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튀김을 만들려면 기름이 많이 들어가 쉽지 않다. 그렇다고 안할 수 없고 작은 용기에 기름을 붓고 기울여 고구마를 잠기게 하여 튀겨내고 물엿을 발라 맛탕을 만들었다.
그 다음에 냉동으로 된 탕수육 오징어 튀김등을 순서대로 튀겨 먹기도 한다.
맛탕은 중국집에서 후식으로 내놓기도 해서 과거 군대 가기전 중국집(시내 중심가다 보니 요리손님이 많았다.)에서 배달일을 할 때 먹어 보기도 했는데 당시 후식엔 호두나 땅콩을 이용한 강정 비슷한 것을 내놓고 쉬는 틈틈이 주방장은 무를 깎아 장미꽃도 만들어 빨간 물감을 들이기도 했었다.
당시 중국집 주인은 화교였는데 인상이 무서운 10대 고등학생 보다 부드러운 20대 대학생을 뽑았는데(내가 부드럽다는 이야기가 아님) 당시 힘든 공사장에서 여름은 일을 할 수 있었지만 (당시에도 막노동을 하던 학생들이 많았다.)겨울엔 일이 없어서 중국집엘 갔고 난 그때 왠만한 중국음식은 구경만 한 것이 아니라 맛을 볼 수 있었다.
9시에 출근해서 밤 10시 정도에 퇴근을 하는데 중국집에서 세끼를 아침엔 밥 늦은 점심엔 그날 그날 주는 대로 면종류를 밤엔 밥을 먹었는데 잘먹고 일을 하는데도 한달 지나니 몸무게가 5킬로가 빠졌는데 주로 시내번화가다 보니 자전거를 이용했고 지금은 흔한 랩같은 비닐은 없었으며 숙달이 되니 흘리지 않도 배달을 했었다.
양장피, 라조육, 라조기, 난자완즈, 부추잡채,해삼탕등을 당시 배달시키는 곳이 많았고 가끔은 정식을 생일잔치상으로 차리는데 바닷가재 같는 특이한 요리가 있어 구경을 한적도 있었다.
당시 주방장은 나보나 5~6살 많은 젊은 청년이었는데 솜씨가 좋았고 요리할 때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하다보니 주인도 간섭하지 않았고 일하는 과정에 화내고 신경질이 나도 일이 끝나면 포장마차에 가서 중국집의 말린 해삼말고 살아있는 해삼에 소주마시는 걸 좋아했고 나의 친구들 모임에 불러 술을 마시기도 했었다.
궁금한 걸 물어보면 알기 쉽게 대답해주었고 그와 난 더 친해졌다.
주인은 화교지만 요리를 못했고 당시 재료는 화교들의 가게에서 구입했고 주인 보다 부인이 주로 일을 했고 우리글이 서툴러 내가 편지를 대신 써준 적도 있었다.
당시 80년대 중후반은 한 중외교가 시작되기 전이다 보니 주로 대만으로 왕래를 했었는데 생각보다 화교들이 많다는데 놀랐었다.
고생도 되고 힘들었지만 사람들 사는 모습을 더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었고 친구가 오 면 주인 아주머니는 무료로 면종류를 만들게 하여 주곤 했었다.
군에 가기전 월급을 받아 친구들에게 한잔 사기도 하고 휴가 때 그곳을 들려 주방장 형과 포장마차에서 한잔을 했던 기억이 난다.
다양한 요리가 있었지만 난 맛탕을 보면 당시 중국집에서 후식으로 나오던 것이 생각나고 일 끝나면 가끔씩 가던 포장마차가 생각난다.
군산이 고향이던 한기형! 안녕하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