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전왕(額田王)의 노래
일본은 아름다운 섬들의 나라다. 해안선이 길어서인지 바닷가 경관도 기기묘묘한 데가 적지 않다.
와카야마현(和歌山縣 화가산현)남부 니시무로군(西牟婁郡서모루군) 시라하마(白浜백퐁.백빈)온천도 그런 고장이다.
태평양에 접한 높은 바위벽 아래에 커다란 바다 굴이 있다. 「3단벽(三段壁)동굴」이라고 불리는 이 굴 안은 어찌나 넓은 지, 중세에는 해적이 배를 숨겨 은신하는 데로 삼았다고들 한다.
붉은 갈색의 벽면 가득히 주름이 잡혀있다. 5천만년 전에 형성됐다는 소위, 「연흔」(漣痕)이다. 태평양의 세찬 파도가 쉴새없이 몰아쳐 들어와 벽면을 교묘히 조각해 놓은 것이다. 흡사 여성의 질벽(膣壁)이다.
동굴 안에는 「분수바위」라는 것도 있다. 이따금 수미터 높이로 고래처럼 힘차게 바닷물을 힘차게 뿜어 올리는 이 바위는 여성의 「쾌락의 절정」을 방불케 한다. 굴 어귀부터 무서운 속도로 물살이 몰려와 막다른 곳에 깊숙이 부딪치고는 하얗게 부서져 물러난다. 그리고 또 몰려온다.
장관이다. 대자연이 만들어낸 에로티시즘의 걸작. 마치 남녀간의 성애행위를 상징하는 듯한, 살아있는 예술이다.
이 시라하마에서 읊어진 노래 한 수가 있다. 「만엽집」제 1권 에 수록된 통번 제 9번의 노래, 액전왕(額田王·누카타 노오호키미)이라는 여류 가인(歌人)의 작품이다.
액전왕은 수수께끼의 여인이다. 태어난 것이 언제인지, 태어난 곳이 어디인지,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동경(銅鏡)을 만들어 일본왕실에 바쳤던 경왕(鏡王·카가미노오오)의 딸이라는 설도 있으나 확실치 않다. 그러나 그녀가 7세기 후반의 일본을 대표하는 뛰어난 시인 중의 하나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애초엔 백제계인 제명(齊明·사이메이 655∼661)여왕의 시중을 드는 궁녀였다. 무녀(巫女)였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주로 여왕의 말을 기록하거나, 여왕의 뜻을 받아 노래를 대신 읊거나 하는 스피치 라이터 구실을 했던 것 같다.
그러다 대해인(大海人·오호아마)과 맺어져 그 사이에 딸 하나를 둔다. 대해인은 훗날 백제계 조정을 뒤엎어 쿠테타로 정권을 장악한 천무(天武·.텐무)천왕이다. 천왕이라는 칭호는 그로부터 쓰게됐다고 전해진다. 그는 신라세력을 업은 고구려계인물로 치부되어 있다.
「임신(壬申)의 란(亂)」이라 불리는 쿠테타는 672년에 일어났다. 백제가 쓰러진 것이 660년(그 후 3년간은 백제유민들의 치열한 항쟁이 계속됐다), 고구려가 멸망한 것이 668년이니까, 신라의 「삼국통일」이 이룩된 지 4년후에 터진 대정변이다. 그 전까지의 일본왕은 천지(天智·텐치)와 대우(大友·오호토모)였다.
천지는 대명여왕의 아들, 대우는 천지의 아들이다. 줄곧 백제계가 일본에서 패권을 잡고 있었던 셈이다. 천지의 즉위 전 이름은 중대형(中大兄·나카노오호에)이다.
720년에 간행된 일본 역사책 「일본서기」(日本書紀)는 중대형 즉 천지는 대해인, 즉 천무의 친형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이들은 형제가 아닌 「남남」이었음이 판명되고 있다.
661년 제명여왕이 돌아가자 어찌된 영문인지 액전왕은 애인인 대해인과 헤어져, 중대형, 즉 천지의 후궁으로 들어간다. 천지가 액전왕을 원했고, 그래서 대해인이 「양보」했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액전왕이 자진해서 후궁으로 들어갔다는 설도 있다. 아무튼 당대의 재원을 두고 한반도에서 간 사람들로 보여지는 두 호걸이 묘한 신경전을 벌였던 것은 사실이다. 그 갈등의 양상이 노래에 나타나 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658년 음력 10월, 제명여왕은 시라하마온천(당시의 이름은 「기온탕(紀溫湯)」)으로 요양을 떠난다. 이때 액전왕은 물론 중대행도 수행한다. 「만엽집」권1-9의 노래는 이때 읊어졌다. 어렵기 그지없는 노래. 일본학자들이 읽다 읽다 숟가락을 내던진 노래이다.
25자의 한자로 엮어진 노래지만 물론 한시(漢詩)는 아니다. 한자의 소리(音)와 새김(訓)에서 빚어지는 음을 빌려 당시의 말을 옮겨 적은, 우리의 고대표기 이두(향찰)처럼 쓰여져 있다. 우리의 신라향가와 비슷한 씀새지만, 더러 일본식 한자의 음독(音讀)과 훈독(訓讀)이 섞여 있는 것이 특색이라면 특색이다.
오늘날의 한국식 음과 훈, 그리고 오늘날의 일본식 음과 훈을 뒤섞은 듯한 상태. 이것이 7세기 후반의 일본에 유통되어 있던 한자의 모습이었을까. 어떻든 그런 수법으로 이 노래는 읊어지고 있다. 게다가 말투는 요즘의 경상도 사투리를 떠올리게 한다.
「원광석」(原鑛石)과 같은 그 원시(原詩)를 봐주기 바란다. 한자 덩어리라고 겁낼 건 없다. 이 한자 덩어리 속에 아주 쉬운 우리 옛말이 숨어 있어 마치 퀴즈를 푸는 기분이다. 한자도 배울 겸 한번 도전해 보자.
莫효 圓隣之 大相七兄爪謁氣
(막효(시끄러울효) 원린지 대상칠형조알기)
吾瀨子之射立爲兼 五可新何本
(오뢰자지사립위겸 오가신하본)
「莫」(막)에서 「氣」(기)까지, 12자의 전반귀절은 현재까지 해독 못한 채 완전 포기되어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吾」(오)에서 「本」(본)까지의 후반귀절은, 「해독되었다」고는 하나 있으나 무슨 뜻인지 도무지 요령부득이다. 일본말로 읽어진 해독문은 나중에 소개하기로 하고, 먼저 우리말로 한마디씩 읽어보자.
莫효圓隣之
「莫」은 우리식 음독으로 「막」이라 읽힌다. 받침인 「기역」은 없애고 「마」로 쓰고 있다. 이두는 이와 같이 받침을 잘라서 쓰는 경우가 적지 않다. 「莫」은 일본식 음독으로도 우리와 비슷한 「마쿠」(마쿠)다. 그중 첫소리만 따면 역시 「마」가 된다.
「효」는 우리식 음독으로 「효」라 읽힌다. 그러나 일본식 음독으로는 「고우」(고우)다. 옛음으로는 「게우」(게우)라고도 읽었다. 그 첫소리만 따면 「고」 또는 「게」다.
그래서 「莫효」 두자는 「마고」 「마게」 라 읽어진다. 마고, 마게란 대체 무엇인가.
단재 신채호(申采浩)선생의 「조선상고사」등에 의하면 껍질을 벗긴 삼대, 즉 겨릅대를 우리 옛말로 「저릅」또는 「삼게」라 불렀는데, 이것을 「계립(鷄立)」 또는 마목(痲木), 「마계(痲稽)」라 이두표기했다한다. 껍질을 벗긴 삼대가 남근 모양같다 해서, 「저릅」또는 「삼게」는 「남근」의 뜻으로 쓰인 우리 옛말이다. 경상북도 문경(聞慶)의 북산 이름은 계립령(鷄立嶺·옛이름은 「저릅재」)이다. 이것은 산모습이 마치 남성의 성기같다 해서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저릅」「계릅」이란 소리를 「계립(鷄立)」이란 한자로 옮겨 쓴 이두 표기라 할 수 있다.
한편, 「삼게」는 「마게」라고도 불렸다. 712년에 편찬된 일본의 또 하나의 고대 역사책 「고사기」(古事記) 의 신화편에는 「마구하히」(麻具波比·마구하히)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성행위」를 뜻하는 낱말이다. 「마구」(麻具)는 「마게」와 같은 말, 즉 「남근」. 「하히」(波比)는 「부비」의 우리 옛말 「바비」를 일본식으로 읽은 것으로, 「마구바비」 는 「남근부비」라는 성행위를 뜻하는 우리 옛말임이 밝혀진다.
액전왕은 「莫粠」(막효)라는 두자로 이 「마게」즉 「마구」(「마고」라고도 발음되었음)를 표현하려 한 것이다.「마게」를 표기하는데, 하필이면 왜 이렇게도 어려운 한자를 골라 썼을까. 여기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해독을 다 한 후에 설명하기로 하자. 「圓隣之원린지」3자는 「동글리지」말을 이두식으로 표기한 글자이다 .즉 「동굴리지」(돌리고 굴리 지)의 뜻. 「마게 동글리지」. 노래는 이렇게 첫 구절부터 심상치 않게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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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이영희 - 노래하는 역사
네이버 책소개
『노래하는 역사』는 <이영희의 한.일 고대사 이야기>시리즈의 첫번째 권으로 조선일보 일요연재로 1993년 5월부터 1994년 7월까지 1년여 동안 써 온 '노래하는 역사'를, 이왈종 화백의 그림과 함게 펴낸 책이다. 일본의 옛 노래묶음인 『만엽집』과 일본의 정사서 『일본서기』를 비교해 우리 고대어로 추적한 왜곡된 한.일 교류사의 진실을 엿볼 수 있게 해주는 책이다.
첫댓글 일본 고대사를 알 수 있어 참 좋았어요^^
잘 읽었습니다^^
흥미롭네요
액전왕은 수수께끼의 여인이다. 태어난 것이 언제인지, 태어난 곳이 어디인지,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녀가 일본의 뛰어난 시인중의 하나임에는 분명하고 하네요. 재미있는 자료입니다.^^
동굴 안에는 「분수바위」라는 것도 있다. 이따금 수미터 높이로 고래처럼 힘차게 바닷물을 힘차게 뿜어 올리는 이 바위는 여성의 「쾌락의 절정」을 방불케 한다. 굴 어귀부터 무서운 속도로 물살이 몰려와 막다른 곳에 깊숙이 부딪치고는 하얗게 부서져 물러난다. 그리고 또 몰려온다.
장관이다. 대자연이 만들어낸 에로티시즘의 걸작. 마치 남녀간의 성애행위를 상징하는 듯한, 살아있는 예술이다.
한번 가보고싶어요^^
잘 읽었어요~
'일본학자들이 읽다 읽다 숟가락을 내던진 노래이다. ' 라는 표현이 재밌네요^^; 액전왕에 대해 좀 더 알아보고 싶어집니다. 좋은 자료 잘 읽었습니다.^^*
액전왕이라 액션왕인줄 알았어요
재밌는 글이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