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단한 지구여행 - 에베레스트 초등자 제3의 극지에 선 사람
영원한 인간사랑 ・ 2024. 2. 23. 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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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 지구여행 - 에베레스트 초등자 제3의 극지에 선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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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09. 23:27조회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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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 지구여행
에베레스트 초등자
제3의 극지에 선 사람
1883년 영국의 그레이엄이 등산을 하기 위하여 히말라야를 찾은 후, 1892년 영국의 콘웨이(Martin Conway), 1895년 머머리(Albert Frederick Mummery), 1899년 프레시필드(Douglas William Freshfield) 등 여러 사람이 히말라야에 도전하였다.
그 후 에베레스트1) 등정은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1921년을 시작으로 1922년, 1924년에도 원정대가 떠났지만 말로리(George Malley)와 어빙(Andrew Irvine)을 에베레스트에 영원히 남겨두고 돌아왔다. 티베트의 영도자 달라이 라마의 입산 거부로 9년간의 공백기가 있었고, 1933년, 1934년, 1935년, 1936년(제7차)마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제2차 세계 대전과 중공의 입산 거부로 또 공백기를 맞았으나, 1950년 미국, 1951년 영국의 정찰대가 남동릉을 정찰하고, 1952년 스위스 등반대가 8,595m까지 진출했지만 정상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돌아왔다.
이때쯤 영국 전역에서는 북극점(1909년 미국의 피어리)과 남극점(1911년 노르웨이의 아문센)의 정복은 다른 나라에 빼앗겼지만, 제3의 극지인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 산의 정복만은 꼭 달성해서 탐험 왕국으로서의 자존심을 회복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고 있었다.
1953년 영국 왕립지리학회와 ‘히말라야 공동 산악 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제9차 원정대(대장: 존 헌트, John Hunt)가 구성되었다. 원정대는 특수 절연 등산화 및 등산복을 착용하고 개폐회로 산소 공급 장치, 휴대용 무전기 등의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들은 쿰부 빙폭, 쿰부 빙하, 서쿰 빙하를 거쳐 로체 산 정면에 있는 해발 7,986m의 바위 능선인 사우스콜까지 이르는 등반로에 8개의 캠프를 설치했다.
1953년 5월 29일 11시 30분 뉴질랜드 출신 대원인 힐러리(Edmund Hillary)와 셰르파2)인 텐징 노르가이(Tenzing Norgay)가 정상에 도달하였다. 인류가 세계 최고봉에 우뚝 선 것이다. 이것은 에베레스트 산이 최고봉으로 알려진 지 100년, 도전한 지 32년 만에 이루어 낸 쾌거였다. ‘그렇다면 정상에 올라선 두 사람 중 누가 더 먼저 정상에 올라섰을까?’라는 의문은 계속 남았지만 두 사람이 끝내 침묵해 밝혀지지 않았다. 몇 년 전 셰르파 텐징의 사망으로 에베레스트 최초의 등정자가 누구인가라는 문제는 영원히 의문으로 남고 말았다.
에베레스트 초등자는 공식적으로 힐러리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1999년 5월 3일, 미국 산악인 에릭 시몬슨이 이끄는 수색대가 에베레스트 북릉 8,400m 지점에서 한 구의 시신을 발견했다. 그 미라는 1924년 에베레스트 정상을 향해 마지막 캠프를 출발한 후 실종된 말로리임이 확인되었다. 주머니에서 발견된 말로리 부인이 쓴 편지와 옷깃에 수놓인 이름이 확실한 증거였다. 말로리의 시신 발굴로 에베레스트 최초 등정의 역사가 1953년 힐러리에서 1924년 말로리와 어빙으로 바뀔지도 모른다고 사람들은 흥분했다. 그러나 그것을 증명할 코닥 카메라가 발견되지 않아 그 해답은 영원히 풀리지 않을 듯 싶다.
1924년 6월 8일 오후 12시 50분경, 영국의 4차 에베레스트 원정대의 말로리와 어빙이 북동릉의 세컨드스텝(8,500m)에 도달한 것이 밑에 있던 노엘 오델 대원에 의해 확인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후 정상 부근이 구름에 가려 더 이상 관측을 할 수가 없었고, 그들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때문에 그동안 말로리와 어빙의 정상 등정 여부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다.
목격자 노엘 오델은 말로리 일행이 에베레스트 정상에 섰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에베레스트를 두 번 오르고 세계 8천 m급 14개 봉을 모두 등정한 이탈리아인 라인홀트 메스너(Reinhold Messener, 1944~)는 말로리가 에베레스트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세컨드스텝은 오늘날에도 사다리가 없이는 오르지 못하는 구간임을 강조하면서, 사다리가 없었던 그때 그곳을 통과하기란 불가능하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므로 말로리와 어빙의 에베레스트 산 정상 등정 여부는 언젠가는 발견될지도 모를 코닥 카메라의 발견에 달려 있다.
한국인의 에베레스트 등정 1977년 9월 15일 대한산악연맹 에베레스트 원정대 소속의 고상돈(1948~1979)이 셰르파 펨바 노르부와 함께 우리나라 최초로(세계 14번째)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했다. 청주 출신인 고상돈은 그 후 북아메리카 최고봉인 알래스카의 매킨리(6,194m) 원정대의 대장으로 참가하여 등정에는 성공했으나 이일교ㆍ박훈규와 함께 하산 도중 자일 사고로 추락, 사망했다. 1987년 12월 22일에는 허영호가 동계 등정을 시도해 정상에 올랐으며, 그는 1993년 4월에 다시 한 번 등정을 시도하여 성공했다. 1993년 5월 16일에는 동국대학교 에베레스트 원정대 소속의 박영석ㆍ안진섭ㆍ김태곤 등 3명이 에베레스트 남동릉 루트를 통해 정상 등정에 성공했다. 그러나 안진섭은 하산 도중 추락사했고, 공격조를 지원하기 위해 등정하던 남원우는 아이스폴 지대에서 실족사했다. 그 후 2000년까지 34회에 걸쳐 많은 산악인들이 에베레스트에 올랐다. 특히 허영호는 생애 4번째 에베레스트 정상을 밟았으며(1987년, 1993년, 2007년, 2010년) 2010년에는 한국인 최초(세계 두 번째)로 아들과 함께 에베레스트에 올랐다. 특히 우리나라는 에베레스트 등정을 서구보다 늦게 시작하였지만 8천 m급 14좌 모두를 등정한 20인중에 엄홍길(2000), 박영석(2001), 한왕용(2003), 오은선(2010, 여성 최초) 등 4명의 산악인을 배출하였다. 그리고 이 영광스러운 뒷 무대에는 많은 희생자들이 따랐다. [네이버 지식백과] 에베레스트 초등자 - 제3의 극지에 선 사람 (대단한 지구여행, 2011. 8. 1., 윤경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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