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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봉문화와 밝산향로(博山香爐)의 비밀
서언(序言)
최근 국립중앙박물관(관장 최광식)은 아시아관 신안 해저문화재실에서 테마전 <마음을 담은 그릇 - 신안
향로>을 개최한바 있습니다.
09/10월 28일부터 2010년 3월 28까지 열렸던 전시의 주제는 14세기 동아시아에 불었던 ‘향香 열풍’이었
습다.
여기에 등장하는 주제중 신안 해저에서 건져올린 원대(元代)의 밝산향로와 기타 부수 기기들이 들어있습
니다. 따라서 향문화의 원류를 동아시아에 두고있는듯한 인상이 짙어보이는것이 사실이었습니다.그
러나 애시당초 중국의 그늘에 가려져 빛을 보지못했던 한국의 향문화는 제대로 조명조차 해 본 일이 없었
습니다.
시기적으로 많이 늦은감은 있으나 지금부터라도 한국의 향문화를 제대로 밝혀본다면 향문화의 원류가
고조선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것입니다.
이 기회를 빌어 밝산이란 형상을 주제로 하여 유행했던 고조선의 향로문화를 밝힘으로서 그동안 한나라의
문화로 오해받아왔던 조선의 향로문화를 바로 잡고 아울러 잃어버렸던 삼신산의 위치를 밝혀보자는것입
니다.
우선 평양의 석암리에서 출토된 일명 박산향로의 유래를 추적합니다.
밝산(博山)향로의 비밀
<박산은 중국의 동쪽에 불로장생의 신선과 상서로운 동물 들이 살고 있다는 상상의 이상향이다.
박산향로는 바다 가운데 솟아 신선이 살고 있다는 이 박산, 즉 봉래(蓬萊)ㆍ방장(方丈)ㆍ영주(瀛州)의
삼신산(三神山)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향로를 말한다.=조유전의 문화재 다시보기에서>
이상이 대체적으로 박산향로를 소개하는 설명입니다.
중국의 동쪽에 있다고 하는것은 중국은 아니라는 말로 해석할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상상의 이상향이라는 말은 조금 어패가 있어보이네요. 상상이라고 하면 실재로는 없다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사실이 아닌 얘기가 어떻게 사서에 중요한 주제로 등장할 수 가 있겠습니까.
사실은 그게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중국의 동쪽에는 황해바다가 있고 그 바다의 건너편엔 조선이 있었지요.
그리고 삼신산은 중국과 조선의 사이에 있었다고 보는것이 타당한 판단일것입니다.
그런데 중국의 사서에는 삼신산은 자기들 영토가 아니라고 기록되어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조선의 영토가 되어야 할텐데 조선역시 삼신산을 상상의 이상향이라고 하네요.
하여 삼신산은 임자없는 산이 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자세히 알고보니 사실은 그게 상상의 이상향이 아니
었고 한반도로 밀려오기 전에 발해내에 있었던 고조선을 말한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한국이 자기들 땅을 잃어버리고 찾지를 못한셈이지요.그러나 이제와서 누구라서 쉽게 이 사실을
믿을려고 하겠습니까. 하지만 다음글을 차근차근 읽어보시면 답이 나옵니다.
우선 밝산이란 이름을 왜 향로에 부치게 되었으며 그 이름은 어디서 왔는지 유래를 밝혀봄으로서 왜곡된
지명의 일부라도 복원해보자는 목적에서 이 글을 쓰게 되었음을 밝혀둡니다.
그동안 많은 학자들은 고조선으로부터 전해오던 밝산이란 이름을 중국의 고유지명으로 오해하여왔었습
니다.
그것은 향로에 박산이란 이름을 붙치게 된 기록이 진(晉)대에 쓰여진 동궁구사(東宮舊事=주1)에 있었는데
그 (동궁구사) 내용은 황태자비로 입궁한 왕씨가 패물로 납입한 품목중에 은으로 도금한 박산향로가 있었
다는 설명이지요. 당시 황태자비의 성씨가 왕씨었다고 하니 만약 그가 낙랑왕씨였다면 더욱 문제는 조선과
밀접하게 가까워진다고 볼수도 있겠습니다.그 박산이란 바로 조선말로 부터 유래된 밝은 산이었기 때문입
니다.
그러나 서경잡기(西京雜記 주2)라는 고서에는 한나라가 향로를 만들고 이름을 피중향로(被中香爐)라 하고,
또 박산향로를 만들어 상스러운 새모양과 괴상한 짐승들을 새겨넣었다고 기록하고 있고,저자(갈홍)는 사견
임을 내세워 밝산은 봉래(蓬萊)라던가 수미산(須彌山)이라던가 하는 산을 상상하면 될것이라고 하였고,
박산이란 이름을 부친것은 그 형태가 해중에서 솟아오른 산같아서라던가 제작지가 산동의 박산이어서라는
등의 설명이 따르고 있기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설명만 보더라도 밝산향로는 조선의 고유언어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는것입니다.
그런데도 후대에 부여 능산리에서 출토된 밝산향로의 이름을 중국의 지명을 피한다는 명목으로 백제금동
대향로로 바꿔버린 예가 있습니다.
그러나 백제는 이미 박산향로라는 이름을 쓰고있었다는 근거가 무왕때 일본으로 보내준 향로형태의 수석을
연출하는 수반(주3)에서 들어나고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들은 고조선의 지명에 대해서 연구가 부족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뿐만아니라 근래에 들어 요서 적봉 지역에서 터지기 시작한 홍산문화의 유적들이 마치 고조선발흥의 핵심
지처럼 조명을 받고 있지만 이곳은 중국에서 볼때 절대 동쪽이 될 수 없고 북쪽이 된다는 사실을 알면
적봉이란곳은 마치 낙양의 북망산과 같은 고대 집단묘역이었다는 사실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적봉지역이 고조선문화와 무관하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다만 중국의 많은 사서들의 기록이 그렇고, 그중 <서경=書經>의 기록속에는 고조선의 발흥지를 산동반도의
동북단에 있는 등주주변 해상으로 지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곳은 중국대륙에서 해가 제일 먼저 뜨는곳이라하여 양곡(暘谷) 또는 동방, 동표지지(東表之地)라고 기록
하고 있지요. 그리고 그 우이지역을 고조선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요서지역의 적봉지대가
고조선 발흥의 핵심지대는 될 수 없다고 봅니다.
[주1]: 晉太元22(AD397) 皇太子納妃王氏 有銀塗 博山連盤 三升香
북조호성고(北朝胡姓考)외편 제이 동이제성(外篇第二東夷諸姓)중
마한신고(馬韓新考)를 보면 자손인이씨언子孫因而氏焉. "그 선조는 은나라에서 나왔다. 주나라 무왕이 은을 이겨, 기자를 조선에 봉(封)하니 이로 인하여 자손이 성(씨)을 삼은 것이다” 箕땅에 봉해져서 箕子라고 했는데 조카인 紂에게 실정(失政)을 직간(直諫)하다가 투옥되었다. 商이 망하고 周가 일어나 면서 주(周) 武王이 그를 풀어주고 회유했다. 이에 기자는 번조선으로 옮겨서 洪範(홍범:사람이 살면서 지켜야 할 범규)을 펼치며 살았다. 조선으로 옮긴 기자의 자손 중에 후에 번조선의 임금이 된 자가 있었는데, 이를 기자조선이라 한다. 末왕이 기준이다. 된 위만은 손자 우거에 이르러 중개무역으로 세력이 강성해져서 한(漢)의 배후에 위협이 되었다. 이에 한무제는 거병하여 조선을 침공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참패를 거듭 하게 되었다. 하지만 우거에반(反)한 조선의 재상 로인(路人-어양(漁陽縣)인),아들 最, 한음(韓陰), 니계상(尼溪相) 참(參), 장군 왕겹(將軍王唊)등이 우거를 죽이고 투항하면서 상황이 반전되고, 이윽고 대신(大臣) 성기 (成巳)가 반(反)하여 우거의 아들 장(長)을 치고 집권하자, …告諭其民,誅成巳,以故遂定朝鮮 爲四郡… 그 백성들이 성기를 주살하고.무제(武帝)는 조선에 4군을 두게 되었는데, 이것이 평주,추저,날양,훼청 이다- 史記. 평정에 공이 큰 토착세력에게 이곳을 지배케 하였다. 최를 온양후에 봉하였다. 이때 한무제는 그의 휘하에 섭하(涉何), "졸정다(卒正多)" "공손수(公孫遂)" "위산(衛山)"과 육(陸)으로는 순체와 해(海)로는 양복(楊僕)패전의 책임을 물어 극형에 처하게 된다. 한 무제때 조선의 평주후 왕겹(또는,협協)이 토착인으로써 은인(殷人) 기자의 먼 후손인지는 기록이 짧아서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위의 기사와 연결 선상에서 보면 위만에 쫏긴 마한의 준왕과 위만에 남아 있던 왕씨를 기자의 연고(然考)로 추정하는데 무리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육세조파(六世祖波), 연의동삼사무읍공(燕儀同三司武邑公). 북위종실(北魏宗室)의 왕비王妃인 왕씨(王氏)의 묘지는 "부인(夫人),왕씨(王氏). 낙랑수성인야(樂浪遂 城人也). 연의동삼사무읍공파지육세손(燕儀同三司武邑公波之六世孫). 역시 위의 "왕기"와 배행이 같다 聖祖幽營二州刺史廣陽靖后道岷之第三女. "할아버지인 유주(幽州),영주(營州)의 이주 자사 겸, 광양의 정후 (왕)도민의 셋째 따님이시고.." (낙랑속현->한서지리지)의 한 기린의 외손이시다." 처사 왕기나 왕황후가 남매간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6세조가 왕파 이므로 주서의 왕맹과 배행이 같은 동기간이다. [주]:2 西京雜記 二九、常滿燈 被中香爐 其法後絕,至緩始更為之。為機環,轉運四周,而爐底常平,可置之被褥,故以為名。又作九層博山香爐, 鏤為奇禽怪獸,窮諸靈異,皆自然運動。又作七輪扇,連七輪,大皆徑丈,相連續,一人運之,滿堂寒顫。
[주3]: 서기612년 백제에서 일본으로 선물한 밝산향로형 수석연출 수반과 영산석(靈山石) 일본 세천류 분석 상전인증(日本細川類盆石相傳印證) (日本樹石1968년 2월호) 내용:우리나라의 수석의 시작은 인황 추고천황 20년대에 백제국에서 사신이 건너와 역서(歷書)를 헌납할 때 그 가운데 박산향로가 포함되어있었다. 그 모양은 상부는 불기(佛器)같고, 속에 향을 채우며 아래쪽에는 배모양같이 되어있어 열탕을 넣는다. 맨 꼭대기에는 분이 있고 그 가운데 영산을 닮은 산이 놓여있다.일찍이 없던 무류의 명석(銘石)이었다. 백제문화의 절정기를 이루던 무왕(武王 12(612)년에 일본 땅으로 건너간 관륵(觀勒)이라는 스님은 『일본불교략사(日本佛敎略史)』에 의하면 백제 무왕2(일본 추고천황 10)년, 그러니까 602년에 처음 일본으로 들어간 것으로 되어있다. <일본서기>권 22 그 7년 후 609년에 나라 지방에 ‘아스카사(비조사 飛鳥寺)’가 완공되었는데, 이때 백제의 승려 열한 명이 일본에 들어갔다. 3년 후(612년)에 다시 관륵 스님이 일본에 들어갈 때는 백제의 역본(曆本)과 천문지리서(天文地理書), 둔갑, 방중술 등의 서책과, 선가사상(仙家思想)을 수양하는 데 이용되었던 수석(영산석 靈山石)을 박산향로형수반(博山香爐形水盤)에 올려서 전달하였다고 한다. 산동총도 제공:향고도 편집:필자
발해(渤海)안에 있는 삼신산(三神山)은 밝산(博山)이고 밝산은 곧 아사달 등주와 요동반도의 여순 사이에는 발해해협이라는 바다가 있습니다. 위에 올려진 지도에는 이해를 돕기위하여 번호를 부쳤는데 7~12번까지의 해역을 말합니다. 그중 지도의 8번에는 해협에 걸쳐있는 산맥의 이름과 내력을 기록한 내용이 보일것입니다. 우리들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장백산 또는 태백산은 시초가 성경(盛京) 즉 심양(審陽)에서 시작 되었다는 <산맥 자 성경 장백산래(山脈自盛京長白山脈)> 글입니다. 이 외에도 만주땅에는 길림 주변에도,또 백두산 견너편에도 장백산은 있습니다. 그러니까 밝산과 관련이 되는 장백산맥은 심양에서 부터 발해해협까지 뻗어내린 산맥이라는 주기이지요. 즉 천산산맥(千山山脈)을 말합니다. 따라서 장백산을 일명 태백산이라고도 부르므로 이곳의 산이름을, 밝산이라고 보는것입니다. 그리고 그 태백산의 끝엔 세분하여 삼신산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밝산은 곧 아사달과 같은 의미를 가집니다. 그것은 아사는 일반적으로 “아침”으로 해석하고, 달은 “땅 혹은 산” 으로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사달과 밝산을 조선과 같은 뜻으로 해석하면 밝산향로(博山香爐)는 곧 조선향로(朝鮮香爐)가 됩니다. <강서대묘 고분벽화> 천정에 그려진 삼신산도는 밝산에 봉황이 날아들고 사신도를 탄 고분의 주인공이 봉황을 따라 밝산으로 향하고 있는 그림입니다. 밝산을 경유하면 환생이 된다는 일종의 계절의 순환원리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봉(鳳)은 풍(風)으로 통하고 또한 서기(瑞氣)로 불리웁니다. 만물의 소생은 봄으로부터 시작되지요 때문에 이 그림은 생명의 탄생부터 성장과 결실.그리고 저장까지를 그리고 다시 소생하는 과정을 산아래 그려진 꽃들을 상징하여 표현한것입니다. 따라서 밝산향로는 무덤의 주인공이나 사자들의 환생을 기원하는 용도로 쓰였다고 보여집니다. 향로에서 피어오르는 연기(煙氣)를 바로 서기(瑞氣)로 보았다면 벽화주변에 그려진 모든 운기문양(雲氣紋樣) 또한 서기(瑞氣)를 상징한것으로 봅니다. 강우방선생은 서기(瑞氣)를 영기(靈氣)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태백산에서 신인이 조선을 건국하였다는 전거 황하에서 한라까지>의 저자 심백강 박사는 <주간 동아 2002년 8월29일자>호를 통해서 중국 ‘사고전서’에 기록된 역사 밝혀내 …라는 제목에서 역사학계 능력부족으로 실체규명 외면, 요(堯) 임금 때인 무진년(B.C. 2333년)에 신인(神人·성인보다 한 단계 위의 훌륭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 태백산 단목(檀木) 아래로 내려 오니, 조선인(朝鮮人)이 그를 임금으로 모시고 단군(檀君)이라 칭했다. 정초(鄭樵)가 지은 ‘통지략’(通志 )에 이르기를 조선이라는 나라는 왕험(王險)에 도읍을 정했는데, 한(漢) 시기의 낙랑군이 그곳이다. 모씨(茅氏)의 ‘상서록’(象胥錄)에 의하면 단군과 아울러 기자(箕子)도 왕양(王壤=平壤의 오기인듯)에 도읍을 정했다. 역사에서는 위만도 왕험에 도읍을 정했는데, 곧 평양이다. (하략)” 하는 글이다. 중국 진(晋)나라 학자 곽박이 지은 ‘산해경주’를 바탕으로, 오임신이 그 주석을 널리 보완 하는 형식을 취하며 지은 ‘산해경광주’. 현재 전체 18권이 ‘사고전서’(四庫全書)에 수록돼 전해 내려 오고 있다. 선우중산국과 고조선 최근에 발행된 고대사 책중에서 문화재청장과 국립중앙박물관장 외 많은 고고학자들의 추천을 받은 책이 있습니다. <코리안루트를 찾아서>라는 책입니다. 저자는 이형구와 이기환 공저이고 성안당 발행으로 되어있습니다. 이 책은 경향신문사에서 여러계층의 권위자들을 뫃아 약 1만km의 장도를 누비면서 밝혀낸 고대사의 비밀 을 신문을 통해 연재한 뒤 단행본으로 엮어낸 기록입니다. 책의 내용중에는 새로운 사실들이 많이 보고가 되고 있지만 특히 수수께끼의 나라 중산국(中山國)의 존재에 대하여 파혜친 사실들은 우리를 놀라게 하고 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선우중산국은 기자의 차남이 세운 나라였다는 사실입니다. 이들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306~341쪽) 기자의 후손이 세운 나라로서 특히 제철기술이 뛰어나 은 나라당시 수준높은 청동제기들은 중산국을 통하여 공급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결국 이들은 기원전 296년에 조나라와 연나라의 연합군에 의하여 망했다는 사실과 1974년에 발굴된 북사성 6호묘에서 출토된 동정(銅鼎)의 기록들은 전혀 새로운 문제들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또다른 정보를 통하여 알게 된것은 이곳 북사성 6호묘에서 출토 된 박산향로가 평양 낙랑유적인 석암리 9호분 묘에서 출토된 향로와 닮아있고, 이 외에도 형태는 같고 시대가 다른 동정등이 출토되었다는 사실은 한나라가 오히려 중산국 문화를 전수받았다는 증거가 되기도 한것입니다. 그렇다면 평양의 낙랑유적역시 한사군중의 하나인 낙랑군 유적이라고 인정할 수 가 없다는것이지요. 그 이유는 박산향로의 경우 거북을 기단에 배치한 향로는 구 중산국과 평양 석암리 9호분묘 출토품밖에 없기 때문입니다.거북을 기단으로 하는 향로는 한 나라의 건국보다 무려 100여년이 앞선다는 얘기입니다.
따라서 지금까지는 평양 낙랑유적에서 출토된 박산향로를 한(漢)나라에 기원을 두었다고 하는 기록은 그 근원을 잃게 되는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거북을 승반위에 올리고, 그 위에 봉황과 박산을 올렸던 형식은 오직 중산국과 평양의 석암리 9호분 묘밖에는 없습니다. 그 외에도 석암리 9호분묘의 출토품 중에는 한나라에서 출토된 유물들과 비교할때 그 수준이 더욱 우수한 제품들이 많다는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한나라의 오수전이 출토되지 않는점도 심중히 고려해야 될것입니다. 따라서 평양의 출토품중에는 한나라의 낙랑군 문화라고 하기에는 믿을 수 없는 우수한 제품들이 발견되 때문에 이에 대하여 문화의 국적에 대한 이의를 제기중인 논문들도 있지만 이 지면을 빌려 주장하고자 하는 요점은 박산향로의 기원역시 한나라가 아니라 고조선이라는 사실을 밝히고자 하는것입니다.
향로는 예기입니다.따라서 천제와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천문에 박식하였던 기자와 관계가 깊었습니다. 때문에 기자의 주변에는 언제나 철을 다루던 집단들이 따르게 되었고,그 일행들이 은나라를 철수했을때도 각종 예기들을 휘대하고 떠나 능원의 교장갱에 묻었던 사실을 기억할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기자는 주 무왕에게 치도방법으로 홍범구주(洪範九疇)를 가르쳐주었던 현인이었기 때문에 공자도 그를 존경하였습니다. 그 흔적들은 오늘날까지 중국의 사서들 안에 오행(五行)이란 주제로 남아 천재지변을 기록하고 있는 것 입니다. 당시 그들은 하늘을 제대로 섬기지 않으면 무서운 재앙이 내린다는 사실은 누구도 거부할수 없었고, 가장 두려워 하였습니다. 그러나 선택받은 자가 아니면 아무나 하늘과의 접신을 할수 없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조선에는 천왕랑(天王郞)이라고 부르는 남자 신관이 있었고,파사(婆娑)또는 천관녀(天官女)라고 부르는 무당이 많았습니다. 향로는 이들이 신과 접신하는데 없어서는 안되는 필수품이었습니다. 삼신산은 고조선의 땅 삼신산은 더이상 전설속의 산이 아니었습니다.전설속의 산으로만 알고있던 삼신산의 강역에 대하여는 한나라 스스로 자기들 땅이 아니고 만이(蠻夷)의 땅이라는 사실을 <사기><효무제본기>와 권28<봉선서> 제6 에 명시하고 있습니다. <천하의 명산 8개중에 3개가 만이(蠻夷)땅에 있고, 5개가 중국에 있다고 합니다.> 만이란 즉 동이를 말함이고 3개의 산이란 삼신산을 말합니다.
<史記>卷十二<孝武本紀>第十二 및 권28<봉선서> 中國華山﹑首山﹑太室﹑泰山﹑東萊,此五山黃帝之所常游,與神會。黃帝且戰且學僊。
그리고 그 삼신산이 육지에서 가까운 발해내에 있다는 사실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기록은 산해경에도 있습니다."동해지내 북해지우"에 조선이라는 나라가 있다는 사서 최초의 조선에 대한 기록이지요. 그리고 진(秦)한(漢)대 나라들은 고조선을 불사국 또는 군자국이라 부르고 삼신산을 동경하여 궁원에 인공으로 바다를 만들고 신선놀음을 흉내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것들이 향로문화를 발전시키고, 천제 외에 죽은자의 환생을 기원하던 용도와 산자들의 기원용으로 까지 쓰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천문문화(天文文化)가 발달한 조선을 공자 역시 동경하였던 것이 사실이었지요. 그도 결국 삼신산을 동경하여 바다를 건너기를 원하였지만 표면상으로는 예가 살아있는곳으로 건너가 살기를 원하였다는 기록으로 많은사서에 남아 있습니다. 고조선은 동북해빈에 있었고, 평양은 등주와 마주 보이는곳에 있다. 이곳을 기록에서는 동방이라 하고 동표(東表)라고도 표현하였습니다. 기자는 은나라가 망하자 주 무왕의 권유를 뿌리치고 자기 조국인 조선으로 돌아왔습니다. 백공기예인 5천명과 함께 청주의 창락에서 배를 타고 발해의 험한 물을 건넌것입니다. 이러한 내용들이 <상서=尙書><주소=註疏 >권4=주1. <후한서>또는 < 창락현 속지=주2>에 상세히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물론 그들이 건너간곳은 한반도의 평양이 아니었습니다.이곳은 역시 등주와 마주 보이는 현재의 장도 평양입니다. 이 장도는 <고려도경>의 봉경에서도 고려의 건국지로 소개를 하고 있지요. 뿐만 아니라 이곳을 수유(須臾)라고 부르던 비밀도 밝혀졌습니다. 이 수유대야 말로 감히 다른곳과는 비교할 수 없는 하늘의 조화를 확인할 수 있는 신기루가 있었지요. 이곳을 원나라때 주치중(周致中)이 쓴 <이역지=異域志=주3>의 기자조선조에는 고조선 일명 고려라고 부르던 나라는 동북해빈에 있었다고 하였고,
명(明) 왕사성(王士性)의<광지역=廣志繹=주4>이라는 논문에서는 평양성이 등주와 마주 대하고있는 곳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국내에서 공인을 주저하는 <규원사화>에서는 역시 중국의 <상서>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 하고 있습니다.
<규원사화>.<단군기>입니다.
初, 神市之末, 蚩尤氏兄弟, 雖自 鹿退歸, 而東人之占居淮岱者甚多, 與漢土之人雜處, 農 織牧, 資以爲業. 且南鄙海島之民, 皆以 珠魚貝, 相交易於漢土, 稍稍住息於濱海之地. 至是海岱.江淮之地, 遂爲其州里, 與 漢土之民, 交(遊)[游]而錯居.《尙書》所稱, 夷 萊夷 淮夷 島夷者, 皆是也. (淮岱) 지역을 차지하고 생활한 자가 매우 많았으니, 한나라 땅의 사람들과 섞여 거처하면서 농사짓고 누에치며 길삼하고 가축을 기르는 것을 밑천으로 하여 생업을 삼았다. 또한 남쪽 지방의 바다섬 백성들은 모두 진주와 물고기 및 조개 등으로 한나라 땅에서 서로 교역하더니 차차 해변의 땅에 머물러 살게 되었다. 이에 이르러 해대(海岱)와 강회(江淮)의 땅에는 마침내 마을을 이루어 한나라 땅의 백성들과 교류하며 섞여 살게 되니,《상서(尙書)》에 이른바 우이( 夷)·래이(萊夷)·회이(淮夷)·도이(島夷) 등이 모두 그들 이다.
[주1]海岱惟青州疏堯時青州當越海而有遼東也○胡渭曰疏亦未盡疑漢武所開樂浪元菟二郡皆古嵎夷之地在 青州之域者嵎夷羲仲所宅朝鮮箕子所封不應在化外先儒但云有遼東非也
해대지역(海岱地域)에 있던 청주는 요(堯)나라때 바다를 건너 요동과 소통하던 곳인데, 선인(胡=仙人) 들이 사는 (불사국)과 소통하던 통로라는데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한무제가 열었든 낙랑.현도 2군이 모두 옛날 우이지역에 있던 청주 지역이다. 우이는 희중이 삶을 열었든 곳이고, 기자를 조선에 봉했으나 불응하고 밖으로 나간곳이다. 단 요동에 있는건 아니다.
* 낙랑군과 현도군의 위치는 우이지역에 있던 청주지역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등주주변 발해해협을 말합니다. 따라서 낙랑군을 한반도의 평양으로 옮겨 주장하는 행위는 즉시 폐기시키고 역사를 바로 잡아야 합니다. (필자주)
[주2]此桥东南2.5公里,有山曰箕子山。
据《昌乐县续志》记载:"野老相传,殷朝箕子佯狂,率多人出奔高 经此住宿,山因名焉。...费县东南50里,亦名旗山;莒县东100里;潍县东50里 山,在王义和桥东南约3里处。..
[주3] 箕子受封於朝鮮後,便帶着當時商代的五千人前往朝鮮生活。元-周致中《異域志》介紹說---- “朝鮮國/古朝仙/一曰高麗/在東北海濱/周封箕子之國/以商人五千從之/其乙巫卜筮/百工技藝/禮樂詩書/皆 從中國”云
[주4]近乃有朝鮮 之變,若倭得志朝鮮,則國家又於登、萊增一大邊也。譚東事者,止言遼陽剝膚, 而無一語及登、 萊,不知遼陽雖逼,然舊邊地,遼宿重兵,一時不能得志,且陸 行,千里寇至,聲息時日得聞,更有山海關之限;登、 萊與朝鮮止隔二百里之水,風帆倏忽,烽燧四時,非秋防,非春,其難守比諸邊為甚。惟近為“平壤屯田” 之疏者得 之。夫疏謂:“屯田平壤是因糧於敵之議也,原為省餉,非專為蔽山左, 然實暗伐敵謀。平壤與登、萊正對,我師屯平 壤,則正蔽登、萊,烽燧無能相及 矣。”
청(淸)나라 때 오임신(吳任臣)의 '산해경광주(山海經廣註)'에는 '해내경(海內經)에 동해 안쪽 북해(발해) 모퉁이에 조선(朝鮮)이 있다고 말한 그 조선이 바로 단군조선'이라는 기록이 나옵니다. 또한 조선의 '태조실록(太祖實錄)'에는 1397년 3월 권근(權近)이 명(明)나라를 방문했을 때, 명태조 주원장(朱元璋)이 '단군(檀君) 가신 지 오래인데 그동안 왕조가 몇 번이나 바뀌었는가(檀君逝久幾更張)' 라고 물었다는 기록도 나옵니다.
였다(國號朝鮮… 九夷君之)'는 기록이 나와 있고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의 '단군고기'에는 조선·시라(尸羅)·고례(高禮)·남북옥저·동북부여·예·맥 등 단군이 다스리던 구이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거명 돼 있기도 합니다.
하안(何晏)의 집해(集解)에 '구이는 동방의 이(夷)가 9종(種)이 있는 것을 말한다(九夷 東方之夷 有九種)' 고 하였고 형병(邢昺)의 소(疏)에는 이 구이(九夷)를 현토(玄兎)·낙랑(樂浪)·고려(高麗)·만식(滿 )· 부유 (鳧臾)·색가(索家)·동도(東屠)·왜인(倭人) ·천비(天鄙)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은 최초의 동이 국가 고조선의 지도자였다는 사실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중산국의 출토품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고조선과의 관계 고대의 중산국은 현 북경에서 서남쪽으로 좀 떨어져 있지요. 그런데 일제시대인 1940년과 41년도에 만안 (萬安) 북사성(北沙城)과 회안(懷安) 일대에 대한 한묘 발굴이 있었습니다. 현 북경에서 서북쪽으로 만리장성이 지나는 장가구시(張家口市)가 있는데, 이 장가구에서 조금 서쪽으로 북사성(北沙城), 그 남쪽으로 회안(懷安)이 위치합니다. 중산국이 있었다는 평산(平山)에서 보면 정북쪽에 위치합니다.
이 발굴을 주도한 사람들은 당시 동아고고학회란 일본인 학술단체에 속한 일인학자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연히 여기서 출토된 유물들 사진을 보고 저는 사실 깜짝 놀랐습니다. 이 유물들 일부가 현 평양 소위 낙랑군지역에서 출토되었다는 유물들과 거의 같거나 비슷한 것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료 출전은 낙랑 유물들의 경우는 [조선고문화종감]1~4권 중 주로 2권에서 발췌하였으며, 북사성과의 경우는 [만안북사성]이라는 1946년도에 출간된 일본어 서적을 참고하였습니다. 평산중산왕묘는 인터넷 으로 확인한것입니다.(이 대목은 서유정님과의 토론에서 인용한것이니다.) 중산국에서 발굴된 선우황의 비문을 통해본 선우씨가 기자의 후예라는 내용입니다. 중산국은 고조선의 제후국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짐으로서 기자는 날조되었다는 일부 의문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기자동래설이 허위라는 망언은 이제 종지부를 찍어야 할것입니다. 기자는 신기루가 펼쳐지는 마법의성인 평양성 즉 장도의 삼신산에 있었습니다.
<鮮于璜碑释文> <선우황은 은나라 기자의 묘예> 선우중산국은 고조선의 제후국이었습니다. (碑陽) <其先祖出于殷箕子之苗裔>
□諱璜,字伯謙,其先祖出于殷箕子之苗裔,漢膠東相之醇曜,而謁者君之曾,孝廉君之孫,從事君之元嗣 也,君天姿明達,徹有芳,在母不瘽,在師不煩,岐齔謠是,合好常,治禮小戴,閨族孝友,溫故知機, 輝光篤實,升而上聞,上郡王府君察孝,除郎中,遷度遼右部司馬,慰綏朔狄,邊宇艾安,遷贛榆令,經國 帥下,政以禮成,民誦其惠,吏懷其威,喪父去官,服終禮闋,復應三公之招,辟太尉府,除西曹屬,葴謨 屢獻,使事日言,王人嘉德,台司側席,蠢爾葷育,萬邦作寇,冀土荒饉,道殣相望,帝咨君謀,以延平中 拜安邊節使,銜命二州,受莢秉憲,彈貶貪枉,清風流射,有邵伯述職之稱,聖上珍操,璽符追假,永初元 年,拜鴈門大守,折節清行,恭儉束脩,政崇無為,聲教禁化 ,猷風之,時依郡烏桓,狂狡畔戾,君執 以威權,征其後伏,永初之際,有勳力于漢室,令德高譽,遺愛日新,內和九親,外睦遠鄰,免浣息隸, 為成其門,周無振匱,亦古晏臧之次矣,當遂功祚,窮爵永年,意乎不造,早世而終,以延光四年六月壬戍, 卒于家,蓋銘勒之云,所以彰洪烈,纂乃祖,繼舊先,悲夫盛德,惡可已哉,於是君之孫魴倉九等,乃相與 刊山取石,表諡定號,垂之億載,以示昆苗,其頌曰:於鑠我祖,膺是懿德,永惟孝思,亦世弘業,昭哉孝 嗣,光流萬國,秩秩其威,娥娥厥額,此宜蹈鼎,善世令王,如何夙隕,丁此咎,國無人兮王庭空,土罔 宗兮微言喪,王機悵兮嘉謀荒,旌洪德兮表元功,闡君靈兮示後萌,神有識兮營壇場 延熹八年十一月十八 日己酉造 아래 지도는 명도전의 이동과 출토지역을 표시한 명도전 분포도를 겸한 지도입니다. 명도전 분포도의 원 자료는 공급지가 연경의 하도 위치인 역현(易縣)으로 되어 있습니다. 易이란 교역 함으로 관계가 깊을듯합니다. 그런데 이곳이 중산국이라는 얘기입니다. 당시 제철기술의 중심지였던 중산국에서 명도전을 주조하였을 가능성은 대단히 높은것입니다. 그런데 분포도에 바다로 떨어져있는 장도와 요동반도의 남쪽에 밀집한 장산군도까지 표시가 되어 있습니다.
명도전(明刀錢)분포도 선우중산국의 문화수준 <1999년 북경방송 다큐멘터리> 왕릉의 발굴유물을 통해서 전국시대 선우중산국의 문화수준을 봅니다.발굴유물중에는 선박도 있었습니다. 그들의 모국인 고조선 즉 사문도(현 장도)와는 유기적인 연락이 있었을테니까 필요했던 도구지요. 중산국에서는 천진을 통하여 사문도로 연결되는 항로가 있습니다. 이들의 왕자는 나라가 망했을때 제나라로 망명하였다가 돌오지 못하고 객사했다는 기록도 보이는구뇨. 그러나 그 말은 믿을 수 없습니다. 제나라는 산동땅이고 사문도는 등주의 주변에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사문도로 망명한걸 제나라로 기록한것으로 보이네요. 놀라운 이들의 제철기술을 보십시요. 이들이 바로 다름이 아닌 고조선의 후예 즉 기자의 후손들이 세운 나라입니다. 战国鲜虞陵墓奇珍——河北平山中山国王墓
하북성 평산 중산국왕릉
河北 平山 中山国王墓一角 하북 평산 중산국왕릉 발굴 현장
中山国的历史文化面貌在中国的史书上很少见到, 一直是历史学界长期悬而未解的问题。1974年,在河北省平山县三汲乡发现了中山国王璺 (公元前327年-公元前313年在位)的陵墓。 중산국의 역사문화는 중국의 역사서에 드물게 보여진다. 줄곧 역사학계에서 긴 세월동안 이해되지 않는 문제로 여겨진다. 1974년 하북성 평산현 삼급향에서 중산왕의 왕릉이 발견되었다. 中山国王璺生于公元前344年,公元前327年成为中山国第五代君主,是一个略有武功,奋发图强,大有作为 的君主。他伐燕攻赵,国力空前,使中山国一时跻身于强国之林。他36岁去世。璺王生前耗费巨资为自己 营建陵寝,制作玩物,生活奢侈。 중산국의 왕 璺문은 BC 344년에 태어나 BC 327년에 중산국 제5대 국왕이 되었다. 璺문 wen4 : 마주 대해있는 물가의 양쪽 언덕을 의미한다. 옥에 생긴 균열 무공이 있으며 국가를 부강하게 하려했으므로 군주가 될 만했다. 그는 연과 조를 친 전례없는 국력으로 중산국을 잠시 강국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36세에 서거한다. 문왕은 생전에 자기의 왕릉을 큰 자금을 소모했으며놀이개감을 만들어 생활이 비교적 사치스러웠다.
中山王墓的平面呈“中”字形,南北各有一条墓道,长达 1座杂殉坑和1座葬船坑。出土的随葬品有青铜礼器、兵器、乐器,以及玉器、金器和陶器等随葬品一万余件, 真实地再现了中山国的物质生活面貌。
중산왕릉은 평면적으로 보면 中 자 형이다. 남북이 각각 묘지통로로 일자로 이어져 있으며 길이는 105 미터이다. 고분의 주위에는 여섯 명의 첩 및 계집종이 고분을 모시고 있고 두 군데의 차마갱, 하나의 잡다한 것을 순장한 갱과 선박을 순장한 갱이있다. 출토된 부장품은 청동예기, 병기, 악기 및 옥기, 금기와 도기등이 10000여개인데. 이것들은 중산국의 물질생활 모습을 잘 반영해 주고 있다.
용과 봉황장식이 떠받치는 사각형 술그릇 받침대
禁 = 술그릇
받침대 故事,故事中的
명나라 마쭝씨 선생이 <동천문집> 중의 <중산랑전>에서 말하고자 한것은 진나라 조간자가 중산국을 정벌할 때 발생한 사람들 입에 회자되는 우화이다. 우화 중의 동곽선생과 배은망덕한 중산랑은 부녀자나 아이도 이미 다 알고 있다. 연나라와 조 나라 사이에 끼여 있는 중산국의 위치
中山国是春秋战国时代位于太行山东侧的一个小国,是中国北方少数民族白狄族的一支鲜虞人建立的国家, 分布在今河北境内,以正定为中心。中山国和赵国世代为仇,经常发生战争。历史上著名的赵武灵王“胡服 骑射”的改革,一个主要目的就是强兵富国消灭中山。
중산국은 춘추전국시대 타이항 산 동쪽의 작은 나라이다. 중국 북방 소수민족중의 하나이 바이띠 족의 한 파인 선우인이 세운 국가이다. 지금의 하북성의 경계내에 있으며 쩡띵 현을 중심으로 삼는다. 쩡띵 현은 이번 분유사건의 싼루 공장이 있는 石家壯쓰찌아짱의 북대문이다. 중산국과 조나라는 역대로 원수사이로 두나라 사이에 자주 전쟁이 발생했다. 역사상 유명한 조나라 무령왕의 "오랑캐 옷을 입고 말타고 활쏘다"의 개혁과 변화, 그 변화를 가져와야 했던 중요한 목표가 바로 나라를 강하게 하여중산국을 멸하기 위함이었다고 전해진다.
公元前306年赵国联合燕国,采用南北夹击之势进攻中山,经过多年的激战,于公元前296年占领了中山国, 中山王子咨逃奔齐国,很快客死异乡。于是,赵国立了一个傀儡尚作国王,一年后就把尚遣送回白狄老家陕 北肤施。从此,白狄人再也没有回到太行山脚下,重建他们的家园。
기원전 306년 조나라는 연나라와 연합하여 중산국을 남북으로 압박해 공격했다 몇년간의 격전을 겪은 후 기원전 296년에 중산국을 점령했다. 중산국 왕자는 제나라로 도망갔으나, 얼마안가 이국타향에서 객사하고 만다. 그래서, 조나라는 국왕의 자리에 꼭두각시를 앉히고,1년후 바로 협북으로 빠이띠 족을 추방하게된다. 이로부터 빠이띠 사람은 다시는 타이항산 근처로 발을 디디지 못하게 되어 그들만의 새로운 터전을 마련 해야 했다.
中山王墓中的玉器有1000件以上,它们质地坚硬、光泽温润,彩色柔和, 是崇高与珍贵的象征,大部分也是刻划着抽象的动物形态
중산왕릉중의 옥기는 1000여 개 이상인데, 그것들은 단단하고 윤택하면 색이 온화하다. 숭고함과 보배로움의 상징이다. 대부분 추상적인 동물 형태가 새겨져 있다. 三龙环形玉佩
造型独特、前所未见的青铜山字形器,是中山国的古徽志。战国时期的青铜器铸造工艺技术较前代有了很 大的提高,中山国人也全面熟练地掌握了制作各种青铜器的先进工艺,同时又发展了自己的文化,创造出 了独具特色、精美绝伦的中山国青铜器。 독특한 조형과 전에 보여지지 않던 청동으로 만들어진 山자 모양의 기물은 바로 중산국의 고휘장이다. 전국시대의 청동기주조공예기술은 전 시대 보다 크게 성장했음을 볼 수 있다. 중산국 사람은 각종 청동기 선진공예 제작기술을 전면적으로 장악했으며, 이와 동시에 자신들의 문화도 발전시켰다. 독특한 특색과 정교한 아름다움을 갖춘 중산국만의 청동기를 창조했다. 1. 铜制错金银猛虎食鹿的屏风插座 금, 은으로 상감된 호랑이 받침대, 51센티미터
2. 双翼神兽 날개달린 신화동물 40.5센티미터 中山国的匠师们非常强调器物形体的优美,他们不仅将人物和动物形象塑造得千姿百态,生动逼真,而且 巧妙地将人物、动物和相应的花纹构成各种器物的装饰,使之浑然一体,维妙维肖。这些用错金银的技法 制作的青铜龙凤方案,神话传说中的双翼神兽,猛虎食鹿的屏风插座 중산국의 청동기 기술자 사부들은 기물형태의 우아미를 매우 강조했다. 그들은 인물과 동물형상의 각종자태와 생동감 넘치는 모습뿐만아니라. 교묘하게 인물, 동물와 상응하는 꽃무늬 및 각종기물의 장식도 담아내어 그것들이 서로 현연일체하여 묘사가 정말 진짜와 같은 느낌을 준다. 이러한 것은 착금, 착인의 기술을 이용한 청동 용, 봉황 방식으로 대표적인 예로 신화전설중의 날개달린 신비한 짐승 双翼神兽(1)와 사슴을 잡아먹는 맹렬한 호랑이 형상의 가리개 받침대 猛虎食鹿的屏风插座 (2) 이다. 猛虎食鹿的屏风插座 사슴을 잡아먹는 사나운 호랑이 형상의 받침대 중산국 청동기는 기물 표면에 금속을 상감하여 풍부하고 다채로운 모습을 표현했다. 금을 박은 명문과 상감 기술이 유행하여 기물의 겉모양이 더욱 수려한 모습을 띨 수 있었다. 树形连盏灯 树形十五连盏灯上8只可爱的猴子正在攀援戏耍的情景,不仅造型生动,而且配有黄白辉映、艳丽多彩的图案。 我们怎能不为这个北方游牧民族机动灵巧的构思发出由衷地赞叹! 나무 형태의 15 개의 이어진 등잔 위에 8마리의 귀여운 원숭이들이 기어오르며 노는 광경에 조형이 생동감 넘칠 뿐 아니라 빛나고 곱고 아릿따운 도안이 어울려 있다. 이 북방 유목민족의 기동성있고 민첩하고 기민함이 뿜어내는 구상에 우리 어찌 찬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图4:铜壶与壶中的酒 中山人自古就以擅长酿酒而闻名,至今仍流传着许多与酒有关的神奇故事。墓中出土的酒已埋藏了二千三百 多年,仍然散发着浓郁的醇香之气,是目前世界上第一次发现的最古老的实物酒(图4)。 중산인은 자고이래로 술을 잘 담구었다고 전해진다. 지금까지 이어내려오는 술과 관계된 많은 신기한 이야기들이 있다. 고분에서 출토된 술은 이미 매장된지 2300년이 넘었다. 그런데 여전히 그윽한 향내가 품어져 나오고 있지 않은가! 이는 최근 세계에서 제일 처음 발견된 가장 오래된 실물의 술이다. 这些丰富的文化遗产,形象地说明了中山国人的聪明与智慧。他们在继承北方优秀文化的同时,又吸收着中 原文化的先进成分,创造出了令世人惊叹的灿烂文化。 이러한 풍부한 문화유산은 중산국 사람들이 총명하고 지혜로웠다는 사실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그들은 북방의 우수한 문화를 계승한 동시에 또 선진 중원문화를 흡수하여 전 세계인을 놀라게 할 만한 찬란한 문화를 창조해냈다. 注:本文是我为十集电视片《震惊中外中国十大考古发现》(六) 所写的解说词改编而成,该片1999年在北京电视台播放。 본 글은 10부작 다큐멘터리 <놀라운 중국 10대 문물발견>,< 6부>를 보고 해설대본을 간추려 쓴 것이다. 본 다큐멘터리는 1999년 북경방송국에서 방송했다. 文章来源:http://blog.sina.com.cn/s/blog_4d3f3aac010008o4.html [다음블로그: 미는 생활이다에서]
평양과 중산국의 밝산향로 비교 평양석암리9호분출토 박산향로 (1916년 일본인 고적조사단에 의해서 발굴됨) 높이;20.3센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 향로는 승반(承盤)위에 거북이 있고, 그 거북을 타고 있는 봉황 위에 향로의 동체부인 박산(博山)이 얹혀져 있는 향로이다. 박산 향로에서 봉황은 주로 향로의 뚜껑 위에 표현되는데 평양 석암리 9호분에서 출토된 이 향로는 몸체를 봉황이 받들고있다. 보통 향로의 몸체는 한 개의 둥근 다리가 받치고 있으나 이 향로와 같이 새나 인물 또는 동물등이 받치고 있는 경우도 종종 있다. 봉황의 몸에는 가는 음각선을 새겨 깃털을 표현하였고 향로 뚜껑에는 여러 겹의 산봉우리들이 표현되어 있고 능선 사이에는 연기구멍을 뚫어 놓았다. <출처:국립 부여박물관> 고대동아시아 향로
초기의 향로는 중국 전통제기인 두[豆]의 형태와 닮았다. 이후 박산향로[博山香爐]가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의 말기에 등장하여 한대[漢代 B.C.206~A.D.219] 까지 크게 유행하였다. 이 박산향로의 큰 특징은 향로의 뚜껑이 박산이라는 점과 향로의 몸체를 받치고 있는 한 개의 다리가 다양한 형태..
*청동박산향로1-상세설명에서 한대에서는 주로 향로.훈로등의 이름을 사용하였고, 박산향로라고 이름 붙인건 후대라고 한 설명은 잘못된것입니다. 박산이란 명칭은 이미 서한시대부터 기록에 등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박산향로의 제작이 쇠퇴한건 후한시대로 넘어가면서였는데 그것은 한무제의 낙랑조선(위만 조선)침략으로 삼신산의 신비가 살아졌기 때문이었습니다.(필자 주)
평산 북사성 6호묘 출토 박산향로(중산국(中山國)은 기원전 296년 조나라에게 멸망함) (한나라는 기원전 206년에 건국되었으므로 한나라가 건국하기 90년전에 조나라에게 망함) 등주북쪽 발해해협에 있는 장도에는 지금도 삼신산 바다에 있는 거북바위들이 물위에 떠있다. 삼신산의 전설에 15마리의 거북들이 삼신산을 받치고 있었다는 전설이 있다.<,사기><봉선서>
이 거북을 모델로하여 각종 석물의 기단으로 삼은것은 고조선시대로 부터 전래된것이다. 산동반도 석도 적산에 있는 장보고가 세운 적산법화원유지에도 거북바위를 기초석으로 하여 불로장생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이는 인근에 있는 삼신산문화의 영향을 받은것으로 추정된다. 고종황제의 거북모양 국새(조선은 거북을 기단으로 삼는 전통이 전해짐) 남원 광한루 앞에 있는 거북석이다. 이곳의 연지에는 삼신산을 모방한 세개의 섬이 있다. 이 거북돌은 아래 설명에서 자라돌(鰲石)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한서(漢書)에 발해에 큰 자라가 있어 삼신산을 등에 업고라는 구절이 있다. 이를 연상하여 호중에 삼신산 즉 봉래,영주,방장산을 선조15년(서기1579년12월) 송강 정철이 만든뒤 이고장에 재난이 일어나게 되자 여기에 자라돌을 만들어 삼신산을 지커보게 한 뒤부터 재난이 없어졌다는 전설이 있다. <높이 4尺 폭 4尺 장 8尺> 역사상 유일하게 닮은 꼴의 박산향로(기단을 거북으로 한 향로는 중산국 북사성6호분묘의 출토품과 평양 석암리9호분묘의 출토품밖에는 밝혀진 유품이 없음. 중산국 북사성은 고조선 제후국 착왕(錯王)의 묘 동정 좌측은 평양선교리 출토 중앙은 중산국 북사성6호묘출토 우측은 평산의 한나라 중산왕묘 출토
모양이 같은 동정이지만 북사성6호묘는 한나라 중산왕 묘보다 약 90여년이 빠름니다 그런데 어떻게 평양 낙랑유적을 한나라 낙랑군 유적이라고 주장할 수 가 있는가? 차라리 중산국 문화라면 이해할수가 있지요. *다음은 중산국과 고조선은 어떻게 관련성이 있는지를 알기위해서 고준환박사의 <하나되는 한국사>에서 빌려온 글입니다.
[열네 번째는 하북성 중산의 천자명문이다. 하북성 중산묘에서 BC 10세기 것으로 보이는 청동도기가 발견되었는데, 거기에는 ‘천자건방중산후’ 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이것은 단군조선의 핵심강역인 서요하 지역에서 출토된 BC 22세기의 도자기 부호와 양식이 완전히 같은 것이었다. 이것은 BC 22세기부터 BC 10세기까지 북경과 하북성 일대를 다스린 것은 단군조선의 천자였음을 기록한 환단고기의 기록을 그대로 뒷받침하는 것이다. 지나인들이 최초로 천자(황제)를 참칭한 것은 BC 221년의 진시황이었다.] 인용끝. 또하나의 기록은 상서의 순전입니다=[주1].순임금이 태산에 올라 천제를 지내고 동쪽으로 가 제후를 알현하였다는 기록인데
임금이 어떻게 제후를 알현할수 있었겠습니까. 이 대목에서 조선의 천제를 제후로 바꿔놓은것이지요. 이 경로는 한나라때도 있었지만 봉래에 도착했던
일행중 갑작이 역관이 사망하는 바람에 삼신산으로 건너지 못하고 바다를 따라 갈석산까지 순행하였다는 기록이
<한서>.<교사지>에 전합니다. [주2]조선은 바로 등주의 건너편에 있던 삼신산 즉 낙랑의
평양성이었습니다. [주1]尙書 舜典
歲二月東巡守至于 垈宗柴望秩于山川 肆覲東后 協時月正日 同律度量衡 세이월동순수지우 대종시망질우산천 사근동후 협시월정일 동률도량형
순임금이 이해 이월에 동쪽을 순행하여 태산에 이르러 제사를 지내고 동쪽의 제후를 알현하고 , 철과 달을 맞추고 날짜를 바로 잡았으며 악률과 도량형을 일치시키고
脩五禮五玉三帛二生一死贄 如五器卒乃復. 소오례오옥삼백이생일사지 여오기졸내복.
오례와 오옥(홀,규,종 등...) 세가지 비단,두가지 산 짐승, 한가지 죽은 짐승 및 예물을 정리하였다. 다섯가지 옥기는 예가 끝난후 돌려 드렸다. 《虞書》曰:舜在璇璣玉衡,以齊七政。遂類於上帝,禋於六宗,望秩於山川, 遍於群神。揖五瑞,擇吉月日, 見四岳諸牧,班瑞。歲二月,東巡狩,至於岱宗。 岱宗,泰山也。柴,望秩於山川。遂見東後。東後者,諸侯也。 合時月正日,同律、 度、量、衡,修五禮、五樂,三帛二生一死為贄。
[주2]<<한서>>권25상<교사지>제5상
天子既已封泰山,無風雨,而方士更言蓬萊諸神若將可得,於是上欣然庶幾遇 之,復東至海上望焉。奉車子侯暴病, 一日死。上乃遂去,並海上,北至碣石,巡 自遼西,歷北邊至九原。五月,乃至甘泉,周萬八千里雲。 한무제의 인공삼신산 조성과 향로문화 도입 중국 섬서성 서안에 있는 한나라가 고조선의 삼신산을 모방하여 인공으로 만든 미앙호(未央湖)에도 전방후원분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일본 인덕천황의 전방후원분을 일본의 독자적인 묘장문화로 주장하는것은 잘못된 판단입 니다. 고조선의 삼신산을 모방하여 만든 인공호수인 한나라 미앙호는 서안의 시내에 있습니다. 지금은 관광명소로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습니다. 이 미앙호에는 놀랍게도 대형의 전방후원분이 조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구글로 검색하던중 발견하였 으나 기록상으로는 확인이 어려우니 조금더 연구가 필요할듯합니다. 누구의 무덤일까요. 한나라의 고조 유방은 무릉(武陵)에 묻쳤다고 하였으니그렇다면 한무제의 무덤 이기가 쉽습니다. 이러한 궁원에 만든 수중릉의 예는 전방후원분은 아니지만 신라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진시황이 삼신산의 불로초를 구하려고 서불을 시켜서 백방으로 노력하다가 결국에는 실패하고 방황 하다가 객사한 사실을 잘알고있던 한무제는 자기는 진시황보다 월등하다는 위력을 보이기 위해서 삼신산에 도전하였다가 실패한 기록이 <감역(鑑易)>이란 사서에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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