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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고구려 유적 답사기 1일차
2019년 이후 코로나 유행으로 인해 중단되었던 고구려 답사가 4년 만에 재개되었다. 9월 28일 추석연휴를 맞이해 해외로 출국하려는 사람들도 인천국제공항은 크게 붐볐다. 08시 05분 심양행 대한항공 KE831편을 타기 위해서, 단체비자로 다녀오는 답사단은 오전 5시 30분에 공항에서 미팅을 해야 했다. 새벽에 집을 나서면 늦을 것 같아서, 나는 27일 심야에 전철을 타고, 28일 0시 40분경 인천공항 제2터미널에 도착했다. 나보다 먼저 공항에 도착한 일행이 있어서, 서로 짐을 지켜주면서 틈틈이 쪽잠을 자기도 하고, 수다를 떨었다. 새벽 3시 30분 일행 한 분이 오셨고, 5시 무렵부터 사람들이 모였다. 모든 분들이 거의 제시간에 도착해서 무사히 출국 심사를 마치고 비행기에 탑승해서 심양공항에 현지시간 9시경에 도착했다. 이제부터가 신경이 곤두서는 시간이다. 약 20년 전 함께 답사 갔던 연구자 1분이 심양공항에서 입국 허용이 안 되고, 강제 출국당하는 모습을 보았던 적이 있다. 이번에는 코로나 문제로 중국에서 당장 격리시키거나, 강제 출국시키지는 않는다고 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우려가 있었다. 미리 건강상태 QR코드를 발급받았기 때문에, 모두 큰 어려움 없이 입국심사를 마쳤다. 내가 입국심사를 마치고 현지시간 10시 15분경 현지 가이드와 만났을 때, 비로소 안도할 수 있었다.
답사 첫날 일정은 시간이 빠듯하니, 식당은 가급적 유적지와 가까운 환인현에서 찾자고 미리 일러두었다. 2015년 식당 때문에 답사 일정이 엉망이 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번 답사에서는 심양도선공항에 내리자마자 환인까지 곧장 직행했다. 고속도로 중간에서 영릉휴게소에 들렸다. 예전보다 이동하는 차량이 많아서 인지, 휴게소가 다소 활기를 띈 모습이다. 청나라 시조 누르하치 4대 조상의 무덤인 영릉이 있는 곳인 만큼, 휴게소에는 누르하치 동상에 서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휴게소 건물도 청나라 양식을 따랐다. 중국의 이런 모습은 칭찬해주고 싶다.
현지시간 1시 15분 환인에 도착했다. 상고성자 무덤떼, 하고성자 성터는 버스 안에서 간략히 설명하고 지나갔다. 이번 답사에서는 오녀산성을 제외한 환인에 있는 다른 유적지를 둘러볼 계획은 없다. 제한된 일정 때문에, 건너 뛰어야 했다. 다만 답사자료집에 간략히 소개만 했다. 미창구 고분과, 환인지역 독립운동 유적지까지 다 돌아보기에는 시간이 없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환인 시내에서 점심을 먹었다. 돼지고기 보쌈, 감자요리, 표고버섯, 콩나물 등 한국식에 가까운 음식이 나왔다.
식사를 마치고 환인시내 정양문 남쪽에서 동창학교터로 추정되는 건물을 만났다. 잠시 동창학교에 대해 설명하고, 곧장 오녀산성에 도착했다. 벌써 2시가 넘었다. 오녀산성 주차장에 내러서 오녀산성에 가려면 박물관을 통과해서 작은 버스로 갈아타야 한다. 박물관 설명은 중요한 포인트에서만 몇 가지만 하고, 서둘러 버스를 타러 갔다. 2시 45분경 오녀산 등반을 시작했다.
해발 600m 서문 주차장에서 오녀산 등반이 시작된다. 서문 주차장 주변은 몇 년 전과 또 달라져 있었다. 천하제일위성(天下第一衛城)이란 글자가 새겨진 돌, 팔괘도를 그린 바닥 그림, 새롭게 지어진 화장실 등 여러 가지가 달라져 있었다. 약 1천개가 넘는 계단을 올라가 오녀산성 서문에 올랐다. 서문에 오르면 음료와 아이스크림을 파는 사람이 있었는데, 올해에는 없다. 코로나로 관람객이 줄어든 탓이리라.
1999년 처음 오녀산성을 답사한 후, 지금까지 10여 차례 답사했다. 그래도 새롭다. 이곳에 오를 때마다 늘 여러 가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게 된다. 추모왕은 졸본지역에 도착해서 처음에는 띠풀을 이어서 비류수가에 머물렀다.(結廬於沸流水上 居之) 그러다가 골령 위에 성을 쌓고 살았다. 『광개토태왕릉비문』에는 비류곡 홀본 서(西) 성산(聖山)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고 하였으니, 고지대에 성을 축성하고 도읍으로 삼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오녀산성에서는 신석기 시대부터 청동기, 고구려초기, 고구려후기, 요금시대 유물이 나왔다. 오녀산에 서기 3세기경 성벽이 쌓여진 것은 이미 궁성의 역할이 끝났다고 하더라도, 방어와 통치를 위한 성, 또는 종교적으로 특별한 장소로 계속 중요시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오녀산 주변에서 너무나 두드러진 지형적 특성 때문에, 이곳을 성소로 인식하는 것은 고대인이나 현대이이나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일반인은 접근하기 조차 어려우니 성소로 기능하기는 딱 좋다. 다만 성소라면 특정 장소에서 종교적 행위를 했을텐데, 오녀산 정상부에서 건물터, 창고터, 군사주둔지, 우물 등은 발견되었지만, 딱히 종교적 성소라고 볼 수 있는 곳은 없다. 동쪽 지역에서 발견된 제3 건물지터를 제사터라고 중국에서는 표기하고 있지만, 딱히 제사터라고 보기는 어렵다. 단지 군사 지휘소터 정도로 보여질 뿐이다. 이 문제는 아직 답을 못 찾겠다.
임꺽정 산채처럼 약탈을 하고 돌아온 고구려인들이 철저히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쌓은 성이라고 볼 수도 있다. 최소 1,800년 이전에 쌓은 성벽을 볼 때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해발 600~800m 지점에 이렇게 성벽을 잘 쌓다니,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무엇이든 했던 사람들의 의지를 생각하게 된다.
오녀산성 정상부는 2018년 방문했을 때와 몇 가지 차이가 있었다. 제1 건물터 옆에 추모왕(주몽) 동상을 세워 놓은 것이 달라졌고, 점장대 일대가 자연 바위와 철기둥과 쇠사슬로 막아놓았는데, 관람객을 위해 나무로 틀을 만들고 가림막을 쳐놓은 것이 달라졌다. 또 점장대 옆에 소점장대 주변도 정비한 것도 눈에 띄였다. 건물지 마다 그림을 그린 게시판을 설치해 이곳이 무엇인지 상사하게 한 것도 달라졌다. 가장 주목할 변화는 1920~30년대에 환인 지역에서 활동했던 동북연군의 행적을 안내판에 선전한 것이다. 중국이 자국 역사에 대해 적극 홍보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까지 중국은 고구려 역사를 감추기, 또는 자국사 만들기에만 급급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동북지역에서 중국과 관련된 역사를 적극 홍보하기 시작했다. 중국의 경제사정이 나아지면서, 자기 역사에 대해 좀 더 넓게 보기 시작하고 대중들의 관심도 조금씩 확대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표로 읽혀졌다.
오녀산성 제1 건물터의 주춧돌은 크지 않다. 아직 큰 기둥을 올리고, 무거운 기와를 얹은 지붕을 사용한 건물로 보기가 어렵다. 기와가 사용되었다는 흔적도 없다. 집안 환도산성에는 큰 주춧돌이 있다. 10년전 집안시박물관에는 집안시에서 발견된 온갖 주춧돌을 야외에 전시하기도 했었다. 오녀산성 제1 건물지는 아직 그 단계는 아니다. 그래서 오녀산성박물관에서 복원한 제1 건물터, 즉 중국측에서 추정 왕궁 건물은 벽채에 초가를 올린 모습이다. 오녀산에는 한때 도교사원이 있었다. 대흑산산성(비사성), 나통산성, 최진보산성, 성산산성, 위패산성, 득리사산성 등에는 도교사원이나 사찰이 들어서 있다. 아직도 사원으로 기능하는 곳이 많은데, 유독 오녀산성에는 도교 사원이 사라진 후, 다시 도교사원이 들어서 있지 않다. 다만 아직도 천지못 서쪽 사면 동굴에는 도교의 신을 모시고 있다. 오녀산성에 다시 도교사원이 들어서는 일만은 없었으면 한다. 도교사원이 들어서면 산성 내 경광이 크게 파괴되기 때문이다. 나통산성, 성산산성, 위패산성, 대흑산산성이 그런 사례이기 때문이다.
오녀산성 정상에서 마르지 않는 샘과 천지가 있다는 것이 처음 답사할 때는 너무나 신기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신기함은 사라졌다. 여전히 오녀산성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환인현의 전경은 장관이다. 하지만 점장대에서 환룡호(환인호)를 내려다볼 때는 좀 기분이 다르다. 아무것도 모를 때는 장관이겠지만, 환인댐이 만들어지면서 환룡호 수면 아래로 잠긴 고력묘자묘지군, 장강마을 유적지를 생각할 때면 기분이 좋지가 않다. 환인호 물이 다 빠지면 다시 유적을 발굴해 고구려 초기 역사가 더 밝혀질 수 있을까? 1960년대 중국이 환인댐을 만들 때 유적 발굴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이 도리어 후대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 그때 제대로 조사조차 없이 환룡호에 잠기게 한 것이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점장대에서 환룡호를 볼 때면 온갖 생각이 교차한다.
2000년대 초반까지는 환룡호에서 유람선을 타고 오녀산성을 멀리서 조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수자원 보호 때문에 환룡호에서 유람선 운행이 사라졌다. 관광객 유치보다 수질 보호가 더 가치 있는 일이라고 판단한 중국의 결정이 잘했다고 생각된다. 딱히 아쉽지는 않은데, 환인에서 볼거리 하나가 사라진 것은 사실이다.
점장대까지 돌아보니 어느덧 현지 시간이 4시가 넘었다. 5시 반이면 해가 떨어진다. 안전을 위해서라도 서둘러야 했다. 오녀산성에 중국인 관광객이 다 사라졌다. 올라올 때는 중국인 관광객이 있었지만, 관심사가 우리와 다르다. 그들은 대충 훓어보고 서둘러 내려갔다. 우리도 서둘러 동벽쪽 하산길을 향해 걸었다. 몇가지 설명을 과감하게 생략하고 좀 더 빠른 코스를 택해 하산하기로 결정했다. 자연 절벽바위 사이에 계단으로 이루어진 일선천(一線天)길을 택했다. 본래는 그 보다 더 북쪽에 고구려 시대부터 있었던 길을 택해서 내려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 길에는 중간 중간 고구려시대 성벽도 보인다. 하지만 절벽 바위 틈에 난 계단을 내려가는 코스도 오래 기억에 남을 만한 길이다. 오녀산성이 난공불락의 성임을 체험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계단을 내려오면 해발 600m 쯤에서 동벽이 나타난다. 이곳도 조금 길을 정비한 흔적이 보인다. 그래서 동벽 가장 북쪽은 접근이 어려워졌다. 예전에 찍은 사진이 있고, 시간도 촉박해 이번 답사에서 동벽을 자세히 보는 것은 생략했지만, 동벽은 고구려 초기 성벽을 보기에 너무 좋은 것이다. 동문 일대는 오녀산성 성벽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이다. 예전과 크게 달라진 곳은 없다. 고색창연한 성벽의 모습이 그대로 보인다. 2000년대 초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중국에서 이곳을 정비한 이후, 모습 그대로다. 다만 남문 옆에는 거대한 돌에 천년왕성(千年王城)이란 글을 새겨둔 것이 보인다. 뭐든지 큰 돌에 붉은 글씨로 뭔가를 적어놓는 것을 중국문화의 특징으로 이해하면 되지만, 내 눈에는 영 거슬렸다.5시 15분경 답사를 마쳤다. 곧장 식사를 위해 집안시로 이동했다. 환인시를 조금 나서자 2018년에는 없었던 환인현에서 집안시로 통하는 고속도로가 나타났다. 고속도로가 개통되면 여행할 때 시간이 짧아져 좋지만, 국도에서 볼 수 있는 풍광을 볼 수 없게 되고, 국도 주변의 유적들을 그저 지나치게 된다. 동북지방은 중국에서도 변방이다. 중국이 국경절 연휴 기간이라고 하지만, 아직까지 교통량을 많지는 않다. 휴게소는 규모에 비해 이용객이 극히 적었다. 중국이 고속도로 건설에 집중하는 까닭은 지방 도시를 개발하는 것과 더불어, 비상시 군대이동을 원할히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과잉투자로 보이지만, 먼 훗날을 대비한다는 느낌이 든다. 중국의 고속도로에 대해 여러 생각을 하다가, 눈을 떠보니 오후 7시 25분 집안에 도착했다. 2019년에 새로 뚫은 고속도로 덕분에, 2018년 3시간 넘게 걸렸던 환인-집안까지 이동시간이 크게 단축된 것이다. 앞으로 환인에서 집안으로 가는 고속도로로 진입하는 도로가 새로 개통되면 30분 정도 더 빨라진다고 한다.
예상보다 집안시 도착 시간이 빨라졌다. 놀라운 것은 집안시 야경이 달라진 것이다. 압록강변 동북쪽으로 새로운 건물들이 많이 들어섰다. 물론 건물의 네온사인만 요란할 뿐, 실제로 불이 켜진 집이나 사무실은 많지 않았다. 중국 지방도시에 빈집이 많다는 것이 사실임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눈에 훤했던 집안시내 도로가 크게 바뀌었다. 몇몇 길들은 크게 넓어졌고, 도시 내에 민가들이 많이 헐렸다. 국내성 인근의 시내 중심도 조금은 바뀌었다. 벌써 5년이 지났으니 집안시가 변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자주 와봐야 하는데, 시간이 많이 흘렀다. 압록강과 가까운 조선불고기 식당에서 불고기가 나오는 식사를 했다. 식당에는 여전히 웃통을 벗고 먹는 사람, 담배를 피우는 사람도 있었다. 여전히 20년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불고기에 술이 없느니 허전해서 몇몇 분들이 술을 샀다. 맥주 1병을 마시고, 호텔로 들어온 시간은 8시 30분경이었다. 호텔은 옛 홍콩성홀리데인호텔. 그런데 주인이 바뀌어 화명가일호텔로 이름이 바뀌었다. 여기서 이틀을 묵을 예정이다. 보이스톡으로 아내와 통화하고, 몸을 씻고 조금 쉬려고 했던 9시 반 경. 내방으로 김용규 선배, 노수한, 최바른, 박소망이 찾아왔다. 12시 넘어서 까지 질문을 받고 답을 해주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했다. 피곤했지만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새벽에 공항에서 거의 잠을 자지 못했지만, 고구려 유적 답사를 왔다는 흥분 때문에 잠이 오지 않았다. 답사 일기를 쓰고, 노트북으로 몇 가지 작업을 하고 침대에 누웠다. 여전히 잠이 오지 않았다. 오늘 보았던 여러 장면들의 과거와 현재가 떠올렸다. 달라진 풍광과 더불어 그 속에 살았던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다가 어느 새 하루 밤이 흘렀다.
첫댓글 재밌게 읽다보니 1부가 끝이네요..다음편도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