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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주의 종말론 비판(마24장을 중심으로)
우리가 막연히 혹은 확실히 믿고 있는 바는 이렇다.
인류 역사의 마지막에 7년 대환난이 있을 것인데 그때에는 적그리스도가 등장하고 짐승의 표를 받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무시무시한 세상이 될 것이다.
그 때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피난처로 피하지 않으면 다죽임을 당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환난을 통과할 믿음이 없으니 대환난이 오기 전에 휴거되게 해달라고 기도하기도 하고, 어떤사람은 대환난을 통과할 믿음을 달라고 기도한다.
대환난이 오기 전에 다 휴거될 것이니 안심하라고 성도들을 안심시키는 목사님이 있는 반면, 우리가 다 대환난을 통과할 것인데 신앙으로 단단히 무장되어야 한다고 강변하는 목사님도 계시다. 어떤 목사님이 옳은가, 환난전에 휴거한다고 가르치는 목사님이 옳은가, 환난을 통과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목사님이 옳은가? 어느 기도가 옳은가? 휴거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옳은가, 환난 통과할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옳은가?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구원과 의를 스스로 얻으려고 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얻으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 그리스도인의 생의 원천은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의 권리 주장이나 자신의 의로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생의 원천은 오직 하나님의 권리 주장과 의롭다고 해 주심에 있는 것입니다. "
이 글은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의 '신도의 공동생활'에서 인용한 글이다. 칼.바르트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했던 바로 그 글이다.
그렇지만 1942년 4월 히틀러 암살 기도 혐의로 나치스에 의해 체포 투옥된 이후에는 그의 신학은 완전히 달라진다. 그의 친구 베드게에게 쓴 옥중서신을 통해 그의 생각을 엿볼수 있는데 이 옥중서신을 기준으로 하여 그의 신학은 전기와 후기로 나뉜다.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우리는 성숙한 인간으로 살아야 한다." "신앙이란 하나님을 인격적 실존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 사신 예수님의 존재에 참여하는 새 삶이다." 전통적인 구원관을 신학적 구원관이라고 비난하고 우리의 구원은 저세상에서의 구원이 아니라 이세상에서 새로운 삶으로 돌아오는 것이라는 소위 '역사적 구원'을 주장했다.
분명히 옥중 서신을 통해 부각된 본회퍼의 이미지는 철저한 인본주의자 그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의 불타는 정의감, 남자다운 지조, 원숙한 인간미에 존경심을 느끼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현대에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계시해 줄 사람을 한 사람만을 들라고 하면 나는 기꺼이 본회퍼를 들겠다. 그렇지만 그의 후기신학은 우리가 따를 수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어떤 목사님이 다른 목사님보다 더 훌륭한 삶을 살고 계시니까 그의 이론이 맞을 것이라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신실한 신자 중에서도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있고 악한 사람이라고 해서 올바른 이론을 내어 놓지 못한다는 법은 없다. 심지어 귀신도 하나님이 한 분인 줄 아는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 않는가? (약 2:19)
올바른 종말관을 가르치는 교회가 많지않다. 올바른 교리를 가지고 있는 교회는 종말에 대해 잘가르치지 않고 온갖 이단들이 요한 계시록을 비롯한 예언서들을 자기들 나름대로 해석하여 가르치면서 기성 교회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는 현실이다. '휴거' 라는 공상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온갖 이단적 종말론 서적들이 서점의 서가를 뒤덮고 있다.
'이 장림 신드롬' 이후로 이제 이런 생각이 성도들을 지배하지 않을까 우려된다.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지 않느냐?"(벧후3:3,4)
이런 사람들에게 주님 예언의 정확성을 증명함으로써 주님은 반드시 구름을 타고 재림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경성시키는 역활을 이 논문이 감당할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곧 오실 것인데 그전에 적그리스도가 나타나고 이때까지 없었던 굉장한 대환난을 겪게 되리라 믿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사건들이 없이도 언제든지 주님이 오실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시킬 것이다.
세대주의에 깊이 빠져 그것만이 참 진리고 보수 신앙인 줄 알고 있는 분들에게 특별히 일독을 권한다. 세대주의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이미 세대주의자가 된 분들은 세대주의에 대해서 배우는 기회가 될 것이다. 이미 형성된 종말관을 바꾸기 어렵다면 종말에 대한 이런 견해도 있구나 하는 정도의 이해만 해주어도 고맙겠다.
1. 스코필드
미조리주 세트루이스.
스코필드( C.I.Scofield)라는 청년이 그의 친구 팍슨 ( C.E.Paxson)의 사무실을 찾아왔다. 그는 팍슨이 성경을 책상 위에 펼쳐 놓고 연필로 줄을 긋고 있는 것을 보았다.
스코필드는 친구에게 물었다. "아니, 자네는 왜 그렇게 좋은 성경책을 망쳐 놓으려 하는가?" 팍슨은 사도행전 8장 5절을 가리켰다. "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그리고 그 귀절과 줄을 그어 연결해 놓은 8절 말씀을 읽어 주었다.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스코필드는 성경에 표시를 하면 말씀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후에도 스코필드는 그 친구를 통해 영감과 가르침을 받았고 마침내 스코필드 관주 성경(Scofield Chain Reference Bible)을 쓰게 되었다.
이 스코필드 관주 성경이 교회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이 성경은 평신도들이 성경을 독자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안목을 제공했다. 이 성경은 구원의 확신과 영원한 보증을 비롯한 많은 칼빈주의 교리를 알미니안주의 교회들에게까지 퍼뜨렸다는 점에서도 평가할 만하다. 스코필드 이전까지 단한 사람의 성경 교사도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그처럼 깊은 영향을 -그것이 좋은 영향이든 나쁜 영향이든 간에 - 끼친 일은 없었다.
이 성경이 끼친 좋은 영향중에 성경을 인간의 이성으로 판단하려는 자유주의 신학으로부터 성경을 보호한 점도 간과할 수 없다. 그렇지만 이 성경은 세대주의 (dispensationalism) 라고 하는 하나의 분파를 발전시키고 대중화시켰다는 점에서 문제점을 안고 있다.
대부분의 평신도들은 세대주의에 대해 잘 모른다. 그러면서 자신도 모르게 이미 세대주의자가 된 사람도 있다.
세대주의가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 우선 스코필드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의 책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구분함' 중에서 한 귀절이다. "그렇다면 진리의 말씀은 적절한 시대로 구분되며, 그 시대 구분을 모르면 '책망 받을것이 없는 일꾼'이 될 수 없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그러한 시대 구분을 무시하는 어떠한 성경 연구도 전적으로 무익하며, 혼란만 가중시킬 따름이다."
대부분의 교회들이, 하나님께서 인류를 대해 오신 방법은 구약 시대와 신약시대가 다르다고 인정한다. 그리고 초대 교회 교부들도 이 두 시대를 인정했을 뿐이다. 그렇지만 스코필드는 성경을 일곱 시대로 나누고 각 시대마다 하나님의 새로운 경륜이 작용한다고 믿는다. 즉, 각 시대는 자연인에 대한 새로운 시험(test)기간으로 생각될 수 있으며, 그 시대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끝난다는 것이다.
스코필드가 나눈 일곱 시대는 다음과 같다.
1. 무죄 시대
2. 양심 시대
3. 인류 통치 시대
4. 약속 시대
5. 율법 시대
6. 은혜 시대
7. 그리스도의 인격적 통치 시대(천년왕국 시대)
모든 세대주의자들이 이렇게 구분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스코필드의 시대구분을 따른다.
세대주의의 핵심 요소를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은 세상을 각 시대마다 다른 경륜으로 다스리신다.
2. 이스라엘과 교회는 다르다.
3. 성경은 문자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4. 구원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사용하시는 '하나의' 계획이다. 하지만 그것만이 '유일한' 계획은 아니다.
이 논문은 세대주의 신학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세대주의 신학에 대해서 일일이 다 열거할 시간과 지식을 필자는 가지고 있지 않다. 다만 세대주의 종말관이 정통 교회에 스며 들었고, 많은 성도들이 그것을 성경적인 줄 알고 있지만, 그 종말관은 전혀 성경의 지지를 받지 못함을 논증하고자 하는 것이다.
세대주의 종말론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임박한 대환난을 믿고 있다. 대환난이 휴거후에 있다고 믿고 H.M. 모리스 박사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만일 우리가 하늘로부터 큰 징조들과 세계적 독재자의 출현과 기타 이 모든 사건들을 그리스도 재림 이전에 있다면, '깨어 준비하라'는 많은 권면들이 무엇이 되겠는가? 일단 이런 사건들이 발생한 후에 그리스도 재림의 임박성에 관하여 관심을 가지면 될 것이 아니겠는가?"
대부분의 세대주의자들은 휴거를 믿고, 휴거되지 못하고 지구상에 남아 있는 불신 세계의 심판을 위해 대환난이 있다고 믿고 있다. 이것은 정통신앙에 위배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마25:46)고 심판하시는 것은 예수 재림 후이다. 요한복음 5:28-29에는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고 되어 있다.
초대교회는 한 번의 심판을 가르쳤고 그 후에 많은 주의와 주장이 등장했지만, 19세기 세대주의가 생기기 전에는 휴거와 재림이 7년의 간격을 두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었다.
2. 세대주의
기독교의 종말론은 우선 예수 재림 후 지상에 지복 천년이 문자적으로 이루어질 것인가 아닌가에 대한 견해 차이로 부터 시작된다. 요한계시록 20장의 천년 왕국을 문자적으로 믿느냐, 아니면 천년왕국을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이미 진행되고 있는 그리스도의 영적인 통치로 믿느냐에 따라 전천년주의와 무천년주의로 나뉜다.
재림 후 천년왕국이 있다는 후천년설도 있으나 19세기 이후로 그 설을 주장하는 사람을 찾아보기는 어렵고 현재는 전천년주의와 무천년주의가 공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전천년설주의자 중에도 역사적 전천년설주의자와 미래주의적 전천년설주의자가 있다. 역사적 전천년설주의자는 교회사의 전체 영역을 말세라고 보고 종말에 관한 예언들을 해석한다. 요한계시록의 적그리스도의 출현과 대환난, 진노의 대접같은 예언들이 교회사적으로 이미 성취되었고 성취되고 있다고 보는 견해다. 그러나 미래주의자들은 종말시기를 그리스도 재림 직전의 짧은 시기로 간주한다. 그들은 말세의 모든 예언들을 재림 직전의 짧은 시기 동안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한다. 요약하면 역사주의자들은 예언의 성취를 지나온 역사 속에서 찾고 미래주의자들은 미래에 기대를 거는 것이다. (근본주의 신학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는 대부분의 복음주의자들은 미래주의적 전천년설주의자이다. )
전천년설주의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실제적으로 천년왕국을 세우고 말세의 예언들이 멀지않아 성취될 것으로 믿는다. 교회의 휴거가 언제 일어날 것인지에 대해서는 전천년설주의자들 사이에 다른 의견이 없었다. 환난을 통과한 후 재림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적어도 1820년대 말까지는 말이다.
하지만 1830년경에, 사도 시대 이래로 모든 전천년주의자들이 확립된 결과로 여겨 오던 것을 뒤엎고 이전에는 결코 들어 본적이 없는 일련의 교리를 그 자리에 세우려는 한 새로운 학파가 전천년주의의 양우리 속에서 일어났다. 그 학파는 .... J.N. 다비에 의하여 설립되었다.
다비(John NeIson Darby) 목사의 소위 말하는 '세대주의' 신학이 일어나기 전에 환난전 휴거를 주장하는 사람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1800년에 런던에서 태어난 다비는 회심 전에는 법률가였지만 그 직업을 포기하고 1825년에 영국국교의 부제로 임명되고, 엔니스케리의 부목사( curacy)에 지명된다.
그 곳에서 굉장한 성공을 거둔 그는 대주교가 선포한 하나의 교령( decree)에 반발하여 소책자를 개인적으로 발간하는 등, 저항을 했지만 실패, 성경적 원리 위에서 신령한 교제를 나누고자 하는 자신의 열망을 채워줄 어떤 집단을 찾게 되고, 결국 찾게 된다.
이 무리는 기도와 성경 연구를 통하여 서로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모이는 집단이었는데, 바로 이 무리가 그의 지도를 받아 뒤에 형제단 운동이 되었다. 이 형제단을 플리머스 형제단 (Polimouth Brethern)이라고 하는데 그가 성경공부를 인도한 곳이 영국의 플리머스였기 때문이다.
그는 헬라어, 라틴어, 히브리어, 프랑스어, 독일어에 정통해 있었고, 특히 철학, 역사, 특히 교회사에 광범위한 지식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열심히 일하는 습관을 가진 사람으로서, 새벽부터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경건의 시간을 가졌다. 하루종일 성경을 읽으며 보낼 때도 자주 있었다.
다비는 그후에 유럽을 여행하였고 미국과 뉴질랜드까지 가서 그의 독특한 성경해석법을 가르쳤는데, 그것은 예언에 기초한 성경해석법이었다.
다비는 플리머스 교단의 대표로 기적에 관한 자료를 모으기 위해 스코틀랜드를 여행했을 때 당시 성령운동의 지도자인 마가렛 맥도날드 양을 만난다. 그녀는 10대 소녀였다. 다비는 맥도날드 양으로부터 대환난이 있기전에 휴거되는 환상을 보았다는 이야기를 듣게되고 영국으로 돌아와서 그녀의 휴거론을 자신의 세대주의적 성경해석방식으로 구체화한다.
주후 1731년 칠리에서 태어나서 제수잇 신부가 되었다가 유태교로 개종한 마누엘 데 레쿤자 이 디아즈 (Manuel de lecunza y diaz)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랍비 벤 에즈라'란 필명으로 [영광과 권세 가운데 메시아의 오심]이란 책을 썼다.
그 책에서 그는 예수께서 세상에 재림하기 45일 전에 교회가 '들림'받아서 올라간다는 이론을 만들었다. 이 이론은 다니엘 12:11-12에 나오는 1290일과 1335일을 잘못 해석한 것이다. 교회가 공중에 45일 동안 머물러 있는 동안 하나님께서 지상에 남아 있는 악한 자들을 심판할 것으로 믿었다.
1801년 데 레쿤자가 죽은 후 그의 가설이 스페인에서 가르쳐졌고 1821년에는 스페인어로 책이 발간되었다.
1827년, 카톨릭 사도교회 지도자였던 에드워드 어빙 (Edward Irbing)에 의해 이 책이 영어로 번역된다. 영국 사람들은 어빙을 이단으로 보았기에 이 이론은 별 호응을 받지 못했다. 어빙은 그리스도 재림 연도를 1864년이라고 주장했다.
그 가설은 세력을 잃고 사라져 갈 뻔 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다비가 그의 책을 읽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스스로 깨달은 진리라고 주장했으나, 후에 편지에서 그가 데 레쿤자의 영향을 받았다고 실토했다.
다비는 불신자를 심판하는데 45일이란 기간이 충분치 못하다고 생각했는지 묘안을 첨가했다. 다니엘서 9:26-27에 나오는 남은 한 이레가 예수 재림 직전에 있을 7년 대환난이라는 이론을 세웠다. (이것이 7년대환난 이론의 시초다).
다비가 발견한 전혀 '새로운 진리'가 제수잇 신부였다가 유태교 랍비로 개종한 자의 생각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믿기 어려운 사실이다.
그러나 그 역사적 근원을 면밀히 조사한 존 브레이 (John Bray)는 '환난전 휴거의 교리'라는 그의 책을 통해 누구든지 다른 기원이나 더 오래된 기원을 알아내는 자에게는 현금으로 상금을 주겠다고 했다.
다비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지상백성(이스라엘)과 하늘의 백성(교회)에 대해 완전히 분리된 구속 계획을 갖고 역사를 진행하신다는 가설을 내세웠다. 그 가설이 자신의 깨달음인지 아니면 누구로부터 배운 것인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람들이 일단 다비의 이론을 받아들이자 성경은 완전히 다른 양상을 띄게 된다. 지상적인 사건에 대한 모든 예언들은 이스라엘에 속하고 천상적인 사건에 관한 예언들은 모두 교회에 속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대환난은 지상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그 기간 동안 고통을 당하는 성도들은 유대인들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교회는 대환난의 모든 예언이 시작되기 전에 휴거되어 하늘에 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세대주의 학자인 아이언사이드는 "교회의 휴거라는 귀한 진리가 빛을 보게 된 것은 파워스코튼 집회( Poverscourt Prophetic Conference)였다"고 진술했는데 이 모임의 지도자는 다비였다.
환난 이전에 휴거된다는 가르침은 당연히 반대를 불러일으켰는데, 이는 그 가르침이 역사적 전천년주의의 가르침의 내용과 상치된 까닭이다. 알렉산더 리즈(Alexander Reese)는 이 가르침이 역사적 신앙과 일맥 상통하지 않음을 분명히 보여 주기 위하여, 비록 전천년주의자라 할지라도 신약성경이 분리된 휴거를 가르치지 않는다고 해석하는 사도 시대 이래의 위대한 성경 학자들을 나열해 놓고 있다.
대환난의 사건들을 대체로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세대주의 종말론자들은 보통 도표를 그려 이 사건들을 설명한다.
1. 세상 마지막 때 적그리스도가 등장한다.
2. 7년 대환난이 있다.
3. 7년 대환난은 적그리스도가 다스리게 되는데
전 3년반은 선한 지도자로
후 3년반은 악한 지도자로 세상을 다스릴 것이다.
4. 예루살렘에 성전이 세워지고 희생제사가 회복된다.
5. 적그리스도와 이스라엘이 7년 언약을 맺는다.
6. 적그리스도는 3년반이 지난 후 그 언약을 파기한다.
7. 후 3년반은 "야곱의 환난의 때"로서 적그리스도가 이스라엘을 박해한다.
8. 이 환난 기간 중에 은혜의 복음이 아닌 왕국 복음이 전파된다.
9. 이스라엘의 남은 자 144,000명은 살아 남는다.
10. 아마겟돈 전쟁이 일어난다.
환난을 가르치는 근거는 언제나 존재하는 이스라엘과 교회 사이의 구분이다. 환난 이전 휴거는 이 개념에서 싹이 트는데, 이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가 모이기 전에 교회가 들림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과 교회 사이의 절대적인 이분법의 전제를 깔지 않고는 교회의 "들림"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귀절들을 세대주의에서 말하는 "휴거"를 가리킬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루시는 방식이 율법과 은혜의 두 방법이라는 이원론 또한 이 개념의 배후에 숨어 있다. 백위드는 주기도문의 "나라가 임하옵시며"라는 기도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이원론적인 해석 방법의 결론을 보여준다. "이 기도 속에서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환난 시기와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이후에 뒤따라올 그리스도의 참된 왕국을 위하여 그들이 기도해야 할 것을 가르치셨다."
7년 대환난의 개념이 세대주의의 해석 원리에서 생겨난 까닭에 환난 전 휴거라는 이 개념도 교회의 역사적 신앙에는 역시 낯선 것이다.
다비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몇몇 지도급 목사들을 설득하여 자신의 중심 교리를 가르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씨. 아이. 스코필드(C .I. Scofield)박사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이 이론은 하나의 가설로 남아 소멸되어 갔을지도 모르겠다.
스코필드 박사는 미국 회중교회 목사로서 달라스 제일교회에서 목회했다. 메사추세쯔주 노트필드의 무디교회의 목사를 지낸 후 여생을 스코필드 관주성경을 편찬하는 일로 보냈다.
스코필드는 다비의 이론에 심취되어 자기가 준비하고 있던 성경주석에 그 내용을 포함시켰다. 그 당시의 온건한 성서학자 3명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은 포함되었다. 세 사람은 이것 때문에 사퇴했다.
1990년 제임스왕 역본(the King James Version of the Bible)의 특별연구판인 스코필드 성경이 출판되었고 수십년 동안 스코필드 성경은 영어 성경중 가장 많이 사용되는 주석성경이 되었다.
7년 환난설은 스코필드 성경에 의해서 영어를 사용하는 모든 나라 교회들에 퍼져 나갔다. 하나의 가설에 불과한 7년 대환난설이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람들의 마음 속에 각인되어 가기 시작했다.
세대주의 학자인 월부어드 (Walvoord)는 "이 가르침은 다비와 플리머스 형제단에 의하여 신봉되었으며, 유명한 스코필드 성경에 의하여 대중화되었다"라고 말한다.
무디 성서학원의 아이언싸이드(Ironside)도 이 이론을 지지하게 되고 달라스 신학교, 그레이스 신학교, 팔보드 신학교를 중심으로 이 이론은 체계화된다. D.L.무디와 R.A.토레이 박사도 이 세대주의 영향을 입었고, 모든 복음주의 교회들은 잘못된 교리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깊이 간직하게 된다. 훨씬 오래된 교리임에도 불구하고 환난후 휴거론은 환난전 휴거론에 의해 기를 펴지 못하게 되었다.
그 후 1,2차 세계대전이라는 전무후무한 대환난을 겪은 후 환난전 휴거론은 점차 시들해 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대유성 지구의 종말'( The Late Great Planet Earth)을 쓴 홀.린세이( Hal Lindsey), '파멸의 지구와 천년왕국 시대'(the ene-time &1000-year)를 쓴 살렘.키르반(Salem Kirban) 같은 독실한 세대주의자들에 의해 세대주의 이론은 대중 속에 파고 들어오고 있다. '대유성 지구의 종말'은 1970년에 발간된 후 미국에서 천 이백만부나 팔려 나갔다.
이들 책은 성경에서 단편적인 귀절들을 선별해서 미래의 환상적인 모습을 엮어 놓은 것이다. 이 책들을 자세히 읽어 보면 시간적인 요소가 나타나 있지 않은 예언들과 예수 초림에 대한 예언들을 자신의 종말론적 구성에 따라 재림에 적용시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한국 교회는 특히 이 세대주의 종말론에 깊이 관련되어 있다. 예를 들면 한국 초대교회 시기에 요한계시록을 많이 강해하신 길 선주 목사도 세대주의 장에서 계시록을 가르쳤던 것이다. 오늘날도 교파를 초월하여 계시록을 강해하는 대부분의 목사들은 세대주의 종말론을 가르치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에 와서는 7년 대환난 통과후 휴거설을 주장하는 사람도 많아졌다. (여기서 대환난은 그냥 환난이 아니라 7년 대환난인 점에 주목하라.) 세대주의자이면서도 다비나 스코필드의 이론을 무조건 믿지 않고 성경을 깊이 연구한 사람은 환난전 휴거설의 모순점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유명한 신학자 켐벨, 몰간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 그는 세대주의자였다가 후에 세대주의를 포기했다. 자기 백성을 위한 주님의 공중 재림과 지상 재림 사이에 3년 반, 또는 7년의 간격이 있다고 보느냐는 질문을 받고 몰간박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그 견해를 잘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사역 초기에 나는 그것을 가르쳤고 나의 저술 중의 하나인 GOD's Method with Man 속에 그 견해를 편입시켰습니다. 하지만 연구가 계속되면서 이 교훈의 오류를 확신하게 되었으므로 나는 출판사로부터 그 책의 지형을 자비로 들여서 사 가지고는 부숴 버렸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능력과 영광 가운데 오시기 이전에 교회를 데려 가시기 위하여 따로 은밀하게 오신다는 생각은 예언을 엉뚱하게 해석하는 것으로서 전혀 성경적인 근거가 없습니다."
손기태 목사는 그가 쓴 [일곱째 나팔의 비밀]이라는 책에서 성경전체에서 7년 대환난 전에 휴거된다는 구절이나 공중에서 7년 동안 어린양의 혼인잔치가 있다는 구절을 찾는 사람에게는 천만원을 주겠다는 현상금을 걸었으나 아직까지 그 현상금을 받아간 사람이 없단다. 뿐만 아니라 존 T. 샤프트는 그가 쓴 [세상을 진동시키는 종말사건]이란 책에서 교회가 환난 전에 휴거될 것이라는 성경구절을 단 한 구절이라도 찾는 사람에게 1만 달러의 상금을 주겠다고 약 4만 명의 목회자들에게 통지를 했으나 상금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한다.
그런데 마태복음 24장과 다니엘서, 요한계시록의 7년을 기초로 7년 대환난 후 주님의 재림과 휴거가 이루어진다고 믿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들은 신앙 연단의 풀무불과 추수기의 타작 마당으로서 대환난이 주님 재림 직전에 반드시 있다고 주장한다. '마지막 때에는 악한 자와 의로운 자를 구별하는 타작 마당이 필연적으로 있으니 그것이 곧 대환난이다.
정말 대환난이 있는가? 있다면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 예비처로 피해야 한다고 하는데 어떻게 피하는가?
오늘날 교회는 누구를 기다려야 하는가? 적그리스도를 기다려야 하는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려야 하는가? 대환난을 기다려야 하는가, 아니면 예수의 재림을 기다려야 하는가?
감람산 강화를 상고하면서 그 해답을 찾아보자.
3. 감람산 강화
마태복음 24장 25장, 마가복음 13장, 누가복음 21장 5-36절에서 행해진 말씀을 통칭 감람산 강화라고 한다.
세대주의자들은 계시록 4장 이후의 사건은 휴거 후에 일어날 일들로 보고 감람산 강화에서 예수님이 하신 예언도 휴거 후에 일어날 일로 생각한다. 말세의 징조는 전혀없고 마태복음 24장의 모든 징조는 휴거후 7년 대환난 기간중에 일어난다고 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이미 그 징조가 보이기 시작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세대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날'과 '주의 날'을 엄격하게 구분하여, '공중 재림'과 '지상 재림'에 적용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천국'도 다르다고 주장하고, '민족들의 심판'과 '백보좌 심판'도 엄격하게 구분한다.
또한 그들은 감람산 강화를, 교회가 휴거한 후에 이스라엘 민족(또는 전인류)에게 임할 미래의 대환난을 말씀하신 것이라고 주장한다. 주후 70년에도 환난이 있었지만 그것은 이 대환난의 예표라고 보는 것이다.
H.A. 아이언사이드의 주장을 들어보자. 마태복음 24장을 설명하는 말이다.
"이것은 티투스와 베스파시안 시절에 겪은 고난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건들은 하나님의 아들의 재림이라는 절정에까지 이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일은 교회가 이방 황제들이나, 교황 시대의 박해 속에서 겪었던 경험들과 일치할 수 있는 가능성도 갖고 있지 않다."
요한 계시록에 빗대어 이 감람산 강화를 소계시록-작은 계시록-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나는 이 감람산 강화가 환상과 상징으로 가득한 요한계시록과는 그 특성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감람산 강화를 예수님 재림 직전의 사건으로 보기로 결심한 사람들에게는 이 예언들의 묵시처럼 보이는게 당연하다.
과연 이 소계시록이 재림 직전에 있을 대환난을 계시한 내용인지 아니면 이미 성취된 예언인지 같이 살펴보도록 하자.
이 소계시록이 이미 A.D. 70년에 일어난 사건을 예언한 것이라는 것이 밝혀지면 요한 계시록의 대부분(4장 이하 전부)을 예수 재림 직전의 사건으로 보려고 하는 사람들의 관점이 조금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자부심이 가득한 제자들이 예수님께 화려하고 웅장한 성전을 자랑하는 장면이 먼저 나온다. 그 자랑에 대답하여 예수께서는 이 아름다운 돌들이 하나도 제자리에 얹혀 있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막 13:3)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마 24:2)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눅 21:6)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이 모든 것'이나 '이것들'은 마가복음의 '이 큰 건물들'을 나타낸다. 이것은 스룹바벨이 주전 585 - 516년에 건설하고 헤롯대왕 때(B.C 20 - A.D 64) 증축한 제 2성전으로 통칭 헤롯 성전이라고 한다.
제자들이 한 질문은 이렇다.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 모든 일이 이루려 할 때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막 13:4)
"선생님이여 그러면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런 일이 이루려 할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까?"(눅 21:7)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날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까?"(마 24:3)
여기서 이 세복음서의 귀절들이 병행 귀절인가하는 것을 확실히 해 두어야겠다.
세 복음서 다 감람산에서 행해졌고 그 시점은 예루살렘 입성 후다. 예루살렘에 입성한 날이 토요일이라면 월요일날 말씀하신 것이고, 주일날이라면 화요일날 말씀하신 내용이다. 특별히 마가와 누가는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에 대한 말씀 후 이 감람산 강화를 위치시키고 있다.
마태와 마가복음은 마지막 때에 대한 예언이고 누가복음은 예루살렘 함락에 대한 예언이라고 주장하는 일부 세대주의 학자들이 있다. 그렇다면, 누가만 다가오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기록하고 마태와 마가는 그러한 참변을 무시하고 누가복음과 꼭같은 문맥으로 아주 먼 미래의 다른 환난을 기록한것이라고 볼 수 있단 말인가? 세 복음서 기사가 다 동일한 사건임을 결론짓지 않을 수 없다.
인용한 세 본문에서 첫번째 제기되는 질문은 '어느 때에 성전이 무너질 것인가?'하는 것이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성전이 무너질 것이라는 말씀에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제자들이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은 성전이 무너질 때였다. 그래서 성전에 들었던 예언의 말씀을 마음에 담아 두었다가 감람산에서 예수께 질문을 하게 된 것이다. 누가복음에는 감람산에서 하지 않고 바로 그 자리에서 그 질문을 한 것처럼 보이나 질문을 한 장소가 감람산인 것은 추정해 볼 수 있다. 성전에서 질문을 해서 대답을 들었는데 감람산에서 다시 질문을 했다고는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두번째 질문의 내용은 징조에 관한 것이다. 마가와 누가는 모두, 질문의 주 내용이 헤롯 성전의 훼파에 관한 징조를 묻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 모든 일이 이루려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까?"(눅 21:7)
여기서 이런 일이란 성전 파괴를 의미한다. 마가와 누가가 구속사의 완성을 의미하는 예수 재림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았다고 하는 사실은 그들이 기록한 주요 내용이 세상 끝날에 일어날 사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마태의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까?'라는 질문을 마가와 누가는 빠트렸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세상 종말에 대한 예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그렇다면 마가와 누가복음서는 제자들이 빠트린 질문(세상 끝에 대한 징조)에 동문서답하고 있는 예수를 그려 놓은 것이 된다.
마가나 누가가 제자들의 질문을 빠트리고 기록하지 않았으리라고 믿는 것은 타당하다. 예수님의 답변이 당신의 재림에 대한 징조를 나타내는 것이 분명하다면 왜 그렇게 중요한 질문을 마가나 누가는 빠트렸을까?
당시에는 66권을 묶어서 보관한 사람이 없었음을 우리는 안다. 또 책이 귀해서 한사람이 책을 읽으면 다른 사람은 귀로 들었다.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서만 읽은 사람들이 이 감람산 강화를 읽으면서 예수 재림의 징조를 언급한 사실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인가? 마태가 기록한 일부의 질문을 기록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들이 강조하는 바나 중요하다고 생각한 내용이 예수 재림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예루살렘 멸망이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마태복음을 기초로 하여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을 자기들의 해석에 끼워 맞추려고 한다. 그렇지만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예수 재림에 대한 질문도 아니고 답변도 아니다. 마태복음서의 질문은 헤롯 성전의 파괴 시기와 징조에 대한 질문에 재림과 세상 끝에 대한 질문이 덧붙여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나는 마태복음 24장 36절 이후가 재림과 세상 끝날에 대한 문제를 다룬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제자들은 왜 예수 재림에 대한 질문을 했을까? 칼빈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여기서, 어릴적부터 이 성전은 세상 끝까지 남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그들의 머리에 박혀 있었기 때문에, 세상의 창조 질서가 무너지지 않는 이상 이 성전이 무너진다는 일은 그들에게 있어서 상상 밖의 일이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제자들은 성전이 파괴되는 시점이 세상 끝이고 자신들이 오랫동안 기다리던 메시아 왕국의 시작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성전의 파괴와 예수의 재림을 같은 시기에 두고 생각했을 것이다.
예수께서도 제자들과 꼭같이 잘못된 개념(성전 파괴=세상 끝=예수 재림)을 가지고 제자들의 질문에 대답을 한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제자들이 세상 종말에 있을 징조에 관한 것을 질문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의 대답도 세상 종말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제자들은 성전 파괴와 예루살렘 멸망을 질문했고 예수님의 대답도 성전 파괴와 예루살렘 멸망이었다.
마태복음에서의 재림에 관한 대답도 이 질문에 대한 대답 후 하게된다. 예수께서는 헤롯 성전과 더불어 마지막 때에 세워질 제 3성전도 함께 언급하신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그 사실에 대한 조금의 암시도 없이 두번의 성전 파괴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는 말인가?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마 24:34) 자유주의 신학자들 중에는 이 말씀을 근거로 예수님께서 재림 시기를 잘못 말씀하신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한 주장은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는 일이 되므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고, 다음의 설명을 통하여 '이 일'이 예수의 재림이 아님을 증명할 수 있으므로 더 이상 논란의 여지가 없겠다.
다시 한번 강조하는데 마태복음 24:1-35은 예수 재림의 징조가 아니다.
우리가 말세의 징조라고 생각했던 귀절들을 하나씩 살펴보자.
1. 거짓 그리스도의 출현
2. 난리와 난리 소문
3. 나라간의 전쟁
4. 기근
5. 지진
6. 핍박
7. 불법, 사랑이 식음
8. 천국복음이 땅끝가지 증거
9.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섬
10. 거짓 선지자
11. 하늘에서 보이는 인자의 징조
필자는 이상의 사건들이 말세의 징조라고 굳게 믿었고 부끄럽게도 C.C.C나 대학부 학생들에게 가르쳐 왔다. 빌리 그래함 박사도 그의 책 '불타는 세계'에서 이 사건들을 말세의 징조로 열거하고 있다. 다비와 스코필드의 기초 위에 세워진 세대주의의 영향이라고 하겠다.
위에 언급한 사실들은 예루살렘 멸망의 징조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줄 알라"(마24:32)는 말씀에서 '이 모든 일'은 바로 이 예루살렘 멸망의 징조를 말하는 것이고,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마 24:33)는 말씀에서 '이 일'은 예루살렘 멸망을 가리킨다.
이 일들은 다 이루어졌는가?
필자는 성경이 성령의 감화로 기록된 완전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 각 책이 떨어져서 존재할 수 없는 유기적인 존재인 것을 믿고 성경은 성경으로 풀어야 한다는 원칙을 고수한다. 그렇지만 성경에 나와 있지 않는, 저자에 관한 개인적 특성, 그 책이 씌어진 때의 정치적 상황, 종교적 상태, 지리적 환경 등을 알기 위해서는 세속 문서도 참고할 필요도 있다고 본다.
벌코프 박사의 충고를 들어 보자. "할 수 있는 대로 해석자는 지금 있는 역사적 자료에서 또는 역사적 원리하에서 그 책이 기록된 환경을 재생시킬 의무가 있다. 다시 말하면 저자가 살고 있던 세계를 다시 살릴 책임이 있다. 그 책을 기록한 땅의 지리와 그 책이 대상으로 하고 있는 백성의 특성, 역사, 풍속, 도덕, 종교 등도 잘 알아야 한다."
그의 충고에 따라 이 일이 다 이루어졌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요세푸스의 책 [유대 전쟁]이란 책을 참고하기로 한다. 그의 [유대 전쟁]이란 책은 신용할 만하고 매우 가치 있는 것으로 인정을 받는다. 그러나 한가지 비평받을 것은, 여기 사용한 숫자들이 좀 과장되었고, 로마인의 영웅적 행사와 위대함을 지나치게 치하한 점이다.
필자는 감람산 강화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요세푸스를 반드시 알아야만 된다고 믿는다.
4. 요세푸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Flavisus Josephus)는 주후 37년 또는 38년 경에 예루살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제사장이었고, 어머니는 하스몬 왕가의 자손이었다. 그의 히브리어 이름은 '요셉 벤 맛디어'(Josep Ben Mattias)였다.
16살 때 그는 스스로 은둔자인 반누스(Bannus)를 따라 3년 간을 광야에서 지냈다. 19살때 바리세파에 가담했다. 26살때(A.D 64년) 그는 로마에 가게 되는데 유대 총독 벨릭스(Felix)가 재판을 받게 하려고 로마로 보냈던 제사장들의 석방을 탄원하기 위해서였다.
이 거대하고 화려한 도시 로마는 그에게 굉장한 감명을 주었다. 요세푸스는 연극배우로 있는 절친한 친구를 통해 황제 네로의 황후 폽베아(Poppea)를 만나게 되고 그녀의 도움으로 그의 사명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게 된다.
유대로 돌아왔을 때 그는 로마에 반란을 일으키려는 사람들이 온 유대인을 지배하고 있음을 보았다. 그는 할 수 없이 반란에 가담했으나 빨리 시리아에 있던 케스티우스 갈루스(Cestius Gallus)가 이 반란을 진압해 주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케스티우스는 진압에 실패하고 그의 군대는 완전히 패주하고 말았다.
로마의 장군 베스파시안(Vespasianus)이 올 때까지의 반년 동안 갈릴리 지방의 사령관이 되어 성읍들을 요새화하고, 식량을 저장하고, 군대를 훈련하면서 보냈다.
그는 자신의 온건한 유화정책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친로마인으로 보이지 않을까 두려워하면서도, 직접적인 공격보다는 방어에 치중하도록 전쟁론자들을 설득했다. 그 결과 친로마 유화론자들이나 전쟁론자들로부터 모두 공격을 받았다. 수차례에 걸쳐 그의 직권과 생명이 위험에 처했다.
결국은 극단론자들이 요세푸스로 하여금 최종 결정을 내리게 강요했다. 지위를 내놓든지 행동을 하든지 양자택일 하도록 강요했다.
이런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베스파시안이 현장에 도착했다. A.D. 67년 7월 요타파타(Jotapata)요새가 포위 공격을 당하여 결국 함락되었는데 요세푸스는 자살하겠다고 맹세한 수명의 동료와 함께 동굴에 숨어 지내다가 결국 포로가 되어 베스파시안 앞에 끌려나가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요세푸스는 베스파시안이 차기 황제가 될 것이라는 예언을 전하였다. 요세푸스의 이 예언은 2년 후(A.D.69) 베스파시안의 부대가 그를 로마의 황제로 선포함으로써 성취되었다.
이 예언으로 해서 요세푸스는 베스파시안의 총애를 받는 특별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는 자유인이 되었으며 죽을 때까지 플라비우스( Flavius)왕가의 가신으로 남게 된다. 플라비우스라는 이름도 여기에서 얻었다.
베스파시안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티투스( Titus)가 예루살렘 함락의 책임을 떠맡게 되자 그는 그 전쟁의 보고자, 통역자, 중재자가 되었다. 그는 유대인들을 항복하도록 성벽 주위를 돌아 다녔고 이로 인해 열심당원들의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 그는 티투스로부터 사례를 받았을 뿐 아니라, 로마로 가서 로마 시민권을 얻고 황제의 연금을 받으며 남은 생애를 보냈다.
[유대 전쟁사]( The Wars of the Jews)는 A.D. 75-79년 사이에 씌여졌는데, 전부 7권으로 되어 있다. 유대인과 로마 사이에 있었던 전쟁에 관한 이 책은 로마 왕조의 후원을 받아 기록한 것으로서 티투스가 강권하여 기록하게 했다. 아랍어로 씌여졌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헬라어판만 남아 있다.
그의 기록은 유대 국가를 엄습하였던 처참한 대학살에 대하여 우리에게 상세하게 전하고 있는 유일한 기록이다.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그의 기록은 그 대환난 기간 동안에 유대 국가가 겪어야 했던 수난이 어느 다른 환난에 비길 수 없는 것임을 생생하게 증거하고 있다. 이 기록은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기 위해 하나님의 섭리로 보존되었다고 하는 것이 많은 양식있는 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그의 책이 처음 나왔던 A.D. 75년은 A.D. 70년의 대학살에 관한 여러가지 사건들이 아직 사람들의 뇌리 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던 때였다. 아직도 생생하게 대환난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이 생존해 있던 시기에 그 사건에 대한 자세한 기록을 책으로 내었다는 것은 그의 기록이 얼마나 정확한가를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이다.
요세푸스는 기독교인이 아니었기에 의도적으로 감람산 예언과 자신의 기록을 일치시키려고 했을 리가 없다. 그렇지만 그의 기록은 '대환난'에 대한 그리스도의 예언(눅21:23)이 확실히 성취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요세푸스는 이스라엘이 경험했던 '대환난'이 이때까지 세계가 경험했던, 그리고 앞으로 경험하게 될 어떤 환난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전무후무한 대환난이었음을 생생하게 증거하고 있다. 요세푸스는 이 예루살렘과 유대 국가의 최후를 다니엘 예언의 성취로 보고 있다. 이제 우리는 그의 글을 통해 감람산 예언이 얼마나 정확하게 성취되었는가를 살펴 보자.
5. 거짓 그리스도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마 24:4-5)
과연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라고 해서 사람들을 미혹했는가?
실제로 '내가 재림 예수다'라고 주장한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의미는 단지 '기름부음 받은 자'의 의미다.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의 의미다.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라고 주장할 사람이 많이 나타날 것이라는 것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진의일 것이다.
사도행전 5:36-37에서 우리는, 존경받는 교법사 가말리엘의 입을 통해 드다와 갈릴리 유다라는 거짓 그리스도를 만난다.
그리고 사도행전 8장을 보면 마술장이 시몬에 대한 기록을 볼 수 있는데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사마리아 백성을 미혹했다.
또 사도행전 13장 6절에는 바예수라 이름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와 바울이 마주친 기록을 볼 수 있다. 사도행전 21:38에서 사천의 자객을 거느리고 광야로 가던 애굽인도 거짓 선지자임에 틀림없다. 요세푸스는 벨릭스(Felis)가 유대 총독으로 있을 당시 (행 23:26) 거짓 선지자들이 거의 매일 몇 명씩 체포되어 처형을 당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6. 난리, 기근, 온역, 지진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마 24:6-8)
감람산 강화 이후 예루살렘 멸망 사이의 40여년간은 유대인들의 반란을 비롯한 온갖 소요들로 점철되어 있는 기간이었다. 가이사랴에서는 폭동으로 말미암아 이만명의 유대인들이 죽었고, 스키로폴리스에서는 일만삼천명이 떼 죽음을 당했고 다메섹에서는 만 명의 유대인이 몰살하였다.
그 시대의 혼란상은 로마의 황제 갈바(Galba), 오토(Otho), 비텔리우스(Vitellius), 베스파시안(Vespasian) 4명의 황제가 한 해 동안 즉위했던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끝은 아직 아니다"는 말씀은 난리와 난리 소문이 예루살렘 멸망의 징조가 아니라는 말씀이다. 명백한 징조는 뒤에 나타난다.
비록 현시대에도 이러한 자연 질서의 동요가 되풀이 되어 나타나고 있지만 예수님의 경고는 특히 주후 70년 대환난에 앞서 동시대인에게 한 것이라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사도행전 11장 28절에는 선지자 아가보가 "글라우디오 때에(주후 44년) 천하에 크게 흉년(기근)이 들 것"을 예언하고 있다. 안디옥 교인들이 유대 지방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긴급 구제 선교에 착수할 정도로 심한 기근이었다.(29절) 유세푸스는 이 기근이 예루살렘에서는 대단히 심각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태복음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누가복음에는 '온역'이 기록되어 있다. "처처에 큰 지진과 기근과 온역이 있겠고"(눅 21:11)
질병 또한 이 당시 만연했다고 하는 사실을 당시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요세푸스는 주후 40년 바벨로니아 지방에 퍼졌던 온역에 대해 언급했고, 타기투스는 주후 66년 이태리 지방에 퍼졌던 온역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수에로니우스는 네로 황제가 왕위에 있을 때 "한 해 가을 동안 3만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을 정도로" 심한 온역이었음을 언급하고 있다.
20세기에 들어 와서 부쩍 많은 지진이 발생한다는 통계 자료를 기초로 특별히 지진을 말세의 징조로 보는 목사님들이 많다.
우리는 주후 30년 이래 초대 교회 당시에도 많은 지진이 있었음을 성경을 통해 알 수 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와 (마 27:51-54) 부활하실 때도 지진이 있었다. (마 28:2) 빌립보 감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를 구출한 것은 그 때 빌립로를 강타한 큰 지진이었다. (행 16:26) 갈리굴라 황제와 글라우디오 황제의 재위 기간 중에는 엄청난 지진이 발생하였다. 글라우디오 재위 중에는 그레데, 서머나, 밀레도, 키오스( Chios), 그리고 사모스( Samos)등지에서 지진이 발생하였다.
타기투스는 로마에 발생한 지진에 대해서 기록했다. "(로마에) 지진이 자주 발생하여 많은 가옥들이 무너져 내렸으며 아시아에서는 열두 개의 대도시가 지진으로 폐허가 되었다."고 기록했다. A.D. 54년에는 네로가 즉위하던 그 날에 지진이 발생하였다. 네로의 재위 동안에는 A.D. 60년에 라오디게아세서 또 지진이 발생했다고 언급되었는데, 그 지진으로 말미암아 라오디게아뿐만 아니라 인접 도시들인 히에라폴리스와 골로새도 붕괴되었다.
A.D. 58년에 세네카는 이렇게 기록했다. "아시아와 아가야 지방의 도시들은 어찌하여 그렇게 자주 단 한번의 치명적인 충격으로 쓰러져 버리는지! 수리이 지방에서는 또 얼마나 많은 성들이 무너져 버렸는지! 또 마게도냐에서는 얼마나 많은 도시들이 무너져 내렸는가! 바보(Paphos; 구브로에 있는 도시 이름)는 얼마나 자주 폐허가 되어 버렸는가! 너무도 자주 일시에 성 전체가 붕괴되었다는 소식이 우리의 귓가에 들려 온다."
세네카는 또 캄파니아(Campania)에서 또 한 차례의 지진이 있었다고 언급하고 있으며, 수에토니우스는 갈바(Galba)황제의 재위 동안에 로마에서 한 차례의 지진이 발생했음을 언급하고 있다.( A.D. 68년). 도시 폼페이는 A.D. 63년 지진에 의해 멸망하였다.
요세푸스는 강한 비바람과 천둥 번개를 동반한 큰 지진이 유대 지방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논평했다. "지구가 체계가 혼란에 빠진 것은 무서운 심판이 인간에게 임할 것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였다. 따라서 누구든지 이런 자연현상 뒤에는 무서운 재난이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를 기억하라. 이 말씀은 끝이 이르기 전에 난리, 기근, 온역, 지진보다 더 큰 재난이 닥칠 것이라는 뜻이다.
7. 핍박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마 24:9)
마태복음 24:9에 막연히 '환난에 넘겨주겠으며'으로 기록된 말씀의 정확한 뜻을 병행귀절인 마가복음 13:9과 누가복음 21:12에서 찾아볼 수 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마 13:9/눅 21:12 참조)
이 말씀은 12 제자를 파송하시면서 하신 말씀과 동일하다.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겟고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마 10:17)
"공회"는 예루살렘의 '산헤드린'을 가리킨다. 이 산헤드린은 예수와 초대교회를 끊임없이 괴롭혔던 이스라엘의 통치적 교회기관이었다. 그리고 "회당"은 지방차원의 유대 종교 및 민사 당국을 대표했다. 이 두 기관은 A.D 70년 예루살렘 멸망과 더불어 그 권력은 종식된다.
그 후의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을 받아도 공회와 회당에 끌려간 적은 없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위의 말씀을 보면 감람산 강화가 2000년이 흐른 이 세대를 향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세대의 제자들을 경성시키기 위한 말씀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끌려가려니와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 증거가 되리라"(눅 21:12-13) 여기서 증거는 '증거의 기회'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지독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그 상황 속에서 도리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를 강력하게 증거할 수 있는 기회를 찾은 사실은 사도행전의 기록들에서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다.
"이튿날에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며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이 관원과 장로들아"(행 4:5-8) "이튿날 천부장이 무슨 일로 유대인들이 그를 송사하는지 실상을 알고자하여 그 결박을 풀고 명하여 제사장들과 온 공회를 모으고 바울을 데리고 내려가서 저희 앞에 세우니라.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행 22:30, 23:1) "총독이 바울에게 머리로 표시하여 말하라 하니 그가 대답하되..."(행 24:10)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허락하노라 하니 이에 바울이 손을 들어 변명하되"(행 26:1)
8. 하늘로서의 징조들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서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눅 21:11)
누가 복음에만 있는 이 기록은, 징조의 초자연적 성격 때문에 이 시대의 끝에 위치시키는 사람도 있지만 앞 뒤 문맥을 살펴보면, 이 현상이 A.D. 70년 예루살렘 성이 포위되기 전의 사건임을 금방 알 수 있다.
요세푸스는 예루살렘 멸망에 앞서 이러한 '무서운 일과 하늘의 징조' 가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예루살렘 위에는 일년 내내 칼 모양을 닮은 별 하나와 혜성이 계속 떠 있었다... 무교절이 다가와 많은 유대인이 성전에 운집하였다... 갑자기 대낮같이 밝은 빛이 제단과 성전 주위를 비추기 시작하더니 무려 반 시간이나 계속되었다...
또한 바로 이 무교절 때에 대제사장이 제물로 바치려고 끌고 들어온 어린 암소가 성전 한가운데서 새끼를 낳기도 하였다. 게다가 성전 안뜰의 동쪽문이 저절로 열리기도 하였다. 이 문은 동으로 만들어져 있어서 매우 무거웠기 때문에 20명이 달라붙어야 겨우 여닫을 수 있었다. 게다가 문받침이 쇠로 되어 있었고 나사못( bolts)이 하나의 돌로 된 단단한 바닥에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도저히 저절로 열릴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밤 제 6시에 저절로 열린 것이다... 성전의 문이 적에게 유리하도록 저절로 열려 안전의 문제에 구멍이 생길 것을 보여주는 징조로 해석했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학식 있는 자들은 이 징조가 예루살렘의 멸망을 전조로 보여주고 있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하기까지 하였다.
이같은 하나님의 심판의 표적 외에도 또 다른 표적이 있었다.
위의 무교절이 지난 며칠 후, ...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신기한 현상이 ... 나타났다. ...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현상이란 다름이 아니라 해가 지기전에 완전 무장을 한 병사들과 병거들이 구름 속에 나타나 예루살렘 성을 에워싸는 모습이었다. 이 외에 또 다른 표적이 있었다. 오순절(Pentecost)이라고 부르는 절기에 제사장들이 성무를 집행하기 위해 판례에 따라 밤에 성전 안뜰로 들어가고 있을 때였다. 바로 그 때 제사장들은 땅이 흔들리는 것을 느끼고 큰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큰 소리가 난 후에는 "우리가 이 곳을 떠나자"라고 말하는 무리들의 목소리 같은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도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하늘에서 끊임없이 천군들이 싸우고 있는 것이 보였으며 무기가 번쩍거렸다. 갑자기 구름속에 나온 불에 의해 성전이 환하게 밝혀졌다. 돌연히 대문들이 열어젖혀지고 초인간적인 목소리가 '신들이 떠나가고 있다'고 외쳤다."
지금까지 언급한 전쟁, 기근, 온역, 지진, 핍박, 하늘의 징조 들은 요한계시록의 6장의 여섯 인에 대비할 수 있다.
마 24:6-9, 29 ........ 계 6:2-17
1. 전쟁 .................. 전쟁의 승리자 (흰 말)
2. 국제전쟁 ........... 전쟁 (붉은 말)
3. 기근 ................ 기근 (검은 말)
4. 지진 ................ 질병과 죽음 (청황색 말)
5. 핍박 ................ 핍박 (순교자)
6. 하늘의 이상 .... 지진, 하늘의 이상
여기서 나는 요한계시록을, 요한이 그 글을 쓰던 시대에 일어났던 일로만 보는 과거론자가 아님을 분명히 하겠다. 그렇지만 전쟁, 온역, 기근, 지진등이 미래의 7년 대환난에 일어날 사건이라든지 말세의 징조라고 하는 주장에는 명백히 반대의 입장을 취한다.
9. 거짓 선지자, 불법
"그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마 24:10-13)
나는 요세푸스의 다음 기록을 통해 이 예언도 문자적으로 성취되었다고 본다.
"벨릭스(Felix)는 20년 동안이나 유대를 휩쓸며 약탈을 일삼던 강도 두목인 엘르아살과 졸개들을 생포하여 로마로 압송하였다. 벨릭스가 체포한자들과 처벌한 자들과 십자가에 처형한 자들이 수는 너무 많아 셀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났다.
이들을 완전히 제거하고 나자 이제는 대낮에 도시 한가운데서 살인을 자행하는 시카리라고 부르는 강도들이 예루살렘에 나타나게 되었다. 이들은 주로 절기 때 단검을 품고 군중 속에 숨어 있다가 적을 살해하고는 모르는체하였다. 그들은 오히려 누가 그런 짓을 했느냐고 군중들과 함께 펄펄 뛰었다. 이런 식으로 해서 사람들의 신뢰를 얻었기 때문에 이들은 발각되지 않고 적들을 살해할 수 있었다.
이들의 손에 처음으로 희생된 사람은 대제사장 요나단이었으며 그 후로 매일같이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이에 죽음 자체보다는 언제 살해될지도 불안감이 오히려 많은 사람들을 심하게 괴롭혔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은 전쟁중의 병사들처럼 항상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으며 혹시 적들이 가까이 접근하지 않나 해서 먼 데까지 경계를 게을지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친구들이 접근해도 의심의 눈초리를 늦추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같이 의심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살해당하였다. 왜냐하면 시카리들의 행동이 워낙 민첩하고 술수가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이들 외에도 또 다른 악의 무리들이 있었다. 이들은 행동에 있어서는 시카리들보다 잔인하지 않았으나 그 의도에 있어서는 더욱 악했다. 따라서 이들은 시카리들 못지 않게 예루살렘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다름이 아니라 정권의 변화와 변혁을 노리고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는 미명 하에 백성을 현혹시키고 기만하는 무리들이었다.
이들은 백성을 반미치광이로 만들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자유의 표징을 보여주실 것이라고 백성을 속였다. 그러자 백성들은 미친 사람들처럼 광야로 몰려 나갔다. 그러나 벨릭스는 이런 사태의 진전이 반역의 시초임에 틀림없다고 판단하고 무장한 기병과 보병을 보내 수많은 유대인들을 학살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어서 요세푸스는 애굽인 거짓 예언자를 언급하고 있다. 그는 3만 명이나 되는 추종자를 이끌고 벨릭스에 대항해서 싸웠고, 접전 끝에 몇 명만을 거느리고 도망했다.
10. 온 천하에 퍼진 복음
"이 천국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
여기서 말하는 "끝"이란 무엇일까? 이스라엘 나라의 끝을 의미한다. 마태복음에서만 언급된 귀절이라면 그 "끝"을 세상 끝으로 볼 수 있겠으나 예루살렘 멸망을 묻는 마가복음에도 언급되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나라의 멸망을 말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또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막13:10)
현 세대의 온 세상, 그러니까 러시아나 중공, 북한, 회교권 깊숙이까지 복음이 전파될 때까지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많다.
그러면 과연 주후 70년 이전에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되었는가?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오가 태어나기 훨씬 전의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만 한다.
누가복음 2장 1-3절에서는 가이사 아구스도가 "천하로 호적하라"는 귀절이 나온다. 이 구절의 "천하"는 한가지 사실을 의미할 수 밖에 없는데 그것은 로마제국인 것이다.
또 사도행전 2장 5절을 보면 오순절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거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그 당시 세대의 모든 나라들이 복음을 들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로마서 1:8에 보면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었다"고 바울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귀절을 볼 수 있다. 현대어 성경으로 로마서 16:26을 보면 그 뜻이 더 분명하다. "그래서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에게 복종하게 되었습니다."
골로새서 1장 6절에 보면 복음이 "너희 중에서와 같이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라고 했고 골로새서 1장 23절에는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라고 씌여 있다.
이제 우리는 오해로부터 벗어나야 할 시점이다. 우리는 마 24:14이 재림과 관계있다는 주장이 근거를 잃게 되었다고 확신한다. 그렇지만 우리 시대의 종말까지 지구의 끝부분까지 복음이 영향을 미치리라는 것을 암시하였다고 주장해도 굳이 반대할 필요는 없겠다.
11. 멸망의 가증한 것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읽는 자는 깨달을진저)"(마 24:15)
7년 대환난 시에 제 3성전이 반드시 세워지고 그 곳에 '멸망의 가중한 것' (잔포하여 미운 물건)이 서고 적그리스도가 그 우상에게 경배하게 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세대주의자들이 있다.
이러한 종말의 시나리오가 나오게 된 성경 귀절은 무엇일까?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잔포하여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단 9:27)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살후 2:4)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되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 짓밟으리라"(계 11:1-2)
그리고 '짐승'과 '그의 우상'이 나오는 계시록 13장과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언급된 본문 말씀이다. 이런 구절들이 종말에 나타날 적그리스도와 그의 우상에 대한 상상으로 발전하게 된 귀절들이다.
성경에 나오는 적그리스도(antichrist)라는 용어를 다 찾아보자. 굉장히 많이 있을 것 같지만 요한서신 네 군데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 요한일서 2장 18절, 22절, 4장 3절, 그리고 요한이서 7절이다.
요한일서 2장 18절에서 요한은 이미 적그리스도가 왔다고 했고, 따라서 마지막 때인줄 안다고 했다. 22절에서는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적그리스도라고 했다. 4장 3절은 이상의 두 귀절을 요약해 놓은것이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지 않는 영마다 적그리스도의 영으로서 벌써 세상에 왔다고 한다. 요한이서 7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가 적그리스도라고 했다.
요한에게 있어서 예수님이 성육신한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너무너무 중요한 사실이었다. 이 사실을 부인하는 자는 미혹케하는 자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대적하는(anti-)자인 것이다.
실질적인 용어는 '적그리스도'가 아니지만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악의 화신을 '적그리스도'라고 부른다.
구약에서는 다니엘서에 나오는 '작은 뿔'이 '적그리스도'라고 이해된다. 신약에서는 마태복음 24장의 '거짓 그리스도'를 적그리스도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바울이 말하는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살후 2:3-5), 요한계시록의 '짐승(13장)을 적그리스도와 같은 개념으로 생각한다.
계시록에서는 적그리스도의 권능이 로마제국과 황제숭배로 대표되는 것으로 이해되며(계 13:1-10), 또한 적그리스도는 이 예식을 권장하는 거짓 에언자로 상징화된다. (계 13:11-18) 초대교회는 적그리스도를 로마의 황제로, 특히 네로와 도미티안으로 간주했었다. 존 후스와 위클리프는 적그리스도를 전체 카톨릭 교회로 확대 해석하였다. 마틴 루터는 교황이 적그리스도라고 믿었다.
교황이 적그리스도라는 생각은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수사들이 퍼뜨린 것이라고 한다. 지금도 안식교에서는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믿으며, 미래에 안식을 지키고 주일을 지키지 않는 안식교도들을 핍박할 것이라고 믿는다.
에스겔 37장의 "곡"을 공산주의 종주국이던 소련으로 해석하여 "후일에 소련이 이스라엘을 침범할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공산주의가 적그리스도가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다.
미래에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것이라는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요한계시록에 적그리스도가 자주 묘사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요한계시록 3장 이후에 나오는 모든 것들을 미래에 관한 것으로 돌린다. 이러한 미래주의적 접근법은 예수회의 일원이었던 프란시스코 리베라(Francisco Ribera)라는 신부가 1580년에 고안해 낸 방법이다. 그것은 로마 카톨릭 교회가 계시록 13장의 짐승이고 살후 2:4의 불법의 사람이라는 주장으로부터 카톨릭 교회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이 이론은 사무엘 R. 메이틀랜드 (Samuel R. Maitland)에 의해 1826년 개신교회에 소개되고 어빙, 다비를 거쳐 세대주의의 공인된 해석으로 받아들여지기 전에는 개신교회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최근에는 세대주의자들이 제안한 미래의 세계정부 지도자들 적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이 많다. 로마 황제나 교황, 히틀러, 스탈린 앞으로 나타날 세계정부 지도자, 적그리스도의 '예표'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개봉되었던 영화, '오멘'(the omen)은 공포영화로서, 적그리스도의 출생과 성장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데, 머잖아 7년 대환난이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세대주의자들에게는 정말 무서운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한 때,'세계정부와 666','컴퓨터와 짐승의 표 666'같은 책들이 베스트 셀러가 된 적이 있었다. 그 책은 바코드가 짐승의 표로서 가까운 장래에 모든 사람들이 오른손이나 이마에 바코드를 받아야 생명을 유지해야 할 때가 온다는 것이 성경에 나와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저서들은 소설이 아니다." 라고 주장하는데 나는 소설같이 느껴짐을 어찌할 수 없다.
요한이 과연 20세기 말을 사는 우리에게 그 사실을 알리려고 계시록 13장에서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 666을 세어보라고 했을까? 고대 사본중 여러 권에서는 이 수가 616인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나는 바클레이가 제대로 설명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은 로마의 사악한 권세요, 땅에서 올라온 짐승은 황제숭배를 강제하여 그 결과, 크리스챤들에게 죽음을 초래케 하는 조직이다. 다쳤다가 나은 머리는 네로요, 마귀의 악의 화신으로 되살아날 것이라는 악한 괴물이다."
1세기 중엽 후반에 이방인과 그리스도인 사이에 깊숙히 뿌리박은 신앙이 바로 '네로 부활설'이다.
네로는 주후 64년, 고의로 로마를 불태우고 그 책임을 크리스챤들에게 돌렸다. 그는 크리스챤들을 들짐승의 가죽 속에 꿰매고 자신의 사냥개를 풀어놓아 물려 죽게하기도 하고, 자루 속에 크리스챤들을 돌과 함께 집어 넣어 강 속에 던져 넣기도 하고, 살아있는 사람 몸에 역청을 바르고 불을 붙여 태워 죽이기도 했다.
그는 스승인 세네카도 자살하게 했고, 심지어는 자신의 어머니 아그리피나마저 자객을 보내어 살해했다. 아그리피나는, 그녀의 아저씨인 황제 클라우디우스와 결혼하여 그를 독살함으로써 네로를 황제로 만들었지만, 아들 손에 죽은 것이다.
68년, 네로가 인류 역사상 가장 잔학 무도한 죄악의 생애를 자살로 마감한 후, 많은 사람들은 길에 나와 춤을 추었다.
그렇지만 그가 죽은 것이 아니라 극동의 파르티아(Parthia)에 갔는데, 거기서 군대를 이끌고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소문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고, 이 소문은 이방인과 기독교인들 사이에 하나의 신앙으로 자리잡았다. 크리스챤들은 이 부활한 네로가 적그리스도라고 생각했다.
네로의 이름을 라틴어로 쓰고 그것을 숫자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이 된다.
N = 50, E = 6, R = 500, O = 60, N = 50
맨 마지막 N이 없이 사용할 수도 있으므로 그 N을 생략하면 616이다.
많은 사람들이 짐승의 수를 자신의 시대에, 자기의 적에게 적용하려고 노력하였고, 또 그렇게 되었다.
종교 개혁자들은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보았는데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교황은 하나님의 대리자라는 뜻의 비카리우스 필리데이(Vicarius Filii Dei)라는 라틴어로 불리우는데 이 글자의 합계도 정확하게 666이다.
V = 5, I = 1, C = 100, I = 1, U = 5,
I = 1, L = 50, I = 1, I = 1, D = 500, I = 1
재미있는 것은 종교 개혁을 일으킨 존 낙스나 마틴 루터도 666으로 해석된 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 후 나폴레옹이나 히틀러, 스탈린, 사다트 등등 권세를 잡은 많은 사람들이 666의 후보가 되었다.
케플러가 2차 대전 때 생각해냈다고 하는데,
A = 100, B = 101, C = 102, D = 103, ... 으로 가정할 때
H = 107, I = 108, T = 119, L = 111, E = 104, R = 117의 합계가 666, HITLER는 666이 되는 것이다.
현재는 컴퓨터라는 무생물이 후보로 등장되어 있다.
A = 6, B = 12, C = 18, D = 24, ... 으로 가정할 때
C = 18, O = 80, M = 78, P = 96, U = 126, T = 120, E = 30, R = 108, COMPUTER도 666이 되는 것이다.
이런 식의 계산 방법으로, 키신저, 죠지 부시나, 빌리 그래함이 666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실지로 미래의 E.C. 지도자가 나타나, 영어로 합성한 그의 이름이 666이 된다고 할지라도, 나는 요한이 나타내고자 했던 적그리스도, 짐승, 666은 당시 로마 정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거룩한 곳'을 마지막 때 예루살렘에 다시 세워질 제 3성전이라고 생각하고, '멸망의 가증한 것'을 적그리스도의 우상 (혹은 제 5세대 컴퓨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이 있다.
과연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근거가 성경에 있는가?
그리스도께서 성전이 언제 무너질지를 묻는 제자들에게 그 당시 존재하지도 않는 미래의 제 3성전을 언급하셨을까?
그리고 '너희가 ... 보거든' 이라는 말씀에 주목하라. 예수께서는 지금 그자들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멸망의 가증한 것을 제자들이 보게 된다는 말씀이다. 직접적으로 20세기 말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은 아니지만, 우리는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주님의 음성을 듣고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렇다고 제자들과는 직접 상관이 없는 내용을 (순전히 기록을 위해서) 말씀하셨다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는다.
'멸망의 가증한 것'은 '멸망케 하는 가증한 것'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정확한 번역이다. 예수께서 인용하신 다니엘서에는 전부 3번의 가증한 것이 나온다.
단 9:27에는 "잔포하여 미운 물건", 단 12:11에는 "멸망케 하는 미운 물건", 단 12:11에는 "멸망케 할 미운 물건"이라고 되어 있다.
예수께서 '멸망케하는 미운 물건'을 언급했을 때 제자들의 머리 속에는 어떤 것이 연상되었을까? B.C. 168년에 예루살렘 성을 침공했던 시리아 국왕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es)의 만행을 떠올렸을 것이다. 예언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단 11:31, 12:11의 '미운 물건'을 안티오커스가 세운 제우스 신상으로 본다.
요세푸스의 증언을 들어 보자.
"안티오쿠스는 성전을 약탈했을 뿐 아니라 3년 6개월 동안 매일 드리는 속죄제를 드리지 못하도록 중지시켰다."
그는 4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하고 수만 명을 노예로 팔았다. 그는 유대교를 이 지상에서 말살하려고 작정했었다.
그가 첫번째로 한 일은 모세의 율법서를 읽는 것을 금지시킨 일이다. 성경을 읽다 발각되면 그 자리에서 처형되었다. 성전 뜰에 제우스의 큰 제단을 세워 그 곳에 많은 돼지떼를 끌어 들이고, 그 돼지들을 잡아 화제를 드렸으며, 그 더러운 피를 그 성소에 온통 흐르게 했다. 성전의 방들은 공개적인 매춘 행위에 사용되었다. (제우스 신상에 대한 제사는 마카비가 일어날 때까지 3년 동안 드려졌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더러운 음식이라고 믿고 있는 돼지고기를 억지로 먹게했다. 엘리자(Eleazae)라는 율법사는 돼지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버티다가 죽임을 당했다.
모세의 율법에 따라 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아야 하는 남자 아이들은 할례가 금지되었다. 어떤 아이든 할례를 받으면 당장 사형하라고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할례를 몰래 하면, 그 아이 뿐만 아니라, 할례를 집행한 제사장, 아이의 아버지까지도 사형에 처해졌다. 그리고 죽은 아이의 어머니는 그 죽은 아이의 시체를 목에 매게 하여, 썩어가는 자기 자식의 악취에 넋을 잃게 만들었다.
이 역사적 사건은 유대인들 마음 속 깊이 간직되어 있었고, 그들의 종교적 자존심에 결코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아 있었다.
신약성경에서 찾아 볼 수 있는 모든 분파가 이 때 생겨 났다. 마카비파, 사두개파, 바리새파, 에쎈파가 그것이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 성을 제압하고 나서 성전 안으로 그들의 군기를 가져와 그 깃발을 세워 놓고 그들의 장군 티투스를 외치면서 그 깃발에 제사를 드렸다고 한다.
이 사건을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으로 보는 사람이 있으나 경고를 받고 산으로 피해야 할 징조로서 작용할 수 없는 사건이기에 타당성이 없다.
병행 귀절인 누가복음 21:20에는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으로 되어 있다. 누가가 "다니엘의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나 "거룩한 곳"이라는 모호한 표현 대신에 분명한 말로 설명해 주고 있는 이 말을 마태복음 24:15의 해석으로 채택할 수 있지 않을까?
'예루살렘은 거룩한 성이요, 가나안은 거룩한 땅이며, 예루살렘 주위의 자리잡고 있는 모리아산은 성전에서 가까왔기 때문에 그들은 특별한 방식으로 거룩한 땅이라 생각하였다. 예루살렘 주위에 있는 성읍들에 로마군대는 진쳤으며 그것이 바로 멸망케 한 가증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구절은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것으로 언급되고 있는데, 그는 구약의 어떤 선지자들보다 메시야와 그의 왕국에 대해 더욱 명백하게 말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성읍과 성전의 멸망이 구약에 어떻게 언급되어져 있는가를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이러한 다니엘의 예언을 언급하고 계신다.'
누가가 "멸망의 가증한 것"과는 다른 엉뚱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마태나 누가 둘 다 "너희가 ...보거든"이란 말로 이 글을 시작하고 있고, 그것을 본 후의 조치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이며, 그리고 산으로 도망해야 할 사람들은 "유대에 있는 자들"이다.
누가복음은 그 글을 읽을 대상이 유대 국경 밖에 살고 있는 이방인 개종자이다. 그렇다면 왜 누가가, 유대인들만이 알 수 있는 "멸망의 가증한 것"이라는 표현 대신에"군대들"이라는 명확한 표현을 썼는가를 알 수 있다.
마태와 마가는 다니엘을 알고 있고 멸망의 가증한 것과 거룩한 곳에 대한 개념이 있는 유대인들에게 글을 쓰면서, 그들이 그 글을 통해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은밀한 말씀의 특별한 의미에 대해서 주의깊은 고려를 하도록 이 한마디를 삽입하고 있다. "읽는 자는 깨달은진저."
팔레스틴의 유대인들이 돌려 보도록 쓴 복음서를 기록한 마태와 마가는 거듭나지 못한 유대인들이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도록 비밀에 싸인 단어를 쓸 수 밖에 없었다. 반면에 누가는 예수님의 그 말씀을 비밀로 할 필요가 없었기에 분명한 표현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12. 산으로 도망하라.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안에 있는 물건을 가질러 내려 가지 말며,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질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마 24:16-20)
이스라엘은 여러 해 동안 로마에 대한 공개적인 적개심을 노출시켜 왔었다. 그러나 로마의 무신경과 무단 정치로 인하여 이스라엘 내부에는 불만이 극도로 고조되었다. 바울을 재판한 벨릭스와 베스도에 이어 알비누스와 프롤루스가 차례로 총독에 부임해 왔는데, 자신의 사복을 채우는 데만 급급했기에 유대 일반 민중들의 생활은 점점 더 궁핍해져 갔다.
또한 국가 내부의 정치적 파벌들의 당쟁은 민심의 동요와 혼란을 점점 가중시켰다. 시골에서는 돌아다니는 도적떼와 살인자의 무리들이 기승을 부렸으며, 예루살렘에서는 시카리라는 조직적인 자객단이 나타나 주민들을 심하게 괴롭혔고, 거짓 예언자들과 광신적인 열심당원들의 수가 점점 늘어갔다.
그와 같은 민간의 동요에 직면하여 법과 질서 유지하기 위한 로마의 능력이 점차적으로 약해졌다. 한 소요를 진압하고 나면 즉시 또 다른 소요가 발생하였다. "마치 몸에 병이 들어 이곳저곳에서 연달아 증세가 나타나는 것과 흡사하였다."
수년동안 들끓던 소요는 마침내 A.D. 66년에 로마 제국에 대한 대규모 전쟁으로 발전하였다. 로마의 장군 케스티우스 갈루스(Castius Gallus)는 온 힘을 다해 행군하여 수리아에서부터 유대 지방으로 자기 군대를 진군시켰다. 수천 명의 유대인들이 팔레스틴, 수리아, 알렉산드리아 전지역에서 몰살을 당하였다. 성은 잇달아 약탈당했으며 유대 주민들은 무차별 죽임을 당하였다. 마침내 로마 군대는 유대인 최후의 보루인 예루살렘을 포위했다.
로마 군대의 진군은 대단히 신속하여 그리스도인들은 미처 빠져 나갈 기회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방 군대가 예루살렘 성을 에워 쌀 것이라는 예고된 징조가 그대로 실현되자 바짝 긴장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포위를 당하여서 탈출할 수가 없었다.
로마 병사들이 방패를 하늘로 향하게 하는 거북이 등 전법으로 몸을 보호하고 성벽을 허는 한편, 성문에 불을 지를려고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기묘한 일이 발생했다. 요세푸스의 말을 들어보자.
"많은 반역자들이 도망을 치자 이에 용기를 얻은 유대 백성들은 반역자들이 물러간 곳으로 몰려가서 성문을 열고 케스티우스를 구세주로 맞아들이려고 하였다. 따라서 만일 이때 케스티우스가 조금만 더 길게 공격을 했었다면 예루살렘 시를 완전 장악할 수 있을 뻔하였다.
그러나 케스티우스는 이상하게도 공격을 계속하지 않았다. 전쟁을 그 날로 끝나지 못하게 하고 계속 끌어 유대인들에게 무서운 불행을 경험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예루살렘과 성전을 역겹게 보신 데 그 이유가 있지 않았나 하고 나는 생각한다.
케스티우스 갈루스 (Cestius Gallus)가 물러간 후 유대인들은 의기 양양했고 다시 전쟁을 준비했다. 로마의 황제 네로는 로마군이 패배한 것에 대해 몹시 화를 냈다. 그는 골똘히 생각한 후 베스파시안(Vespasina)을 수리아 지방 평정을 위해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베스파시안의 군대는 예루살렘을 다시 공격하기 전까지의 중간 기간 동안에 갈릴리와 유대 지방에 대해 진압에 들어갔다.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라는 그리스도의 경고는 먼저 "유대에 있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었다. 유대에 있는 자들은, 그들의 군기에 자신들이 섬기는 우상의 그림을 그려 넣은 로마 군대들(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거룩한 곳) 예루살렘에선 것을 보고 베레아의 산지로 피신하여 멸망을 피할 수 있었다.
예루살렘 성의 그리스도인들도 로마 군대가 맹렬한 기세로 재진격하기 전에 안전하게 탈출했다. 요세푸스는 이렇게 말한다.
"케스티우스가 이런 참패를 당한 후에 많은 유대 유력인사들은 침몰해 가는 배를 버리고 탈출하듯이 예루살렘을 버리고 도망하였다."
기독교 역사가인 유세비우스(Eusebius)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전쟁이 나기 전 그 곳에서 인정받은 경건한 사람들중에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에 의하여 명령을 받아왔던 예루살렘 교회 전체는 그 성에서 나와 펠라(Pella)라고 하는 요단 강 너머에 있는 한 소읍에 머물렀다."
13. 큰 환난
"이는 그 때에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마 24:21)
"이는 그 날들은 환난의 날이 되겠음이라. 하나님의 창조하신 창조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막 13:19)
세대주의자들은 "큰 환난"이란 말을 미래에 있을 7년 대환난을 가리킨다고 주장하는데 이 환난이란 말이 씌여 있는 성경귀절을 면밀히 조사해보면 그러한 가르침이 허황되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된다. 막 13:19의 톰슨 주석 성경의 주석을 읽어 보자. "이 귀절들은 더 이상 디도 장군의 예루살렘 침략에 초점을 두지 않는다. 지금까지 보여진 환난은 너무나 준엄하기 때문에 만일 하나님께서 극적으로 간섭하셔서 그 날을 감하시지 않으시면 모든 인류는 멸망될 수 밖에 없다." 성전 파괴를 질문한 것이 분명한 귀절을 세대주의자들은 미래의 대환난에 적용시키고 있는 것이다.
'환난'에 해당되는 헬라어 단어는 '들립시스'이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 모두 44번 나온다. 주후 70년 유대인들에게 내렸던 그 대환난을 가리키는 것으로 4번, 악한 자에게 내릴 형벌의 뜻으로 3번, 하나님의 백성이 당하는 일반적인 고난의 의미로 37번 사용되었다. 그렇지만 이 단어가 이시대의 마지막에 있을 대환난의 뜻으로 쓰인 곳은 단 한군데도 없다. (요 16:21/행 11:19/롬 5:3/8:35/12:12고후 1:4/2:4/4:17/7:4/엡 3:13/살전 1:6/3:3/3:4/3:7/살후 1:4/히 10:33)
마태복음 24:21의 "큰 환난"은 주후 70년의 그 심판을 가리키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지금까지 없었고 후에도 없을' 환난이라고 예수님께서 강조하셨음을 주목하자. 환난 시기가 이 시대의 마지막에 가서야 발생하도록 되어 있다면 '후에도 없을' 것이라는 말은 무의미한 말이 될 것이다. 환난 이후에 진행 될 역사는 남아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거듭거듭 그 민족에게 자비를 베푸셨으며 오랫동안 참아 오셨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진노의 잔이 이 세대에 이르러 채워졌다고 말씀하셨다. (마 23:32)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사가랴의 피에 이르기까지 다 이 세대에 돌아 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마 23:35, 36)
따라서 누가복음 21:22의 '형벌의 날', 23절의 '큰 환난'은 바로 '이 백성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진노'(눅 21:23)인 것이다.
요한계시록에는 모두 5번의 "환난"이 나오는데, 1:9, 2:9, 2:10의 3군데는 모두 '대환난'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이생의 사건을 가리키고 있다.
두아디라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이세벨의 꾐에 빠진 어떤 사람들을 경고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에 던지고"(계 2:22) 말씀이 나온다. 여기서는 큰 환난이라고 언급되어 있지만 7년 대환난과 연결시키기는 어렵다.
계 7:14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더라."는 말씀이 마지막 남은 후보다. 세대주의자들은 이 귀절을 7년(혹은 3년반)동안 지속되는 미래의 대환난에 시킨다. 그러나 교회가 현대에 이르기까지 겪어왔던 지속적인 '큰' 환난들을 생각할 때 이 말을 이 시대의 종말에 있을 대단히 짧은 기간에 국한시킨다고 하는 것은 독단적인 태도다.
세대주의자들은 7년 대환난 시기 동안 살다 순교한 독특한 일단의 성도들을 '환난 성도'라고 지칭하여 구별하는데 이것은 거의 2천년 동안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아낌없이 바친 수백만의 그리스도인 형제들에 대한 어떤 의미에서, 모욕이 아닐 수 없다.
휴거론자들은 7년 대환난을 기초로 해서 '환난전 휴거설', '환난후 휴거설', '환난 중간기 휴거설' 들을 주장한다.
조기홍 목사의 글을 읽어 보자.
휴거에 관해서는 일반적으로 보수적인 학자라면 누구든지 휴거가 있을 것을 믿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휴거의 시기에 관해서는 여러가지의 견해로 갈라져 있어서 일반 신자들이 따르기에 매우 어려운 실정이다.
그래서 어느 학자들은 소위 '환난 전 휴거설'을 주장하여 "세상에 7년 환난이 오기 직전에 모든 교회가 휴거하여 구원받은 자들은 세상의 환난을 받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이 학설은 에드워드 어빙( Edward Irving), 존 N. 다아비(John N. Darby), 콜린데이, 스코필드, 홀 린세이 등의 지지를 받고 있을 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상당히 많은 목회자들이 가르치고 있다.
또한 소위 '환난 중간 휴거설'이라는 것이다. 큰 환난은 7년이 아니라 최후의 3년 반(이레의 절반, 단 9:27)이라고 하여 전 3년 반은 영적으로 받을 환난이며, 후 3년 반은 육적으로 받을 환난이기 때문에 전 3년 반과 후 3년 반 사이에 성도들의 휴거가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또 다른 한가지 주장은 7년 환난이 끝난 후에 예수께서 재림하신다고 주장하여 환난 전 휴거론자들과는 휴거 자체에 대한 견해와 휴거 시기에 대한 견해를 달리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로버트 군더리(Robert Gundry), 죠지 래드(Georgy Ladd), 패드 로버트슨(Pat Robertson), 윌터 마틴(Walter Martin), 짐 맥키버(Jim McKeever), 찰스 하지(Charls Hodge)등이 지지하고 있으며, 국내의 상당한 목회자들이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이외에도 무휴거론과 부분 휴거설도 있다. 그러나 서로가 자기들이 믿고 주장하는 선에서 한치의 양보도 없이 자기만이 성경적인 해석이라고 주장하는 연구가들, 또는 계시를 받았다는 사람들 틈에서 오늘도 기독교인들은 종말론에 대한 확실한 지식을 갖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는 실정이다."
세대주의자들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 대부분의 교역자들이 종말론을 가르칠 때 주장하는 7년 대환난은 어떻게 해서 형성된 개념일까?
(심지어는 무천년주의자인 신성종 학장까지도 요한계시록을 강해하면서 7년 대환난을 언급하고 있는 실정이다.)
성경에는 분명코 '7년 대환난'이라는 용어가 없다. 성경에 삼위일체라는 용어가 없어도 그 개념이 존재하듯이 7년 대환난도 분명히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무엇을 가지고 그렇게 주장하는 것일까?
그들은 7년이란 기간의 근거를 다음 두가지 성경 귀절에 둔다. 첫째는 다니엘서 9장 24-27절이다.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잔포하여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 "(단 9:27)
세대주의자들은 이 귀절을, 미래에 있을 7년 대환난에 적용시킨다. 스코필드는 "짐승, 즉 '불법의 사람'(살후 2:3,4)에 관해 언급하는 부분이며 이것은 마 24:15과 같은 내용이다."라고 단 9:27을 주석하고 있다.
먼저 다니엘서 9:24-26을 요약하겠다.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70이레의 기한을 정하는데 그 기간 동안 죄가 끝나고 죄악이 영속되고 영원한 의가 드러나고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 부음을 받는다.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왕이 일어 날까지 7 + 62 = 69 이레가 지난다. 62 이레 후에는 기름 부음 받은 자가 끊어지고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성읍과 성소를 훼파할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한 개혁주의자들의 해석은 대체로 이렇다.
칠십 이레 (490년)은 연속된 기간이다. 죄가 끝나고 죄악이 영속되고 영원한 의가 드러나고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 부음을 받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인한 결과다. 기름부음 받은 자가 끊어 진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고 한 왕의 백성은 예루살렘을 침공한 로마 군대를 뜻한다.
27절의 언약은 예수께서 하신 새언약이다. 이레의 절반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제사와 예물이 필요없게 되었다.
이렇게 해석할 때 '잔포하여 미운 물건'은 예루살렘을 포위한 로마 군대라는 필자의 해석과 맞아 떨어진다.
어려운 예언이고 여러 견해가 있음을 인정한다. 그렇지만 단 9:27이 미래에 있을 대환난과 적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의견에는 반대다. 왜냐하면 성경이 전혀 그런 사실을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남은 한 이레가 앞의 69 이레와 떨어지고, 그 사이에 2천년 정도의 삽입기간(교회 시대)가 있다는 이론은 성경 본문으로는 증명할 수 없는 가설이다. 또한 그들의 말대로라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69이레와 남은 한이레사이의 괄호 시대에 존재하게 된다.
'칠십이레의 결과는 그리스도의 초림과 인간의 구원을 위한 그의 사역과 일치되며, 미래의 어떤 기간의 종말로 인식되어서는 안된다.'
7년이라는 기간의 두번 째 근거는 다음의 귀절들이다.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계 11:12)
"또 짐승이 큰 말과 참람된 말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 두 달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계 13:5)
다니엘서 7장 25절, 12장 7절, 계시록 12장 14절의 한때 두때 반때를 모두 3년반으로 해석한다. 여기서 '때'를 '년'으로 해석할 수 있는지 문제점이 남지만 박해받는 이 기간들을 모두 후3년반에 집어 넣는다. 계 11:13 두 증인이 예언하는 기간, 계 12:6의 아이를 낳은 여자가 광야에서 양육받는 기간, 1260일은 전3년반에 끼워 넣는다.
계 11:9,12절과 다니엘 9:27의 3일 반은 3년 반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고 문자적으로 3일 반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세대주의자들은 7년 대환난 전에 예수의 공중재림과 교회의 휴거가 있다고 주장하고 전3년반은 유대인 회심 기간이고 후3년반은 유대인이 환난받는 기간으로 해석한다.
자신들은 세대주의자가 아니라고 하면서 7년 대환난 통과설을 주장하는 목사님들이 있는데, 그 분들은 7년 대환난이 세대주의에서 나온 개념인 줄 알고 계시는지?
7년 대환난은 세대주의자들이 다니엘서에 나오는 70이레 중 남은 한 이레와 3년 반, 3일 반, 한때 두때 반때를 두번 합쳐서 만들어낸 개념이다. 그들의 말대로라면 계시록 11장 2절에 기록된 42개월은 후3년반이고 3절에 기록된 전3년반이다. 후3년반을 먼저 말하고 전3년반을 나중에 설명한 것이되는데 이것은 문맥상 맞지 않는 주장이다. 2절의 42개월은 이스라엘이 이방인에게 짓밟히는 기간이고, 3절의 1260일은 교회가 선교 사명을 감당하는 기간으로, 둘 다 같은 기간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3년 반은 상징이다. 이 3년 반은 7년을 반으로 나눈 것으로, 불안정한 기간이고, 말세 기간이다. 이 기간은 환난 기간이기도 하면서, 보호받는 기간이며, 동시에 세상을 향해 선교하는 기간이다.
이 기간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신약 시대, 교회 시대인 것이다.
성경이 숫자를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는 무수한 예를 다 조사해 본다면 3년 반을 문자적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마태복음 1장을 보자. 예수님의 족보가 나온다. 이 족보는 모든 세대를 다 기록한 것이 아니다. 몇 사람의 이름이 의도적으로 생략되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다윗까지 14대, (마 1:1-6)
다윗에서부터 바벨론 시대까지 14대, (마 1:7-11)
바벨론 포로에서 그리스도 탄생까지 13대이다. (마 1:12-17)
(여기 1명이 부족한 것은 영적으로 깊은 뜻이 숨겨져 있다.)
14는 완전수 7의 배수이다. 7은 하늘의 수 3과 땅의 수 4의 합이고 12는 3과 4의 곱이다. 144,000은 문자적으로 보는 사람도 있지만 12 X 12 X 1000 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본다.
요한계시록에 있어서 숫자는 1260일을 비롯해서 거의 모두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 일곱 영, 일곱 교회, 일곱 별, 일곱 촛대,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일곱 머리, 이십사 장로, 네 천사, 땅 네 모퉁이, 열 뿔, 사망자 7,000, 1000년 왕국 ...
계 7:14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더라."는 말씀의 '큰 환난'은 '교회 시대 전체의 질고'라고 보는 것이 옳다. 환난은 교회 시대 전체의 독특한 특징의 하나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은 환난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 16"33)
바울 사도도 교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행 14"22)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장차 받을 환난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더니 과연 그렇게 된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살전 3:4)
참된 그리스도의 교회는 환난을 받아 왔고, 또한 받고 있고, 앞으로도 받아야 한다. 만일 환난을 받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는 교회는, 어쩌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의심해 보아야 한다.
이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환난'이 어떠했는가를 요세푸스의 기록을 통해 알아 보자. 이 예언들은 너무 정확하게 성취되었기 때문에 학자들간에는 주후 70년 이후에 예루살렘 멸망을 목격하고 쓴 것이 아닌가 논란이 있다고 한다.
필자는 세 복음서가 주후 70년 이전에 쓰여졌다고 믿는다. 세 복음서 모두, 예언은 여전히 미래의 일로 남아 있고, 성취되었다는 언급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은 주후 80-90 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복음서에는 감람산 강화에 대한 기록이 없다.
다른 복음서에는 있는데 요한복음에만 빠졌다는 것은, 요한이 이미 예언의 성취를 보고 들었기 때문이다. '요한은 예루살렘이 파괴괸 후에 기록하였으므로 그것에 대하여 기술하지 않았다.'
케스티우스 갈루스가 패퇴한 후, 유대인을 진압하라는 네로의 명령을 받고 베스파시안이 자기 군대의 머리를 돌려 예루살렘을 향하도록 명령하였을때 예루살렘 성은, 로마 군대에 의해 유린당한 농촌에서 몰려 들어온 피난민들로 속속 들어차고 있었다. 그 사람들은 닥쳐 올 공격시 수천 수만의 말없는 시체더미로 화할 운명에 처해 있었다.
지속된 전투 기간을 통하여 유대인들이 받았던 수난은 밖에 있던 로마 군대에 의한 것보다는 오히려 성 안에서 동족간에 오고 간 자해의 잔학 행위에 의한 것이 훨씬 많았다. 그 야만성과 사악함은 로마인들과 결코 다를 바가 없었다.
성 안에는 도적들과 열심당원들과 살인자들의 무리가 떼를 지어 몰려 들어왔다. 예루살렘은 무법 지대 그 자체였다.
성은 서로 암투를 벌이는 폭도들로 편이 갈라져서 상대방을 죽이고, 광신적인 열심당원들과 범죄자들은 자기 종족을 희생의 제물을 삼았다. 난동자들이 그같은 악행과 만행을 저지르며 서로 싸우는 통에 그 틈바구니 속에서 수천 명의 무고한 양민들이 죽음을 당하였다. 난동자들은 그 성안에 있던 수십만의 양민에 비하면 소수에 불과했지만 백성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으며, 그들의 길을 가로막는 사람들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무자비하게 살해 되었다.
그들의 야만성은 제사장이라는 직분자들에게조차도 가차없었다.
열심당의 요구에 동조하기를 거절하는 인품있는 자들이나 양민들 역시 끔찍한 고문을 당하였으며 베임을 당하였다. 12,000명 이상이 이들의 손에 죽어갔다.
성을 탈출하려고 시도했던 모든 자들은 목이 잘리웠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기 때문에 그 시체들을 다 묻을 수가 없어 성 안에는 커다란 시체더미가 쌓여 짓밟혔으며, 혹은 성 밖으로 내던져졌다.
"예루살렘 시가 이같이 사악한 무리들의 난동에 의해 전쟁 상태로 빠지게되자 그 와중에 휩싸인 주민들은 산산조각난 거대한 몸뚱아리와도 같았다. 이에 노인들과 부녀자들은 내부의 재난에 시달린 나머지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에서 로마군이 쳐들어 와서 외부와의 전쟁이 한시라도 빨리 일어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기에 이르렀다.
예루살렘 주민들은 극심한 공포와 두려움에 시달렸다... 애곡 소리가 끊일 날이 없었다. 게다가 주민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드러내 놓고 감정을 표현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신음 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그들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아무리 친척지간이라 하더라도 살아 있는 자들에게 신경을 쓸 여유가 없는 것은 물론 죽은 자의 시신을 장사지낼 겨를조차 없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28)
"로마군과의 전투가 당분간 그치자 예루살렘에서는 다시 내분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유대인이 애굽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무교절인 니산월 14일에 엘르아살과 그 일당은 성전의 문을 열고 하나님께 제사드리기를 원하는 자들의 출입을 허용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어찌하여 그토록 많은 유대인이 예루살렘에서 죽어갔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명절을 지키기 위해 유대 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 엄청난 숫자의 유대인들과 유대인 개종자들이 몰려와 성안으로 들어갔고 로마군의 포위 공격은 이 때 시작되었다.
유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거짓된 기회를 이용하지 않았다. '성 안으로 들어가지 말라'는 주님의 지시 (눅 21:21)를 그대로 따랐다.
유대인들의 동족 상잔의 광적 행동은 지속되었으며, 심지어 로마 군대가 마침내 성을 완전 포위하고 유대인들과 전면전에 돌입하게 되었을 때조차도 그칠 줄 몰랐다. "이 강도들에게서 예루살렘이 당한 피해는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것이었다. 예루살렘은 오히려 함락되기 전에 더 비참한 상태에 있었으며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로마군은 오히려 예루살렘에 자비를 베푼 셈이었다.... 따라서 우리 유대인은 유대의 파멸의 원인은 바로 동족인 유대인에게 있으며 로마군은 단지 죄를 범한 그들에게 응분의 처벌을 가한 것분이라고 결론을 내려도 지나친 것은 아니다."
요세푸스가 열심당원들을 강도라고 부르는 것을 이해하기 바란다. 사실 그들은 강도나 다름없었다.
요세푸스는 거듭해서 말한다. "사실상 예루살렘 온 주민들이 멸망을 당하게 된 것은 이 강도들의 광기 때문인 것이다."
베스파시안이 가이사랴로 돌아와서 전군을 동원하여 예루살렘으로 진격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을 때 네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베스파시안은 우선 예루살렘 공격을 일시 중단하고 네로를 이어 누가 로마 황제가 될것인가 관망하기로 했다.갈바(Galba), 오토(Otho), 비텔리우스(Vitellius)가 각각 1년을 못채우고 황제 자리에서 물러난 후(살해되고 자살), 베스파시안은 로마에 불려가 거기에서 황제로 선포되었다. 이리하여 유대 반란진압의 책임은 그의 아들 티투스의 어깨 위에 지워지게 되었다.
유대인들이 계속해서 상호간에 살인을 자행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긴 하였지만 그들은 로마 군대에 대해서도 완강한 저항을 하기도 하였다.
티투스는 요세푸스를 특사로 급파하여 너무 늦기 전에 항복하라고 유대인들에 권고하였다. 요세푸스와 함께 유대인들에게 화친을 청하러 갔던 티투스의 친구가 어깨에 창을 맞아 부상을 당하자, 티투스는 성벽 외곽을 불지르고 토성을 쌓으라고 명령했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눅 19:43).
그리고 토성 위에 공성 장비를 배치하였다.
티투수는 토성을 쌓는 일과 더불어 동족인 요세푸스를 보내어 설득을 계속했다.
요세푸스는 '천하 무적'인 로마군에 대한 저항이 부질없음을 말하고 이렇게 호소한다. "하나님이 온갖 죄악을 저지른 그대들과 함께 하실 것이라고 스스로 착각하고 있는가?... 내가 죽어 그대들이 온전한 정신으로 돌아올수만 있다면 기꺼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
그러나 폭도들의 고집만 자극하여 로마인들에게 저항하겠다는 결의만 다져 주었다. 폭도들을 제외한 일반 백성들의 로마군에게 투항하고 싶어 했지만 강도들은 그들을 엄중히 감시했고, 탈주자들은 즉각 처형하였다.
완벽하게 포위된 성 안은 극도의 기근 상태에 빠졌다. 서로 편을 갈라 편싸움을 벌였던 폭도들의 이같이 계속된 암투의 과정에서, 그 인구가 몇 년동안 먹고 살기에 충분했던 양곡들을 비축하고 있던 곡식저장소가 의도적으로 불태워졌다.급수소 역시 다른 편들이 마시지 못하도록 더럽혀졌다. 비축되었던 그와 같은 막대한 양의 양곡의 손실은 그 성을 휩쓸어간 무시무시한 기근의 직접적인 발단이 되었다. 그 결과 오게 된 기근으로 해서 예루살렘이 포위되어 있던 동안 엄청난 숫자의 유대인들이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강도들의 광기는 기근의 정도가 악화되자 더욱 심해졌다. 따라서 기근과 강도들의 광기라는 두 가지 재난은 날이 갈수록 점점 심각해져만 갔다. 강도들은 어느 곳에서도 식량을 마련할 수 없게 되자 이제는 백성의 주택을 침입하여 마구 뒤지기 시작했다. 강도들은 식량을 찾아내지 못하면 그 집의 주인을 고문하였다. 그들이 찾지 못하는 깊숙한 곳에 식량을 숨겼을 것이라고 짐작하기 때문이었다... 많은 백성들은 가지고 있는 재산을 곡식 한 그릇에 팔았다...
아이들은 부모의 입에 들어갈 한 조각의 빵까지도 부모의 입에서 빼앗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눈 뜨고 볼 수 없는 일은 어머니들이 어린 아이의 음식을 빼앗아 먹는 광경이었다... 강도들은 아이들이 음식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대롱대롱 매달리면 번쩍 들어서 빙글빙글 돌리다가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또한 강도들은 겨우 빵 한 조각이나 보리 한 줌이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잔인한 고문 방법까지 창안해 냈다."
요세푸스는 이 대환난의 독특한 성격을 말해주고 있다. 어떤 나라도 그가 겪었던 정도의 자해의 고통을 당한 나라는 없었던 것이다.
"창세후에 있어서 이 당시의 예루살렘보다 더 많은 비극을 겪은 도시는 없었으며, 이 당시의 세대보다 더 많은 악을 저지른 세대도 일찌기 없었을 정도로 그들은 예루살렘에 고통을 가했으며 수많은 악을 자행하였다."
요세푸스의 이 말은 다음 성경 귀절의 주석으로 삼아도 좋을 것이다.
"이는 그 날들은 환난의 날이 되겠음이라. 하나님의 창조하신 창조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막 13:19)
여기서 이 환난이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을 대환난이라고 했는데 과연 그런가? 이 예루살렘 멸망 전에도 많은 민족의 멸망이 있지 않았는가? 그리고 이 후에는 세계 제 1,2차 대전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큰 환난을 당하지 않았는가?
그렇다. 더 규모가 큰 환난은 많이 있어왔다. 노아의 홍수는 불과 8명만 남기고 전 인류를 휩쓸고 가지 않았던가! 예수께서 "큰 환난"이라고 언급하셨을 때는 , 죽은 사람의 수나, 파괴된 재산의 정도나, 지속된 기간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니다. '이런 환난'(마 24:21)이라고 했을 때는 오히려 어떤 종류의 환난인가 하는 말씀인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 보자.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 됨을 스스로 증거함이로다.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 (마 23:31,32)
스데반이 순교 직전 행한 증언을 들어보자.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언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행 7:52)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을 어떻게 말하는가? "유대인은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아니하고... 노하심이 끝까지 저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살전 2:15,16)
이 환난은 전세계적인 환난이 아니라 오직 이스라엘 민족이 겪어야 할 전래없는 고통의 기간이다. 그것은 이스라엘 전체의 죄악에 대해 하나님이 보응하시는 때인 것이다.
세대주의자들은 이 환난이 예루살렘 멸망이 아니고 지구의 종말에 있을 전세계적인 사건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누가복음 21:23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는 이 땅에 큰 환난과 이 백성에게 진노가 있겠음이로다."(눅 21:23)
이사야와 다니엘이 대환난에 대해 한 예언도 이 환난이 민족적인 것임을 나타낸다. "슬프다 그 날이여, 비할 데 없이 크니 이는 야곱의 환난의 때가 됨이로다." (렘 30:7) "또 대환난이 있으리니 개국 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단 12:1)
계속해서 요세푸스의 글을 따라가 보자.
기근이 점점 심각해지자 수많은 유대인들이 밤이 되면 떼를 지어 성을 빠져나와 먹을 것을 구하려 성벽 주변의 계곡을 뒤졌다. 로마군인들은 그들을 잡아 온갖 고문을 다한 후 예루살렘 성벽 앞에서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했는데 그 수가 하루에 500명 이상이었다.
"생포된 유대인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십자가뿐 아니라 십자가를 박을 땅조차도 모자랐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을 빠져 도망쳐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졌다. 게다가 갈수록 기근이 심해지자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자들이 없는 가정이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다락방에는 굶주려 죽은 부녀자들과 아이들의 시체가 가득하였으며, 도로에는 아사한 노인들의 시신이 즐비하게 널려 있었다. 게다가 피골이 상접한 소년들과 청년들은 마치 그림자처럼 시장을 배회하다가 아무데서나 쓰러져 죽고 말았다."
요세푸스는 거듭해서 예루살렘 멸망이 강도들의 광기라고 주장한다.
"예루살렘에 몰아 닥친 재난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따라서 이제는 재난이 백성뿐 아니라 강도에게도 큰 타격을 주게 되니 그들은 점점 더 격노하게 되었다. 산더미처럼 쌓인 시체들은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쳤으며 시체가 썩는 냄새에 코를 들 수 없었다. 이 악취는 도시 밖으로 나가 로마군과 접전을 하는 자들에게 큰 장애 요소였다. 그러나 이미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는 데 이골이 난 강도들은 시체를 밟으면서 앞으로 진격하였다."
예루살렘 성과 성전이 파괴되기 전에 유대인들의 항복을 받아내려는 마지막 시도로서 티투스는 요세푸스를 보냈고 요세푸스는 간청하다시피 말했다.
"제발 우리의 도시인 예루살렘을 보존합시다. 그리고 이미 불이 붙기 시작한 성전의 불을 끄고 성전 안에서 늘상 드리게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도록 합시다."
요세푸스의 제안은 거절되었다.
"예루살렘 시는 하나님의 도성이므로 네가 걱정할 필요가 없다."
"한편 예루살렘 성 안에서 기근으로 죽어간 인명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으며 그 참상은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의 목불인견이었다. 먹을 양식이 있다는 기미한 보이면 어디서든지 즉각 싸움이 벌어졌다. 둘도 없는 친구사이도 예외는 아니었다. 친구의 먹을 것을 빼앗기 위해 치열한 투쟁도 불사하였다.... 그들은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무엇이든지 먹었다. 심지어 만지기조차 역겨운 더러운 짐승들도 잡아 먹었다. 그들은 마침내 허리띠나 신발을 물론 방패에 달린 가죽띠까지도 잘라내 입으로 씹기까지 하였다. 심지어는 오래된 건초까지 먹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섬유질을 모아 소량을 자그마치 4아틱(드라크마)을 받고 파는 자들도 있었다."
요세푸스는 이어서 기근의 참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마리아라는 여인의 비극을 소개한다. "그녀는 죽은 아들을 구운 후에 반은 먹고 나머지 반은 몰래 감추어 놓았다. 그런데 바로 이 때 강도들이 들이닥쳤다. 강도들은 음식 냄새를 맡고 당장 음식을 내놓지 않으면 목을 잘라 버리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러자 마리아는 그들을 위해 맛있는 음식을 남겨 놓았다고 말하면서 먹다 남은 인육을 내놓았다. 이에 강도들은 그 광경을 보고 너무나 큰 충격을 받은 나머지 앞이 아찔했으며 정신이 나는 듯했다. 그러자 그녀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이것은 바로 내 아들이오. 내가 직접 요리한 음식이오. 와서 한번 이 음식을 먹어 보시오. 나는 이미 식사를 끝냈소. 그대들은 여자보다 감정이 풍부하며 어머니보다 사랑이 많은 척은 하지 않겠지? 그러나 그대들이 양심의 가책이 되고 내가 한 짓이 마음에 걸리거든 이 나머지반을 내게 남겨놓고 가도록 하시오.'... 온 백성들은 이같은 무서운 일이 그들의 눈 앞에서 벌어졌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아 마치 그들이 그와 같은 전대 미문의 만행을 저지른 양 공포에 몸을 떨었다."
아빕월 10일 , 공교롭게도 전에 바벨론 왕에 의해 성전이 불탔던 그 날, 마침내 성벽은 뚫리고, 티투스의 엄명에도 불구하고 격분한 병사들의 손에 의해 성전은 불길에 휩싸이게 되었다.
"한편 강도들은 완전히 궁지에 몰려 (성전의 불을 끄는 일을)도울 수 없었다. 강도들은 사방에서 패배를 당하고 죽음을 당하였다. 한편 일반 백성들 대부분은 약한 데다가 무기까지도 갖추지 못해 로마군에게 잡히는 대로 목이 잘렸다. 그리하여 재단 주변은 죽은 시체가 산더기 같이 쌓이게 되었으며, 제단으로 오르는 계단에는 죽은 시체에서 흐르는 피로 피바다를 이루었다.'
"그리하여 사면이 완전 시체로 뒤덮여 맨땅을 찾아볼래야 볼 수가 없었으며 도망가는 유대인을 쫓는 로마 병사들은 시체 더미를 밟지 않고서는 적을 추격할 수 없었다."
성전 가까이 있는 회랑에 피신해 있던 부녀자, 아이들을 포함한 일반백성 약 육천여 명이 몰살 당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이같이 많은 유대인들이 몰살을 당하게 된 것은 한 거짓 선지자 때문이라는 점이다. 이 거짓 선지자는 바로 그 날 예루살렘을 돌아 다니며 아래와 같이 선포하였다. '하나님게서 여러분들에게 성전으로 올라오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이 성전에 올라가게 되면 여러분들은 그 곳에서 기적으로 구원받게 될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강도들이 백성을 속이기 위해 수많은 거짓 선지자들을 매수하였다. 이 거짓 선지자들은 강도들의 사주를 받고 유대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구원을 기다려야 한다고 떠들고 다녔다. 강도들이 이같이 거짓 선지자들을 이용한 것은 이런 거짓 희망을 불어 넣어 유대인들이 탈주하는 것을 막으려는 계락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실상 자신들이 멸망된 것을 보여주는 분명한 표적들을 보고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이같은 거짓 선지자들을 마치 하나님을 믿듯이 믿었던 것이다."
"로마 병사들은 떼를 지어 칼을 빼 들고 도시 골목길을 누비며 만나는 유대인들을 닥치는 대로 학살했으며, 유대인들이 도망쳐 들어간 집에는 불을 질러 완전히 폐허로 만들었다. 그러나 로마 병사들은 약탈하러 집에 들어 갔다가 온 식구가 굶어 죽어 다락방까지 시체가 가득한 것을 보고는 망연자실하여 아무것도 손을 대지 않고 그냥 나오기도 하였다.... 그들은 살아 있는 유대인을 만나면 끝까지 쫓아가 한 명도 남겨 놓지 않고 모조리 학살했다. 그리하여 도시의 길들은 이들의 시체로 통행이 불편할 정도가 되었으며, 거리마다 피바다를 이루어 심지어는 집에 붙었던 불이 이 피로 인해 꺼지기까지 하였다."
티투스는 예루살렘에 들어와 요새화된 건물들과 유대 저항군들의 거대한 망대를 살펴보면서 경탄을 금치 못했다. "신께서 이번 전쟁에서 우리를 돕고 계심이 분명하다. 이런 막강한 요새에서 유대인을 제발로 걸어나가게 만드신 분이 신이 아니고 누구겠는가? 인간의 힘으로는 아무리 강력한 공성 장비라도 이 망대들을 무너뜨릴 수 없도록 건설되지 않았는가!"
목숨을 부지하고 살아남은 자들은 한 곳에 모아져 분류되었다. 건장한 청년들은 로마에 개선할 때 전시용으로, 또는 검투사나 맹수의 밥이 되게하기 위해 남겨두고, 나머지 포로들은 애굽의 광산에 팔았다. 유대인들이 계속해서 우상을 섬길 때 그 벌로 다시 애굽으로 보내어질 것이라는 예언이 있었다. (신 28:68/ 렘 43:7/ 호 8:13, 9:3) 17세 미만의 포로는 노예로 팔렸다.
"예루살렘이 포위된 기간 동안 포로로 잡힌 자의 수는 97,000명에 달했으며 사망자 수는 1,100,000명에 달했다. 이 사망자 수의 대부분은 예루살렘 시민이 아닌 유대인이었다. 이들은 유대국 각지의 주민들로서 무교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을 방문했다가 갑자기 로마군에 의해 포위당한 유대인들이었다."
"저희가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눅 21:24) 이리하여 예수께서 예언하셨던 대환난은 끝이 났다.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해 예언들은 글자 그대로 성취되었다. 선지자들이 예언하였듯이 하나님의 진노가 퍼부어졌으며 그 결과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박살이 났다.
이스라엘은 로마 군대의 극에 달한 진노뿐 아니라 상상할 수 없는 기근과 자기 자식을 잡아 먹는 만행과 폭도들의 동족 상잔의 비극을 겪어야 했다. 예루살렘은 "이방인들의 발 아래 밝혔으며" 생존자들은 노예로 팔려서 온 이방에 흩어지는 굴욕 또한 당하였다.
이 전무후무한 환난은 "(이)땅에 큰 환난과 이 백성에게 진노가 있겠음이로다"(눅 21:23)라는 예수님의 예언의 말씀의 정확한 성취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예수님의 최초의 선언(마 24:2)과 정확하게 일치하여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아 있지 않을 만큼 완전하였다.
"티투스는 예루살렘 전체와 성전을 완전히 파괴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나 웅장하게 서 있는 세 개의 망대... 와 서쪽 성벽은 그냥 두라고 명령하였다....세개의 망대를 그대로 둔 것은 로마군이 정복한 예루살렘이 얼마나 풍요를 누리던 도시였으며 얼마나 견고하게 요새화된 도시였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티투스는 나머지 성벽은 기초가 드러나도록 완전히 파괴하여 사람이 살던 곳인지 의심이 갈 정도로 완전 폐허로 만들어 버렸다."
14. 이방인의 때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밟히리라."(눅 21:24)
'이방인의 때'는 언제를 말하는 것일까?
마태복음 8:11-12에는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계심을 본다.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이것은 유대인들이 약속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예언이다. 마 22:7에는 군대를 보내어 예루살렘을 멸망시키겠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마 22:13 혼인 잔치 비유에서도 "바깥 어두운데 쫓겨난다"는 표현이 있는데 이것은 예복 입지 않은 사람이 버림받는 것을 표현한 말이다. 마 25:30의 달란트 비유에서도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달란트를 활용하지 못한 무익한 종이 버림받는 것을 뜻한다. 달란트 비유에 이어서 나오는 양과 염소 비유에서는 "저희는 영벌에"라고 단적인 표현을 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주후 70년 버림받은 것이고 '감람나무로부터 잘려나간 것이다' (롬 11:17)
그렇지만 바울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유대인들)을 버리셨느뇨?"(롬 11:1)라는 말씀으로 영원히 버림받지 않았음을 강변한다. 유대인의 버림받음은 시한부적이라는 말이다. 바울을 비롯한 예수를 고백하는 유대인 '남은 자'들이 있다는 사실은 언젠가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을 것을 보증한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롬 11:25,26) 이 귀절이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를 설명하는 귀절이라고 믿는다. 이방인이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수 만큼 구원받을 때까지, 이스라엘을 이미 오신 그리스도 예수를 부인하고 살아갈 것이라는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지금의 성전터에서 세워진 오말 사원(Dome of Rock)이 세워진 688년을 이방인에 의해 예루살렘이 밟힌 때로 보고 그자리에 제 3성전이 새로 새워질 때를 이방인의 때가 끝나고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다 찬 때로 본다.
또 어떤 사람은 오말 사원이 세워진 688년에서 1967년까지의 1260년을 요한계시록 11:2과 12:6의 1260일로 보고 이방인의 때가 다 찼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1967년 6월 '6일 전쟁'으로 예루살렘을 탈환한 것이 이방인의 때가 다 찬 증거로 보는 것이다.
이것은 조금 무리가 있는 주장이다. 문맥으로 보아 예루살렘이 밟히는 것은 오말 사원이 세워지는 때가 아니라, 예루살렘 멸망의 때로 보는 것이 옳다.
또 이방의 지배를 받는 것을 밟히는 것으로 본다면 B.C. 586년 이래로 예루살렘은 계속 밟혀오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안식교에서는 교황을 짐승으로 보고, 교황이 세력을 잡은 기간을 1260년에 깨워 맞추었고, 그렇게 되었다. 교황권이 확립된 538년부터, 나폴레옹으로부터 교황 피우스 6세가 발렌스로 유배당한 해 1798년까지의 1260년을 1260일로 해석한 것이다. 그렇지만 교황권이 확립된 해를 , 발렌티나 3세가 교황의 통치 행위에 대하여 법적인 효력을 부여한 445년으로 보는 사람이 많다. 1260일의 기간이 문자적으로 1260일을 의미한다고 보지 않으나 하루를 1년으로 보아 세계 역사를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데는 무리가 있다.
에스겔서 4장 6절을 기초로 '일 = 년'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러한 이론을 '1일 1년설'이라고 한다. 윌리엄 밀러(William Miller)는 다니엘서 8:24의 '2300 주야'를 2300년으로 해석해 B.C. 457년에 2300년을 더해 1843년을 예수 재림의 해로 잡았다. 이 해에 오지 않아 1년 연기한 1844년에 다시 기다렸으나 여전히 재림이 없자 공중 재림하셨다고 선포하고 안식교의 출발점으로 잡는다. 그 날과 그 시는 아들도 모르고, 그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성경을 억지로 풀다가 그런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여하튼 '이방인의 때'가 아직도 많이 남은 것 같지는 않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할 것은 성전이 새로 세워진다고 해서 세대주의자들이 상상하는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성전 안에 서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또 유대식 성전이 그렇게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가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부활 승천 이후로 하나님은 더 이상 손으로 지은 성전에 머무르지 않는다. (행 7:48) 교회가 성전이고 (엡 2:21,22), 신자들의 몸이 성전(고전 3:16, 6:19)이다. 그리고 앞으로 올 새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없다고 했다. (계 21:22)
세대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모든 유대인들이 다 구원받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다면 '온 이스라엘'의 '온'이 그리스도 재림 직전에 지구상에 있을 일단의 유대인을 묘사하는 말이 되는데, 하나님께서 특별히 마지막 세대의 유대인들에게만 유독 특별한 호의를 베푸신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 '온 이스라엘'이란 말은 전체국가를 표시하는 말로 이해되어서는 안되고, 도리어 옛 언약의 백성 중에서 선택된 전체 숫자를 표시하는 말로 이해되어야 한다.... 또한 부사는 '그 후에'라는 의미일 수 없고 '이런 방법으로'라는 의미일 수 밖에 없다."(벌코프)
이들의 구원은 '제사제도의 회복'이 아니라 '메시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될 것이다. 세대주의자들이 말하는 '왕국 복음'이 아니라 '은혜의 복음'으로 말이다. 현재 효력을 발휘하고 있는 '은혜의 복음'을 떠나서는 과거든 현재든 미래든, 아무런 소망이 없다. "거기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다."(롬 3:22)
15. 거짓 그리스도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들을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고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마 24:23-26)
"보라 내가 미리 말하였노라" (마 24:25)는 말씀을 근거로 이 귀절을 5절이나 11절의 경고를 반복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으나 그렇지 않다.
25절 말씀을 다른 번역(현대어 성경)으로 보자. "내가 경고해 둔다." 대응 귀절인 누가복음 13장 23절을 보자. "너희는 삼가라. 내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노라."(개역성경) "내가 미리 모든 일을 경고하는 것이니 너희는 삼가 조심하라."(현대어성경) 25절 말씀은 단순히 24절 말씀을 강조하는 것이다.
나는 5절 말씀은 예루살렘 포위기 이전에 나타날 가짜 그리스도고 24절은 예루살렘 포위 이후에 나타날 거짓 선지자를 가리킨다고 본다. 24절의 거짓 그리스도와 5절의 거짓 그리스도는 다르고, 24절의 거짓 선지자와 11절의 거짓 선지자는 다른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라."(마 24:26)는 말씀은 로마 군대에 의해 철저하게 포위된 성내 상황과 맞지 않다.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라"(마 24:26)는 말씀은 로마 군대에 의해 철저하게 포위된 성내 상황과 맞지 않다.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고 하여도 나가지 말라"는 26절 말씀은, "산으로 도망하라"(마24:16)는 경고에 따라 펠라로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고 있을 유대인 성도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요세푸스는 '지도자를 사칭하는 자들이 많은 백성을 미혹하여 광야로 끌고가면서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표적과 기사를 보여 주겠다고 약속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다른 어떤 거짓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골방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스도가 ...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마 24:26)
요세푸스는 '성전 꼭대기에 올라가라. 그리하면 하나님으로부터 구원받을 기적의 증표를 받게 될 것'이라고 성 안에서 떠들고 다닌 거짓 선지자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 말을 믿고 성전 근처의 곡간에 모였던 6000명의 사람은 구조되는 대신 로마 군대의 봉화에 의해 모두 화염에 휩싸여 몰살했다.
마태는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에 대해 이같이 경고한 후에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 발견되지 않는 한 귀절을 덧붙인다.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마 24"27)
예수께서는 번개를 비유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그리스도가 세상에 왔다는 소문을 듣거든, 그것이 거짓일 줄 알라. 아무도 내가 왔다는 소문을 들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내가 다시 올 때는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게 올 것이기 때문이다."
'인자의 임함'이 예루살렘 멸망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종말론적인 사건, 즉 예수의 재림을 가리키는지는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예루살렘 멸망과 최후의 심판, 이 두 사건들은 여러가지 면에서 상당히 유사하다. 따라서 그 사건들은 동일한 용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 귀절을 어느 한 군데에만 적용시킬 필요는 없다고 본다.
16. 주검에 모이는 독수리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지니라"(마 24:28)
몇몇 주석가들은 이 말씀을 주후 70년 이스라엘의 멸망에 적용시키는 반면 다른 주석가들은 이 시대의 마지막에 있을 그리스도의 재림시의 심판(살후 1:6-9)에 엄격히 제한시켜 적용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 귀절을 로마 군대가 앞세우고 왔던 군기에 새겨진 독수리 휘장을 암시하는 것으로 본다.
그렇지만 보다 넓은 의미로 볼 때 이 귀절은 이 시대 끝에 있을 최후의 심판 때 아울러 적용이 된다고 봐야 한다. 꼭 같은 내용이 적혀 있는 누가 복음 17장 37절은 '인자의 나타나는 날', 곧 재림의 날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잘 알려져 있었던 팔레스틴 지방의 속담을 사용하여 예수께서는 영적인 부패, 정신적인 타락이 존재하는 곳에는 어김없이 지체하지 않고 심판이 있을 것을 지적하신다 - 이는 모든 시대에 발생하는 일이지만 특히 세상 끝에 있을 일을 가리킨다.
이 구절에서 사용된 표현은 속담적인 말이다. 맹수와 독수리들은 시체가 있는 곳을 쉽게 찾아내어 그것들을 먹으려고 달려든다. 로마의 군인들은 마치 시체를 먹으려고 달려드는 독수리와 같았다. 예루살렘이 되기에 꼭 알맞은 것이었다. 독수리가 죽은 시체를 살펴보고 그 주위에 와서 먹으려고 하듯이 로마의 군인들이 예루살렘이 그 생명을 잃은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이러한 속담은 일반적인 진리를 가르쳐 준다. 악한 자들이 있는 곳에는 항상 악한 수단들이 동원된다. 마치 독수리들이 죽은 시체로 향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섭리가 로마 군인들을 예루살렘으로 인도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큰 잔치에 모이라고 공중에 나는 모든 새를 향해 외치는 하나님의 소집 명령은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종말의 때에 있을 것이다.(계 19:17,18) "성도들은 어떻게 그에게로 모아질 것인가? 독수리들이 본능적으로 가장 빨리 그리고 가장 민첩하게 시체 있는 데로 달려가듯이 성도들도 그에게로 이와 같이 달려갈 것이다."
17. 어두워진 해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마 24:29)
천체의 징조와 땅 위에서 벌어질 재난을 언급하는 이 귀절 때문에 사람들은 지구의 종말을 연상하는 환상적인 장면을 상상하게 되고 주후 70년의 대환난을 쭉 끌어 당겨 역사의 마지막 시대에 갖다 놓게 된다. 이 귀절은 과연 지구의 종말을 의미하는가?
누가복음 21장에서 제자들은 지구의 종말이 아니라 성전의 파괴를 질문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누가복음 21:25,26을 살펴 보자.
"일월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우는 소리를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이라." 요한계시록 17:15에서는 '물'을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라고 해석하고 있음을 볼 때 이 귀절들은 세상 권세의 불안정과 소란한 상태를 상징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이상의 모든 경우에 있어서 물리적 현상은 왕조의 몰락이나 혹은 거대한 도덕적. 정신적 변화를 묘사하기 위해 쓰이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채택하여 사용하신 이 말씀에서 어떤 다른 의미를 유도해 내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다."
주후 70년 예루살렘 멸망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던 요엘 선지자의 글을 살펴보자. 이 말씀은 사도행전 2:17-21에서 베드로가 그대로 인용한다.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같이 변하려니와"(욜 2:28-31)
요엘은 오순절날 성령이 부어질 것이라는 예언과 함께 유대 국가에 퍼부어질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도 암시한 것이다. 베드로가 성령 세례에 관한 귀절 뿐 아니라 그 뒤의 귀절도 인용했다는 사실은 그도 이스라엘 국가의 붕괴에 대한 사실을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
세대주의자들은 이 요엘 선진자의 글도 마지막 때에 적용하여 문자대로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피빛같이 변하는 천재지변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성경의 문자적 해석 방법은 세대주의의 특징이다. 오순절 날,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 피어 올랐는가?
이 송오 박사의 말이다. "그리스도인은 성경은 문자적으로(Iiterally) 믿는 사람들이다. 만일 성경을 영적 의미로 해서(spiritualize)하거나 비유적으로 해석(allegorize)한다면 성경은 원래의 의미와 크게 달라질 것이다."
J. 드와이트 펜트코스트( J. Dwight Pentecost)의 말도 들어보자.
"최초의 용인된 해석방법을 위대한 해석가이신 주님이 사용하셨던 문자적 방법이었다. 그리고 다른 방법들은 결국 이단을 일으키는데 기여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문자적 해석 방법은 오늘날 어떤 교리 분야에서나 바른 해석을 위한 기본적인 방법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이 말은 진리가 아니다. 예수님이 구약을 사용하신 것을 살펴보면 훨씬 더 다양한 방법으로 성경해석한 것을 알 수 있다. 바울은 갈라디아 4장에서 아브라함과 그의 두 아들의 이야기를 언급하면서 의도적으로 풍유법을 사용한다.
세대주의자들은 역사적 전천년주의자들과는 달리 천년왕국도 문자적으로 믿는다. 이사야서 65:25 말씀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으로 식물을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도 천년왕국에서 문자적으로 성취될 것을 믿는다.
실지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 지 모르겠지만 이사야 선지가 의도한 바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바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본다. 많은 학자들이 이 귀절을 문자적으로 보지 않는다.
"백세 못되어 죽는 자는 저주를 받은 것이리라."(사 65:20)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천년왕국에서 장수를 누리지만 죽기도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어 천국에 대한 개념, 천년왕국에 대한 개념을 흐려놓는다.
천년왕국이라는 개념 자체도, 두번의 부활(선인의 부활, 악인의 부활), 천년간의 생활 상태의 애매함, 사탄이 두 짐승과 같이 불못에 던져지지 않은 까닭 등이 문제점으로 지적되어 무천년주의자들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세대주의자들은 천년앙국에서는 문자대로 예루살렘이 중심이 되고 유대인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주장하는데, 그 곳에서 살아야 할 우리들로서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유대 땅 베들레헴과 너는 유대 고을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마 2:6) 마태가 여기서 5:2의 성취라고 여기는 예수님의 베들레헴 탄생은 문자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목자가 되기 위한 탄생이었던가?
요한이 회계의 세례를 전파하며 외친 소리, "선지가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눅 3:4-6) 이 말씀은 이사야 40:3-5을 인용한것이다. 실지로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 그런 토목 공사가 행해졌는가?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은 과연 젖과 꿀이 흘렀는가?
세대주의자들이 다니엘 12:4("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을 20세기에 수송 산업기술이 진보된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할 때, 우리는 그가 다니엘서를 그것이 쓰여졌던 당시와 동일한 정신으로 알고 있는건지 물어봐야 한다. '빨리 왕래하며'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슈트'이다. 그 뜻은 '두루 다닌다' '빨리 왕래한다'이지만 책과 관계될 때는 '속독하다'의 뜻이다. 따라서 이 귀절에서는 본서(다니엘서)와 관련되어 사용되었으니 이렇게 해석한것이 옳다. '마지막 때에 이 책(11:2-12:4의 환상)을 진지하게 읽고 탐구하는 자는 지식(깨달음)이 크게 더하여 질 것이다.'
세대주의자들이 모든 성경은 문자적으로 해석한다는 말은 자신들이 그렇게 해석하지 않음으로서 모순을 드러낸다. 홀.린세이는 하늘의 구름과 함께 오리라는 말씀을 문자대로 보지 않는다. '우리는 구름은 예수님과 같이 흰 옷을 입고 올 믿음의 순교자를 말하는 것임을 알고 있다.'
성경을 자세히 살펴 보라. 문자적으로 해석할 수 없는 부분이 얼마나 많은가? 선지자의 예언을 문자적으로만 본다면 초림의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박은 주후 30년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과 같이 오류를 범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
예언서에서는 이스라엘의 멸망 뿐 아니라 열국에 대한 멸망도 유사한 표현으로 상징화하고 있다. 이사야 13:10을 읽어 보자. "하늘의 별들과 별떨기가 그 빛을 내지 아니하며 해가 돋아도 어두우며 달이 그 빛을 비치지 아니할 것이로다."
얼핏보면 지구의 멸망을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바벨론의 멸망에 관한 예언이다.(사 13:1) 이 귀절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거나 미래의 사건으로 해석한다면, 저자가 애당초 말하고자 하는 뜻은 받아들이기를 거절하는 것이 된다. 이사야는 이 묵시적 언어를 통해 바벨론의 멸망을 예언했고, 그대로 되었다. 이사야는 에돔의 멸망에 대해서도 비슷한 언어를 썼다. "하늘의 만상이 사라지고 하늘들이 두루마리같이 말리되 그 만상의 쇠잔함이 포도나무 잎이 마름 같고..."(사 34"4)
에스겔도 비슷한 언어를 썼음을 볼 수 있다. ".. 하늘을 가리워 별로 어둡게 하며 해를 구름으로 가리우며 달로 빛을 발하지 못하게 할 것임이여, 하늘의 모든 밝은 빛을 내가 네 위에서 어둡게 하여 어둠을 네 땅에 베풀리로다."(겔 32:7,8) 이것은 애굽에 대한 멸망을 예언한 것이다.
예수께서도 선지자이셨으므로 이전의 선지자들이 사용했던 표현으로 이스라엘의 멸망에 대해 예언하셨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이 표현은 세상 권력을 직설적으로 표현했을 경우, 그 권력들로부터 발생할 수 있는 오해와 보복으로부터 자신의 백성을 보호하기 위한 '단절 전달 방식'이다.
마태복음은 "그 날 환난 후 즉시" 해가 어두워졌다고 했다. 어떤 이는, 하나님의 눈에는 "천 년이 하루에 불과하다."(벧후 3:8)는 말씀을 근거로 "즉시"를 해결하려고 하지만 설득력이 없다.
마태복음 24장 29-31절을 묵시적인 언어로 보는 사람은 이 말씀이 해석상 어떤 문제도 생기지 않는다. 실제로 큰 환난 후 이스라엘 나라의 멸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귀절은 지구 종말의 사건으로 보는 사람에게는 '즉시'라는 단어로 인하여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앞의 모든 사건들을 세상 끝날에 있을 사건으로 끼워 맞추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18. 하늘에서 보이는 인자의 징조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리라. 저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마 24:30,31)
몇몇 주석가들은 이 귀절을 29절에 이어서 상징적인 표현으로 받아들여 주후 70년에 이미 일어난 사건으로 본다. 구약에 여호와께서 임하심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귀절들을 언급하면서 (창 20:3, 출 3:8, 시 72:6, 시 18:6-17, 사 31:4)이 귀절을 구약의 비유적 표현법으로 이해한다.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도 그렇게 해석한다. "내가 빽빽한 구름 가운데 네게 임한다."(출 19:9)는 기록도 있고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그와 함께 서서.."(출 34:5)라는 기록도 있다.
신약에서는 "(너희가)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마 10:23)(너희 중에)"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도 있느니라."(마 16:28) 같은 귀절도 잇어서 구름타고 오는것을 상징으로 볼 수가 있다.
나는 이제까지 감람산 강화의 주요 강조점이 이 시대의 마지막 사건이 아니라 주후 70년의 이스라엘 멸망을 가리키는 것으로 주장해 왔지만 이 귀절에서 나타나는 명백한 뜻을 억지로 상징적으로 보려고 하지는 않는다. 구름, 큰 나팔소리, 천사 이 모두를 상징으로 보다가는 이미 예수님께서 눈에 보이지 않게 재림하셨고, 미래의 재림은 없을 것이라는 이단들의 주장을 어떻게 반박할 수 있을 것인가? 예수님은 문자 그대로 변화된 육체를 가지고 승천하셨고(행 1:9) 그 몸 그대로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계 1:7)고 믿는다.
여기서 구름은 손오공의 근두운처럼 예수님을 태워 나르는 운송 수단처럼 묘사되었는데 그렇지 않다. '구름과 함께' 오신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승천 시에도 구름을 타고 올라가신 것이 아니다. 그냥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가리워 보이지 않게 된 것이다.
그리고 예수 다시 오실 때는 믿는 자들이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살절 4:17)주를 영접할 것을 믿는다.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낸다."는 귀절을 보자. 지구 끝까지 복음의 메세지를 들고 가는 복음 사역자를 천사(사자;)로 이해하는 사람도 있는데 나는 천사를 문자 그대로 보는 것이 옳다고 본다. 마태복음 13장 알곡과 가라지 비유를 보면 추숫군(천사)를 보내는 때는 추수 때(세상 끝)이라고 기록되어 었다.(마 13:39)
또 주님의 재림과 나팔소리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쫓아 강림하시니"(살전 4:16)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고전 15:51,52)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인자의 징조"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많은 의견들이 있어 왔는데 몇가지만 소개하자면, 십자가, 광채, 천사, 별 등이 있다. 이 재림을 주후 70년의 사건으로 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하늘에서 보이는 인자의 징조'를 '인자가 하늘에 있음을 나타내는 징조'로 해석하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재림 직전에 '그랜드 크로스'라는 십자가 형태로 별들이 도열할 것을 가리킨다고 하는데, 기발한 착상이다.
'쥬피터효과'같은 혹성 직렬 현상은 이천년 동안 수없이 있어왔다. 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라는 말씀을 편견없이 읽으면 육안으로도 볼 수 있다는 뜻인데 천체 망원경을 통해서 보는 흑성 직렬 현상이 인자의 징조가 되기에는 무리가 있다.
병행 귀절을 보자.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막 13:26/ 눅 21:27참조) 여기에는 따로 인자의 징조가 없이 바로 인자가 오는 것을 보리라고 말씀하고 있다.
징조가 무엇인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예수께서 지상에 강림하실 때 눈에 볼 수 있도록 그 모습을 하늘에 드러내실 것이라는 사실은 확실하다. 이제 '그 때에'(then)이란 말을 살펴보자.
'그 때에' 이후의 사건이 주후 70년 전무후무한 대환난 직후에 일어나지 않았음을 우리는 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때에'라는 말 때문에 이전의 모든 사건을 세상 끝으로 끌여당겨 말세의 징조로 생각한 것이 사실이다.
"그 때에'라는 단어는 헬라어 '토테' (tote)에서 나온 파생어다. 이 단어는 시간의 간격을 전혀 포함하지 않고 사건의 순서를 나타낼 때 쓰이는 말이다. 앞의 사건에 이어 즉시 발생할 수도 있고 상당 기간의 시간 간격을 두고 발생될 수도 있다. 따라서 마 24:29-31의 사건을 순서대로 설명하기 위해서 예수께서 이 단어를 사용하셨다고 믿는다.
먼저, 대환난, 그 뒤 즉시 이어지는 열국의 동요와 불안정, 그리고(then) 권능과 영광의 그리스도의 재림. '현대어성경'은 마 24:29을 정확하게 번역하였다. "그러면 드디어 인자가 온다는 징조가 하늘에 나타날 것이고...."
19. 이 세대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 24:32-35)
"무화과 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 말씀을 먼저 상고해 보자.
우리는 무화과나무가 이스라엘을 말씀하신 것이고, 잎사귀를 낸다는 것은 1948년 이스라엘의 국가 수립을 말하는 것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홀. 린세이는 이렇게까지 말한다. "이 세대는 어느 세대인가? 이 문맥에서는 분명히 가장 큰 기적인 이스라엘의 재탄생을 보는 세대이다. 성경에서 한세대는 때로는 40년인 것 같다. 만일 이 산법이 옳다면 1948년으로부터 약 40년 이내에 이 모든 것들이 이루워질 것이다. 일생동안 성경 예언을 연구한 많은 학자들은 이렇게 될 것을 믿는다."
지금도 많은 학자들이 믿고 있는 지는 모르겠지만, 홀. 린세이는 1988년 안에 주님의 재림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을 했던 것이다. 세대주의자들은 최근에 한 세대를 50년으로 연장했다.
그러면 과연 무화과 나무가 이스라엘을 가리키는가? 눅 21:29에는 '무화과 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고 되어 있다. 무화과나무를 이스라엘로 보기로 굳게 다짐한 몇몇 세대주의자들은 2차 세계대전 후 독립한 수많은 나라들을 '모든 나무'에 적용시키고 있다. 이런 비유를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똑바로 이해하는 것일까? 온전한 교리를 가지고 있는 많은 주석가들은 이 이론을 사실 무근으로 돌려 버렸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마 24:33)
세대주의자들은 이 귀절도 그들이 말하는 '말세'에 적용하기 위해 필사적이다. '이 귀절 앞에 나오는 32절 말씀과 연관시켜서 생각해 보면, 그 뜻은 곧 무화과 나무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아는 것처럼, 위에 언급한 징조들이 나타나면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운 줄 알라는 것이다. 즉, 그 징조들을 목격한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주님의 재림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무화과 나무인 이스라엘이 독립한 후부터 '한 세대'가 가기 전에 예수께서 재림하실 것이라고 믿는 세대주의자들의 주장은 '너희도'에서 걸린다. 마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을 볼 것같이 말씀하고 계시지 않은가? 실지로 제자들은 여러 징조들을 보았고 요한은 예루살렘 멸망을 끝까지 지켜 보았다.
이 '모든 일'이 20세기 후반에 있을 여러가지 말세의 징조를 언급하는 것이라면, 예수님은 20세기 말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이 말씀을 기록해서 남겨두기 위해 제자들을 세워두고 동문서답을 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일'을 그렇게 해석해서는 예수께서 제자들 당대에 재림하실 것이라고 잘못 예언한 것이 틀림없다는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을 반박할 수 없다. 바클레이는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을 알고 있었고 그러기에 이 말씀을 재림에 적용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만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재림에 대한 내용으로 말씀했다면 그것은 틀린 것이 된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의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들 당대에 재림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의 인성에 지식의 한계가 있으며 그는 그들 당대에 자기가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다고 하는 견해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다. 우리는 예수께서 그의 인성에 지식의 한계가 있었다고는 할 수 있으나 그가 이와 같이 커다란 영적인 진리에 오류가 있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나는 다음의 주석이 예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온전한 뜻이라고 믿는다. "여기에서 예수께서는 사실상 무화과나무 가지에 새싹이 비치기 시작하면 여름이 이어지는 것이 분명하듯이 이 모든 일(즉, 멸망의 가증한 것의 출현, 거짓 메시야의 등장, 등등)이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면 예루살렘이 멸망하게 될 것임이 확실함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마 24:34)
'이 세대'를 '징조를 목격한 세대'로 해석할 수 없음은 앞에서 설명했다.
예루살렘 멸망의 사건을 예수 재림 직전의 사건으로 보는 사람들은 본문에 쓰인 '세대'(generation) 라는 단어는 '민족','종족'이라고 해석할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이스라엘 민족은 결코 이 땅에서 없어지지 않는다는 말씀이라고 억지 주장을 하고 있는데 과연 그럴까?
'세대'(generation)의 의미를 국어 사전에서 찾아보자. '같은 시대에 태어난, 공통된 사고방식과 감각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한 생물이 생겨나서 생존을 끝마칠 때까지의 동안'이라고 나와 있다.
헬라어의 '게네아'가 '종족'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면 할 말이 없는데, 신약성경에서 이 '게네아'가 쓰여진 다른 곳 40군데에서는 그런 뜻으로 해석할 수 있는 데가 한 군데도 없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예수께서 이 단어를 사용한 데를 찾아보자.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마 12:41) 여기서 이 세대는 유대 민족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 될 수 없다. 문맥을 살펴 보면, 요나의 전도를 받고 회개한 니느웨 사람이, 요나보다 더 큰 이인 예수님을 보고도 믿지 않은, 예수님과 동시대 사람을 심판한다는 의미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리"(마 12:42)이 말씀도 마찬가지다.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온 남방 여왕이, 솔로몬보다 더 큰 이 예수님을 , 가까이 보고도 믿지 않은 '그 시대' 사람을 심판한다는 말이다.
마태복음 23장에서 예수께서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화 있을 진저" 책망하시면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했다.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그러시면서 '조상의 양을 채우고'(32절),'지옥의 판결'을 받고, '아벨과 사가랴의 의로운 피'에 대한 보응을 하는 세대는 '이 세대'라고 했다. "이것이 다 이 세대에게 돌아가리라."(마 23:36) 예수의 말씀을 듣고 있던 '그 시대' 사람을 두고 하신 말씀인 것이다.
제자들은 성전이 무너지리라는 예언을 듣기 전에 마 23장의 예루살렘 멸망에 관한 예언 말씀을 들었다. 그래서 감람산에서 조용히 물었다. "어느 때에 이런 일(these things) 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까?"(마 24:3)
'이런 일'은 '이런 일들'로 번역해야 정확한 번역이 된다. 여기서, '이런 일들'은 성전 파괴를 비롯한 예루살렘 멸망에 따르는 비극적인 사건들이다.
33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의 "이 모든일"은 마 24:3-28에 나타나 있는 예루살렘 멸망의 징조고, 34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이 일이 다 이루리라"의 '이 일'은 예루살렘 멸망의 징조와 더불어 실질적인 예루살렘 멸망을 가리킨다고 본다. 3절에 제자들이 질문했던 바로 그 일인 것이다.
예수님은 3절의 '이런 일들'이 이루어지는 '때'는 그 제자들의 세대라는 것을 분명히 하셨다. "이 세대가 지나가지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34절)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 24:35)
바로 그 세대에 닥칠 진노에 대하여 주님께서 예언하셨던 모든 말씀은 번복 불가능하며 절대적이었다.
20. 하나님 나라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운 줄 알라."(눅 21:31)
세대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의 끝에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에 '이런 일'도 세상 종말의 징조로 본다.
그렇지만 누누히 설명한 바와 같이 이런 일은 예루살렘 멸망을 가리킨다. '만일 예수가, 하나님의 나라는 자기의 생애 중에 일어날 세상의 종말을 의미한다고 명백히 생각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그가 실수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 '하나님 나라' 개념이 분명하지 못한 것이 세대주의의 특징이다. '하나님 나라'와 '천국'을 엄격히 구별하여, 다른 개념이라고 주장하는 세대주의자들도 많다. 그렇지만 '천국'은 하나님이란 표현을 두려워하는 유대인을 대상으로한 마태복음에서만 나타나는 표현이라는 것을 안다면 그 주장은 무시될 수 있을 것이다. 마가복음 1:15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다"는 말씀은 마태복음에서는 "천국이 가까왔다"고 되어 있다.
세대주의적인 사고가 우리가 많이 보고 있는 주석 성경에도 들어와 있음을 본다. 톰슨 주석성경을 펼쳐서 마가복음 1장 15절을 찾아 보자.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밑에 기록된 주석을 보자. '지상에서 메시야가 통치하는 것은 구약성경에 약속되어 있었으며,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갈망하던 것이었다. 이제 메시야가 오셨으므로 그 나라가 가까와졌다. 그러나 그의 백성들은 그를 받아 들이지 않고 오히려 배척하였다. 그래서, 그 나라의 성취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원하고, 그의 교회를 형성하려는 하나님의 목적이 완성될 때까지 연기되었다.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 하나님의 목적이 완성될 때까지 연기되었다.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 하나님의 나라는 땅 위에 세워질 것이다.' 그러면서 행15:14-16과 계19:15를 참조하라고 부언하고 있다.
그러면 사도행전 15:14-16을 읽어보자.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저희를 권고하신 것을 시므온이 고하였으니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도다. 기록된 바, 이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 귀절에 대한 주석을 또 읽어 보자. '야고보는 아모스의 예언이 '이후에', 즉 전세계에 복음이 증거된 후에 성취되어질 것이라고 했다. 즉,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면 다윗의 장막이 다시 세워지고(천년왕국에서),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가 주님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재림 후에 세워질 천년 왕국을 가리키는가? 하나님 나라는 천국과 다른 개념이라는 말인가?
여기서 '이후에'라는 말의 잘못된 해석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후에'라는 말은 스코필드나 톰슨 주석성경이 주장하는 것처럼 사도행전의 상황이 아니라 아모스의 상황이다. 따라서 종말론적으로 해석할 귀절이 아닌것이다. 야고보가 인용한 행 15:16-17 말씀은 아모스 9:11-12의 70인역에서 인용한 말씀이다. 아모스 9:11-12의 원래의 의미는, 메시아 시대가 오면 무너진 다윗의 장막 다시 세워질 것이라는 말씀이다. 유대인들은 그 사실을 문자적으로 믿었고, 지금도 믿고 있다.
그런데 야고보의 말씀은 그것이 아닌 것이다. '이방 사람들이 돌아와 믿음의 한 식구가 된 이 사실'(행 15:15 현대어 성경)이 아모스 9:11-12의 성취라는 것이다. 이 사실은 예루살렘 총회에서 야고보가 이방인 그리스도인에게 유대의 옛 관습을 따르게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토의하는 중에 나온 말인데 아무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졌다. 그들은 어느 정도 하나님 나라의 영적 특성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유대인에게는 받아 들여지기 어려운 개념이다. (어쩌면 세대주의자들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개념이 아닐런지 모르겠다.)
다윗의 성전을 언급하면서 스데반 집사가 한 말씀,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나니"(행 7:48)는 유대인들로 하여금 이를 갈게 하고 손에 돌을 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예수님이 요 2:20,21에서 자신의 몸을 성전이라고 가르쳤지만, 그 사실을 깨달은 것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라고 요한 사도는 말하고 있다.
톰슨 성경은, 마태복음 16:19절 베드로에게 주는 '천국 열쇠'를 주석하면서 '천국'에 대해서는 이런 정의를 내린다. '천국은 그리스도가 그의 구원의 은혜를 행사하는 전 영역을 의미한다. 지상에서는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그의 나라가 임재하여 활동하고 있다. 열쇠란 말은 매고 푸는 것을 암시한다.'
예수님은 '천국의 비밀'(마 13:11)을 비유로 설명하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던 개념이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 그러시면서 이제 이 개념을 깨닫는 너희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마 13:16) 마 13:24-30의 가라지 비유에서 '천국은 농부가 좋은 씨를 자기 밭에 뿌린 것과 같다'고 했다. 농부는 예수님이고 좋은 씨는 천국 백성들이고 밭은 세상이라고 설명하셨다. 이어서 나오는 '겨자시 비유'와 '누룩 비유'에서는 확장되어 가는 천국의 개념을 설명하고 있다.
이 개념은 '창세로부터 감추인 것'이었다. (마 13:35) 그러니까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절대로 깨달을 수 없었고, 오신 메시야 예수를 영접하지 않고, 오실 몌시야를 기다리고 있는 현재 이스라엘 사람들도 절대로 깨달을 수 없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기다리는 '메시야 왕국'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나라 (왕국)'을 조화시키지 못해서 계속 헤매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하나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 12:28) 유대인들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들이 기다리는 것은 '메시야 왕국'이다. 거듭 묻는다. "하나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니이까?"(눅 17:20)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이미 제자들 가운데 있다고 대답하신 것이다.
그들이 제대로 이해를 했을까? 이해를 못했다. 누가복음 17:22을 보면 하나님 나라에 대해 제자들에게 '다시'말씀하셨다고 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인 재림에 대한 설명을 하셨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 직전에도 그들은 묻는다. "주님, 주께서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해방시켜 주실 때가 지금입니까?"(행 1:6 현대어 성경) 그 당시 유대인들이 믿는 '메시야 신앙'으로는, 메시야가 오시면 해야 될 일이 바로 그 일이었다. 제자들은 끝끝내 '하나님 나라(왕국)'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나님 나라는 눈에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다. 거듭나면 영적인 눈을 통해 볼 수 있는 나라다.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가 없느니라."(요 3:3)
예수께서 사역을 시작하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하였'지만(눅 11:20) 그것은 다만 시작의 단계에 있었을 뿐이었다. 어느 날, 그가 그의 제자들에게 말한 대로, 하나님의 나라는 '권능으로'임하며, 그리고 적어도 그들 중 몇명은 살아서 그 날을 볼 것이었다.(막 9:1)
하나님의 왕국은 연기되었는가? 이스라엘 민족에게 약속한 메시야 왕국은 아직도 유효한가?
마 21:33 이후의 '악한 표도원 농부의 비유'를 생각해보자. 한 집주인이포도원을 만들고 울타리를 둘러치고 거기에다가 포도즙을 짤 큰 구유를 파고 망대를 세운 뒤 농부들에게 세를 주고 다른 나라로 갔다. 이처럼 완벽한 포도원이나 충분한 열매를 기대할 만했다. 그러나 추수 때가 되어 실가를 받으려고 종들을 보냈더니 그 종들을 심히 때리고 죽였다. 주인은 더 많은 종들을 다시 보냈으나 역시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마지막에는 '내 아들이야 함부로 대하지 않겠지' 생각하고 아들을 보냈으나, 종들은 그 아들마저 죽여버렸다.
여기까지 이야기하시고 예수님께서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질문을 한다. "포도원 주인이 돌아왔을 때 그 주인이 소작인을 어떻게 할 것 같으냐?" "악한 자들을 모조리 죽여버리고, 그 포도원을 제때에 소출을 바칠 다른 소작인들에게 세줄 것입니다." 그들은 대답을 잘 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맺는 백성이 받으리라."(마 21:43)
하나님 나라가 연기되었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빼앗기리라고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21:33-43의 주해는 예수님의 이 말씀으로 충분하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를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마 23:37,38) 언제 버린 바 되었는가? 이 예언을 하신 후 40년후에 버린 바 되었다.
마 22:2-7의 '왕의 아들의 혼인 잔치 비유'는 유대인들이 구체적으로 '군대'에 의해 멸망하리라는 사실이 암시되어 있다.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리를 불사르고"(마 22:7)
유대인에게 약속한 메시야 왕국은 영원한 언약인가? 세대주의자들은 말한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출 19:5-6) 이 약속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신 것이고, 또한 영원한 계약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베드로전서 2:9에는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너희'는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말이다.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으나 저희가 땅에서 왕노릇하리로다."(계 5:10)말씀에서 '나라와 제사장'을로 삼은 저희는, '사단의 회'(계 2:9) 유대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
세대주의자들 중에는 레위기 26장 말씀을 들어 계약의 영원성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지만 그 계약은 조건부 계약인 것을 그들은 간파하고 있다. "너희가 나의 규례와 계명을 준행하면"(레 26:3) 이라는 단서가 붙는다.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저희를 허물하여 일렀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새 언약을 세우리라 ... 새 언약이라 말씀하였으매 첫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히 8:7, 8, 13)
역사적 신앙은, 그 왕국은 지연된 것이 아니라 교회 속에서 성취되었다고 주장한다. "지연된" 왕국, "제안되었지만 수립되지 않은"왕국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로부터 생겨난 교회의 영광을 손상시키는 것이다.
예수가 세우려던 나라는 정치적인 나라였는가?
그리스도께서 오신 목적 중의 하나가 나라를 세우기 위한 것임을 부인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렇지만 그 분이 오셔서 세우려던 나라가 어떤 성격의 나라였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의견이 있다. 스코필드, 월부어드, 블랙스톤(Blacktone)같은 세대주의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초림시에 구약의 많은 그것들이 성취되어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께서 자신이 처음 의도하셨던 사역을 감당할 수 없게 되자, 대처 방안으로 교회를 세우셨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그들은 교회시대를 '괄호 시대'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스코필드는 유대인들이 예수께서 제시하시는 나라를 거부한 시점이 바로 마태복음 11장 20절이라고 주장한다. 그 본문은 이렇다.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월부어드는 '새로운 회집(a new assembly) 인 교회의 성립을 선포한 시점이 마태복음 16장 17,18절이라고 하는데 그 본문은 이렇다. " ..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세대주의자들은 대체적으로 교회를, 처음 계획의 실패로 인한 때늦은 '후속 조치'(an afterthought)로 보거나 아니면 '끼워넣기'(parenthesis) 로 본다. 그들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의도대로 정치적인 나라를 받아들였다면, 하나님께서는 십자가 아닌 다른 어떤 방법을 모색하셨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세대주의자들의 주장을 지지해 주는 성경 귀절은 하나도 없다. 십자가 외에 다른 길이 있었다면 골고다 상에서 3번씩이나 간절히 기도하신 예수님의 기도를 듣지 않으셨을 리가 없다. '누가 예수님을 죽으러 왔다고 말하는가?'라고 반박하던 통일교의 신문 광고를 기억한다. 예수님이 살아서 정치적인 왕국을 건설하려고 했다는 교리는 세대주의자들과 통일교가 일치한다. 그렇지만 정통 기독교는 예수님이 죽으러 오셨다고 가르친다.
이사야에 의해서 대속의 성격이 뚜렷이 표현되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 메시야는 이짐을 기꺼이 짊어지신다. 그는 매를 맞고 찔림을 받았다. (슥 12:10) 그리고 산 자의 땅에서 죽임을 당하셨다. 그는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셨다. (사 53:8) 그리고 죽은 후 그는 "범죄자의 하나로 여김을 받으셨다."(사 53:12) 그러나 그는 아리마대 요셉과 같은 "부자의 무덤"에 장사되었다. (사 53:9) 이와 같은 대속의 고통과 죽음은 하나님께 용납되어 구주는 "모든 더러움을 씻는 샘"이 되셨다.(슥 13:1) 그의 복음은 구약에서 하나님이 계약하신 백성의 제한을 넘어선다. 세계 만민이 메시야 왕국의 빛 아래로 들어올 것이다. (사 60"1-6) 그 문은 밤낮으로 닫히지 않을 것이며(사 60:11), 이 왕국에서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합 2:4)
그 왕국은 우주적인 은혜의 왕국이므로 온유한 자와 마음이 상한 자와 모든 애통하는 자도 들어갈 것이다.(사 61:1) 하나님은 그의 신을 만민에게 부어주신 것이며...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욜 2:28)
신약은 예수님이 오신 목적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예수라는 이름자체가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세우려고 하신 나라가 정치적인 왕국이었다면 어떤 방법으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실 수 있었을까? 시므온이 갓 태어난 예수를 보고 그의 모친에게 한 말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눅 2:35)는 말은 무슨 뜻일까?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기 위해 당하셔야 했던 온간 고통과 모욕을 보면서 마리아가 느끼게 될 고통을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으로 불렀다. 이 때는 말씀 사역을 시작도 하시기 전이다.
예수님께서는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고 했을 때 예수께서 말씀하신 '때'와 '하나님 나라'는 무엇일까? '때가 찼다'는 말은 구약에서 약속한 나라가 막 실현되려는 시점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는 복음으로 성취되어지는 영적인 나라가 틀림없다. 세대주의자들은 예수께서 하신 산상수훈(마 5:-7:)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유대인들을 향한 것이라고 주장한다.(그리고 덧붙여 마 24: 감람산 강화도 유대인만을 대상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제대로 본 것이지만 휴거후에 일어날 사건이라고 보는 데 문제가 있다.)
스코필드는 막 1:15을 주석하면서 유대인들을 향하여 정치적인 나라를 설교하시는 것으로 사역을 시작하였다고 주장하고, 마태복음 5장을 주석하면서 "산상설교를 앞으로 이루어질 지상의 의로운 정부(천년 왕국)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헌법"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세대주의자가 아닌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팔복을 성도들이 현재 추구해야 할 덕목으로 본다. '팔복의 주된 목적은(하나님 나라)완성 때의 축복을 약속하기보다 현재의 축복점을 가르치는 것이다.'
오병이어의 기적 후 사람들이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요 6:15)했을 때 예수께서는 그것을 허락지 않으셨다. 유대인들 가운데 정치적인 나라를 세우려고 마음먹었다면, 그 때가 기회였다. 그러나 이 기회를 거절하신 것은 그분이 오셔서 세우려고 하신 나라가 정치적인 나라가 아니었다는 증거가 된다.
유대인들에게 주시려고 했던 나라도 교회를 통해 이루어지는 '영적인 나라'임에 틀림이 없다. "이는 한 아이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매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단 7:14)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정권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슥 9:10) 이상은 메시야(그리스도)에 대한 에언이다. 세대부의자들은 왕으로 오실 메시야 예언은 재림시에 성취될 것으로 본다. 하나님의 나라(왕국)가 연기되었다면, 그리스도의 왕권도 연기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끝까지 자신의 왕권을 주장하셨다.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을 때 하신 말씀을 생각해 보자.(요 18:33-37)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는 빌라도의 첫 질문은 정치적 나라에 대한 관심을 나타낸 것이다. 로마에 대항하는 정치적 위험 인물인가를 알기 위한 것이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왕이 아님을 분명히 하는 말씀이다. "그러면 네가 왕이냐?"라는 두번째 질문을 어떤 의미의 왕인지 알고 싶어서 묻는 질문이다.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다. 나는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 났다." 그리스도께서는 전사역 기간을 통하여 줄곧 영적인 나라를 선포하셨다. 그의 나라는 본질적으로 영적인 나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마리아에게 수태 고지한 천사가 눅 1:32 에서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저에게 주시겠다고 했을 때, 그 시점은 예수 재림 후가 아닌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 유대인들의 거부로 실패 또는 연기되었다고 하는 주장은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
세상 끝에 가서는 무력으로 자신의 나라를 세우실 것으로 믿는 사람들이 있다. 스코필드는 슥 12:8을 주석하면서 미래에 실현될 메시야 왕국은 "전도나 설득에 의해서가 아니라 무력에 의해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초림시에 그러한 나라를 세우지 않았을까? 예수께서는 "아버지께 구하여 열 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도 있는 권한도 있었는데 말이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하나님 나라는 화려하게 임하는 것이 아니다. 반죽 그릇에 퍼지는 누룩같이, 겨자씨가 자라는 것같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3:31-33)
이미 하나님 나라는 섰고 사람들은 그리로 들어가고 있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때 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눅 16:16)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골 1:12-13) 우리는 이미 하나님 나라에 들어와 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나라는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다스리고 계신다. "아버지께서 이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이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요 17:2)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 28:18)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엡 1:22) 제자들은 그 사실을 믿었고 또 담대히 전파했다.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저희가 믿고"(행 8:12) "(바울이)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도하여 주 예수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행 28:31)
오스카 쿨만의 히브리적 종말론을 우리는 받아들이고 있는데, 그의 유명한 말에 이런 것이 있다. "Already not Yet", 즉, "하나님 나라는 이미 임했다. 그러나 아직 임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세례 요한과 예수님께서 "가까왔느니라"고 선포하심으로 시작된 하나님 나라는 구약에서 약속된 새로운 시대는 실제로 도래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옛 시대가 끝났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복음의 메시지는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죄와 사망이 계속해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지금은 성장하고 발전하고 있으며, 앞으로 예수님 다시 오실 때, '완성'을 볼 것이다.
이런 개념을 가지고 누가복음 21:31이 무엇을 뜻하는지 살펴보자.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운 줄 알라"(눅 21:31)
A.D. 70년 예루살렘 멸망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와졌는가?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바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는 성장하고 발전하는 개념이다.
유대인들로 하여금 세월이 갈수록 더욱 절실히 메시야를 기다리게 만든 요소 중 하나는 이방인들이 자기 나라를 줄곧 지배해 온 사실이었다. 그들은 B.C. 586년에 예루살렘이 함락된 이래로 거의 모든 세월을 이런 저런 정복자들의 통치를 받아왔었다.
그러므로 A.D. 66년에 로마 점령군에 대해 반란을 일으켜 일단 성공했던 사건은 모든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할 만한 일이었다. 유대인들은 다시 한번 이스라엘의 왕국이 회복된 것으로 생각했다. 이제는 예루살렘이 더 이상 다른 민족에 의해 짓밟히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 매일 성전에서는 감사제가 드려지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의 격변은 당시 예루살렘에 살고 있던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심각한 문제를 던져 주었음에 틀림없다. 그들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를 생각해보자. 그들은 정치적 해방자로서의 메시아를 기다렸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했을 때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목격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그 나라의 완성은 여전히 미래에 있다)
그런데 이제 반란이 성공하고 로마의 지배에서 벗어날 위대한 날이 눈 앞에 닥쳤을 때, 그들은 그들이 믿고 있던 예수님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고, 예수를 믿지 않던 유대인들이 옳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유대주의의 전통적 규례를 지키고 싶어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들의 생각이 어떠했든지 간에 반란이 성공하고 진압이 시작된 짧은 기간동안 예루살렘에 살던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시험의 기간이었음에 분명하다.
히브리서는 바로 그 당시 예루살렘에 살던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한 서신이다. 히브리서에서 저자는 자기의 동족 그리스도인들에 옛 종교로 돌아가지 말도록 권고하고 있다.
유대적 세력이 되살아나고, 성전이 그대로 남아 있고, 구약적 제사가 끊임 없이 드려지고 있는 당시의 그리스도인에게 메시야와 하나님 나라는 설명하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만일 유대 국가가 멸망하지 않았더라면 '하나님 나라'의 영적 개념은 유대적 개념에 의해 흐려지게 되었을 것이다. 유대주의의 속박에서 벗어나 기독교가 견고한 터전 위에 설 수 있게 된 것은 예루살렘의 멸망이라는 사건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A.D. 70년은 기독교가 유대주의적 전통주의와 율법주의의 영향에서 벗어나는 해였고, 은혜의 복음이 자유와 보편성을 띄고 세상에 나아갈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해였다.
21. 그 날과 그 때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 24:36)
이 귀절은 예수 재림에 적용될 말씀이라고 믿는다. 예루살렘 멸망은 많은 징조가 있지만 예수 재림은 특별한 징조도 없고 날짜와 시간을 모른다는 것이다.
35절까지의 예루살렘 멸망에는 징조가 있고 그 징조에 대처하는 행동 방식도 있다. '거짓 그리스도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산으로 도망하라','도망하는 일이 겨울이나 안식일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라','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라'
그러나 36절 이후의 에수 재림에는 구체적인 대처 방안이 없다. '깨어 있고''예비하고 있는 것'은 영적인 각성을 말하는 것으로, 구체적인 행동이 아니다. 밭에서 일하고, 매를 갈고,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주는 일은 주님의 청지기로서 해야할 평소의 의무를 말하는 것이다.
노아의 홍수는 최후의 심판의 모형이고 방주는 성도들의 구원의 모형이다. 노아의 때와 같다고 했는데 인자의 임함은 갑자기 오기 때문에 깨닫지 못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이런 평상의 일 가운데 주님께서 재림하신다는 것이다. '아들도 모른다'고 하시는 그날을 알려고 노력하는 것이 재림을 준비하는 자세가 아니다.
암 3:7 을 근거로 '그 날과 그 때'를 알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36절 말씀을 왜곡 해석한다. 그들은 36절 말씀을 바로 앞절 35절에 적용시킨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34절까지의 말씀을 강조하기 위하여 하신 말씀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의 '천지가 없어지는 날'의 '그날과 그 때'는 알 수 없지만 예수 재림의 날짜는 참 '선지자'에게 알려 주심으로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천지가 없어지는 날은 천년왕국 후인데 마귀가 잠시 놓이는 그 기간을 예측하지 못하므로 천지가 없어지는 정확한 날과 시간을 알 수 없단다. 어처구니 없는 주장이다.
또 그 날(day)과 그 때(hour)는 모르지만 해(year)는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는데 막 13:36에는 홀연히 온다고 했고 살전 5:2에는 도적같이 온다고 했는데 어떻게 알 수 있다는 것인지?
"너희가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마 24:44/눅 12:40)이 말씀은 '지금은 주님이 오실 때가 아니라'고 단정하고 있을 때 주님이 오실 것이라는 말이다. 이런 사실 때문에 항상 깨어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깬다'는 것은 재림하는 주를 대망하며 늘 준비하는 마음의 자세를 말하는 것이다. 살전 5:2, 베후 3:10, 계 3:3, 16:5에는 도적같이 온다고 했기 때문이다.
'예비하고 있으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아무 때 오시든 당황함이 없이 맞이할 수 있도록 하는 말씀이다. 예비한 자에게는 도적 같이 오지 않는다.(살전 5:4) 예수께서 반복해서 그 때를 알지 못함을 말씀하고 계시다."그 날과 그 시는 알지 못하느니라."(마 25:13)
디모데 P. 웨버 목사는 신학교의 신학생들 중 몇명이 잘못된 종말관으로 장래를 망친 경우를 보았다고 한다. 그들은 '곧 주님이 오신다'고 믿고 헬라어와 히브리어, 조직신학, 구약학, 신약학, 그리고 교회사 같은 어려운 학문을 배우느라 3년 세월을 허송해야 하는가 하면서 몹시 괴로워했다. "남아있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우리는 학교를 그만두고 잃어버린 양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시간을 쓰는 것이 옳지 않은가?" 이 학생들 중 얼마는 결국 장래의 선교보다 당장의 전도를 위해 학교를 떠났다.
세월은 흘렀고 학교에 남아 신학을 끝까지 공부한 학생들은 학교를 그만둔 학생들보다 더 많은 준비를 갖추게 되었다. 그들은 나가서 더 많은 봉사와 선교를 하고 있다. 그 중에 한 명이 웨버 목사 자신이다.
어떤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자신의 생애에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같이 마음놓고 살고 있다. 예수님의 재림을 믿는다고 하지만 경계하거나 준비하는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마치 영원히 이 세상에서 살 것처럼 재물을 모으고 세상일에 몰두한다.
주님의 재림을 확실히 믿는 우리는 세상 것을 사랑해서는 안되고 세상의 것들을 잃어버리는 것을 마치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생각해서도 안된다. 세상일을 너무 소홀히 해서도 안 되지만 세상일에 너무 매달려서도 안 된다. '이제 곧 임박했다'고 강조하며 사는 것과 '아직은 그 때가 아니라'고 안심하며 사는 것, 이 둘 사이에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고 살아야 한다.
지금 당장 오실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 때는 모른다는 신앙이 매일 매일의 삶을 충실하게 할 뿐만 아니라 죄로부터 지켜주기도 한다. 부끄러운 곳에 갔다가 예수님 재림한다면 예수님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어떤 목사님들은 예수를 믿는 성도라 하더라도 교회가 들림받은 후에 남게 되어 대환난을 겪게 될 것이라는 잘못된 이론으로 교인들을 억누르고 있다. 만일 그렇다면 차라리 육신의 죽음을 통해 영혼이 하나님께로 가는 것을 더 원하게 되지 않을까?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7년 대환난이 있다고 주장하며 환난후 휴거설을 주장하는 목사님들도 성경이 말하고 있는 바를 제대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예기치 않은 때" 주님 오신다고 했는데, 적그리스도가 양의 탈을 쓰고 나타나 이스라엘과 조약을 맺는 것을 보고 난 후, 혹은 대환난 때 깨어 준비해도 늦지 않다는 생각을 갖게 되지는 않을까?
한국 교계는 1992년 시한부 종말론으로 인해 몸살을 앓았는데, 사실 '7년 대환난'을 신봉하고 가르치는 모든 자들은 시한부 종말론자들이다. 왜냐하면 7년 대환난 시작점부터 정확히 7년 만에 재림과 종말이 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사실상 7년 시한부 종말론자들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느 시점에 서 있든지 주님의 재림과 종말의 때를 알 수 없다고 가르치고 있다.
홀.린세이는 마태복음 24:8을 해석하면서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예수님이 열거했던 징조들이 보다 잦아지고 심해질 때, 종말이 가까이 오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는 지난 10년 사이의 이러한 징조들이 가속화되었다고 말하면서, 따라서 종말이 임박했다고 주장한다. '재난'으로 번역된 헬라어 '오딘(Odin)'은 '해산의 고통'을 뜻한다. 문제는 그가 '해산의 고통'이라는 1세기의 글을 가지고 20세기에 적용시키려는 데 있다. '해산의 고통(Odin '오딘')이 쓰인 데는 또 찾아보면 살전 5:3이다.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저희가)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여기서 빈도나 심도가 증거한다는 개념은 없다. 우리는 이미 말세를 살고 있고 말세에 대한 징조는 없다.
결어
필자는 종말론을 공부하면서 쉽게 풀리지 않는 난제를 만났는데, 그것이 '7년 대환난' 개념이었다. 예수님 재림 직전에 7년간의 대환난이 있을 것이라는 이론 아래에서는 '환난 전 휴거설'이든 '환난 후 휴거설'이든 '환난 통과설'이든 모두 모순점을 가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감사하게도 '7년 대환난'이 세대주의 신학자들이 만들어낸 가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종말에 관한 많은 문제점들이 해결되었다.
이 책의 텍스트가 된 [ What the Bible says about THE GREAT TRIBULATION; Future or Fulfiled?]는 '당신의 대환난 개념 전통적인가 성경적인가'로 나침반사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어느새 미래에 적그리스도가 다스리는 7년 대환난이 있을 것이라는 개념이 일반 교회의 '전통'이 되어 버렸다.
세대주의 관점에서 씌여진 줄도 모르고 몇개월 동안 섭렵한 수십 권의 세대주의 종말론 책들은 나에게 신앙의 혼란을 가져왔지만 이 한 편의 논문으로 그 보상을 받고 싶다.
부디 왜곡된 종말론을 가진 모든 분들이 바른 종말관을 가지는데, 이 논문이 조그마한 도움을 줄 수 있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