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나리를 바라보면 참새가 떠오른다. 나뭇가지에 올망졸망 피어 있는 그 개나리는 마치 노랗게 지저귀는 참새와 같다. 개나리를 보면서 참새처럼 재잘거리는 모습을 보았다면 그것은 김현승의 <아버지>라는 시를 읽었기 때문이거나 혹은 내가 아버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세상이 단순히 달라져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무언가 변화가 있었기 때문에 보이는 세상이 달라진다. 세상과 나는 조우한다. 어제까지는 관심도 끌지 않던 풀 한 포기가 오늘 문득 내 눈에 들어왔다면 나에게 무슨 변화가 생긴 것이다. 세상이 그 전과는 달리 새롭게 보인다.
우리는 나무를 통해서 우주 끝까지 여행을 할 수 있다. 나무는 상상력의 원천 가운데 하나로 우리는 나무에 올라 하늘 끝에 닿을 수도 있고, 나무뿌리를 통해 땅속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 우리는 나무와 서로 이어져 있음을 알 수도 있고(아바타), 나무가 꿋꿋하게 서 있는 모습에서 의지를 발견할 수도 있다. 나무에는 많은 상징이 담겨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언제 어떻게 발견하느냐 하는 점이다. 우리가 무언가 아이디어를 찾을 때 전혀 새롭게 해석되지 않는 관념 속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익숙한 모습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을 만나지 않으면 우리는 단 한 걸음도 새로운 것을 찾을 수 없다.
-<콕 집어 알려주는 달인의 글쓰기>에서
[단숨에 쓰는 나의 한마디]
글쓰기는 새로운 발견이다. 무심했던 것들이 내 안에 꽉 자리를 잡고 나와 함께 호흡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를 미는 것이다. 전과 다른 시선으로 전과 다른 깊이와 넓이를 가지고 쭉쭉 삶을 헤쳐 가는 것이다. 그러면 당연히 삶이 풍부해진다.
삶이 풍부해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인식의 정도라고 생각한다. 내가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나를 둘러싼 세상은 도대체 무엇인지, 그러한 것들을 얼마만큼 인식하느냐의 문제라는 것이다. 정말 많은 것들을 인식해내면 지식적으로도 많이 알고 느낌적으로도 많은 것을 느끼기에 그 삶은 풍부하다는 것이다. 나의 내면과 외면, 사물들의 표면과 이면, 그 모든 것들이 내 몸속에서 혈류처럼 흐르기도 하고 내 바깥에서 나와 교류하며 대기 순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궁극에는 ‘물아일체(物我一體)’, 그것을 인식해내거나 느낀다는 것이다. 세상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지만, 알고 보면 하나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의 세계를 획득해낼 수 있는 일등 매개체, 그것은 바로 삶을 성찰하는 글쓰기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위의 글을 옮기다가 클림트의 ‘생명의 나무’가 생각났다. 글쓰기 수업 시간에 한 번 보여주는 그림이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말이다. 성찰과 연결, 그것이 글쓰기의 키워드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