀴논으로 날아가 공중 지원하였으나 연안의 여러 성들은 무기력하게 무너져 버렸다.
푸켓 기지의 경우 남베트남군이 방어선을 포기하고 달아나 버렸기 때문에 기지 주변에 북베트남군이 깔려있었다.
재급유와 함께 폭탄을 장착하고 긴급 이륙한 A-37 조종사들은 적이 너무 가까이 접근해 있어서 랜딩 기어를 접지도 못한 채 폭탄을 투하해야만 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푸켓 기지가 함락당하자 조종사들은 비엔 호아 또는 판랑으로 도피해야했다.
4월로 접어들면서 남베트남 정부는 최악의 고비를 맞게되었다.
북베트남군이 수도 사이공 인근 비엔 호아, 탄손 누트를 공략하기 시작하였다. 동영상에는 푸옥 롱 함락과 함께 중부 주요 도시들이 연이어 함락당하자 동해안으로 퇴각하는 군과 민간인의 행렬,
포위당한 다낭에서의 필사적 탈출과 다낭 기지의 항공기와 전차 등 전리품을 노획하는 북베트남군이 보입니다
4월 8일에는 남베트남 공군 F-5 조종사가 대통령 궁을 폭격한 후 전향해 버리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아래 그림 참조)..
남베트남 제18사단 5천명의 병력은 사이공의 관문 수안 록을 최후의 방어선으로 설정하였다. 남베트남군에게 있어서 만약 방어에 실패한다면 수안 록 전투는 최후의 전투가 될 수도 있었다. 공군은 가용한 항공기를 최대한 동원하여 공중 지원하기로 하였다.
북베트남군은 사이공으로 연결되는 도로를 차단한 다음 탄손 누트를 포격하였다.
4월 9일, 북베트남군 4만의 병력이 5천명이 방어하고 있는 수안 록을 포위 공격하였다. 쌍방은 치열한 포격전을 벌였다.
A-1 스카이레이더는 가능한한 최대로 폭장하여 출격하였으며, 가용한 공군기들은 데이지 컷터와 네이팜, 1,500파운드 폭탄 등 모든 종류의 폭탄들을 적재하고 전투에 돌입하였다. 쉴 새없이 헌신적 출격을 감행한 공군 조종사들은 전방 항공 통제 지원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정밀 타격 지원을 하지 못했다.
4월 22일, 증원이 전무한 가운데에서도 사투를 벌였던 18사단 생존자들이 사이공으로 퇴각함으로써 전투는 종료되었다.
수안 록 함락 후 조종사들은 포화가 쏟아지는 탄손 누트 기지에서
악착같은 이착륙을 시도하고 있었지만 비엔 호아 기지를 지원해줄 수는 없었다. 4월 28일에는 3대의 A-37 드래곤 플라이가 탄손 누트를 공격하는 일도 벌어졌다. 과연 그 항공기 조종사는 누구였는가에 대해서는...
1명은 4월 8일 대통령 궁을 폭격한 구엔 탄 트룽 대위(북베트남 주장)라 한다. 다만 나머지는 공산주의 사상을가진 남베트남 공군 조종사,
가족의 안전을 우려, 어쩔 도리없이 공격한 조종사,
노획한 A-37을 북베트남 조종사가 조종한 것이다라는 추측만 가능했다. 탄손 누트 기지 활주로는 포격 때문에 고정익 항공기의 이착륙이 점점 불가능하게되었다.
[A-37 드래곤 플라이와 북베트남 공군 조종사들]
구엔 탄 트룽 대위(맨 왼쪽)는 1975년 4월 28일 A-37 드래곤 플라이로 탄손 누트를 공격했다. 북베트남군은 그가 4월 8일에 대통령궁을 공격하고 전향한 베트남 공군 F-5 조종사 출신이라고 선전하였으나 확인된 바 없다.
사이공은 북베트남 14개 사단에의해 포위당해 있었다.
10여 개 사단에 포위당한 사이공,남베트남 몰락은 단지 시간 문제일 뿐이었다.
4월 29일, 포드 미 대통령은 프리퀀트 윈드 작전을 명령, 자국민 철수를 개시하였다. 탄손 누트 기지 공군 조종사들은 독자적 또는 가족을 태우고 태국이나 해상의 미해군 함대로 날아갔다.
남베트남 공군 최후의 필사적 저항은 4월 30일 새벽, 탄손 누트 기지 방어에서였다. 기지를 이륙한 AC-119K 건쉽과 2대의 A-1 스카이레이더가 밀려드는 북베트남군을 공격하였다. A-1 한 대는 SA-7 미사일에 격추 당했다.
AC-119K 건쉽 조종사는 4,000피트 이하의 고도로 내려와 기관총 사격을 가했다. 지상에서 발사된 2번째 SA-7 미사일이 건쉽의 우현 엔진을 강타하여 화염에 휩싸였다. 승무원들이 추락하는 건쉽에서 비상탈출, 1명은 동체에 걸려 실패했으나 3명은 낙하산을 전개하여 성공했다.
탄손 누트를 접수한 북베트남군은 26대의 A-1 스카이레이더를 노획하였다. 약 100대 정도의 각종 헬리콥터들이 해상의 미 함대로 탈출해왔으며, 그 중 절반 가량은 비행 갑판 공간 확보를 위해 바다에 버려졌다. 11대의 A-1 스카이레이더도 태국으로 도피하였다.
그외 F-5 26대, A-37 8대, C-130 6대, C-47 13대, C-7 5대, AC-119 3대가 태국으로 도피한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어느 단좌 A-1H 조종사는 비좁은 조종석에 아내와 아이 두명을 태우고 탈출에 성공하였다. 미국 망명이 허락된 남베트남 조종사들은 무척 운이 좋은 사람들이었다. 소수의 조종사들은 미국 항공 회사에 취업하였고,미해군에서 중령까지 근무한 사람도 있었다.
[A-1 스카이레이더(SKYRAIDER) / 남 베트남 공군 A-1 스카이레이더]
출처 : rectek2님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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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베트남은 스카이레이더들의 최후의 활약터로 많은수의 스카이레이더들이 투입되어졌고 또 소모되어졌습니다.
A-1 스카이레이더는 1945년 첫비행에 성공한 이래 1957년 까지 총 3,180 대가 생산되어 본가였던 미해군에서는 물론이고 미공군과 해병대에서도 채택하여 1970년대 초까지 운용되었고 그밖에 영국, 프랑스, 스웨덴, 남베트남, 캄보디아에도 공여되어 영국 해군항공대가 1991년까지 사용하는 등 잘 만들어진 무기는 장수한다는 것을 확실히 증명하기도 하였습니다.
비록 1972년 A-4 스카이호크 나 A-6 인트루더 같은 새로운 제트 전투기들의 등장으로 스카이레이더들은 모두 미군장비에서 도태되었지만 후에 이들 기체의 운용경험과 설계개념들은 현재에도 운용되고 있는 A-10 Warthog 에 계승되어졌습니다.
스카이레이더의 후속기가 될 뻔했던 공격기A2D-1 스카이 샤크 Skyshark
1945년 6월 25일.
더글러스 사는 해군으로부터 터보프롭(turboprop-powered) 함상 발진 공격기의 개발을 의뢰받는다.
해군은 연료소모가많은 제트추진 항공기에 비해 훨씬 경제적인 공격기를 원했던 것이다.
원래 스카이레이더의 원형기인 XBT2D-1에 세가지의 터보프롭 엔진으로 시험할 계획이었으나 문제가 많아 모형이 만들어지기 직전에 취소시키고 여러회사에 새로운 엔진의 개발을 의뢰하게된다.
해군은 XT40-A라 명명한 엔진의 개발을위하여 1945년12월 제너럴 모터스의 앨리슨 엔진분과와 개발계약을 맺는다.
1947년 늦은봄, 해군은 터보프롭 공격기 개발에대한 요구조건을 변경하였다.
새로운 공격기는 적항공기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능력을 갖추어야한다는 것이었다. 말그대로 공격기이지만 공대공 전투를할 수 있는 전투공격기를 만들어내라는 것이었다. 이 새로운 항공기는 XA2D-1이라 명명되었고, 1949년 9월 25일 2대의 원형기 제작을 지시받게된다
1번째 XA2D-1는 1950년 3월 26일에 처녀비행에 나섰다.
이 테스트 비행에서 엔진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이 밝혀진다.
태평양 건너 한국 전쟁은 해군에게 새로운 함상 발진기의 필요성을 부채질했다.
스카이 샤크 개발프로그램이 몇몇 심각한 문제를 만났던 사실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발주로이어진다.
1950년 6월 30일,10대의 A2D에대한 발주가 이루어지고, 8월 18일에는 81대 이상의 발주가 추가로 이루어진다.
캘리포니아, 캐롤라이나등의 몇몇 하청업자들의 공장에 스카이 샤크의 생산 라인이 확보되었다.
한편, 테스트 비행은 최악의 상황을 연출한다.
1번째 XA2D-1 기체가 1950년 12월 19일 테스트비행 중 추락하여 조종사가 사망한다. 이 사고 후 1952년 초까지 비행이 금지되었다.
앨리슨 T40엔진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고 해군도 서서히 스카이 샤크에대한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단 더글러스 사에서는 추가로 스카이레더가 계속 생산되었기 때문에 해군은 향 후 몇 년간은 더 기다릴 수 있다는 유연한 입장에있었다.
1번째 생산 된 A2D-1이 테스트 파일럿 조지 젠슨에의해 1953년 6월 10일 비행에 성공했고 4대의 기체들이 더 생산되었다.
하지만 1954년8월5일에 계속 수행된 테스트 비행에서 엔진의 심각한 결함과함께 여러 가지 부품들의 결함으로인해 기체가 추락하는 사고가 다시 발생했다.
다행히 조종사는 긴급탈출하여 목숨을 건졌다.
이렇게되자 이미 생산되었던 나머지 4대의 비행은 그 후로 이루어지지못한다.
결국 해군은 발주를 취소하고 스카이 샤크의 생산라인을 폐쇄하도록 명령하게된다.
2개의 앨리슨 T-40 M 터보 프롭엔진의 힘으로 2개의 프로펠러가 서로 반대방향으로 작동하며, 비행 중 연료를 아끼기위해서 한 개의 엔진을 꺼둘 수도있었다.
추락한 2대를 포함한 총 6대가 생산되었을 뿐이다.
원래 폐기처분하려했다가 엔진을 떼낸 기체로 로스엔젤레스 국제공항의 레이다 영점 수정용으로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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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일부는 민간인들에게 불하되어 현재에도 각종 에어쇼에서 심심치 않게 보여지는 기체중 하나 입니다.
여담이지만 베트남전에서 맹활약한 스카이레이더 덕에 이후 개발되어진 프롭기 형태의 훈련기 기종들중에는 무장능력을 가미해 스카이레이더처럼 사용하려는 시도가 많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KA-1 웅비도 그런 기종중 하나 입니다.
AD-7 / A-1J 제원:
엔진: 2800hp Wright R-3350-26B radial piston engine
중량: 자중 10,550 lbs., 최대이륙중량 25,000 lbs.
익폭: 50ft. 9in.
길이: 38ft. 10in.
기고: 15ft. 8.25in.
최대속도 18,000ft: 320mph
순항속도 6,000ft: 190mph
상승고도: 25,500ft
항속거리: 900 miles
무장: 20mm cannon 4문, 8,000lbs 무장
생산수량: 3,180대
더많은 사진과 정보는 http://skyraider.org/skyassn/imcol.htm를 참조할 수 있습니다
A-1H Skyraider 일반제원
승무원: One
길이: 38 ft 10 in (11.84 m)
익폭: 50 ft 0 in (15.25 m)
기고: 15 ft 8 in (4.78 m)
익면적: 400.31 ft² (37.19 m²)
자중: 11,970 lb (5,430 kg)
적재중량: 13,925 lb as scout; 18,030 lb as bomber (6,315 kg as scout; 8,180 kg as bomber)
최대이룩중량: 25,000 lb (11,340 kg)
엔진: 1× Wright R-3350-26WA radial engine, 2,700 hp (2,000 kW)
성능
최대속도: 320 mph (280 knots, 520 km/h)
슨항속도: 295 mph (256 knots, 475 km/h)
항속거리: 1,315 mi (1,142 NM, 2,115 km)
상승고도: 28,500 ft (8,660 m)
상승율: ft/min (m/s)
익하중: 45 lb/ft² (220 kg/m²)
Power/mass: 0.15 hp/lb (250 W/kg)
무장
기관포: 4 × 20 mm (0.787 in) cannon
기타: Up to 8,000 lb (3,600 kg) of ordnance on 15 external hardpoints including bombs, torpedoes, mine dispensers, unguided rockets, or gun pods
용도 : 공군(후 미 해군)공격기 및 정찰기
승무원 : 1~4인(형식에 따라)
최초비행년도 : 1945년 3월 18일
채용년도 : 1946년
제조사 : 더글러스
전장 : 11.7m
전폭 : 15.2m
전고 : 5.3m
중량(공기체) : 4,766kg
중량(공격기) : 8,180kg
중량(정찰기) : 6.316kg
엔진 : 라이트 R-3550-24W 2,500마력 1기
속력 : 300마일/시
최대상승고도 : 7,300m
무장
기총 : 20mm M-3 기관포 x 2
폭탄 : 동체에 1,000파운드 폭탄 1기, 양익에 1,000파운드 폭탄 2기
폭뢰 : 동체에 650파운드 폭뢰 1기, 양익에 650파운드 폭뢰 2기
어뢰 : Mk-13-3어뢰 동체와 양익에 3기
기뢰 : 1,000파운드 기뢰 동체와 양익에 3기
로켓 : 11.75 '타이니 팀(Tiny Tim)'로켓 또는 12 HVAR 로켓 2기
참고싸이트 및 실기체 자료출처
미라지의 콤프방 (www.compmania.co.kr)
아카데미 홈페이지 (http://www.academy.co.kr)
트럼페터 홈페이지 (http://www.trumpeter-china.com/)
유용원의 군사세계(http://bemil.chosun.com/)
비겐님의 블로그
(http://kr.blog.yahoo.com/shinecommerce/2227.html?p=1&t=3)
위키백과사전 영문판 (http://en.wikipedia.org/wiki/A-1_Skyraider)
http://en.wikipedia.org/wiki/Douglas_A2D_Skyshark
http://www.vectorsite.net/ava1spad.html
http://wingsovereurope.com/a-1_skyraider.html
참고서적
KODEF 군용기 연감 ( 2007년 10월11일 도서출판 플래닛미디어 양욱 지음)
F-15K SLAM EAGLE
(2007년 6월20일 도서출판 플래닛미디어 양욱외 ISBN 978-89-92326-18-6))
Future Weapon (군사연구 황재연 정경찬 저자 2008.5.25)
2007 한국군 무기연감 (군사연구 황재연, 박재석, 김정환 2006.10.15일 초판)
* Wrighten By Mirageknight (2011.12.27 Ver 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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