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기다리며
너를 기다리기
백 년이
걸린다
너를 잊기까지
죽어서
또 백 년이
걸린다
나는 산정에 선
한 그루
나무,
하늘이 푸르다
아름다운 이름 하나
하늘에 작은 별 하나
빛날 때까지
얼마나 많은 밤 꽃들이 피어나
하늘길 밝혔을까
강가에 꽃 한 송이
피어날 때까지
얼마나 많은 밤 별들이 반짝이며
강물 위에 빛났을까
하늘과 땅 사이
아름다운 이름 하나,
얼마나 더 많은 밤
잠 못 이루고
사무쳐야
내 가슴에 피어날 수 있을까
그 겨울
겨우내 하얀 눈이 쌓이는
고향 집 삼밭
캄캄한 구덩이 속에서는
샛노란 무 싹들이 세상 소식 궁금하다고
기지개를 켜며
새록새록
고개를 밀어 올리고 있었습니다
산길에서
나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면
깊은 산 외딴 길섶에
한 송이 이름 없는 작은 꽃으로 피어나리라
혹여, 그대가 한 번쯤
하찮은 실수로
바람처럼 내 곁을 머뭇거리다
지나칠 때
고갤 꺾고 꽃잎 한 장 바람결에 날려 보리라
눈길
어둑새벽 눈길 위엔
시묘 살던 서당집 훈장 할아버지 짚신 발자국과
석유등 밝히고 새벽예배 간
천안할머니,
조그만 신발 자국이 나란히 찍혀 있었습니다
장길
빚봉수 서고
팔려가는
소
자운영 꽃 피는
논둑길 건너갈 때
울아버지
홧병,
쇠뿔 같은 낮달이
타고 있다
한내
장길
먼길
한 사날-
진달래꽃 길을 따라 혼자 걸어서
그대 사는 먼 곳 외딴 그 오두막 찾아가 보고 싶네
폭설처럼 꽃 지는 저녁
길 위에 엎어져 영영 잠들어도 좋겠네
꽃신 한 켤레
허리춤에 달랑 차고
불두화 피는 밤
워낭 소리 무심히
빈 뜰을
채우는 밤
몽실몽실
달 아래
불두화 벙그는 소리
외양간 소가
귀 열고
가만-
눈 감으시다
망종 무렵
할아버지 소와 함께 비탈밭을
가신다
송아지는 심심하다고
어미 그림자 졸졸 따라다닌다
개옻나무 아래 잠시
할아버지 눈 붙이시는 동안
커다란 두 눈 슴벅이며
어미는 연하여 송아지 목덜미를 핥아 준다
초아흐레 흐린 낮달이
가새뽕나무에 걸리는 한나절,
쑥꾹새 울음 따라
빨간 오디가 먹빛으로 익는다
병아리들의 기도
거룩하여라,
물 한 모금
머금고
하늘을
우러르는
저
꼬마 성자들!
딸에게
너는
지상에서 가장 쓸쓸한 사내에게 날아온 천상의
선녀가
하룻밤 잠자리에 떨어뜨리고 간 한 떨기의 꽃
첫눈 내리는 날에 쓰는 편지
소한 날 눈이 옵니다
가난한 이 땅에 하늘에서 축복처럼
눈이 옵니다
집을 떠난 새들은 돌아오지 않고
베드로학교 낮은 담장 너머로
풍금 소리만 간간이 들려오는 아침입니다
창문 조금 열고
가만가만 눈 내리는 하늘 쳐다보면
사랑하는 당신 얼굴 보입니다
멀리 갔다 돌아오는 메아리처럼
겨울나무 가지 끝에
순백의 꽃으로 피어나는 눈물 같은 당신,
당신을 사랑한 까닭으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기다림의 세월은 추억만으로도
아름답지만
이제는 가야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당신을 만나서는 안 되는 까닭은
당신 만날 날을 기다리는 일이
내가 살아온 까닭의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한 방울 피가 식어질 때까지
나는 이 겨울을 껴안고
눈 쌓인 거리를 바람처럼 서성댈 것입니다
목
산다는 것은
목을 내놓는 일이다
목을 씻고
하늘을 우러르는 일이다
저녁에 돌아오며
목을 만져보는 일이다
밥과 법
밥이 있다
법이 있다
밥이 있고
법이 있는가
법이 있고
밥이 있는가
밥 속에
법이 있는가
법 속에
밥이 있는가
밥이 법을 먹으면
콩밥이 된다
법이 밥을 먹으면
합법이 된다
밥이 법이다
법이 밥이다
평창강 물수리
물수리가 수면 위를 스치듯
잽싸게
누치 한 마리를 낚아챘다
물수리 품에 안겨
번뜩이는 은빛 비늘 세우고 하늘 여행 떠나는
누치,
물수리 나랫짓 따라
좌로 우로
꼬리지느러미를 흔들어 주었다
검은댕기해오라기가
고갤 갸우뚱,
멍한 눈으로 하늘 속을 들여다본다
딸 시집보내고
신발장에 벗어놓은 네 조그만 구두
오늘은
보이지 않는다
베란다에 적막하게 걸려 있던 이쁜
네 팬티들
오늘은
보이지 않는다
하늘에서 하얀 눈 내린다
먼지처럼
허공을 떠돌다
조금씩 내려서 쌓인다
늙은 아내, 빈 둥지를
지키고 앉아
시집간 딸 걱정할 만큼만 눈이 내린다
그리운 홍성
꼬불간 돌아서
은행나무
말무덤
금마천 살진 메기 물살을 친다
의사총을 끼고
숯거리 들어서면
장닭이 목청 뽑아 홰를 쳐 울고
아침볕에
조양문朝陽門
젖은 머리 말릴 때
월산 진달래
붉더라, 붉더라,
아버지의 짐 자전거
한평생 버겁던 짐 다 내려놓고
타이어도 튜브도
안장도 짐받이도 떨어져 나간 채
고향 집 앵매기 집 짓는 헛간
구석에 처박혀
예산장- 홍성장- 삽다리장-
새벽안개 가르며 씽씽
내달리던
푸른 시절, 푸른 날들 추억하다가
장꽝에
감꽃 구르는 소리…
가슴 허무는
아버지의 짐 자전거
응봉국민학교*
팔봉산 해 높이를 재며 시작되던
응봉국민학교,
무논에서 개구리가 라랴러려- 언문으로 울면
귀밑때기 새파란 아이들
입이 째지게 책 읽는 소리 들렸었지
측백나무 울타리 늦은 잠에서 깨어난 참새들
구구단 못 외워 벌 받는 아이처럼
살금살금 교실 안을 넘겨다보고
노오란 해가 눈썹 끝에 와서 걸리면
숙직실 부엌에서 강냉이죽 끓는 냄새가 솔솔
풍금 소리에 묻어오기도 했었지
운동장을 끼고 흐르는 실개천엔
각시붕어, 모래무지, 꾸구리, 미꾸라지가
파들거리며 손안에 들어와 잡혀주고
봄비 오다 갠 날 운동장 늙은 벚나무에선
팝콘처럼 터지던 벚꽃,
전교생이 소낙비를 가려도 넉넉하던
플라타너스,
코스모스 화안한 신작로 길, 가을 운동회,
꼴찌를 놓친 적 없던 백미 달리기는
여학생들 앞에서 나를 얼마나 작게 했던가
담임선생님 등에 업혀 소풍 가던 상국이,
국어책을 잘 읽던 똑똑한 윤수,
눈물이 많아 울보 별명을 붙이고 살던 착한 완수,
무릎 꿇고 벌 받던 개구쟁이 용배,
울음 섞인 목소리로 졸업생 답사를 읽어나가던
빨간 스웨터 혜진이는, 또
얼마나 오랫동안 나를 아프게 했던가
구렛나루 거뭇하던 영묵이, 덕회,
그리고 먹석골, 솔안말, 우체국, 청심당 약방도
지금 모두 잘 있는가, 잘들 있는가
*충남 예산군 응봉면 노화리에 소재한 응봉초등학교의
옛 교명
모과
못생긴 모과 하나
방안 가득
눈물 같은 향을 내더니
썩어가며 더욱 깊어지누나
암꽃처럼 피어나는
반점
그대,
누워서도
성한 우리를 걱정하시더니
노파와 개
노파가 죽었다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던
흰둥이
혼자
주검 곁을
지키고 있다
너구리 가족
어미를 따라 잡혀 온
새끼 너구리
피눈물로 범벅이 된
그물망 속에서
빡빡-
마른 젖을 파고 있다
동그랗게 몸 옹크려 새끼를 품은
새끼보다
작은
어미 너구리,
젖줄 고르느라
안간힘 쓰는
눈빛이
가을 하늘 속보다 깊다
입동 무렵
성가수녀원 뒤뜰에 모과가 열렸다
수녀님 만나면 따 달라고 해야겠다
칠순을 바라보는
안젤라 수녀님은,
멀리서도 잘 익은 모과 냄새가 났다
그 여름
홍수로 깊어진 대흥내를 건너
한낮의 뙤약볕 속을
열무단 이고 늙은 노새처럼 걸어오시는
할머니, 낮은 어깨엔
여치 풀무치 기름챙이도 함께 붙어왔다
소낙비에 전 베적삼에선 눅눅한 쉰내가 피어났다
보릿집 후둑이며 아궁이 불 지피면
부뚜막에 쪼그리고 앉아 할머니
수제비를 뜨셨다
해꽃은 꺾여 시드는데
쇠품팔러 간 엄마는 돌아오지 않고
귀향
인제는 가리, 은하강 푸른 물결
하얀 쪽배 타고
청보리밭 사잇길 우마차 타고
필릴리- 필릴리-
하루 반나절 들어가면
우물가에 흰 닭이 울고
저녁연기 하늘로 긴 머리 풀어 올리는
탱자꽃 달밤에 화안한 그 집,
흰 무명 저고리 어머니가
아랫목에 더운밥 묻어 놓고
밤마다 젖은 눈 깜박이는 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