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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호산나 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복의근원정태경
<고난주간 새벽기도1> 부활의 참된 의미: 누가복음 20:27~44, 말씀: 하용조 목사님
오늘부터 <고난주간 특별 새벽기도>의 시간을 갖습니다
<고난>이란 무엇입니까? 로마서 8장 18절을 보십시오
\\"현재의 고난은 앞으로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롬8:18)
지금 우리가 받는 고난은 앞으로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전혀 비교되지 않습니다.
왜 그러냐구요?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셨기 때문이지요.
그럼, 우리가 <고난>을 피할 수 있습니까?
결론부터 얘기하면, 누구나 <고난>은 피할 수 없어요.
<고난>이 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예요.
그러므로 <고난>이 오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세요.
왜, 감사해야 하나요?
그것은 로마서 8장 18절의 말씀과 같이, 현재의 고난은 앞으로 오게 될 영광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니까요.
이것이 고난주간의 첫번째 메세지예요.
예수님은 십자가를 피하지 않았아요.
예수님은 자기가 받은 고난을 통해서, 본인이 이루고자하는 일을 이루셨습니다.
우리에게도 고난이 있어요.
그럴 때 그 고난을 그대로 받아 드리고, 정면으로 돌파하세요.
우리가 그 고난을 겪은 후에는 아름다운 열매가 맺히게 되니까요.
사람들은 고난을 겪으면 겸손해 져요.
그러나 고난을 겪지 않으면, 오만해 져요.
그것은 고생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그 고난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이지요.
\\"남자는 군대를 갔다와야 사람이 된다\\"는 말이 있듯이, 고생을 해야 합니다.
배가 고파 본적이 없는 사람은 배고픈 사람의 마음을 모릅니다.
저는 오래 전부터 신장(콩팥)이 나빠요.
그래서 신장투석을 일주일에 두번씩 받아요.
제가 아파보니까 신장의 중요성을 알게 됐어요.
그동안 신장이 내몸의 독소를 빼주는지 몰랐어요.
제가 아파보니까 \\"산다는 것이 참으로 소중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어요.
우리가 매일 밥 먹는 일이나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그렇게도 소중한지 몰랐어요.
이런 고난을 겪어야 신장에 대한 고마움도 생기고, 정상적인 것에 대한 감사도 느끼고,
그것으로 인해 <고난이 축복>이라는 말도 느낄 수 있어요.
우리가 고난을 겪어야 봉사도 하게 되고, 남을 위해 희생도 하게 되고, 헌신도 하게 되지요.
이게 <고난 코드>예요.
매일 내 입장에서만 생각하던 사람도 고난을 당해 봐야,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게 돼요.
그래서 옛말에 \\"아파봐야 안다\\"고 하는 말이 생긴 거예요.
사도행을 보면 교회가 성장해요.
그 성장 가운데는 고난이 있어요.
그래서 고난과 성장은 같은 거예요.
사업을 해도 고난이 따르고, 그 고난을 겪으면서 성장하는 거예요.
결국 고난을 겪으면 인격이 성숙해 져요.
그래서 고난을 겪으면, [축복이 온다]는 거예요.
고통에는 다 뜻이 있고, 그 다음에는 [영광의 축복]이 오는 거예요.
이번 고난 주난을 통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까지 전체 그림을 그려보면 다음과 같아요.
1. 예수님이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합니다.
예수님의 이런 모습이 저는 코메디와 같아요.
기왕에 타고 오시려면 큰 나귀를 타고 오시지, 어린 나귀를 골라서 타고 와요.
2.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 도착하여 성전을 청소하고, 장사꾼들을 몰아 냅니다.
3. 열매맺지 못하는 무화과 나무를 꾸짖고
4. 감람산에 올라가서 \\"감람산 사건\\"을 일으키고
5. 제자들과 다락방에서 성만찬을 베풀고
6.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고
7. 그날밤 예수님은 가롯유다의 배신으로 체포를 당합니다.
이것이 금요일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날 밤에 일어난 사건을 시간대 별로 얘기하면, 밤 1시에 대 제사장의 방으로 끌려가고, 3시 공의가 모이고,
5시에 로마총독 빌라도의 심문을 받고, 6시에 헤롯왕을 만나고, 6시 30분 사형 언도를 받고,
9시 십자가에 처형당하고, 6시간 동안 십자가에 매달려있다가 오후 3시에 드디어 운명하게 됩니다.
그 당시에 로마의 법은 엄하기로 유명한데, 유독 예수님의 재판은 일사천리로 진행됩니다.
모든 불법과 여론 재판식으로 일관되게 계획된대로 하루밤 사이에 졸속으로 진행됩니다.
8, 그러니까 금요일에 운명하시고, 일요일 새벽에 부활하게 됩니다.
그래서 \\"죽은지 3일만에 부활하셨다\\"고 얘기하는 겁니다.
우리가 고난 주간에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하신 7가지 말씀](가상칠언)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1.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가 하는것을 알지 못하나이다.\\" (누가복음24:34)
-----용서의 기도
2. \\"오늘 네가 나와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전도의 기도
3.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나이다\\"(요한복음 19:26)----효도의 기도
4. \\"엘리엘리라마 사막다니\\"(나의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태복음 27:46
-----절규의 기도
5. \\"내가 목 마르다\\"(요한복음19:28)----- 고통의 기도
6. \\"다 이루었다\\"(요한복음9:30)---------완성의 기도
7.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손에 부탁하나이다\\"(누가복음24:46)------위탁의 기도
오늘의 큐티는 사두개인과 예수님이 벌리는 <부활논쟁>의 얘기입니다.
바리새인은 \\"부활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두개인은 \\"부활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사두개인은 이성주의자이고, 합리적인 상식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기독교를 휴머니즘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부활은 절대로 일어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에 모이신 성도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기적입니다.
어떻게 2000년 전에 살았던 예수라는 청년의 말을 우리가 믿을 수 있으며,
더구나 사람으로 태어나서 \\"죽었다가 3일 만에 다시 살아났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것을 믿는다면, 나의 이성으로 믿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역사이지요.
성령이 나의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서 어떻게 그런 일(=부활사건)을 믿을 수 있겠어요.
일반 사람은 쉽게 믿지 않지요.
그런데 신기한 것은 기독교인들은 이 사실을 믿어요.
하기야 천지창조를 믿으면 부활도 믿게 되지요.
그러니까 \\"내가 믿어지지 않는다\\"고 하나님의 역사를 부정하면 안됩니다.
나처럼 하나님을 믿지 말고, 하나님처럼 하나님을 믿으세요.
\\"내가 불가능하다\\"고 \\"하나님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오늘의 누가복음 20장 27~33절의 말씀은 <트릭>이예요.
사두개인의 말은 사실이 아니고, 지어낸 얘기입니다.
그것은 반대를 하기위해 지어낸 말이고, 논리적으로 모순된 말입니다.
사두개인들은 이런 가정법적 논리를 앞세우고, 그럴듯하게 말을 만들어서 예수님을 공격하고 있어요.
실제로 \\"그런 일이 있다\\"고 하여도 예수님의 대답은 단호합니다.
누가복음 20:34~36의 말씀과 같이 \\"천국에는 그런 일이 없다\\"고 대답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시집가고 장가 간다 그러나 죽은 사람 가운데 부활에 합당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은 시집도 가지않
고 장가도 가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천사들과 같아 다시금 죽을 수도 없다. 그들은 부활이 자녀이므로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다(눅34~36)
사두개인들의 생각하는 \\"부활이 없다\\"는 것은 이성적이고 상식적이로 합리적인 생각이지만,
예수님의 영적 논리와는 서로 차이가 있어요.
그럴 때 여러분은 어떤 것을 믿으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으세요. 세상의 행복(돈, 권력, 명예)을 추구하지 마세요.
세상의 행복과 하나님의 행복은 차이가 있어요.
하나님의 복은 마음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으며.... 와 같이 하나님의 법과 질서 안에서 이루어 집니다.
우리에게 고난이 찾아 오더라도 그것을 피하지 말고, 정면으로 받아 드리면, 고난이 영광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난은 성숙으로 바뀌어, 우리에게 복으로 돌아 올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언제나 함께 하실 것입니다.
<고난주간 새벽기도2> 엇갈리는 준비, 누가복음 22:1~13, 말씀: 하용조 목사님.
“하나님의 고난이 끝났다”고 모든 것이 다 끝나는게 아닙니다.
그렇다고 “고난이 계속 된다”고 하나님의 사랑이 끝난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2007년초의 특새>에서 경험했던 기적은 계속해서 일어 납니다.
그러므로 “기도에 응답이 없다”고 포기하지 마세요.
어떤 병도, 어떤 어려움도, 어떤 고통도 포기하지 마세요.
<예수 믿는 삶>이란?...... 내 병을 고쳐 주었기 때문에 감사한 것이 아니라,
그 분이 나와 항상 함께 하기 때문에 감사한 것입니다.
그것은 그 분이 내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내 안에 계시면, 내 마음에 평화가 오고,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지난 일요일, <종려 주일날> 예수님이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했어요.
하늘의 왕이 뛰뚱뛰뚱 걷는 어린 나귀의 등에 타고 예루살렘 성전에 도착해 보니,
거룩한 성전이 장사꾼들의 상업주의에 물들어 있는 모습을 보고 예수님이 깜짝 놀랬습니다.
그것은 장사꾼들이 종교 지도자들과 결탁하여 하나님의 집을 망쳐 놓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보고 예수님은 상을 뒤엎고, 채찍을 휘두르며, 화를 내셨습니다.
그래서 먼저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몰아내고, 청소를 하셨습니다.
그다음에 예수님이 걸어가다가 화려하게 생긴 무화가 나무를 보고, 열매가 없음을 질타하시고, 꾸짖었어요.
아무리 잘 생겼어도 알맹이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유월절> 잔치 준비를 하십니다
오늘의 QT의 제목은 <엇갈리는 준비>입니다.
성경을 보니까 유월절 잔치를 준비하면서 여기에 두 사람이 나옵니다.
한 사람은 <가룟 유다>이고, 또 한사람은 <물동이를 메고 가는 사람>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유월절 이라고도 하는 무교절이 다가왔습니다” (눅22:1)
<유월절>은 어떤 날입니까?
유월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속박으로부터 구원해 내신 것을 기념하기 위해, 유대인들이 봄철에 지키는 <축제일>입니다.
그럼 <무교절>은 또 무슨 날입니까?
무교절은 오래 전부터 유월절 행사에 연이어 7일 동안 히브리인들의 축제일로써, 이스라엘 남자들이 지정된 성소에 반드시 순례 해야 하는 절기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무교절에는 “누룩을 넣지 않은 떡을 먹는다”고 해서 [무교절 (교자는 발효 교)]이라고 합니다.
결국 마귀를 궁극적으로 이기는 길은 십자가의 보혈이므로, \\"문설주에 피를 발라서 마귀를 없앤다\\"는 뜻으로 인해서
그때부터 유월절이 시작 되었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기 전에 “유월절의 음식 잔치를 했다는” 것입니다.
2절을 보세요
“대 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를 없앨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을 두려워 했기 때문입니다“
(눅22:2)
대 제사장들은 겉으로는 거룩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속으로는 예수를 죽이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인기가 높아지다 보니까, 자기의 권력과 인기를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가 누려야 할 권리를 예수가 독차지 하니까, 자기 소외감이 들어서 예수를 시기 하고,
드디어는 예수를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는 것입니다.
그런데 백성이 두렵기 때문에 그들의 눈치를 보면서, 여론을 보아 가면서 음모를 꾸밉니다.
3절을 보세요 “사탄이 그 열둘중 하나인 가룟이라는 유다에게 들어 갔습니다“(눅22:3)
여기에 나오는 가룟 유다에게서 발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첫째, 그는 예수님의 12 제자중 한 사람이고,
둘째, \\"사탄이 그에게 들어 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까, 유다의 생각이 바뀌었어요.
가룟 유다는 제사장들의 꼬임과 \\"돈을 주겠다\\"는 유혹에 넘어가, 그들의 음모에 가담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제사장의 <유혹>과 사탄의 <꼬임>이 합쳐진 작품이지요.
그렇지 않아도 대 제사장들은 예수를 죽일수 있는 방도를 구상 중인데, 거기에서 하수인이 나타난 거지요.
그들은 너무도 반가웠고, 서로 의기가 투합 되었지요.
5~6절을 보세요. “그들은 기뻐하면서 유다에게 돈을 주기로 약속했고, 유다도 이에 동의 하고, 무리가 없을 때
예수를 그들에게 넘겨 주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눅22:5~6)
항상 음모 뒤에는 돈이 따르지요.
돈은 [거짓 증언]의 댓가로 주어 지는 것이예요.
그래야 사실이 아닌 것을 거짓말로 증언을 대신 하게 되지요.
여기에서 우리는 오늘의 큐티 제목을 잠시 생각해 봅시다.
오늘의 제목은 <엇 갈리는 준비>입니다.
왜? <엇 갈리는 준비>입니까?
그것은 가룟 유다의 준비와 물동이를 메고 가는 사람의 준비가 너무나 내용이 다르기 때문에
[엇 갈려서] 붙여진 제목입니다.
첫째, <가룟 유다의 준비>입니다.
그는 똑똑한 척 하면서, 자기는 엄청난 [정의의 사도]라고 생각하며 행동하는 가룟 유다입니다.
그러나 그 뒷편에는 자기의 스승을 고발해서, 뒷돈을 챙기려는 엄청난 반역을 감행합니다.
유다의 또 한가지 모습을 살펴 보면, [옥합을 깬 여인]에서.....
마가복음 14장 3~9 에서 유다의 떳떳치 못한 모습을 또다시 보게 됩니다.
[옥합을 깬 여인] 옆에는 가룟 유다가 있었습니다.
[옥합을 깬 여인]은 예수님에게 자기가 가진 <최고의 가치>를 드렸습니다.
가장 비싼 향유가 들어 있는 옥합을 깨어서, 예수님의 머리에 부을 때, 사람들은 “왜 향유를 낭비 하는가?”
“이 향유를 비싼 값에 팔아서 그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면 좋을텐데......“ 라고 항의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때에 예수님은 “왜 여인을 괴롭히는가?”
“이 여인이 내 몸에 향유를 붓는 것은 내 장례를 준비하기 위한 것이다”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둘째, 또 한 사람의 준비가 나와요.
그것은 누가복음 22장에 나오는 [물동이를 메고 가는 사람]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물동이를 메고 가는 사람]은 이름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냥 [물동이를 메고 가는 사람]을 만나면, “그를 따라 가라”고 막연하게 말씀 하십니다.
8~11절을 보십시오.
“가서 우리가 유월절 음식을 함께 먹을수 있도록 준비하라, 그들이 물었습니다.
“저희가 어디에서 준비하면 좋겟습니까?” 예수께서 “성안에 들어가면 물동이를 메고 가는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
가 들어가는 집으로 따라 들어가 그집 주인에게 “선생님 께서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을 방이 어디냐고 물으
셨습니다“라고 말하라고 말씀 하셨습니다\\"(눅22:8~11절)
예수님도 이렇게 대책없는 말씀을 하실 때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특별한 설명도 없이, 그를 따라서 “유월절 음식을 준비하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이 “어디다 마련 할까요?”라고 묻자, 예수님은 “성안에 들어가면, 물동이 메고 가는 사람을 만날 것이다.\\"
그가 들어가는 집으로 따라 들어가 \\"선생님이 음식 먹을 방을 알아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돈을 주면서 “음식을 준비하고, 방을 예약하라”고 하면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길거리를 가다가 [물동이를 메고 가는 사람]을 따라 가라\\"고 하시니, 막연한 얘기입니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고, 대책없는 놀라운 분입니다.
제가 이번에 일본의 \\"LOVE SONATA\\"를 계획한 것도 이와 같은 비슷한 얘기입니다.
하나님은 저에게 \\"일본 열도를 품으라\\"는 <전도의 비젼>을 주셨어요?
그런데 현실의 상활을 따져 보면 불가능 해요.
마치 길거리에서 [물동이를 메고 가는 사람]을 찾는 것과 같아요.
이것이 일본의 첫집회인 오끼나와를 오고 가면서 느낀 거예요.
작년말 저는 2007년에는 일본을 위해 기도하고, \\"일본에 가서 전도 집회를 하자”고 선포 했어요.
그런데 오끼나와를 가려니까, 비행기 편이 제한 되어 있어서 문제가 된 거예요.
우리 온누리 교회에서 200명이 티켓을 사니까, 더 이상 오고 갈수 없어요.
아시아나 항공사 실무진한테 얘기하니까. “고위층에 얘기 해야 된다”고 해서 또 방법을 찾아야 했어요.
누구를 알아야 움직이지요.
그래서 찾아낸 방법이 <전세기>를 띄우는 거예요.
이 <전세기>가 예수님이 타고 간 어린 나귀와 같아요.
그 때 나귀 주인(고위층)이 “뭐라고 얘기하면, 어떻게 하지요?” 라는 질문에는
“예수님이 그걸 쓰고 싶다고 대답해라\\"는 거예요.
여기에서 <고위층>은 [물동이를 메고 간 사람] 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두 사람을 보았어요.
한사람은 똑똑한 <가룟 유다>이고, 또 한 사람은 <물동이를 메고 간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물동이를 메고 간 사람>을 사용했어요.
그를 따라 들어가 그집의 다락방에서 <최후의 만찬>을 준비합니다.
주님은 당신을 사용하고 싶어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등위에 타고 싶어 합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위한 준비입니다.
때로는 당신의 돈이 필요하고, 당신의 시간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거절하지 말고 순종하십시오.
오늘도 하나님과 함께 승리하는 생활이 되시기 바랍니다.
<고난주간 새벽기도3> 최후의 만찬과 성만찬, 눅22:14~23, 말씀: 하용조 목사님
하나님을 머리로 이해하지 말고, 가슴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은 자기가 체험해야 알 수 있다\\"는 말이예요.
영적인 내용은 은혜 받은 체험과 은사의 경험이 있어야 스스로 알게 됩니다.
우리의 이성이나, 머리로 하나님을 알려고 하면 골치가 아파요.
그것은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영적인 문제를 우리는 쉽게 알지 못해요.
그러나 하나님을 가슴으로 느끼는 것은 쉬워요.
그러니까 이성으로 이해할려고 하지말고, \\"가슴으로 느끼라\\"는 말입니다.
어제 큐티를 복습하겠습니다.
가룟 유다는 겉으로 예수님의 제자로 행세하면서, 결국은 예수를 배신하려고 음모에 가담합니다.
그것은 그에게 사탄이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가룟 유다는 성경의 곳곳에 후렴처럼 나타나서 배신행위를 합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배신과 거절의 상처가 있어요.
우리에게는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이런 배신과 거절의 경험이 있어요.
배신과 거절이 우리의 영혼 깊은 곳에서 우리 인생을 뿌리째 흔들고 있습니다.
가롯유다의 몸속에 들어간 사탄은 유다로 하여금 악한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유월절 잔치에 또 한사람이 나와요.
그는 물동이를 메고 가는 사람입니다.
이 여인은 유명한 <최후의 만찬>에 나오는 다락방을 제공한 사람입니다.
나는 여러분의 등이 예수님을 태운 <어린 나귀>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헌금을 할 때, 잘난 척하고 돈내지 마세요.
어떤사람은 교회에 와서 \\"사회적 신분을 인정해 달라\\"고 요구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들의 태도는 아주 오만해요.
헌금할 때에 좋은 자세는 \\"하나님! 어떻게 나같은 사람의 돈도 쓰십니까?\\"
\\"하나님! 저는 부끄럽고 죄송한 마음으로 이 헌금을 바칩니다. \\"라는 자세로 드리십시오.
그것은 자기를 드러나지 않고 드리는 방법입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의 다락방에서 <최후의 만찬>을 벌립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13장 1~3장에 나오는 <제자들의 발을씻기시는 예수님>입니다.
오늘 말씀드리려는 <최후의 만찬>은 너무나 감동적인 장면이니까,
예수님의 동작 하나 하나를 구별하여 기록해 보겠습니다.
1. 갑자기 예수님이 음식을 잡수시다가
2. 벌떡 일어나서 발을 씻길 준비를 합니다.
3. 겉옷을 벗으시고
4.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5. 대야에 물을 떠온 후
6. 예수님은 무릎을 꿇으시고
7. 제자들의 발을 씻기고, 수건으로 닦아 주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행동은 아주 <소리없는 충격>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어쩔줄 모르고 당황해 하고 있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생애중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는> 이 장면이 가장 감동적으로 느껴집니다.
그 이유는 제 자신이 기적을 일으키지 못하지만, 저와 함께 사역하는 부목사님들의 발은 씻겨 줄 수 있으니까요.
나보다 더 높은 윗사람을 섬기는 것은 아주 쉬워요.
그러나 나보다 낮은 사람을 섬기는 일은 쉽지 않아요.
예수님의 이런 행동은 기가막힌 한편의 드라마와 같아요.
그래서 지금까지 배운 예수님이 에루살렘에 와서 첫번째한 일은
첫째, 성전을 깨끗이 청소하는 일과
둘째, 열매없는 나무를 저주해야 했고
셋째, 약한 자의 발을 씻어주고, 어려운 사람의 눈물을 씻어 주는 일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은 유명한 말씀을 한마디 하십니다.
그것은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겠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4:34)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라들이 너희가 내 제자임을 알게 될것이다\\"(요 14:35)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3장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하신 말씀이고,
요한복음 14장 ~15장~16장은 <다락방 설교> 입니다.
또 마태복음 5장~6장~7장은 <산상설교>입니다.
이와같은 주옥같은 예수님의 말씀은 원문 그대로 읽기만 해도 예수님이 설교하시는 것 같고,
그것을 들으면서 예수님을 만나는것 같고, 또 예수님의 음성을 체험하게 되는 성경구절입니다.
오늘은 <성만찬의 의미>에 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누가복음 22장 1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빵을 들고 감사 기도를 드린 후, 떼어 제자들에게 주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내가 너희를 위해 주는 내 몸이다.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눅22:19)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을 하시다가, 떡을 떼시고 \\"이것은 내 몸이다.\\",
그리고 잔을 들고 \\"이것은 내가 너희를위해 흘리는 내 피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떡은 예수님의 몸이고, 포도주는 예수님의 피가 되므로, 성만찬에 참여하여 그것을 먹으면,
<예수님의 살을 먹고, 예수님의 피를 마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것은 내 몸안으로 예수님이 들어오는것과 같으므로
<예수님이 내 안에 거하는것>입니다.
이것이 <성만찬의 역사>입니다.
신앙은 이성과 지성으로 이해하는게 아니예요.
예수는 믿는게 아니고, <먹는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려고 하니까 그는 믿어지지 않고, 의심이 생기는 거예요.
음식을 먹으려고 밥상에 앉으면, 음식냄새가 코를 찌르므로 배가 더 고파요.
우리는 그 음식을 먹고, 위장에서 소화를 시키고 그것이 에너지가 되어, 우리 몸의 살과 피가 되지요.
이때에도 음식은 구경하는게 아니고, 먹는거예요.
이 음식이 내 몸 안에 들어와서, 나와 하나 되는 것과 같이 성만찬을 내 마음에 예수를 모셔 오는 것입니다.
<성만찬>때에 먹은 떡과 피가 내 몸 안에 들어와서 나와함께 있으며, 나와 하나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와 나는 하나 되었다>고 하는 거예요.
이것은 마치 여자가 <임신하는 것>과 같아요.
여자가 임신을 하면 어머니 뱃속에서 아이가 성장하게 되지요.
신앙은 <임신한 아이가 자라는것>과 같이, 하나님이 내 안에 들어와 나와 함께 생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안에 들어온 하나님의 성령님이 나를 움직이게 됩니다.
성령이 나에게 들어오면, 내 삶이 변하게 만들지요.
그래서 그 분이 말하는대로 나를 움직이고, 그분이 원하는대로 내가 말하는 거예요.
예수 믿고 제일 중요한 것은 나의 성격이 변해야 해요.
예수 믿고도 성격이 변하지 않는 사람은 예수를 헛 믿는 거예요.
예수님이 내 몸 안에 들어왔으니, 옛날의 나의 모습은 없어져야 하고,
예수님과 내가 하나가되어서 새로운 피조물로 내가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그래서\\"예수님과 나는 하나다\\"라고 말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가 내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한다\\"고 얘기하는 거예요.
20절을 보세요.
\\"이 잔은 너희를 위해 흘리는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다\\"(눅22:20)
예수님은 잔을 들고, \\"이 잔은 너희를 위해 흘릴 내 피로 세우는 새 계약이다\\"라고 말씀하시고, 마지막 <최후의 만찬>을
끝내고, 자정에 횃불을 들고 찾아온 로마군병에게 체포당하였습니다.
바로 그 전에 겟세마네 동산으로 올라가 땀이 피가 되는 기도를 합니다.
그때의 시간이 밤 12시이고, 그 얘기는 내일 계속됩니다.
이 고난주간에 성만찬의 축복이 있으시기 바랍니다.
<고난주간 새벽기도4>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눅22:39~46, 말씀:하용조 목사님
사람이 죽기전에는 진실된 말을 합니다.
예수님도 돌아가시기 전에 <최후의 만찬>을 하시면서, 두가지 설교를 행하십니다.
첫번째 설교는 <침묵의 설교>입니다.
그것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 준 사건>입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 준 사건>은 큰 소리로 설교하는 것 보다도, 더 위대한 <침묵>의 설교입니다.
예수님은 어려운 일을 당할 때에는 홀로 계셨고, 깊은 침묵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은 대중적인 설교보다도 침묵을 더 좋아하셨습니다.
지난 여름철에 강원도 지방에수해가 났을 때, 온누리 교회에서는 자원 봉사자들을 모아서 말없이 그곳으로 달려가서
봉사를 한 기억이 있지요.
그렇게 말없이 찾아가서 봉사하는 것이 <침묵의 설교>입니다.
이런 <침묵의 설교>는 큰 소리로 소리치고 떠드는 설교보다 더 효과적입니다.
두번째 설교는 <말씀 설교>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7장에서 <산상 설교>를 하시고, 요한복음 14~16장에서 <다락방 설교>를 하신 것과 같이,
<말씀>을 갖고, 군중들에게 설교합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기도하러 겟세마네 동산으로 올라 가십니다.
그곳에는 \\"감람나무들이 많이 있다\\"고 하여 <감람산>이라고도 하고, <올리브산>이라고도 불려 집니다.
왜 겟세마네 동산으로 올라 가셨을까요?
그것은 기도하러 갔습니다.
예수님은 급하면 이곳에 자주 오셨습니다.
왜 기도해야 합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져야하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22장 3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예루살렘 밖을 나가, 여느때처럼 감란산으로 가시자 제자들도 따라갔습니다\\"(눅22:39)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평소에도 <기도하는 습관>을 가졌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시고, 우리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인간의 생각이나 느낌으로 기도하지 말고, 원칙과 기준에 맞는 기도를 권하셨습니다.
여기서 \\"여느 때처럼\\"이란 말은 형식적이 아니라, <늘 습관처럼 기도한다>는 말입니다.
특히 새벽기도는 육체의 고통을 이겨야 할 수 있습니다.
새벽 미명에 \\"육을 일찍 깨워서 일어난다\\"는 것은 본인에게 고통입니다.
기도하러 갈 때에는 혼자 가지 마세요.
반드시 동역자가 있어야 합니다.
혼자 기도하는 것보다 함께 기도하는 것이 좋습니다.
예수님은 평소에 하시던대로 겟세마네 동산으로 올라 가니까, 제자들도 따라 갔습니다
예수님이 설교할 때, 졸고있던 제자들이 예수님이 가시니까, 그냥 따라간 것입니다.
40절을 보세요.
\\"그곳에 도착하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라\\"(눅22:40)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인간은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고, 하나님께선 <말씀>과 <성령>을 통해서 응답하십니다.
진짜로 우리가 기도하는 목적은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기도하는 목적은 하나님과 대화하기 위해서 기도합니다.
기도는 그때 그때의 나의 형편을 알려드리고, \\"시험에 들지 않고, 자기를 붙들어 달라\\"고 기도 해야 합니다
생각하는 것과 기도하는 것은 다릅니다.
생각하는 것이 중요한것 같지만, 기도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생각하면 인간이 보이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보입니다.
생각하면 사상이 보이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움직입니다.
사람이 생각을 많이하면 남을 비판하게 되고, 기도를 많이하면 다른 사람을 섬기게 됩니다.
41절을 보세요.
\\"예수께서는 제자들로부터 떨어져 돌을 던지면 닿을만한 곳으로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습니다\\"(눅22:41)
기도할 때에는 무릎을 꿇고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와서 졸던 사람도 예배드리는 그 자리에 있으면, 함께 은혜를 받습니다.
물론 은혜받기 전에는 누구나 졸기도 하지요.
그러나 졸더라도 그곳에 있으면, 함께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42절을 보십시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면 내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으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
게 하십시오. 그때 하늘로 부터 천사가 나타나 예수께 힘을 북돋아 드렸습니다.(눅22:42-43)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의 기도는 두가지입니다.
첫 번째, 예수님의 기도는 \\"아버지의 뜻이면, 이잔을 내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언뜻 보기에는 이 말이 예수님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십자가지의 고통이 너무나 크고, 무겁기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무소불능의 권한을 가지신 분인데, 이런 십자가를 물리치는 것은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십자가를 스스로 지려고 오신 것입니다.
얼마 전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라는 예수님의 수난을 다룬 영화가 있었습니다.
이 영화는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그 영화를 보면, 고뇌에 찬 예수님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도 기도하는 예수님의 주변에 끊임없이 마귀가 극성을 부리고,
우리를 호시탐탐 노리고 유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깨어서 기도하라\\"고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42절의 말씀은 <절규의 부르짖음>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부르짖는 기도는 땀이 피가 되도록 드리는 기도입니다.
왜 예수님은 이런 기도를 했을까요?
이것은 <죽는다>는 의미의 육체적인 죽음에 대한 공포는 아닙니다.
요한복음 17장은 전체가 기도로 꽉 채워져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삶 자체가 기도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나와의 친밀감을 보여 줍니다.
두 번째, 예수님의 기도는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입니다.
드디어 예수님은 기도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뜻>을 알았습니다.
기도는 마귀의 유혹과 사탄의 시험을 이기려고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겠다\\"는 의지적 결단이 있어야 하고, 결정적으로 그렇게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43절~44절을 보십시오.
\\"그때 하늘로 부터 천사가 나타나, 예수께 힘을 북돋아 드렸습니다.\\" (눅22:43)
그러자 한 천사가 하늘에서 나타나 예수님에게 힘을 북돋아 주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를 드릴 때, 천군천사가 나타나서 돕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고뇌 속에서 더욱 간절하게 기도하셨습니다.그러자 땀이 핏방울 같이 되어 땅에 떨어졌습니다\\"
(눅22:44)
사람이 생활하면서 가장 무서운 적은 내부에 있습니다.
싸움은 멀리서 나타나지 않고, 내부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자기 주변에서 발생합니다.
즉 자신의 마음 안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기독교인 치고 기도 안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다 기도는 하지요.
문제는 적당히 기도하는게 문제입니다.
더 문제인 사람은 기도하다가 그냥 자는 사람입니다.
45절을 보세요.
\\"예수께서 기도를 마치고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 보시니, 그들은 슬픔에 지쳐서 잠들어 있었습니다.\\" (눅22:45)
예수님은 피곤하여 슬픔에 지친 제자들에게 \\"마음은 원하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말씀하시며, 제자들을 위로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깨어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새벽기도 안간다\\"고 누가 뭐라고 합니까?
\\"선교사로 떠나지 않는다\\"고 누가 뭐라고 합니까?
그러나 이런 비젼을 가진 사람은 누가 말려도 떠나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은 선교사로 떠나고 싶지만, 육신이 따라가지 못합니다.
실제로는 \\"떠나고 싶다\\"는 것은 마음 뿐이지, 실제로는 <우리에게는 그런 생각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의 말씀에서 우리가 배우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첫째, 기도는 생활습관(Life style)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습관적으로 겟세마네동산에서 기도하신 것 처럼, 우리도 습관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기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 기도는 특별한 때에 특별한 기도를 해야 합니다.
땀이 피가 되도록 나 자신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 결단은 자기 자신이 내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자신이 이겨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결정할 때에 \\"그 일을 하느냐? 마느냐?\\"는 것은 자기 자신이 결정할 문제입니다.
결코 남이 결정해 주지 않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는 본인이 스스로 결정해야 합니다.
셋째, 참된 기도는 천군 천사가 도와 줍니다.
참된 기도는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참된 기도는 결국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시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내 뜻>이 무너지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순종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런 순종하는 삶을 바라십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기도하는 여러분에게 항상 임하시기 바랍니다.
<고난주간 새벽기도5> 십자가의 사람들, 눅23:1~43, 말씀: 하용조 목사님
예수님이 돌아가시는 십자가 주변에는 어떤 사람이 있었나요?
십자가 주변에는 많은 사름들이 있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십자가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을 생각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먼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그리고 사두개인 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당시의 <종교지도자>입니다.
그들은 사회의 기득권층이고, 겉으로는 종교적인 미소를 짓고 있지만, 예수가 나타나면서 부터 불편했던 심기를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그런 이유는 믿음 때문에 그런것이 아니고, 자기의 권리와 인기를 예수한테 빼앗겼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두 번째 사람은 <가룟 유다>입니다.
그는 3년간 예수님을 따라 다닌 예수님의 제자 이면서도 예수님을 배반했어요.
그는 왜 배반했을까요?
그에게 사탄이 들어 갔기 때문입니다.
가룟 유다의 문제는 평소에 불평이 많아서 마귀가 그에게 들어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평소에 긍정적인 생각을 해야 해요.
마귀는 불평하는 사람이나, 응어리진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먼저 파고 들어 갑니다.
그는 마귀의 유혹을 받고, 예수를 팔아 넘길 생각을 하는 이중인격자입니다.
세 번째 사람은 <빌라도>입니다.
빌라도는 로마의 총독으로 지성인입니다.
이런 지성인도 정치적인 문제에 들어가면, 자기 주장을 포기하고 정치권력의 하수인이 되어,
여론과 권력앞에 흔들리게 됩니다.
그러나 법관의 양심으로는 “예수가 죄가 없다”고 3번씩이나 얘기 합니다.
빌라도가 예수에께 물었습니다.
“네가 유대 사람의 왕이냐?”(눅23:3) 예수는 당신이 지금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소!
빌라도는 나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런 죄목도 찾지 못하겠다. 이사람이 \\"백성을 선동한다\\"고 해서, 네게도 데려 왔다.
그러나 신문한 결과, 고소한 것과 같은 죄목을 찾지 못했다.
해롯도 역시 죄목을 찾을수 없어 그를 다시 돌려 보냈다. 이 사람은 사형당할 만한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
그러니 나는 이사람을 매질이나 한후에 풀어 주겠다“(눅23:13~16)
네 번째 사람은 <백성들>입니다.
백성들은 언제나 무리를 지어 다니고, 함께 모여야 힘을 발휘 합니다.
그들은 문화 대혁명을 일으킬수도 있고, 위기에 처한 국가를 구할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때는 호산나라고 찬양을 부르면서 예수님을 환영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빌라도의 재판 때에는 “예수를 죽이라”고 소리 지릅니다.
그러자 백성들은 일제히 “그 사람을 없애시오! 그리고 우리에게 바라바를 풀어 주시오!“라며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빌라도는 백성들의 요구대로 폭동과 살인으로 감옥에 갇혀있는 바라바를 풀어주고, 예수는 그들의 뜻대로 십자가 형으
로 처형하기로 했습니다.
데모하는 군중가운데 브레인이 있어서 뒤에서 데모대를 조정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들은 데모대 뒤에는 음모를 꾸미는 사람이기에 그들은 사탄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들은 군중의 포효하는 소리로 인해서 겉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다섯 번째 사람은 구레네 사람<시몬>입니다.
26절을 보십시오
“로마 군인은 예수를 끌고 가다가 시골에서 올라오고 있던 구리네 사람 시몬을 붙잡아 십자가를 대신 지게하고,
예수를 뒤따라 가게 했습니다(눅23:26)
구리네 사람 <시몬>은 지구상에 예수가 죽기전에 마지막으로 십자가를 지고 간 사람입니다.
시골에서 올라와서 뭘 모르는 촌놈이 십자가 처형사건에 말려들어 로마 병정의 지시대로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고,
처형장까지 옮기는 사람이 됩니다.
그날 구레네 사람, <시몬>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더럽게 재수 없이 걸렸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그러나 사람은 때로는 자기가 원하지 않는 일이나, 유쾌하지 않은일도 할 때가 있지요.
성도여러분?
혹시 당신은 “다른 사람은 다 안하는데, 왜 내가 그일을 해야 합니까?” 라고 속으로 항의 하는 사람응 아니십니까?
특히 처음 교회에 오는 사람은 누구나 한번쯤그런 불평을 하게 되지요.
그러나 결국 누군가 그 일을 감당 해야만 해요.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옮기는데 도와 주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지나서 생각해 보면, 시몬의 이런 행동은 “얼마나 귀하고 가치 있는 일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합니다.
아내들이여! 가끔 이런 생각을 하지요.
“내가 왜 이 남자하고 살아야 하는지?\\"에 관해 의문을 가질 때가 있지요?
그런 불평하지 마세요. 그냥 사세요.
그것이 당신의 운명이니까요.
여섯 번째 사람은 <슬피우는 여자들> 이예요.
27절~28절을 보세요.
“많은 사람들과 여자들이 큰 무리를 이루어 예수를 따라 갔습니다. 여자들은 예수에 대해 슬피울며 통곡 했습니다.
예수는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로 인해 울지말고, 너희 자신과 너희 자녀들을 위해 울어라>“(눅23:27~28)
예수님은 슬피우는 여자들의 흐느끼는 소리를 들으면서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와 네 자녀를 위해 울어라“고 말씀하십
니다.
일곱 번째 사람은 예수님 옆의 <두 강도>입니다.
“죄수들인 다른 두 사람도 사형을 받기위해 예수와 함께 끌려 갔습니다. 해골이라는 곳에 이르자,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두 죄수도 하나는 그 오른쪽에, 하나는 그 왼쪽에 못 박았습니다“(눅23:32~33)
드디어 예수님은 골고다 언덕의 해골이라는 곳에서 처형 받게 됩니다.
예수님의 옆에는 두 강도가 있어요.
한 강도는 <구원 받을 강도>이고, 또 한 사람은 <구원 받지 못할 강도>입니다.
32절을 보세요
“십자가에 달린 죄수중 하나가 예수를 모독하며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그러면 너와 우리를 구원해 보이라“
너도 똑같은 십자가 처형을 받고 있으면서 하나님이 두렵지도 않느냐?“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저지른
짓이 있으니 마땅히 벌을 받을 것이지만, 이분은 잘 못한 일이 아무것도 없다“(눅23:39~41)
<구원 받지 못할 강도>는 끝까지 예수를 받아 드리지 않고, 예수를 모독 합니다.
그리고 “네가 예수냐?”라고 조롱합니다.
그러나 <구원 받을 강도>는 옆의 강도의 얘기에 동의하지 않고, 먼저 자기를 회개를 합니다.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면, 구원이 시작됩니다.
그는 그 순간에도 “예수는 죄가 없다”고 인정합니다.
그리고 42절과 같이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눅23:42)
예수님의 대답은 “내가 진실로 네게 말한다, 오늘 네가 나와 함게 낙원에 있을것이다” (눅23:43)
그날 정오 쯤, 어둠이 온땅을 뒤덮고 해가 빛을 잃었고, 성전의 휘장 한가운데가 찢어 졌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여 제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맡깁니다”라고 말씀하시고 숨을 거두셨습니다.
여덟번 째 사람은 <백부장>입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또 한분을 준비 하셨습니다.
그분은 로마장교 <백부장>입니다.
그 백부장을 통해서 예수님의 장례식이 진행됩니다.
죽음은 슬픈 일이지만, 믿음의 사람들은 그 슬픔을 축복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는 슬픈 장례식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죽은 죽음으로 승화 시켜야 합니다.
죽음이 왜 축복인지 아세요?
사람은 죽음으로 육신의 옷을 벗게 되는 것입니다.
죽음이 오지 않으면, 육신의 옷을 벗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우리에게 죽음이 없다면, 늙어서 움직일 수 없는 나이가 되면 우리가 어떻게 되겠어요?
그래서 죽음은 축복이 되는 거예요.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성도의 죽음 을 슬프게 생각하지 말고, 축복으로 받아 드리세요.
그래서 우리교회에서는 장례식을 [천국 환송예배]라고 부르며, 기독교는 축제일로 생각하는 거예요.
아들이 죽었을 때에 어떤 사람은 이렇게 표현했어요.
\\"내 아들은 죽은게 아니고, 내 믿음의 동지 한사람 갔어요” 라고 표현 했는데, 여러분은 그 말이 어떠세요?
여러분들도 그렇게 죽음을 축복으로 바꾸는 지혜로움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고난의 종> 이사야 52:13~15, 53:1~3, 말씀:하용조 목사님
성탄절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나 믿지 않는 사람들이나 모두 다 좋아합니다.
그래서 성탄절이 가까이 오면 사람들은 <축제> 분위기에 쌓입니다.
요즘은 우리가 근무하는 사무실이나 백화점 주변에서 또는 길거리에서도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쌓여서 트리를 만들고 여러 장식을 걸고 있지만, 예수님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습니다.
성탄절의 주인공은 산타크로스가 아니고, 예수님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주인공인 예수님은 잊어 버리고, 싼타만 만들고 찾고 있어요.
요즘에는 <성탄 휴가>까지 생겨서 23일부터 25일까지 3일간 스트레스에 쌓인 시민들은 <황금 연휴를 떠난다>고 합니다.
과연 성탄은 우리가 이렇게 놀고 즐겨야 하는 축제일 인가요?
<성탄>은 하늘보좌를 과감히 버리고, 인간을 구하기 위하여 사람의 몸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희생정신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태어날 때부터 고난 받기위해 태어났고, 그의 삶은 죽기위해 태어났습니다.
그럼, 진정한 <성탄>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진정한 성탄의 첫 번째 의미는 <자기 비움>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우리의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비움>이 있어야, <채움>도 있습니다.
비우지 않고는 채울 수가 없습니다.
진정한 성탄의 두 번째 의미는 <자기 포기>입니다.
<자기 포기> 즉, 자기 몸을 낮추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그 하늘 보좌의 높은 지위를 스스로 포기하고, 낮고 낮은 이 세상에
인간의 몸으로 스스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진정한 성탄의 의미를 알고 성탄을 맞이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요즘 공부하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도 성탄의 의미와 그 내용이 같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포로가 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희망의 메시지와 회복의 메시지를 줍니다.
나는 이렇게 <교회가 세상의 희망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과 같이 이사야 선지자는 스스로 <고난의 종>이라고 말씀하는 것과 같이,
우리를 구원하신 메시아는 다음과 같은 사람입니다.
이사야 42:1~9절을 보십시오.
“내가 붙잡아 세운 내 종을 보라. 내가 뽑았고 내가 기뻐하는 내 종을 보라. 내가 내 영을 그에게 불어 넣었으니, 그가 그 민족들에게 공의를 가져다 줄 것이다”(사42:1)
“그는 소리치거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거리에서는 목소리를 내지 않을 것이다.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불길이 약해진 심지를 끄지 않을 것이다.
그는 성실히 공의를 베풀고, 그가 세상에 공의를 세울 때까지 마음이 약해지지 않고,
마음이 상하지 않을 것이다”(사42:2~4)
“하늘을 만들어 펼치시고 땅과 거기서 생겨난 것들을 퍼뜨리시며, 땅 위에 사는 사람들에게 숨을 주시고, 땅 위를 걸어 다니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 여호와가 정의를 이루려고 너를 불렀다. 내가 네 손을 잡고 지켜 줄 것이니, 너는 백성의 언약이 되고, 이방의 빛이 되며”(사42:5~6)
“나는 여호와 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나는 내가 받을 영광을 다른이에게 주지 않고, 내가 받을 찬송을 우상들에게 주지 않겠다. 보라! 전에 말한 일들은 다 이뤄졌다. 이제 내가 새로 일어날 일들을 알려 주겠다. 그 일들이 시작되기도 내가 너희에게 말해주겠다(사42:8~9)
이상 이사야 42장 1~9절에서 얘기하는 <메시아의 종>의 노래에 깊은 감동을 받습니다.
여기 42장에 나타난 메시지는 그냥 읽어만 보아도 메시아가 <하나님의 종>이라는 이미지가 그려집니다.
그럼, 여호와의 <종>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첫째, 메시아는 고난을 겪습니다.
그래서 메시아를 <고난의 종>이라고 얘기합니다.
<하나님의 종>이 고난을 겪을 때에 의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종>은 고난을 겪어야 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메시아는 고난을 겪어야 합니다.
그래야 온 인류를 구원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 메시아는 탄생에서 죽음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예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의 탄생에서부터 어린시절, 그리고 그가 고난 받는 내용과 죽는 방법까지도 구약의 여러곳에 구체적으로 이미 <예언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탄생으로 신약이 시작되지만, 그 이전에 쓰여진 구약에 <구체적으로 언급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세상에 성인과 성자가 여러사람이 있지만, 어떤 사람도 예수님과 같이 미리 예언되어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메시아인 예수님은 철저하게 예언된 대로 태어났습니다.
빌립보서 2장 6~11절을 보십시오.
”그 분은 본래 하나님의 본체셨으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기득권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신을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진 사람의 모양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자신을 낮춰,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입니다.(빌2:6~8)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이는 하늘과 땅과 무릎을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하셔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려는 것입니다.”(빌2:9~11)
이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셋째, 메시아는 그 당시, 그 당대에는 인기가 없었습니다.
이사야 52장 13절~15절을 보십시오.
“보라! 내 종이 잘 될 것이다. 그가 높아지고, 존귀하게 될 것이다. 전에는 그의 몰골이 사람이라 할 수 없을 만큼 엉망이고, 그의 풍채도 사람의 모습이 아니어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보고 놀랐지만, 이제는 왕들이 지금껏 아무도 말해 주지 않은것을 보고 아무에게도 들어보지 못한 것을 깨달아서 많은 나라들이 그를 보고 물을 끼얹듯 놀라고, 왕들이 그 앞에서 입을 다물 것이다.(사 52:13~15)
메시아는 고난을 겪었지만, 결론은 <형통함>이었습니다.
여기서 ”형통하다“는 것은 <승리>를 뜻합니다.
즉 메시아는 고난도 겪었지만, 마지막 결론은 그가 드높아 지고, 존귀하게 되어서, 결국은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메시아가 세상에 왔을 때에는 그의 몰골이 너무나 참혹하여 사람이라 할 수 없을 만큼 엉망이었고, 그의 풍채도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다>라고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했습니다.
그는 마치 끌려 다니는 짐승처럼 수모를 당했어요.
우리들이 이미 본 영화 <실미도>나 <삼청 교육대>의 모습을 통해서 본 것은 인간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비 인간적인 모습>입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비 인격적인 대우를 받는 모습을 최근에 상영된 \\"The Passion of the Christ \\"라는 영화에서 잘 보았습니다.
이사야 53장 1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들은 이 소식을 누가 곧바로 믿겠습니까? 여호와께서 그 분의 팔을 누구에게 드러내셨느냐? (사53:1)
메시아의 운명은 사람들이 믿지 않는데서 부터 시작됩니다.
성도여러분?
믿지 못하면 비극이 생겨요.
남녀가 아무리 사랑을 해도, 서로 믿지를 못하면 결국 비극적으로 헤어지게 됩니다.
네번째로, 메시아의 모습은 어땠습니까?
메시아는 연한 <순>과 같이 어린 <싹>과 같습니다.
메마른 땅을 뚫고 나온 어린 <싹>은 볼품이 없습니다.
이사야 53장 2절을 보세요.
“그는 주 앞에서 마치 새싹과 같이 , 메마른 땅을 뚫고 나온 새싹과 같이 자라났다.
그는 수려한 풍채도 없고. 화려한 위엄도 없으니 우리가 보기에 볼 품이 없었다”(사53:2~3)
메시아는 “메마른 땅을 뚫고 나오는 연한 <새싹>과 같습니다.
그런 <새싹>은 화려한 풍채도 없고, 근엄한 위엄도 없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아무리 짖밟아도 또 솟아 오르고, 아무리 없애고 또 없애도 또다시 나오는 <새싹>과 같은 존재예요.
그 분이 예수님입니다.
제가 아는 남미에 근무하는 김준태 선교사님을 소개합니다.
그는 남아메리카 아오카족에 뛰어 들어가서 산골짜기를 헤메며 Q.T를 전파해요.
자기가 받는 봉급으로 Q,T를 스페니쉬로 번역하여, 그것을 책자로 만들어 남미 곳곳에 나눠 줍니다.
저는 이 사람을 보면서 큰 충격을 받았어요.
그는 목사도 아닌 <평신도>로써 코이카에 근무하면서 자기의 사역을 스스로 감당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아무리 사람들이 그 일을 못하게 말려도 그는 그 일을 해요.
그는 자기가 좋아서 하는 그 사역을 <누가 뭐라고 해도>, 도저히 멈출 수가 없는 것입니다.
메시아는 광야에서 자라나는 이런 <새싹>과 같은 거예요.
다섯 번째로, 메시아는 멸시와 조롱을 받아요.
그러면서 무시 당하고 버림 받아요.
이사야 53장 3절을 보세요.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버림을 받았을 뿐 아니라. 고통을 겪었고, 언제나 병을 앓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를 보고서 얼굴을 가릴만큼 그는 멸시를 당했으니, 우리마저도 그를 무시해 버렸다”(사53:3)
우리가 살면서 제일 못견디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람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화가 치밀어 오르고, 분노가 쌓이는 것은 <사람을 멸시하고, 무시당할 때>입니다.
메시아에게 고통은 참을 수 있어요.
그러나 그 고통은 <이유있는 고통> 이어야 합니다.
<나는 하지도 않았는데, 누명을 씌우고 그랬다>고 매도를 당할 때에 사람은 참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3절을 보면, 메시아는 언제나 <병을 앓고 있었다>고 합니다.
저는 이 대목이 눈에 번쩍 들어 옵니다.
제가 병을 달고 다녔으므로 이 말씀에 위로를 받습니다.
성도여러분?
여러분들이 주님의 일을 하다가 무시를 당하거나, 병을 앓았을 때,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그럴 때는 이렇게 생각하세요.
<나도 메시아적인 요소가 있구나>라고....생각하세요..
그런 위대한 고난을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럴 때에 상처를 받지 말고, 예수님을 생각하세요.
<우리의 예수님도 그렇게 살았다>는 생각을 하면서 마음을 가라 앉히세요.
<예수님도 그러셨는데.......>
그래야 내 마음에 평화가 오고, 사랑이 생기기 시작해요.
오늘 여러분들에게 그런 마음이 생기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혹시 여러분은 과거의 상처 때문에 고민하십니까?
혹시 억울한 누명을 쓰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을 생각하고, 그것을 억누르고 잊어 버리세요.
메시아인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우리를 위해 이런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는 고난을 당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고, 세상에 와서도 그는 조롱 당했고, 끝내는 우리를 위하여 죄없이 돌아 가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예수님을 상상하면서 세상의 어려움을 당할 때 슬기롭게 극복하시기 바랍니다
<고난의 종 2 > 이사야 53:4~12, 말씀: 하용조 목사님
오늘은 <고난의 종>의 두번째 시간으로 메시아에 대해 더 자세히 말씀드리려 합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여호와의 종>을 준비시켜서 예수님을 이땅에 보내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자신이 직접 <인간 예수>가 되어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성탄>이라 말하고, 그를 가리켜 <메시아>라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그런 <메시아>를 환영 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거부감을 갖고서 그를 죽이기 까지 했습니다.
그럼 그렇게 메시아를 거부하는 이유가 뭡니까?
그것은 메시가가 허물이 있거나 잘못된 것이 아니고, 그 정반대로 <인간이 죄를 지어 그 마음이 어두워졌으므로> 그 죄
가 드러날까봐 거부하는 것입니다.
빛이 오면, 어두움은 물러나게 되고, 죄가 확연히 드러나듯이 <인간은 자기의 죄가 드러날까봐>
그렇게 철저히 거부한 것입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버림을 받았을 뿐아니라, 고통을 겪었고, 언제나 병을 앓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를 보
고 얼굴을 가릴만큼 그는 멸시를 당했으니, 우리 마저도 그를 무시해 버렸다“(사 53:3)
여기를 보면 멸시와 버림과 고통을 당하는 메시아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또 그는 언제나 병을 앓고 있었고, <얼굴을 가릴만큼 무시를 당했다>고 했어요.
우리나라 옛말에 “발의 때 만도 못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메시아를 <발의 때 만도 못하게 여기고> 멸시하고 무시해 버렸습니다.
그럼, 메시아가 그런 대우를 받을 만큼 잘못을 했나요?
그렇지 않아요.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그럼, 그는 누구를 위하여 그런 대우를 받았을까요?
그는 <우리> 때문에 그런 곤욕을 당한 겁니다.
그것을 설명해 주는 말씀이 4절에 나옵니다..
“그러나 사실 그가 짊어진 병은 <우리의 병>이었고, 그가 짊어진 아픔은 우리의 아픔이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가 <맞
을 짓>을 해서 하나님께서 그를 때리시고, <고난을 주신다>고 생각했다“(사 53:4)
4절에서 진실은 무엇입니까?
<사실>이라는 말은 <진실>을 의미합니다.
메시아가 <맞을 짓>을 해서 그런 엄청난 고난(=십자가형)을 당한 것입니까?
이사야 선지자는 <그렇지 않다>고 얘기합니다.
그가 <짊어진 병>은 무엇입니까?
그가 <짊어진 병>은 우리의 <병>이었고, 그가 <짊어진 아픔>은 우리의 <아픔>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2가지 단어가 나옵니다.
<짊어진 병>과 <짊어진 아픔>입니다.
어떤 여인이 남편에게 사집을 갔는데, 그 때부터 벌어지는 모든 문제는 모두 다 <그 여자가 시집을 잘못와서 생긴 일>이
라고 <그 여자 때문이라>고 몰아 세웁니다.
그 여인과 관계가 없는 일이 벌어져도 <그 여자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뒤집어 씌웁니다.
<네가 우리집에 잘못 들어와서 생긴 일>이라고 모든 것을 다 뒤집어 씌우면, 그 며느리는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오늘의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온 인류가 지어야 할 죽음의 병, 저주의 병을 <예수님이 대신 짊어 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병의 이동>을 뜻합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예수님이 죽는 순간에 그 때부터 <고난이 이동되었다>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이렇게 한번 기도해 보세요.
“주님! 내가 사랑하는 자식이 매우 아픔니다. 차라리 나를 죽여 주시고, 저 아이을 살려 주세요”
그러면 그 순간부터 그 아이는 치료가 되고, 내가 그병에 걸리게 돼요.
이것은 대속적인 의미에서 <병의 이동>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4절에서 예수님이 [우리의 고통과 아픔을 짊어 졌다]고 했어요.
어두움의 세력들이 만들은 <우리들의 병>을 [예수님이 짊어졌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에게 옮겨 졌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이 <대속의 개념>입니다.
그럼, <대속의 의미>가 뭡니까?
예수님이 우리들을 사랑해서 그 아픔을 대신 아파하고 그런 수모를 겪은 거예요.
이것이 대속의 개념입니다.
<대속>과 <구속>은 같은말 이므로, 그래서 <우리를 구속했다>고 하는 겁니다.
이렇게 우리를 구속하는 이유는 <우리들을 사랑했기 때문>이고,
그렇게 대속(구속)하는 이유는 예수님의 사랑과 연관이 있어요.
그래서 이유없이 예수님이 그것을 담당하고, 그 죄를 대신 뒤집어 쓰고 겪는 거예요.
죄는 누군가 그 <죄의 값>을 치러야 그 죄가 없어져요.
죄는 <시간이 지나간다>고 죄가 없어지지 않아요.
죄는 <시간이 흐른다>고 해결되지 않아요.
죄는 반드시 회개를 하고, 누군가 <죄의 값>을 지불해야(= 감당해야) 없어지는 거예요.
그런 우리들의 죄의 문제를 해결한 사람이 바로 예수님 이예요.
어떤 사람은 <죄를 짓고도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을 해요.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예요.
죄는 당장 드러나지는 않지만, 그것이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정확히 말하면 죄가 해결되지 않고, 그냥 쌓여 있는 거예요.
예루살렘에서 십자가 처형을 보고있는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우리는 연극이나 영화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나요?
나의 교양과 의지를 감추어서 그렇지, 나도 예수님 처형 당시의 사람들과 똑같아요.
나도 죄의 욕망과 미움이 내안에 있기 때문에 나의 허물을 남에게 뒤집어 씌우게 돼요.
인간은 역시 나의 잘못된 편견으로 나의 죄를 남에게 덮어 씌워요.
인간은 죄를 지으면서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그 죄를 넘기고 희생양으로 삼으려고 해요.
그래서 누군가에게 죄를 몽땅 다 덮어 씌우고, 그를 감옥으로 보내면서 긴 한숨을 몰아 쉽니다.
아마도 메시아에게 그 당시의 로마인들은 그렇게 했을 꺼예요.
5절을 보세요.
“그러나 사실은 우리의 허물이 그를 찔렀고, 우리의 악함이 그를 짓뭉갰다. 그가 책망을 받아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아서 우리의 병은 나은 것이다(사53:5)
사실은 <우리들의 죄 때문에> 그가 찔림을 당하고 상처를 입었고,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게 되었
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The passion of The christ \\"라는 영화를 보려고 팝콘과 콜라를 사들고 들어간 사람이 예수님의 짓밟히는 처절한 모습을
보면서 <한모금도 마시지 못했다>고 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십자가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첫째, 십자가상의 예수가 보여야 하고
둘째, 한참을 쳐다보다 보면 내죄가 그 십자가 걸려있는 모습이 보여야 해요.
이것은 내가 지은 더러운 죄가 용서 받으려면,
예수님의 십자가에 걸려있는 <자기 모습>이 보여야 해요.
이것은 십자가에 내죄가 이동된 것으로, 그것이 <대속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겁니다.
5절에서 예수가 <짊어진 병>이 예수의 것이 아니고, 내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 고통 때문에 비참하던 나의 모습이 내안에서 떠나게 되어,
결국은 <나에게 평화가 온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내 마음에 평화가 오는 것이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내 병이 치유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크리스찬이 십자가를 보고 있으면 눈물이 나와야 해요.
그것은 내 상처가 십자가로 이동 되었기 때문이지요.
그것은 우리의 슬픔을 예수님이 짊어졌기 때문이고,
결국 내 슬픔은 <예수님에게 이동한 것>이기 때문이지요.
나는 오늘 아침에 이 놀라운 메시지가 성도 여러분의 마음속에 새겨지고,
그것이 현실로 나타나길 바랍니다.
6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제 각각 자기 길로 흩어져 가 버렸지만,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
시고, 그를 공격하셨다“(사53:6)
하나님은 이런 메시아를 공격했어요.
그것은 메시아에게 모든 것을 뒤집어 씌웠기 때문이지요.
왜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모든 것을 뒤집어 씌웠을까요?
그것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입니다.
이것이 십자가 사건이고,
이것이 구원입니다.
이것이 대속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몰고 갔을 때 메시아는 어떻게 했어요?
예수님은 \\"억울하다\\"고 했을까요?
예수님은 \\"분하다\\"고 항의 했을까요?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아요.
그럼 예수님은 어떻게 했을까요? 이사야 53장 7-8절에 해답이 있어요.
“그는 학대받고 괴롭힘을 받았지만, 입을 열지 않았다.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마치 털을 깎이는 잠잠한
어미양 처럼,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사53:7)
“그는 강제로 끌려가 재판을 받고 처형을 받았지만, 땅에서 그의 생명이 끊어지는 것을 보고서 그가 당한는 것은 <내 백
성의 죄악 때문이라>고 중얼거리기 라도 한사람이 우리 세대 가운데 누가 있느냐?(사53:9)
여기에서 <고난받는 메시아>의 3가지 반응을 살펴 보겠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끝까지 침묵했어요.
그는 결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는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예수님은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행동했어요.
그리고 마치 털을 깍이는 어미양 처럼 행동 했어요.
요즘같이 데모하고, 소리지르고, 저항하며, 화염병을 던지지 않고, 예수님은 죄값을 치루며 운명으로 받아 드렸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교회에서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따질 것은 다 따지고, 할 말은 다 해요>.
그러니까 은혜가 없지요.
세 번째, 예수님은 폭행도 거짓말도 하지 않았어요.
이것은 <온유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고난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10절을 보세요.
“그러나 그가 병들어 으스러진 것은 여호와 께서 원하신 일이었다. 그가 그의 생명을 속 건제물로 내놓으면 그는 자손을
보면서 오래오래 살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원하신 일이 그의 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사53:10)
이것은 “자손의 축복이 있다”는 말입니다.
11절을 보세요.
“그는 고통에서 벗어나서 그가 알고 있었던 자신의 사명을 제대로 이뤄 냈음을 보고 만족할 것이다. 내 종이 많은 사람들
을 의롭게 할 것이다. 그는 많은 사람의 죄악을 스스로 짊어질 것이다“(사53:11)
메시아는 자기 사명을 다하며 의롭게 하는 분입니다.
메시아는 33세를 사시고, 사람들로부터 수모를 받으며, 무시를 당하다가 결국 처형 당했습니다.
메시아는 사람들의 죄를 짊어지고 죽었습니다.
그는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의롭게 살다 죽었어요.
이것이 구원의 축복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활안에서 이런 <메시아의 형상>이 나타나길 바랍니다.
성도여러분? 이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은 누구일까요?
예수님처럼 알면서도 속아주는 사람입니다.
말없이 침묵하고, 저항하지 않고, 묵묵히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모든 사람에게서 감동을 줄것입니다.
반대로 <할 말 다 하는 사람>은 무섭지 않습니다.
말없이 순종하며, 모든이에게 감동을 주는 원리는 <예수님의 사랑> 뿐입니다.
사랑만이 모든 것을 <해결하는 열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