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에 소리 없이 비가 내린다. 나는 나뭇잎에서 사그락사그락 소리내며 내리는 봄비를 무척이나 좋아한다. 대청마루에 서서 앞산을 바라보면 갖가지 나무들이 움터내기에 바빠 봄비를 갈증 내듯 마셔대며 웃음 나누기에 정신이 없다. 마당 한가운데 서서 하늘을 바라보고 입을 아! 하고 벌리고 있노라면, 빗방울은 얼굴 위 볼로 혀로 여기저기 떨어졌다. 떨어지는 빗방울을 쫙쫙 삼키곤 했다.
봄비가 오는 날 우리 집 화단은 분주하다. 길게 뻗은 줄 장미는 모양 꾸미기에 정신이 없고, 하얀 옥매화는 봄을 마중 나가는 여인 마냥 눈가에 새록새록 미소를 달고 다소곳이 고개 숙여 인사를 한다. 돌 틈 사이로 뻗어 오른 난초는 화단의 입구를 단장하는데 바쁘다.
비가 오는 날이면 어머니는 바느질을, 하신다. 맑은 날은 들로 나가 이 일 저 일 온갖 일 다 하시고, 비 오는 날만은 어머니에게 유일한 휴식일이다. 외할머니가 어머니 시집올 때 사 주셨다는 재봉틀을 돌리며 빗물과 같은 곡조를 담아 노래를 불렀다. 재봉틀 소리와 화음을 이루는 구슬픈 노래를 나는 아직 잊지 못한다.
갑자기 불어난 빗물 때문에 학교를 쉰 적도 많았다. 물이 불어 넘치는 샛강을 바라보며 저 간물이 우리 집까지 밀고 오면 어쩌나 하고 가슴을 조이기도 했다. 강물이 넘치지 않을 정도면 난 꼭 아재 등에 업혀서 강을 건너 학교에 갔다. 책보자기를 허리에 두르고 아재 등에 업혀 아재 목을 두 손으로 꽉 끼고 가는 학교 길이 신이나 간물이 넘치지 않게 비가 오기를 바랬다.
억수같이 내리치는 여름비는 천둥과 함께 내리치기 때문에, 무서웠다. 밤이면 귀신 불처럼 번뜩번뜩 창을 밝히고 귀신 이야기 벼락 맞는 이야기를 할머니가 들려주었기 때문이다.
여름비는 나에게 또한 좋은 추억을 주었다. 그것은 태풍이 지나간 후 떨어진 풋감을 줍는 것이다. 새벽이면 뒤질세라 감나무 밑으로 달려가 풋감을 주워 동이에 담가 두었다가 떫은맛이 간 뒤에 먹는 감 맛 또한 유별나다.
비 온 뒷날에는 세상 모든 것이, 깨끗하고 찬란해 보이기에 그지없다. 꽃들은 말끔히 씻겨진 옷으로 폼을 내고, 새들은 금세 다시 지저귄다. 들판의 곡식들도 무엇인가 새새 거리며 열매 맺기에 바쁘다. 학교 길은 새 신을 신고 오라고 손짓을 한다. 나는 그러노라고 답하고 맑게 흘러가는, 고랑 물을 쏜살같이 타고 올라간다. 넓은 바위가 있는 곳에, 벌써 내 또래의 조무래기들이 모여서 빨래도 하고 머리도 감고 발도 씻고, 종알종알 종일을 물소리와 함께 무엇인가 씻어낸다.
그러나 지금 내리는 저 창밖의 비를 맞는 내 아이들은 하늘을 향해 아! 하고 입 한번 벌릴 수 없음을, 고랑 물을 타고 올라가 머리 한번 감을 수 없음을,
지금 저 꽃과 나무들은 나를 향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내 손에서 내 마음에서 전해져간 수많은 공해의 물질. 무언의 얼굴로 자꾸자꾸 바라만 본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우리들이 어렸던 그 시절엔 자연이 모두 놀이 감 이였지요. .그 때가 그리워 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