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오늘(28일)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당선인의 만남은 여러 의미가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25년 만에 탈당하지 않고 대선을 치른 대통령의 등장입니다. 역대 대통령들이 임기 말 불명예스럽게 여당에서 탈당한 것과 상반됩니다.
오대영 기자가 보도합니다.
http://bit.ly/TvJvIi
[기자]
1992년 노태우 대통령은 당시 대권 주자 김영삼 후보와 극심한 갈등을 빚었습니다.
사돈인 SK그룹에 이동통신 사업을 허가하는 것에 대해 김 후보가 불만을 표출했기 때문입니다.
또 관권 선거 의혹이 일자 개각을 요구해 인사권에 대한 도전으로 비치기도 했습니다.
결국 노 대통령이 민자당을 전격 탈당하면서 갈등은 폭발했습니다.
대권을 쟁취한 김영삼 대통령은 1997년 신한국당의 이회창 대선후보와 갈등이 컸습니다.
이 후보는 경쟁자였던 김대중 후보와 김영삼 대통령, 김종필 총재를 '부패한 3김'이라고 주장하며 탈당을 요구했습니다.
김 대통령은 이인제 후보의 국민신당을 물밑에서 지원한다는 의혹도 받았습니다.
마침내 정치권의 근거 없는 주장에 대응하겠다며 탈당을 선언했습니다.
2002년 김대중 대통령의 세 아들에 대한 비리가 터지자 국민의 비난 여론이 빗발쳤습니다.
결국 김 대통령은 대국민 사과와 함께 탈당을 선언했습니다.
이를 두고 당시 노무현 민주당 대선후보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한 탈당이었다는 해석도 나왔습니다.
2007년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이 만든 열린우리당을 탈당했습니다.
노무현 정권에 대한 비난 여론이 대선에 악영향을 줄 것을 우려한 대권 주자들이 여러모로 탈당을 압박했습니다.
특히 유력 대권주자인 정동영 의원과의 깊은 갈등은 탈당의 결정적 요인으로 꼽힙니다.
1987년 직선제 이후 뽑힌 모든 대통령은 이처럼 본인의 뜻이든 아니든 임기 말 집권 여당에서 나오는 잔혹사를 겪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25년 만에 탈당하지 않은 첫 대통령으로 박근혜 당선인을 만나는 의미 있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오늘(28일)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당선인의 만남은 여러 의미가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25년 만에 탈당하지 않고 대선을 치른 대통령의 등장입니다. 역대 대통령들이 임기 말 불명예스럽게 여당에서 탈당한 것과 상반됩니다.
오대영 기자가 보도합니다.
http://bit.ly/TvJvIi
[기자]
1992년 노태우 대통령은 당시 대권 주자 김영삼 후보와 극심한 갈등을 빚었습니다.
사돈인 SK그룹에 이동통신 사업을 허가하는 것에 대해 김 후보가 불만을 표출했기 때문입니다.
또 관권 선거 의혹이 일자 개각을 요구해 인사권에 대한 도전으로 비치기도 했습니다.
결국 노 대통령이 민자당을 전격 탈당하면서 갈등은 폭발했습니다.
대권을 쟁취한 김영삼 대통령은 1997년 신한국당의 이회창 대선후보와 갈등이 컸습니다.
이 후보는 경쟁자였던 김대중 후보와 김영삼 대통령, 김종필 총재를 '부패한 3김'이라고 주장하며 탈당을 요구했습니다.
김 대통령은 이인제 후보의 국민신당을 물밑에서 지원한다는 의혹도 받았습니다.
마침내 정치권의 근거 없는 주장에 대응하겠다며 탈당을 선언했습니다.
2002년 김대중 대통령의 세 아들에 대한 비리가 터지자 국민의 비난 여론이 빗발쳤습니다.
결국 김 대통령은 대국민 사과와 함께 탈당을 선언했습니다.
이를 두고 당시 노무현 민주당 대선후보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한 탈당이었다는 해석도 나왔습니다.
2007년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이 만든 열린우리당을 탈당했습니다.
노무현 정권에 대한 비난 여론이 대선에 악영향을 줄 것을 우려한 대권 주자들이 여러모로 탈당을 압박했습니다.
특히 유력 대권주자인 정동영 의원과의 깊은 갈등은 탈당의 결정적 요인으로 꼽힙니다.
1987년 직선제 이후 뽑힌 모든 대통령은 이처럼 본인의 뜻이든 아니든 임기 말 집권 여당에서 나오는 잔혹사를 겪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25년 만에 탈당하지 않은 첫 대통령으로 박근혜 당선인을 만나는 의미 있는 기록을 남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