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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금요일 밤에 열린 월드컵 조별 예선전, 한국과 포르투칼의 축구 경기는 너무나 감동적이었습니다. 우루과이나 가나 선수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우리 선수들과 코치진, 그리고 응원하는 국민들이 하나가 되어, 기적과 같은 역전승을 거두고 16강 진출이라고 하는 쾌거를 이루어 내었습니다. 축구라고 하는 경기는 참 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스물 두명의 선수들이 공 하나를 가지고 운동장에서 만들어내는 한 편의 드라마에 온 세계가 함께 환호합니다. 하루 종일 손흥민의 절묘한 패스, 황희찬의 극적인 역전 골이 눈앞에 어른거리고, 사무실에서도 일과 중임에도 불구하고 동료들과 삼삼오오 둘러 모여서, 벤투 감독의 ‘빌드 업’ 축구에 대해서 심각한 토론을 벌이고, 선발 기용과 교체 선수 활용법에 대해서 저마다 의견을 제시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축구 전문가입니다.
마크 로크스라고 하는 영국 사람이 쓴 책이 있습니다. Fields of God. ‘하나님의 운동장’이라는 책입니다. Football and the Kingdom of God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축구와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출간되었습니다. 제목이 말해주는 대로, 이 책에서 저자는 축구 종주국인 영국인답게, 창조와 타락, 하나님 나라, 부활과 같은 기독교 신앙과 교리를 축구를 접목시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호모 루덴스. 즉 놀이를 즐기는 존재입니다. 어린아이들을 보면 참 재미있게 놉니다. 혼자든, 둘이든, 여럿이든, 아이들은 어떤 환경에서도 놀이를 합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마도 틀림없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 놀이를 즐기고자 하는 욕구와 놀이를 만들어내는 능력도 사람에게 함께 주신 것 같습니다. 마크 로크스도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동산에서 일하고, 안식하고, 삶을 즐기도록 창조하셨고, 우리 인간이 성실하게 땀흘려 일하고 안식하고 삶을 즐기는 것을 보시고, 보기에 참 좋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인간이 일만 하고 쉬기만 한다면 그 삶이 즐겁고 행복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이 세상 속에서 일하고 예배하고 안식하고 놀이를 즐기며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놀이는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누가 처음 축구를 시작했는지 모릅니다만, 둥글게 생긴 물건을 이리 저리 발로 차고 놀았을 것입니다. 그 놀이가 재미있어서 자꾸만 하다 보니 이 단순한 놀이는 창조성과 상상력이 더해져서 축구라고 하는 게임으로 발전하였을 것입니다. 규칙들이 만들어지고, 여러 대형의 전술들이 개발되고, 볼을 다루는 기술도 발전하였습니다. 페널티 라인 근처에서 찬 프리킥은 곡선을 그리며 상대방 수비수들의 머리 위를 넘어 날아가다가 뚝 떨어져 골문을 향합니다. 공격수들이 공을 몰고 요리조리 수비수를 피하여 돌진하는 모습은 마치도 공이 발 끝에 달려있는 것 같습니다. 수비수들은 최선을 다하여 길목을 지키고 공격수를 에워쌉니다. 그래도 손흥민 선수에게는 소용이 없습니다. 에워싼 수비수들 발 사이로 절묘한 패스를 찔러줍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창조성을 발휘하여 여러 가지 축구 기술들을 개발하였고, 신나는 놀이로 발전시켰습니다. 사람들은 공 하나로 쉽게 친구가 되고, 하나가 되며, 일상의 피로와 긴장을 털어내곤 합니다. 그래서 마크 로크스는 우리가 좋아하는 축구라고 하는 이 놀이를 하나님도 좋아하시고, 우리는 천국에서도 축구를 즐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 날의 축구는 사람들이 함께 하는 즐거운 놀이가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산업이 되었고, 완전히 세속화되고 말았습니다. 철저하게 경제 논리가 적용됩니다. 돈을 벌려면 팬들의 인기를 모아야 하고 팬들의 인기를 얻으려면 이기는 경기를 해야 합니다. 이기기 위해서 수백억에 달하는 이적료와 연봉을 지불하고 좋은 선수들을 스카우트합니다. 그러나 선수가 부상이나 다른 이유로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면 가차없이 퇴출시켜 버립니다. 이기기 위해서 전술과 체력을 연마하지만, 선수들은 또한 이기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반칙도 불사합니다. 이기기 위하여 주먹과 팔꿈치로 상대 선수를 가격하기도 하고, 유니폼을 잡아 당기기도 합니다. 태클은 상대의 공격을 차단하는 멋진 기술이지만, 때로는 이기기 위해서 행사하는 폭력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응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로지 승부에 집착하는 관중들은 게임을 온전히 즐기지 못하고, 즐거운 운동장을 변질시키고 맙니다. 국가의 명예뿐 아니라 자신의 명예도 달려 있기에, 그만큼 치열하고 절실하게 선수들은 운동장을 뛰었는데, 경기가 끝난 후,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부진한 경기력을 보여준 선수에게는, 그 가족이나 심지어 여자 친구에게까지 악담과 저주를 퍼붓기도 합니다. 상대방 응원단을 향해서 때로는 폭력과 위해를 가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일들은 하나님의 운동장에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들입니다.
단순히 축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일하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놀이를 즐기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운동장’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 가운데 우리 인간은 평화를 누리고 함께 삶을 즐기며 살아가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가 살아가는 하나님의 운동장은 탐욕과 이기심, 그리고 탐욕이 난무하고 하나님의 규칙과 질서가 무너진 혼돈의 자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폭력과 탐욕과 이기심의 배후에는 사탄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사탄은 아름다운 하나님의 운동장을 어지럽히기 위하여 자신의 구단을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운 운동장에서 땀흘려 경작하며, 하나님을 예배하고, 즐겁게 살아가는 아담과 하와에게 뱀은 엄청난 계약금과 연봉을 제시하며 스카우트를 하려 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 먹으라는 것입니다. 그렇게만 하면 너는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처럼 되고, 네 마음에 원하는 대로 마음껏 즐기며 살아갈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조건에 마음이 흔들려 처음 인간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 먹고 말았습니다.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고자 했던 그 교만,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어 온 세계의 중심이 되고, 자기 마음에 원하는대로 세상을 즐기며 살아가고자 하는 그 욕망 때문에, 처음 사람들은 하나님의 질서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거부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난 후, 하나님의 운동장은 조화와 질서와 평화가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서로를 신뢰할 수 없어 나뭇잎으로 자신을 감추기 시작하였습니다. 형제들 사이에 시기와 증오가 생겨나고 결국 형제를 살해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아름다운 하나님의 운동장에서 창조의 질서는 깨어져, 땅은 오염되고 가시와 엉겅퀴만 내게 되었고, 동물의 세계에서도 평화와 공존의 질서는 깨어지고, 약육강식의 무서운 질서가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의 운동장에서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였던 사탄은 오늘날도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합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원하는 것을 모두 가질 수 있다고 하는 엄청난 이적료와 연봉으로 사람들을 유혹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 제의를 따라 사탄의 구단에 입단하기로 계약을 맺습니다. 그들은 사랑과 은혜가 넘쳐야 할 이 세상 곧 하나님의 운동장을 이기심과 탐욕으로 오염시킵니다. 창조의 질서를 깨뜨리고 혼돈과 무질서로 이 세계를 몰아갑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마귀는 심지어 예수님에게도 은밀한 제안을 하고 있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 사십일을 금식하신 예수님에게는 정말 피하기 어려운 유혹이었을 것입니다. 사탄의 제안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그저 자신의 물질적인 필요를 채우는 수단으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물질의 욕망을 채우기를 인생의 목표로 삼고 살아가는 것이 진정 행복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유혹을 단연코 거부하셨습니다.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능력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면서, 자신의 물질적인 욕망을 채우는 것이 목적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고, 너희는 먼저 주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먼저 생각할 것은 소유욕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과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씀입니다. “물질의 욕망에 충실하라. 그러면 인생이 행복해 질 것이다”라고 사탄은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대답은 이것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인생의 즐거움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갈 때 누리는 것이며, 인생의 진정한 의미와 행복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마귀는 예수님을 산 꼭대기로 데려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스카우트 조건을 제시합니다. “내게 절만 하면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호히 그 제의를 거부하였습니다.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속지 말아야 합니다. 사탄은 마치도 천하만국과 그 영광이 자신의 것인양, 우리를 속이고 있습니다. 그 거짓말에 속은 사람들은 사탄이 원하는 대로 악에게 굴복하고, 사탄이 주는 그 권세와 영광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운동장에서 사탄에게 스카우트된 선수들의 행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은 그 유혹을 단호하게 물리쳤습니다. 세상이 주는 권세와 영광을 탐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만 경배하며,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며 살아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마귀는 수많은 순례객들이 모여드는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에 예수님을 데리고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내리라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또한,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마귀는 예수님을 유혹하는데 어떤 이상한 논리나 법칙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시험을 합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뛰어내려 보라. 말씀에 기록된 대로 너는 발끝 하나 다치지 않을 것 아니냐? 그러면 너는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 인기를 누리게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현대에는 연예인만 아니라, 교수나 정치가, 심지어 목사들까지도 인기에 목을 맵니다. 인기는 곧 권력이요 돈이요 명예입니다. 사람들은 인기를 얻기 위해 반칙도 서슴치않습니다. 실제 자신의 삶에서 한참 빗나간 정의, 자유, 인권 같은 좋은 단어들을 동원하여 자신을 포장하거나 다른 사람을 비판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인기를 얻고 권력을 얻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탄의 제의를 거절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시험하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믿고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지, 인간이 시험하거나 아니면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마음대로 왜곡하고 이용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물질주의, 세상 권세와 영광이라고 하는 조건을 가지고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를 자신이 운영하는 구단에 스카우트하려 합니다. 그리고 그 유혹 앞에 우리는 흔들립니다. 그 유혹과 타협하면서, 그런 자신을 합리화하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어떻게 우리는 이 유혹을 이기고 하나님의 운동장에서 진정한 행복과 평화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첫째는, 성령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에 충만한 가운데 광야로 나갔고 거기서 성령의 이끌리심을 받으며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예수께서 사탄의 스카우트 제의를 단호히 물리치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역을 감당하실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성령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한결같이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하면 우리의 마음 중심에 사탄이 역사할 자리가 없어집니다. 그러나 성령이 소멸되면 우리 마음에 빈 공간이 생기고 사탄은 그 빈 틈을 파고 듭니다. 온갖 탐욕과 이기심과 교만이 그 빈 공간을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 그리스도의 진리의 영, 우리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함께 하시며, 위로와 격려와 힘을 더하여 주시는 그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고는,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운동장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바로 서지 못하며, 그 제자직을 온전히 감당해 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은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하신 말씀이,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구해야 할 좋은 것은 바로 성령이라는 말씀입니다.
또 한 가지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지식이나 경험으로 사탄의 유혹을 물리칠 수가 없습니다. 수많은 지식인들이 쉽게 자신의 욕망하는 바를 얻기 위하여 위선적인 행태를 보이는 것을 우리는 많이 보아 왔습니다. 마귀의 유혹에 스스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 우리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무기는 세상적인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을 기준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선택하고 결단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내 생각으로는...”이나, “내가 아는 지식으로는”, 아니면 “내가 경험한 바로는...”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되었기를...”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선택과 판단의 기준이었습니다. 이렇게 성령충만과 말씀이 하나님의 운동장에서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고 하나님 나라의 선수로 달려갈 수 있는 비결인 것입니다.
우연히 영국의 FA컵 결승전 식전 행사 영상 하나를 보았습니다. 1871년에 시작된 이 대회는 잉글랜드 축구협회 산하에 있는 프리미어 리그부터 아마추어 클럽까지 모두가 참가하여 해마다 챔피언을 뽑는 전통있고 권위있는 대회입니다. 그런데 그 대회의 결승전이 열리기 전 식전 행사에서, 축구 팬들로 구성된 합창단과 한 성악가가 그라운드에서 노래하는 영상이었습니다. 그 노래는 “Abide with me”라고 하는 찬송가였습니다. 우리가 쓰는 찬송가 481장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FA 컵 결승경기 시작되기 약 15분 전 이 찬송가의 첫절과 마지막 절이 불려지는 것이 전통이라고 합니다. 1927년부터 부르기 시작했으니 벌써 95년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해 저물어서 날이 어두니 구주여 나와 함께 하소서. 내 친구 나를 위로 못할 때 날 돕는 주여 함께 하소서.
이 육신 쇠해 눈을 감을 때 십자가 밝히 보여주소서. 내 모든 슬픔 위로하시고 생명의 주여 함께 하소서.”
이 찬송가는 크리스챤 장례식에서 많이 불리는 찬송가로, 당시의 영국 국왕인 조지 5세가 좋아했던 곡이라고 합니다. 사실 축구대회 결승전 분위기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 곡입니다. 그런데 이 찬송가를 합창단과 관중들이 함께 부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기원은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운동장에서 달리게 될 선수들이나 환호하는 관중들은 이 찬송을 부르며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그 환희와 열정, 승리의 영광이나 패배의 아쉬움이나. 결국은 다 소멸되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하나님의 운동장에는 승리의 환희도 있고 패배의 아쉬움도 있습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 진정한 삶의 의미는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 사랑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기억하며, 우리는 언제나 세상의 욕망과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며 하나님의 운동장에서 땀흘려 일하고 안식하며 하나님을 예배하고, 인생의 진정한 즐거움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탄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비결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고 ‘성령의 인도하심’ 입니다. 말씀과 성령으로 사탄의 유혹을 물리친 후에 우리는 하나님의 운동장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총을 맛보며, 진정으로 아름답고 즐거운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