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명재상 황희
“네 이년 네가 먼저 시비를 걸어 놓고 뭐가 어쩌고 어째?”
“아니 이년이? 누가 할 소리를 누가 하는지 모르겠네!”
하녀들이 마당 한가운데서 서로 머리채를 붙잡고 악다구니하고 있는데 막 퇴궐하여 집안으로 들어서던 황희정승이 그 모습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주인어른이 나타났는데도 하녀들은 싸움을 그칠 생각은 않고 오히려 다 큰소리를 냈다. 평소 황희 정승이 하인들을 가족처럼 친밀하게 대해 주었기에 하인들은 그를 그다지 어려워하지 않았던 까닭이었다.
황희는 하녀들의 싸움을 잠시 지켜보고 섰다가 가까이 다가가 물었다.
“무엇 때문에 그리 싸우느냐?”
“아이고, 대감마님, 마침 잘 오셨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억울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제가 실은....”
한 하녀가 황희에게 억울하다는 듯이 울며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그래 듣고 보니 네 말이 맞구나.”
하녀의 말을 다 들은 황희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하녀가 하소연을 하기 시작했다.
“대감마님, 너무 억울합니다. 쇤네의 말을 좀 들어 보십시오....”
그녀의 말을 모두 들은 황희는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고보니 네 말도 맞구나.”
하녀들은 서로의 말이 다 맞다고 얘기하는 황희에게 다시 자신들의 푸념 섞인 말을 늘어 놓았다.
그런데도 이번에도 역시 황희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말없이 듣고는 둘 다 맞는 말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광경을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던 황희의 조카딸이 다가와 말참견을 했다.
“큰 아버님, 큰아버님께서 어찌하여 이 두 사람의 이야기 다 옳다고만 하십니까? 분명 어느 한쪽이 잘했으면 다른 한쪽은 잘못하였을 터인데 옳고 그름을 밝혀 주셔야지 그저 둘 다 옳다고만 하시면 어찌하옵니까?”
조카딸은 답답하다는 듯이 황희를 쳐다보았다.
“음..... 그러고 보니 네 말도 옳구나!”
황희는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 말을 들은 하녀들과 조카딸은 모두 한바탕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금방이라도 서로를 죽일 것처럼 싸우던 하녀들은 한참을 웃고 난 뒤 겸언쩍은 듯 황희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이렇듯 황희는 넓은 아량과 관용으로 집안사람들을 대했다고 한다. 황희가 밥을 먹을 때 하인의 자식들이 그 밥상머리에 둘러앉아 밥과 반찬을 집어 먹어도 그저 웃어넘겼다는 일화를 보면 황희의 그릇이 얼마나 크고 넓은지 감각이 간다.
황희의 집에는 큰 배나무가 있었는데 가을이 되면 주먹만 한 배가 주렁주렁 열렸다.
하루는 이웃집 아이가 장대를 가지고 와 황희의 집 배나무 가지를 마구 쳐서 많은 배가 땅에 떨어졌다.
그것을 본 황희는 마당으로 나가 그 아이에게 호통을 쳤다.
“이 녀석! 어찌하여 남의 배를 다 망가지게 하느냐?”
황희의 호통 소리에 놀란 이웃집 아이는 깜짝 놀라 대문 밖으로 도망쳤다. 달아나던 아이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던 황희는 하인을 불러 떨어진 배를 모두 주어 그 아이에게 갖다주라고 일렀다.
“어린것이 얼마나 배가 먹고 싶었으면 그리했겠느냐? 어서 갖다주어라.”
황희는 어른이든 아이든, 집안사람이든 모르는 남이든 한결같이 대했다.
언제나 따뜻한 마음으로 상대방의 입장과 눈높이에서 그들을 해 하려고 애썼던 것이다.
2
한강 강변의 작은 나룻터에서 줄을 서 있던 낡은 가마 한 대가 나룻배에 오르려 할 때였다.
갑자기 웬 사내가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나타나더니 가마를 거칠게 한쪽으로 밀어내고는 자신이 먼저 배에 오르려 했다.
그 바람에 가마가 한쪽으로 기우뚱거려 하마터면 물에 빠질 뻔한 것을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가마의 주인인 듯한 선비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는 말했다.
“이보시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 순번을 기다려 배에 오르고 있소. 그런데 늦게 온 사람이 먼저 타는 경우가 어디 있소?”
강경한 어조였지만 선비의 태도는 아주 정중했다.
“뭐라고? 내가 누군 줄 알고 이래라저래라하는 거요! 난 이래 봬도 황희 정승의 심복이란 말이요, 알아듣겠소?”
사내는 혀 꼬부라진 소리로 대뜸 소리쳤다.
이 나라 제일가는 영의정이신 황희 정승의 심복이란 말에 선비는 움찔했다.
그렇지만 사내는 그것으로도 분풀이가 되지 않은 듯 계속해서 선비를 향해 욕지거리를 해 대더니 배가 강 건너편에 도착하여 선비 일행이 배에서 내리자마자 다짜고짜 가마를 향해 오줌을 싸는 것이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선비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내가 양반이거늘 하찮은 아랫것에게 이런 치욕을 당하다니....”
분한 생각에 더는 참을 수가 없었던 선비는 가마와 하인들을 주막에 기다리게 하고 황희의 집을 찾아갔다.
황희의 집은 한 나라의 정승이 사는 집이라 하기에는 너무 작고 초라했다.
하인의 안내를 받아 사랑방에서 잠시 기다리자 곧 황희가 나타났다.
“무슨 일로 이렇게 우리집을 찾아오셨는가?”
선비는 황희가 그처럼 정중하게 말하자 가슴속의 울화를 삭이고 차분하게 나룻터에서 있었던 일을 말했다.
“허 그것 참, 뭐라 할 말이 없구료. 이는 내가 부족한 탓이오, 부디 노여움을 거두고 잠시나마 편히 쉬다 가도록 하오.”
황희가 그토록 정중히 사과를 하니 선비는 마음이 흐뭇했다.
‘이제 곧 놈을 단단히 경치겠지, 내 기어이 그 골을 보고 가리라.’
선비가 속으로 벼르며 기다리고 있는데 하녀가 와서 황희에게 점심식사를 어찌할 것인지 여쭈었다.
“이곳에서 손님과 함께 들 것이니라.”
잠시 후 좁쌀미음 한 그릇에 간장 한 종지가 차려진 상 두 개가 들어왔다. 선비는 정승의 점심상이 초라한 것에 놀랐으나 내색하지는 않고 남김없이 다 들었다.
황희는 점심상을 물리려 온 하녀를 불러 귀엣말을 몇 마디 속삭이더니 선비에게 이런저런 세상사 얘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제나저재나 사내가 벌 받기를 기다리던 선비는 하루해가 저물도록 황희가 딴청만 부리자 부아가 나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그만 물러가겠습니다.”
“벌써 돌아가려오? 그럼 아쉽지만 안녕히 가시오!”
황희는 여전히 별다른 말 없이 인사만 했다.
‘거 참! 천하에 명상이라더니 자신의 하인 하나 처리 못하는 삶이 어찌 한 나라의 정승이란 말인가!’
선비가 씩씩거리며 마당을 가로질러 가고 있는데 어디선가 곤장을 치는지 퍽, 하는 소리에 연이어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이를 이상히 여긴 선비가 나는 곳으로 살며시 가보니 아침에 자신을 욕보인 그 사내가 하인들에게 둘러싸여 멍석말이를 당하고 있었다.
하인들 중 한 명이 선비를 알아보고 말했다.
“선비님! 나리의 분부대로 선비님을 욕보인 이 녀석에게 벌을 주고 있습니다. 이제 다시는 그런 짓을 못할 것이옵니다.”
선비는 깜짝 놀랐다.
“아니 대감께서 언제 그런 분부를 내리셨소? 이제껏 함께 있었어도 아무 얘기를 듣지 못했는데...”
“아 예, 아까 점심상을 물리러 갔던 하녀에게 분부하셨습니다.”
선비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좁은 소견을 부끄러워했다.
다른 사람들 같으면 위엄을 과시하려 그 자리에서 큰소리를 쳤을 텐데 황희는 소리 없이 자신의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3
청렴결백하기로 소문난 황희는 평생 초가집 신세를 면하지 못한 것은 물론 쌀밥 한 번 제대로 먹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항희가 세상을 떠난 후 치러진 막내딸의 혼사만은 공주님 혼례 못지않았다고 한다.
허나 이도 알고 보면 황희가 생전에 쌓아놓은 음덕의 결과였다.
황희가 병석에 누워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그의 부인은 아직 출가를 못 시킨 막내딸의 혼사가 은근히 걱정되었다.
지금까지도 딸들에게 혼수를 제대로 못해 보냈는데 그나마 남편마져 죽고 나면 하나 남은 딸의 혼례를 어찌 치러야 하는가 싶어 부인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대감께서 기력을 회복하셔서 그나마 살아생전에 막내를 출가시켜주셔야죠. 이대로 가면 제가 어찌하오리까?”
하루는 부인이 황희의 머리맡에 앉아 눈물 섞인 넔두리를 했다.
“부인,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바우라는 광대가 다 알아서 해줄 것이요.”
황희는 기운없는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부인은 황희의 엉뚱한 소리에 이러다 정신마져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더 이상 그런 이야기는 입밖에 내지 않았다.
황희는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그후 몇 해가 흐른 뒤 황희의 부인은 겨우 막내딸의 혼인 날짜를 잡게 되었다. 하지만 혼수를 마련할 돈이 없어 걱정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 무렵 나라에서는 경사가 겹쳐 하루는 임금이 큰 연회를 열었다.
연회는 전국 각지에서 모인 유명한 광대들이 임금을 위시한 문무백관들 보는 앞에서 한바탕 놀이판을 벌이게 되었는데, 줄타기 재주가 뛰어난 바우라는 광대도 참석하게 되었다.
놀이판이 신명나게 벌어지는 가운데 드디어 바우의 차례가 되었다. 그런데 한참 신나게 줄을 타며 흥을 돋우던 바우가 갑자기 해괴한 짓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는 허리에 찼던 수건을 들고 양쪽 엉덩이에 번갈아 갖다 대며 큰 소리로 사설을 늘어놓는 것이었다.
“이것은 돌아가신 황희 정승댁 정경마님과 막내따님이 서로 속옷을 번갈아 입는 모습으로....”
이를 본 임금은 진노하여 신하들에게 즉시 바우를 잡아 무릎을 꿇이라 명했다.
한 신하가 호통을 쳤다.
“네 이놈! 네가 감히 한 나라의 정승이셨던 분의 가실을 욕보인단 말이냐?”
“천부당만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어찌 소인처럼 미천한 것이 그리할 수 있겠사옵니까? 다만 소인은 황희 정승께서 세상을 뜨신 후 그 식솔으 생계가 어려워 이번 막내따님의 혼사에 혼수도 변변히 준비하지 못 한다 하기에 이를 상감 마마께 알려드리고자 주제 넘은 짓을 하였사옵니다. 소인을 죽여 주옵소서.”
이 말을 들은 임금은 바우의 뜻이 장하다 이른 후 황희의 막내딸의 혼수를 공주의 것 못지않게 준비해 보내라 명했다.
혼수를 가져온 신하에게서 모든 사정을 전해들은 황희의 부인은 감흡해 마지않았다.
황희 부인은 그때서야 죽기 전 병석에서 했던 남편의 말이 생각났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줄을 미리 아셨단 말입니까? 대감!”
황희부인은 미 모든일이 지하에 계신 황희 정승이 일생동안 쌓아온 음덕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남편의 명복을 빌고 또 빌었다.
첫댓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즐건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