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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비
누가 유자 잎으로 휘파람을 불고 있나 유자향 진동하는 숲속의 초목들이 차례로 가을을 불러 추초문秋草聞을 펼친다
밀물처럼 우거졌다 썰물처럼 잦아들며 몽밀蒙密한 기억 속을 완류하는 시나위 저만치 저녁 노을이 단풍물에 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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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산주름 깊은 골 할미꽃이 으밀아밀
츠렁바위 땅벽 삼아 굽바자 두른 굴피집 쥐코맞상 들마루엔 피죽바람도 명주바람 지게춤 바가지장단에 오십 년이 짐벙지더니 묵상은 정이 넘쳐 삐쳤는지 바람났는지 생파같이 집을 나가 따로 거처 십 년 세월 나절로 허우룩해서 살속이 영 맥쩍소 꽃눈개비 꾀꼬리단풍 언제 오고 가는지 비느 와서 비설거지할 때 비마중은 곡두가 하나 외마치 부뚜막장단 그 청승도 참 객쩍소
함께 먹던 떡 생각나 옹달솥에 옹달샘물 겅그레랑 옹달시루 그량시루밑 챙길 동안 나무나 좀 해다 주지 본체만체 잇긋않고 오명가명 안녕하슈 잘 계시우 인사해도 풋잠 든 척 몽따고 누워 겨르롭게 볕바라기 이 보소 살님네 영감 내 말 싹 다 들리제? 내사 오늘 마음고름 훌랑 풀어헤쳤으니 부사리 영각 치듯 거쿨지게 울어나 보소 그 소리 비나리 삼아 합펨 비손 해 볼랑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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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석 평전의 밤
세석 평전 밤이 오면 개구리 소리 만발하다 일생을 종주하는 지리산의 코골이들이 천육백 고지에 풀어 놓는 긴 역정의 무게들
흐느끼듯 한탄하듯 땀에 절인 억양들이 저들끼리 등 비비고 팔 다리 포개 가며 저리들 신명 넘치게 합장으로 어울려
골풀, 호오리새, 좀고채목, 쩔쭉들이 형형색색 율동한다 철이 따로 있으랴 저만치 반달가슴골들도 옹기종기 앉았으리
내일 갈 길 잘 가시라 서로 꿈을 다독이며 별이 되는 자장가, 어디 세석뿐이랴. 온 밤을 휘감아 도는 바람소리 물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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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우豪雨 6
빗줄기 사이로 빗줄기가 행진한다
헤밀 같은 설청 같은 북소리를 거느리고
사방의 길을 지우며 질서를 해방한다
빗소리를 그느르며 빗소리도 도열한다
촛불 횃불 반딧불로 깃발을 펄럭이며
사방에 길을 내면서 새 질서를 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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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행
안거와 안거 사이 봄 가을이 기어간다
귀도 없는 청맹 홀로 더듬이로 길을 찾아
차안을 갉아 먹으며 피안으로 향한다
탁발한 꿈의 빛깔대로 분홍 초록 똥을 누고
골똘히 생각는 듯 그 생각을 비우는 듯
안간힘 배 밑에 깔고 잠을 끌어당기며
바다에서 뭍으로 온 그 긴 수행의 속도로
회오리를 업고서 또 어디로 가시는가
발밑에 바다를 만들며 일렁이는 물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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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의 기도
나의 내세 소망은 다시 불꽃입니다 백 년 묵은 이단에서 천 년 묵은 예지로 죄목의 진보를 끌고 거듭나게 하소서
저들의 믿음대로 저들의 소원대로 금역의 속살을 적신 붉은 안개를 두르고 통렬한 본보기 최후 돌고 돌게 하소서
암흑 밝힌 눈부신 광명 눈멀 듯이 낭설 뿌려 덕담은 악담 되고 축복은 저주로 변해 떼 지어 서로 입히고 스스로도 입는 시대
잘 키운 마녀 하나 열 천사 안 부럽게 죄 아닌 죄 겹겹 입고 활활 불꽃 되리니 처절한 그 순간만을 내 환희로 주시고
사냥하며 시나브로 사냥감이 되어가는 참 독실한 저들은 참 충실히 속아왔음을 당신이 알게 하소서 당신을 알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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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방랑자
뭉크와 마주친 밤 나는 바다로 갔다 잠긴 입 굳은 눈으로 쫓기듯이 쫓는 듯이 청동빛 녹아내리는 깊은 어둠 속으로
그의 뒤를 미행하는 불길한 징크스나 앞길에 매복한 스산한 결말이나 내 앞을 스쳐간 순간 내 것이 돼 버렸다
음울한 침묵의 시선 겨누고 있을 까마귀 절규를 정착하고 있을 벽 속의 고양이 그들이 정체를 숨긴 곳은 바깥인가 안인가
내가 닿은 밤바다는 암갈색 외투 속이었다 갈매빛은 출구가 아니라 나를 홀린 음모였다 바다는, 바다는 없다 뭉크, 그와 떠돌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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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사유 모나리자
천 길 고행 끝에서 만 근 역사를 이고 앉아
생각을 괸 팔다리를 가지런히 편 까닭은
토르소, 공의 추억을 기리기 위해서다
용서할 순 있어도 잊을 수는 없는 나날
연꽃 미소로 어루만지는 혜너른 눈매 가득
그 누가 그리 불쌍해 슬픈 안개 어리나
잊을 수는 있어도 미안한 줄 모르는
영혼 없는 것들에게 영혼을 채워 주려
천추에 천추를 더해 앉아 있을 소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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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 광상곡
울긋불긋 가을 공원 사람들도 알록달록 낙엽처럼 깔깔대던 오륙칠 세의 꼬마들을 유모차 옆의 노부인이 손가락으로 불러 세워
근엄하게 쉿! 하고 우아 우아 눈 흘기네 잠든 아기 안 보이니? 조용히 놀아야지 아이들 풀이 팍 죽고 여기 저기 수군대네
그라모 집에 있지 공원을 전세 냈나 내 겉으모 애기 깨워 쟤들 노는 거 보라 것다 아 싫다 저런 할마시 절간으로 가든지
그 때 발끈 돌아서며 스님이 푸념하네 머라꼬, 저 보쌀이 절에 오모 가만 있것나 얘들아 우리 아기 잠 깰라 목탁 끄고 염불 다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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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 삼중주
저 찬란한 탕진은 개화인가 낙화인가 누구는 희망을 펑펑 누구는 절망을 펑펑 한 살매 멱차올라서 자폭하는 별인가
드난살이 애옥살이 씨족끼리 서러워 펑펑 주지 못한 사랑 아래위로 불서러워 별똥밭 뉘누리치게 펑펑 젖어 우는 밤
그래 실컷 울자꾸나 천둥 번개 울력하며 서리담은 심알들이 어둠 속에 파종하듯 두리반 펑펑 들레며 함박눈이 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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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둥이 보살
울가망한 란다 창밖 하잖한 허공에서 부연 어둠 다독이는 먹물버섯 같은 달빛 지리산 대원사 계곡 석탄절을 재생한다
오줌보 차오르는 꽉 막힌 봉축 행렬 평생을 참고 참아 노랗게 뜬 승합차에서 할미꽃 예니곱 송이 포살포살 쏟아져 옴폭 팬 응달 굽이에 옹기종기 돌아앉은 낮달처럼 오련하게 여윈 궁둥이들이 음각의 일생에 돋은 양각으로 피었다
어머니 산 자락자락 골짝골짝 주름 같은 세월의 내공 없이 필 수 없는 그 달빛이 불면의 머리맡에서 보살보살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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