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암나철기념관
- 전남 보성군 벌교읍 칠동리
홍암 나철 (弘巖 羅喆, 1863년~1916년 )
본명은 나두영(羅斗永) · 나인영(羅寅永). 호는 홍암(弘巖). 전남 보성군 출신.
29세 때 문과 병과(丙科)에 급제, 승정원가주서(承政院假注書)와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를 지냈다.
일제가 침략을 노골화하자 관직에서 물러나 호남 출신의 지사(志士)를 모아 1904년 비밀단체 유신회(維新會)를 조직, 구국운동.
1908년, 서울 재동에서 ‘단군대황조신위(檀君大皇祖神位)’를 모시고 제천의식을 거행한 뒤 <단군교>를 공표하였다.
단군교에서는 이날을 중광절(重光節)이라 한다.
단군의 개국과 입도(立道)를 구분하여 서기전 2333년에 124년을 더하여 ‘천신강세기원(天神降世紀元)’이라고 하였다.
일제 탄압으로 1910년 8월에 단군교에서 <대종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일제는 1915년 종교통제안(宗敎統制案)을 공포하고 대종교를 불법화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교단이 존폐의 위기에 봉착하자 1916년 음력 8월 4일, 시봉자(侍奉者) 6명과 함께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三聖祠)에 들어가 수행, 순명에 따라 돌아가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나철이란 이름은 들어봤다. 작년 10월에 이 앞을 지났지만 들르지는 않았다. 이번엔 관심이 가서 들어가 봤다.
겨울이고 관광철이 아니라 그런지 썰렁한 느낌이다.
기념관
관리사무소
홍암사(사당), 나철 선생과 두 아드님의 사진과 위패가 있다.
홍암 나철 선생 영정
나정문 / 나정련, 두 아드님도 부친의 뜻에 따라 독립운동을 하셨다.
나철 선생은 을사오적을 처단하기 위해 비밀결사대를 조직하셨다.
보성 충절사(忠節祠)
- 전남 보성군 득량면 삼정리
모의장군(募義將軍) 최대성(崔大晟, 1552~1598)과 두 아드님 신위를 모시는 사당이다.
장군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 휘하에서 한산도대첩 등 남해안에서 여러 전공을 세웠다.
정유재란 때 두 아들 최언립(崔彦立)과 최후립(崔厚立), 동생 최대민(崔大旻), 종제 최대영(崔大英)과
여러 가노(家奴)를 비롯한 의병 수천 명을 모아 이들을 이끌고 순천, 광양, 고흥, 보성 등 20여 곳에서 왜군과 싸웠다.
안치전투(鴈峙戰鬪) 때 득량면 송곡리에서 왜군의 조총에 맞아 1598년 6월 8일 45세의 나이에 전사했다.
경앙문(사당 외삼문)
성인문(사당 내삼문)
정충문
최대성 공을 기리는 비이다.
충절사(사당)
보성 해평리 석장생 / 전남 문화유산자료
- 전남 보성군 득량면 해평리
장승은 마을입구나 길가에 자리하여 그 마을의 수문신·수호신으로 구실한다.
상원주 장군은 여자의 형상으로, 민머리에 얼굴은 거의 평면이다.
하원당 장군은 남자의 형상으로, 민머리이며 몸통 전체는 사각기둥 모양이다.
원래 개흥사 입구에 놓여 사찰을 수호하던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 마을로 옮겨진 뒤 당시 바닷길로 운송되었던 조세의 원만한 수송과 주민의 평안과 안정을 기원하는 마을의 수호신이 되었다.
남녀 장승은 키가 거의 같거나 남자 형상이 조금 큰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곳은 여자 형상이 더 키가 크다.
사진 왼편이 하원당 장군, 오른편이 상원주 장군이다.
2번 국도에서 군도 845번으로 들어서면 충절사와 석장생을 만난다.
군도 845번을 따라 장흥으로 가는 길은 해안을 따라 간다.
왼편으로는 고흥군 도양면과 녹동항, 소록도대교와 거금대교, 거금도(고흥 금서면)이 보인다.
오른편으로는 완도군 금당도(금당면), 금일도(금일읍), 생일도(생일면), 약산도(약산면) 등이 보인다.
보성 오봉산(343.5m)
봉화산(476m, ?), 오봉산 맞은편이라 봉화산이라고 생각한다.
보성군 회천면 율포를 지나서 본 경치 같다. 보이는 곳은 고흥군 도양읍쪽이다.
완도군 쪽이다.
보성 일림사, 보성군 홈페이지에 일림사를 추천하여서 가서 보았지만 실망.
2025년 2월 13일 여행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