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성도 '조선강역총도'(都城圖 '朝鮮疆域總圖') 17세기말 서울대학교 규장각 개천의 정비는 太宗(1367~1422)때부터 시작하였다. 태종은 1411년 개거도감을 설치하고 대규모의 개천공사를 실시하였다. 이후 세종(1397~1450)은 개천의 과학적 정비에 많은 노력을 기울렸다. 세종은 1421년 운종가 (현 종로) 행랑뒤편에 도랑을 파서 물길을 내고, 1441년 하천의 높이를 재는 수표(水標)를 만드는 등 홍수에 다각적으로 대비를 하였다.
하늘에서 내려다 본 경복궁일대 국가기록원 1958년
신문로부근에서 경복궁 왼편을 항공촬영한 사진이다.
경복궁 서쪽에는 청계천의 지천중 으뜸이었던 백운동천이 흘렀다. 조산시대에는 청개천을 開川이라고 불렀다. 개천이라는 말은 원래 '내를 파낸다'는 의미였으나 차츰 인공이 가해진 하천을 부르는 일반적인 명칭이 되었다. 한양의 개천은 그러한 일반명사가 그대로 고유명칭으로 굳어진 것이다.
서쪽에서 바라본 청개천 1929년 서울역사박물관
왼쪽 가운데의 경성부청사(현재의 서울시청) 위쪽으로 뻗은 청계천 물줄기가 선명하다. 삼각동을 중심으로 한일대의 건물밀도가 상대적으로 높다.
남산상공에서 바라본 청계천 1955년 국가기록원
화면 왼쪽아래에는 비스듬하게 흐르는 청계천이 보인다.
당시 모전교에서 광통교 중간부분까지 복개가 진행되었다.
신문로상공에서 바라본 청계천 1958년
멀리 왼편상단에 종묘가 보이고, 종료 오른편으로 청계천이 흐르고 있다.
당시 광통교까지 복개된 모습이 보인다.
동대문상공에서 바라본 청개천 1958년 국가기록원
사진중간에 있는 종로 오른편으로 종묘가 보이고 왼편으로 청계천이 흐르고 있다. 종묘부근에는 많은 다리들이 놓여져 있다.
동대문운동장과 청개천 1955 국가기록원
동대문운동장 위로 서에서 동으로 흐르고있다
오른편 상단에는 동대문이 희미하게 보인다.
남산에서 바라본 동대문 부근
이폴리트 프랑뎅(Hippolyte Frandin 1892~1894) 우측상단에는 동대문이 있고, 바로 아래에는 청개천 양옆으로 준천 후 쌓아 놓은 흙더미들이 보인다. 영조이후의 준천은 '경진준천(庚辰濬川)'의 예를 따라 정조(1752~1800)대부터 2~3년에 한번씩 크고 작은 준천사업이 이루어 졌다. 이어 순조(1790~1834)대에는 준천의 세세한 절차를 규정한 '준천사목를 제정하였다. 이후 준천사업은 1894년 갑오경장이후에 한성부로 이관되었다가 대한제국기에는 마차회사가 담당하기도 했다.
남산에서 바라본 동대문 부근모습
사진엽서(조선명소, 京117) 대한제국시기 김종영
위 사진자료들은 청계천 옛모습사진전에서 가져 왔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