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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궁극이
53편 4절-6절: 죄악을 행하는 자는 무지하뇨 저희가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하나님을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저희가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 크게 두려워하였으니 너를 대하여 진 친 저희의 뼈를 하나님이 흩으심이라 하나님이 저희를 버리신고로 네가 저희로 수치를 당케 하였도다 시온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줄 자 누구인고 하나님이 그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며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4절: ‘죄악을 행하는 자는 무지하뇨. 저희가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하나님을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다. 왜냐하면 심판을 받을 짓임에도 불구하고 교만하고 고집하여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떤 면에 죄악을 행하고 있다는 것이냐? 죄악을 행하는 것도 여러 가지다. 거짓말을 하면서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 것. 또 사람을 폭행을 하면서 죄를 짓는 것. 또 영의 눈을 가지고 보면 교회 안에서 성경을 가지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릇 가게 만드는 것. 이것도 죄악을 행하는 거다. 바리새교인들이 사람을 두들겨 패고 거짓말하고 사기 치는 것은 아니지만 영적인 면에서 하나님 앞에 죄악을 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죄라고 할 때 행동으로 육신적으로 사람에게 해코자 하는 것만을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런 건 안 믿는 사람도 다 아는 거다. 하나님의 백성의 입장에서는 눈으로 보이는 죄악에서 더 들어가 교훈적인 측면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죄를 볼 줄 알아야 한다.
‘저희가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하나님을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죄악을 행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떡 먹듯이 먹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 말은 하나님의 백성이 그렇게 맛이 좋다는 건데, 이 말의 뜻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순진하니까 악한 자들이 마음먹은 대로 사기를 쳐 먹을 수 있다는 뜻이다.
안 믿는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을 악하게 보느냐, 선하게 보느냐? 선하게 본다. 왜냐? 날마다 사랑을 부르짖고 웬만하면 용서해 주는 게 있기 때문이다. 악한 자들이 교인들의 이런 마음을 역이용해서 교인들로부터 이득을 취하려고 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것에 속으면 안 된다.
하나님의 백성은 신분이 높은 사람들이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 하나님의 백성으로 소속이 되어있는 신분이 높은 자들이다. 신분이 높은 일을 안 한다고 할지라도 명칭 호칭상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백성이요, 신령천국을 상속받을 자들이기 때문에 신분이 높은 백성들이다. 이처럼 신분이 높은 성도들을 가르친다면 세상 도덕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덕성, 하나님의 지혜지식성, 하나님의 능력성에 대해 가르쳐야 하고, 이런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이것을 모른 채 하나님의 백성을 가르친다고 달려든다면 얼마나 무지한 일이냐?
지금 세상을 가르치는 목사님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은 신분이 높은 자들이라고 하는 것을 인격적으로 알고 있느냐? 안다면 인격적으로 차원 높은 하나님의 도를 가르쳐야 한다. 말로는 신분이 높다고 하면서 성도들에게 세상을 가르친다면 실력적인 면에서 차원 높은 성도가 되지를 못한다. 이방세상에서도 자기가 아무 것도 모르면 다른 사람을 못 가르친다. 학교에서도 선생이 실력이 없어서 제대로 못 가르치면 쫓겨난다. 하물며 교회에서 자기가 성경을 모른다면 교인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겠다고 나서겠느냐?
세상학교에서는 세상 것, 육에 관한 것을 가르치고,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것, 신령한 것, 영에 관한 것을 가르친다. 애굽을 출발한 광야교회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 써먹을 영능의 실력을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에 닦는 거다. 교회에서 이건 없이 육에 관한 것을 소원 목적하고 가르치고 있다면 이는 무지한 자들이다. 그러면서도 교회와 세상으로부터 훌륭하고 유명하다는 소리를 듣는다고 해도 우리 입장에서는 이런 사람을 질적인 면에서 하나님 앞에 신분이 높은 사람으로 알아줄 수 없다.
교회에서 성경을 들고 세상 것을 가르친다면 무지한 자들이고, 무지한 자들은 죄악을 행하는 자들이다. 이런 자들에게는 조만간에 하나님의 심판이 떨어지는 것인데, 그럼에도 감히 하나님의 백성을 가르치겠느냐? 가르쳐봤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선이 아닌 헛된 노력만 고달프게 하도록 가르치게 된다.
하나님의 백성을 자기의 먹이로 삼는 자들이 누구냐? 무지한 자들이요, 죄악을 행하는 자들이요, 거짓 종들이다. 거짓 종들은 성경을 빙자하여 교인들을 자기 이익에 부려먹는다. 무슨 말인가 하니 이들이 말하기를 ‘주님을 사랑하는 증거가 무엇이냐? 몸 바치고, 물질 바치고, 시간 바쳐서 죽도록 충성봉사 하는 거다’ 이렇게 말을 한다. 이 말이 맞느냐, 틀리느냐? 우리는 이 말의 질을 심사해야 하고 목적을 심사해야 한다. 이 면은 보지 못한 채 단순히 보이는 것으로만 판단을 하면 안 된다.
이런 거짓 종들의 말에 빠지면 그들의 육을 위한 목적에, 또는 그들의 세상목적에 실컷 이용을 당하게 된다. 아무리 열심히 충성봉사를 해도 자기의 영적인 면에 영원한 유익이 없다면 망한 거다. 자타의 영적인 면에 아무 유익이 없는 곳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아무 것도 아니다. 목회도 그렇고, 교회에 몸 담아서 충성봉사를 하는 것도 그렇다.
주님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자기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거냐? 자기가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주님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거냐? 어느 거냐? 자기가 거짓 종 밑에서 열심히 충성봉사를 할 때 목사님을 위해 한다고 하느냐, 주님을 위해 한다고 하느냐? 주님을 위해 한다고 한다. 그러나 주님을 위해 한다고 하는 그 충성봉사를 누가 다 빨아먹는 거냐? 거짓 종이 다 빨아먹는다. 빨아먹는 증거가 뭐냐? 영적인 차원에서 자기에게 아무 것도 없으니까.
충성봉사를 해도 영적인 차원에서 자기에게 유익이 있어야 보람이 있는 건데 도둑놈 소굴에서 충성봉사를 하면 영적인 면에 유익이 있느냐? 없다. 국가법이 와서 잡아간다. 몰라서 그랬다? 말이 안 되는 거다. 거기에 관한 형벌을 피할 수 없는 거다.
애굽에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이 앉더니 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노예처럼 혹독하게 부려먹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백성의 노역을 착취해서 자기 나라의 부강만 취했다. 이게 육이다. 하나님의 백성을 부려먹으면 이게 죄인데, 아닌 말로 바로가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 일도 잘 하고, 이 백성들 때문에 애굽이 부강하게 되는구나’ 라고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먹을 것도 많이 주고, 땅도 많이 주고, 농사도 많이 짓게 해 준다고 할지라도 이스라엘 백성에게 노역을 시키는 게 죄다. 이스라엘이 주격이 되지 않고 소유격이 되면 죄가 되는 거다.
예수님 당시 때도 로마가 자기들의 부강을 위해서 성경을 가진 유대인들을 이용해 먹었다. 오늘날 마지막 시대의 교회는 겉으로 보기에는 부흥 같으나 사실은 세상이 교회 안에 들어와서 주인행세를 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교회가 예수님의 이름을 나타낸다고 하며 천국복지가 아니라 세상의 복지를 위한 일을 하고 있다. 이건 주님을 위한 충성이 아니라 세상 밑에 들어가서 세상을 위해 충성봉사를 하는 거다. 이건 하나님을 찾지도 않는 거고 부르지도 않는 거다. 하나님을 부른다고 하는 것이 세상이 요구하는 것을 들어달라는 세상소리뿐이다. 하나님의 제사장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중간에 서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것을 받게 하면서 백성의 것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인데 이게 아닌 세상을 위해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교회가 하나님과 세상의 중간에 서서 세상을 대표하고 세상을 위하는 쪽으로 제사장이 된 거다.
5절: ‘저희가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 크게 두려워하였으니 너를 대하여 진 친 저희의 뼈를 하나님이 흩으심이라. 하나님이 저희를 버리신고로 네가 저희로 수치를 당케 하였도다.’ ‘저희가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 크게 두려워하였으니.’ 악한 자들이 두려움이 없는 곳이 어디일까? 산 속이겠느냐, 땅 속이겠느냐, 물 속이겠느냐, 별나라로 올라가는 것이겠느냐?
이 세상에는 두려움이 없는 곳이 없다. 그런데 악한 자들이 두려움이 없는 곳에 있다고 하니 그곳이 어디일까? 도둑이 도둑질을 해서 제일 숨기 좋은 곳이 어디이겠느냐? 예배당 안이다. 예배당 안에서도 예배를 드리는 교인들 틈에 앉아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하고 있으면 누가 보더라도 성인군자로 보이지 도둑으로 보이겠느냐? 더 나아가서 강대상 뒤에 엎드려서 기도를 하고 있으면 마치 예수님처럼 보일 거다.
일반적으로 악한 자들이 제일 숨기 좋은 곳이 어디냐? 산 속 기도원이다. 그런데 우리가 욥기에 보면 사단이 어느 가운데 섰느냐? 하나님의 아들들 가운데 섰다. 하나님은 보지 않아도 척 아시지만 하나님의 아들들은 사단이 자신들 가운데 서 있는 것을 모르는구나. 우리들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말해주는 거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관할, 이 모임 안에 도엑과 같은 사람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거고, 도엑의 성질을 가진 육이 주격이 된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 안에서 얼마든지 주도권을 잡고, 교권을 잡고 세도를 부리기도 하는 거다. 사울 왕이 그랬고 도엑이 그랬다. 하나님의 백성 안에서 서로가 주격이 되어서 하나님의 백성 앞에서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고 이용을 당하면서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혔다.
신앙적인 면으로 볼 때 성도가 두려움이 없는 곳은 하나님의 보호를 입는 장소다.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있는 곳. 또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곳. 또 교회의 회중이 있는 곳. 그리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예배의 곳이다. 그런데 죄악을 행하는 자들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곳에서 왜 두려워할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은 기쁜 장소인데 이들이 이곳에서 왜 두려워할까?
‘너를 대하여 진 친 저희의 뼈를 하나님이 흩으심이라. 하나님이 저희를 버리신고로 네가 저희로 수치를 당케 하였도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 가운데서 악행을 하던 자들의 뼈를 흩으셨고, 저희를 버리셨기 때문에 수치를 당하게 되어서 두려워한 거다.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있으면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지는 혜택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을 찾지 않았고,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을 부려먹었으니 하나님께서 이런 자들을 가만 두시겠느냐?
예수 잘 믿으라고 그만큼 봐주고, 용서해주고, 좋은 말을 했는데도 하나님의 백성들을 부려먹고 이용해 먹는다? 이건 안 된다. 내쫓아야 한다. 이런 일이 일반사람들 속에서는 있을 수도 있고, 있는 일이지만 하나님의 집에서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가 신앙의 본질을 알면 이런 게 보이는 거다. 이런 자가 보이면 내쫓아야 한다.
교인인데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목회자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역으로 이용해 먹는 자다. 그러니 이에 대한 벌이 어떻겠느냐? 사랑의 세계에서는 교회 안에서 이런 짓을 한다고 해서 감옥 속에 집어넣는 건 없지만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수 있도록 하나님의 주권역인 역사의 훈련을 받을 수밖에 없구나’ 이게 들어가야 한다.
우리 같으면 은혜를 받았으면 감사해 하며 더 잘 하려고 하지 않겠느냐?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을 역이용해먹고, 더 나아가 하나님과 성도들에게 욕을 하면 어떻게 될까? 우리가 이걸 알아야 한다. 예수를 믿고 안 믿고 간에 사람이 표독스러우면 반드시 결과가 좋지 못하다. 이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역이용하면 신앙적인 면에서 그 결과가 어떻다는 것을 일반계시로 보여주는 거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고도 하나님의 사랑을 역이용하여 세상위주로 되어있다면 이런 사람은 내보내서 세상에게 다시 한 번 밟혀봐야 한다. 깨닫게 하려면 그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 옳은 신앙을 깨닫게 되면 회개하고 돌아오는 거다. 이게 옳은 거다. 그런데 이럴 때 다른 교회로 간다? 그곳에서도 고치지 못하면 마찬가지의 취급을 당하게 된다. 설령 다른 교회로 가더라도 진리의 교회를 찾아가서 잘못된 마음을 다 회개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은복을 받는 거다. 그렇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괴로움이 떠나지 않는다.
하나님을 한 번 떠나면 다시 돌아오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마음이 화인을 맞아서 그런 상태로 덤덤하게 되어버린다. 이럴 때는 그 마음이 더 굳어지기 전에 빨리 내보내서 빨리 얻어맞게 해서 하나님께 다시 돌아오게 하는 것이 옳은 교훈이다. 빨리 고치도록 하지는 않고 ‘오냐, 오냐’ 하며 어르고 있으면 어찌 될까? 이 사람 속에 자기 주관성이 더 커져서 완전히 사람이 망가져 버린다.
예수님께서도 당시의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것을 둘러엎어 버렸듯이 지금의 우리 속에 그 성격, 그 성질, 그 요소가 들어있으면 자기를 둘러엎어야 한다. 옳은 종이라면 교인들에게 이런 게 보이면 그 마음을 둘러엎어야 한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예수님의 지적에도 외식적인 신앙을 고치지 못했고, 그로 인해 그들은 역사적 재앙을 받았다. 우리도 고치지 않으면 마찬가지로 재앙을 받게 된다.
‘너를 대하여 진 친 저희의 뼈를 하나님이 흩으심이라. 하나님이 저희를 버리신고로 네가 저희로 수치를 당케 하였도다.’ 뼈는 그 사람의 골격이듯이 악한 자들은 모든 면에서 일사분란하게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조직이 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버리시고 흩어버렸다고 한다. 흩어버리면 무슨 힘이 있겠느냐?
흩어버리는 방법도 여러 가지다. 그 중에 하나의 방법은 서로가 의사충돌이 되게 하면 그 단체는 와해되고 만다. 니므롯이 성을 쌓다가 이 일을 만나서 흩어지고 말았다. 우리 입장에서 그 때로 돌아가서 성을 쌓는다면 하나님의 단일성으로 올라가야 한다. 이렇게 되면 ‘인간의 힘을 높이 날리세’ 이런 일이 왜 생기겠느냐?
하나님의 선민이 거하는 축복받을 장소로 들어왔으면 하나님을 바로 찾아 참 사람이 되어야 할 텐데 그러지 않고 간사하여 모든 권세를 잡고 교만하고 방자히 날뛰고 있을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은 진리의 성도가 도리어 그들을 제압을 했으니 그들이 얼마나 두려워했겠느냐? 사람은 무슨 일이던 ‘내 뜻대로 되는구나’ 하며 안심을 하다가 생각지도 않게 판세가 뒤집어져 버리면 두려워지는 법이다.
교회에서는 성도가 진리로 자랄 수 있도록 사람을 위하고 사람을 살펴야 하는 건데 그러지 않고 목사 자기의 세상목적을 위해 이용해먹는 쪽으로 들어가면 이 목사는 도둑이고, 이런 목사의 속은 언젠가는 드러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을 높이겠다고 하며 사람을 괴롭히면 안 된다. 말씀으로 잘 깨우쳐서 자원적으로 될 때까지 인도를 하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겠느냐? 이건 없이 명령을 해서 강제적으로 일을 시킨다면 일은 빨리 성취될 수도 있겠지만 사람을 만드는 것은 강제로 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 자원으로라야 되는 거다. ‘자원’이라는 말 속에는 먼저 자기를 살피고 다각적인 면으로 다른 사람을 살피면서 자타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면으로 언행심사가 나가야 한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이에 대한 예가 될 런지 모르겠지만 아이를 기르면서 부모의 성격이 모가 나면 부모의 그 성격이 아이에게 그대로 들어간다. 그러면 부모가 아이의 그 성질을 그대로 보고 있느냐? 말을 안 듣는다고 두들겨 팬다. 그러나 알고 보면 아이가 부모의 말을 안 듣듯이 부모도 하나님의 말을 안 듣는 것이 부모의 속에 들어있는 거다. 그러니 먼저 하나님 앞에 부모부터 심사를 하라. ‘아, 내 속에도 아이가 가진 성질이 들어있구나’ 하는 걸 깨닫고 예수님의 지혜롭고 따뜻한 마음으로 아이에게 교육이 들어간다면 그 아이가 안 고쳐질까?
6절: ‘시온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줄 자 누구인고. 하나님이 그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며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시온에서 되어진 역사가 많지만 대강 살펴보면 다윗이 여부스 족속에게서 빼앗은 요새이고, 성전을 지은 곳이고, 여호와의 거하시는 시온산이고, 하나님의 영적 왕국을 상징하기도 한다. 이 외에도 많이 있지만 생략하고, 여기서 시온산을 말하는 것은 ‘누가 시온산으로 먼저 올라가서 이스라엘을 구하겠느냐’ 이 말이다.
쉽게 생각해서 이스라엘을 구하려면 어디로 가야 하느냐? 이스라엘 백성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시온산으로 먼저 올라가라고 한다. 이게 무슨 뜻이냐? 이 말의 또 다른 의미는 이미 먼저 올라가 계신 분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인간을 향해서 자랑스럽게 하는 말이기도 한다. 즉 누군가가 먼저 시온의 봉우리로, 즉 도의 봉우리로 올라가야 이스라엘을 구할 수 있다는 말이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없고 눈 뜬 자라야 소경을 인도한다. 모두가 소경이면 인도자가 없으니까 다 구덩이로 빠져버린다.
그러면 정상봉에 계신 분이 누구냐?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가 누구냐? 오직 예수 그리스도시다. 죄와 사망을 이기신 분, 사단과 마귀를 정복하신 분, 아가페로, 자원적 능동적으로 당신의 백성을 죄에서 해방시키신 분,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라고 하신 당신의 백성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시다. 이 분이 시온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한 분이다. 모든 영적 이스라엘이 이 분을 기뻐한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보면 이 분의 능력을 수동적으로 받아서 신정통치를 한 다윗을 볼 수 있다. 그래서 다윗이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거다.
‘하나님이 그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며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이스라엘 조상 중에 이스라엘 백성이 죄의 종노릇하는 것을 기뻐하는 조상이 있겠느냐? ‘이스라엘’이란 야곱의 개칭된 이름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이란 ‘하나님이 다스릴 것이다’ 라는 뜻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야 할 이스라엘이 죄의 종노릇을 한다거나 민족적 종노릇을 한다면 조상의 입장에서 그것이 보기가 좋겠느냐?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누구든지 자기가 진리통치를 받는 자유를 원할 거다. 이스라엘 백성이 죄의 종이 되어서 배가 터지게 먹고 사는 것보다 진리통치를 받는 자유가 얼마나 좋으냐? 죄에 매이는 걸 기뻐하는 사람이 있느냐? 다 진리로 자유하는 것을 기뻐한다. 성도가 시온사상으로 올라가면 구원이 있는 건데 기쁨은 여기서 오는 거다. 영적 이스라엘의 기쁨은 여기서 온다.
그렇다면 현재 자기는 무엇을 기뻐하고 있느냐? 자기의 기쁨이 어디서 오느냐? 말씀의 이치에서 기쁨이 와야 한다. 자기의 구원이 어디 있느냐? 바로 거기에 있다. 교회를 통치하고 인도하는 목사님의 세계에서도 도의 봉우리로 올라가야 영적 이스라엘이 구원이 된다. 구할 수 있다. 말씀으로 죄에서 자유로, 저질에서 높은 곳으로, 선악과 따먹은 차원에서 생명과를 따먹는 차원으로 올라간다. 이게 다 구원이다. 주님이 이 일을 하셨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